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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29일
02:30 : 이른 시간이다 시계와 핸드폰 모닝콜이 요란하다. 벌떡 일어난다. "아 그렇치 오늘 북한가는날이구나' 내 일생의 슬프고 찹찹한 여행이 시작 되었다. 03:10 : 옆동 사시는 손사장님은 내 고교 선배이시다.그분도 함께 가신다 는것을 어제 주차장에서 알았다. 03:25 : 병점 화성상공회의소앞 버스가 대기하고 있다. 고단한 몸을 부시시 털고 회원사 사장29명 화성상의 직원3명 합32명이 집결하다. 04:05 : 어둠을 뚫고 달린다. 몇몇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분들이고 몇몇분은 낯설다.버스 에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회사소개가 이어지다. 05:25 : 자유로 휴게소 도착 새벽 안개에 젖어있다.자유 글쎄다.내가 오늘 가는 북한 땅엔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는것일까 하기사 완전한 자유 . 지대는 있기는 있는것인가? 06:40 : 납측 출입국 사무소 도착 입국수속 해외 에가는것도 아닌데 입북 절차는 공항 가는거만큼 복잡하다.아니 복잡함보다 안해도 될텐 데 하는 심기때문에 불편한걸꺼다. 07:40 : 출국심사 08:00 : 원래 예정대로라면 8시에 군사 분계선을 넘기로 한 시간이다. 그러나 마냥 기다린다 북측에 통신 선이 워낙낡아 연락이 늦는 다는 좀 애매한 이유다.기아리는동안 입북시 주의사항이 전달된다 1, 정해진 관광 구역을 임의로 벗어나지 않도록한다. 2, 북측 사람들을 자극할수있는 말과행동은 삼갑니다. 3, 사진 촬영은 정해진 구역에서만 합니다. 이 세가지 항목에 세부항목이 있음은 물론이다. 08:40 : 드디어 출발 하다. 묘한 기분이다. 08:58 : 남방한계선 통과하다.작년 노대통령이 노란선으로 건넜던곳은 북측이 선을 지워달라고 해서 지금은 새까만케 그을 린채 남아있다. 지금 남북이 경색 국면인거 처럼,드디어 북녁 땅이 다 최초로 마주친 북한 병사 부동자세 조그만 키 마른 체구 무표정,한낮 온도 아직도 30도가 넘는데 긴팔옷이다.물론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추측컨데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서라든지-- 09:20 : 북한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진짜 북한 땅에 서 있는거다. 다시 버스에 오르기전 전방 4-500 메터정도에 개성공단이 보인 다. 참 가까운곳이다. 지금 현재 1차 사업이 완료되어 35개여 업체가 조업중이다.금년안 에 70여개 업체가 가동될 예정이다. 북한 근로자 3만여명 남한 직원이 900여명 근무하고 있으며 개성 시내 인원만으로는 모자라서 근처 개풍군에서 까지 실어나른단다. 앞으로도 2,3차 개발 이 예정되어있으며 언어 가 통하고 인건비가 저렴 (약 60달러)하고 향후 강화 도와 다리를 연개해서 물류 시스템을 좋게 한단다.인력을 많이 필 요로 하는 업종은 도전해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경색된 남북 관계가 풀려 야겠지만. 우리가 탄 차에 안내원 3명이 탑승한다. 모두 남자인 그들은 참 똑 똑 해보인다. 서먹함도 잠시 개성관광 이백이십몇일째 가 지난 노련함으로 우리 를 압도한다.
