[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청년들이 이태원으로 간 까닭은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정치시위 ‘메카’ 광화문광장 넓이는 4만4200㎡
다양성·자유 상징 이태원 거리의 24배 달해
군중을 한 방향으로 조종하는 공간은 넓고
나만의 개성 표출하는 공간은 좁은 게 문제
개성과 자유 맘껏 펼칠 곳 더 많고 넓어져야
이태원에서 꽃다운 삶이 끝난 청년 156명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드립니다. 우리는 병이 난 후에야 자기 건강 상태를 살필 수 있듯이,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사회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게 된다. 많은 분이 다양하게 사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다시는 이런 불행이 반복되지 않게 시스템을 보완해야한다. 여기에 건축가로서 시각 하나를 덧붙여서 왜 청년들이 핼러윈 때 이태원에 가고 싶어 했는지 이해해보고 싶다.
/일러스트=이철원
이태원은 1980년대까지는 가까운 부대에서 나온 미군들이 여흥을 즐기는 거리였다. 가수들은 영어로 노래를 불렀고, 여기저기서 외국어가 들리며, 인종을 넘어서 남녀가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이미지는 좋지 못했다. 80년대 중반이 되자 ‘문나이트’가 생기면서 한국 댄스음악과 블랙 뮤직의 메카가 되었다. 군복이 금지되자 이태원은 다국적 문화 해방구가 되었다. 외국인이 많다 보니 국적이 다양한 음식점이 들어섰고 해외 문화가 처음 정착하는 곳이 되었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견이 없는 공간에 성 소수자가 모이기도 했다. 당시 압구정동 로데오가 부의 상징이었다면 이태원은 세대 간 벽도 없고, 성 소수자도 차별받지 않으며, 다양한 언어로 서로 다른 민족이 소통하는 자유 공간이었다. 그중 해밀톤 호텔 이면에 있는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는 이태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말에 열리는 핼러윈 파티는 자유와 개성 표출의 상징적인 날로 자리 잡았다. 남녀노소를 떠나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각종 분장을 하고 모이는 이 파티는 개성을 표출하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즐기는 장으로 자리 잡았다.
10월 서울 거리에는 집단적 모임이 크게 두 종류 있었다. 하나는 정치 집회이고 하나는 이태원 핼러윈 파티다. 둘은 여러 명이 군집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성격은 반대다. 하나는 여럿이 같은 목적과 생각을 가지고 모이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여럿이 그 모인 숫자만큼 다양한 개성을 표출하는 공간이다. 하나는 같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다수가 통일되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전체주의 성격 자리라면,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표현하는 자리다. 하나는 흑백의 사고를 가지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공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즐기는 공간이다.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 가는 젊은이들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고 상대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즐기기 위해서 모였다. 어려서부터 입시에 시달리고,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식판에 똑같은 급식을 배급받아 먹으면서 자라고, 검정 패딩만 입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배워온 젊은이들에게 이태원 핼러윈 밤은 다양성과 자유의 해방구였다.
정치적 시위의 메카 공간은 광화문광장이다. 광화문광장의 크기는 가로 520m, 세로 85m로 넓이가 4만4200㎡다. 다양성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의 크기는 가로 310m, 세로 6m로 넓이가 1860㎡다. 광화문 광장은 이태원 세계음식문화거리보다 24배나 넓다. 우리나라에 정치적 신념을 표출할 수 있는 시위 공간은 넘쳐난다. 하지만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자유 공간은 지극히 작고 제한적이다. 이 도시의 거리에서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는 시간은 거의 매주 있지만 각자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시간은 1년 중 하루 허락되었다. 그날이 핼러윈 밤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정의, 국가, 민족 같은 거대한 개념을 이용하여 다수를 내가 원하는 한 방향으로 조종하려는 사람과 집단이 너무 많다. 그들의 중심을 보면 대의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제 한두 가지 생각에 전체 국민을 욱여넣는 일에 동의할 수 없는 국민이 너무 많다. 그런데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에 집착하는 편협한 사람들은 변하는 세상을 알지 못하고 변화하게 두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람을 흑백 두 색깔로 만들고 내 편과 네 편으로 가르고 대치하게 하고 싶어 한다. 그런 자들은 도시 공간을 마음대로 점유하고 그 공간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겁박하고 세를 과시하는 데 익숙하다. 반대로 다양성을 표출하려는 사람들은 갈 곳도 시간도 부족하다.
이 사회의 많은 젊은이에게 핼러윈 밤에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나만의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제한적 시공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구경하기를 즐겼다. 1860㎡밖에 안 되는 그 좁은 거리에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만약에 이 도시에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할 공간이 더 많았다면, 만약에 이 도시에 자기만의 개성을 표출할 시간이 핼러윈 밤뿐 아니라 더 많았다면 이러한 참사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사회는 변화하고 있는데, 꼰대들만이 자신들이 살던 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강요하고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희생된 것이 아닐까? 그 와중에 이런 죽음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려는 자들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파렴치한 자들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왜 이토록 핼러윈 퍼레이드에 열광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사회가 한 가지 모양으로 찍어내는 모습이 아닌 온전한 개성을 가진 내가 될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그곳에 간 것이다. 핼러윈 밤 이태원이 아니라도 자연스레 자기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이런 참사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 조선일보 2022. 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