10:00 : 차는 개성공단을 경유해서 개성 시내로 향한다.길옆에 민가가 보 인다 민가 도로는 무장군인이 지켜 서있고 일반 민간인은 무뚝뚝 바라 본다.뛰엄뛰엄 상점들이 있다만 손님은 많치안을 거 같다. 뭐라 말하수없이 찹찹하다. 시내를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만 시원 하게 흐를뿐 초라하다.인구 30만이 사는 개성시내 활기가없다.차도없다.건물도 6-70년대식 그대로이다. 송학산이 지척이다 맑은날 남산에서도 보이는 바로 그산이다. 어 머니 산이라고도 부른단다. 임신한 여인네가 누어있는 형상이다. 10:20 : 개성 평양간 고속도로에 오르다 이길로 곧장 2시간 30여분 가면 평양 이란다. 도로 상태가 안좋아 천천히 가는 시간일테니 정말 가까운곳에 평 양이 있는거다. 잠깐 고속 도로를 달리는가 싶더니 고속도로를 빠져 나온다.버스 한대만 달릴수 있는길을 열심히 달린다 주변에 산은 민둥산이고 그곳을 가로 지르는 나무 전봇대가 힘겹 게 전선에 매달려 있다. 보이는 밭에는 대부분이 키작은 옥수수가 심어져있고 밭에도 키작 은 벼가 심어져 있다 소출은 미미할거 같다. 굽이굽이 개성 북쪽을 향하던 버스가 멎은곳은 박연폭포 10:40 : 박연폭포는 개성 북쪽16km 지점의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의 웅장 한 화강암 암벽에 걸쳐있다. 높이 37m로 금강산의 구룡폭포,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 나 라 3대 폭포의 하나이며 송도삼절의 하나이다. 박연은 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8m의 바가지 모양으로 패여 생긴 못 이며 이박연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물이 바로 박연폭 포이다.서쪽에 용바위라는 둥근 바위가 있는데 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해서 머리를 붓삼아 머리채로 휘갈겨 썼 다는 시가 있으며 아무도 그뜻을 해석 못했는데 김일성 장군이 그 곳에 와서 해석 했다고 안내원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박연 폭포위로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는데 수해로 길이 무너져 볼 수 없었음이 유감이었다. 12;00 : 오던길을 되돌아 개성시내로 들어갔다 500명을 수용한다며 자랑한 평양관에서 왕 이먹던 성찬 13첩반상 기를 먹다. 솔직히 말해 음식은 별로 이다. 물론 한잔 안할수없지 않은가.들쭉 장내삼술 에 얼큰하다. 하루 관광인원이 제한되는데 500명이란다 ,옆 자리에 앉으신 오세 남 할아버님 44년생이시니까 우리나이로 64세시다 고향이 바로 개성 봉동리 16-1번지시란다 8살때 1.4후퇴 마지막 열차를 봉동리 역에서 타셨단다 술 몇잔을 권해드리자 연신 술잔을 드리키시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신 다. 왜 안그러시겠는가 오세남 할아버지와 나는 어떤 느낌 어떤한 감흥 에 차이가 있을까 철도원으로 목숨을 건지신 당신의 아버지는 대구에서 북으로 북으 로 연천에 임시터를 잡으셨고 그곳이 마지막 종착지가 되신거다. 다시는 고향땅을 밟을 밟은을수 없게 되셨으며 대신 그의 아들이 대신 그가 생전에 그토록 보고 싶었을 고향땅을 지금 밟고 있는거다.
13:00 -------------- 개성시내 선죽교-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가 그의 아들 이방원에게 철퇴를 맞아 숨진곳이다. 살해된뒤 그의 선혈이 묻었던 자리에 대나무가 피어났다고 해서 선죽교 라 칭하였다 정말 조그만 다리였다 길이 7-8 정도의 작은 다리이지만 후세 사람들 특히 북한 사람들에게 각인 된 크기는 거대함이다. 후손이 그다리를 밟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옆에 별교를 세워 현 재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가 있다. 표충비 - 선죽교와 도로를 사이에두고 마주하고있는 표충각에는 고 려 왕조의 절개를 지킨 정몽주의 충의를 기리기위해 조선의 임금인 영조와 고종이 각각세운 표충비가 있다. 숭양서원 - 1573년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만들어지다.정몽주와 서 경덕의 위패를 모셨다가 1575년 숭양이란 사액을 받 아 서원으로 승격 되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 겨진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일만큼 유서깊은곳이다 14:00 ---- 고려박물관(고려성균관) 고려 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으로 992년 국자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가 성균관으로개칭 1988년부터는 고려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모아 고려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있음 유일하게 여행객이 쇼핑할수있는 곳이 있음 각종 토속품과 술 그 리고 북한표 비아그라도 있었음
16:00 : 일정이 모두 끝나다 출경 수속시에는 일일이 카메라 촬영 내용을 검사하고 조금만 이상 해도 확인 또확인함 들어올때와 마찬가지로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앞장서고 그뒤를 개 성공단에 입주한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을 가득실은 트럭들이 뒤따르고 그렇게 새벽 부터 시작한 개성 일정이 끝나간다 북한 이 만들어놓은 기정동 선전마을은 지금은 개성공단이 들어서 는 바람에 무인 주택에서 그곳에서 일보는 직원들이 살고 있단다. 우리의 민통성 대성리 마을과는 옆에서 보니 맞닿아 있다시피하다.서로펄럭이는 국기와 인공기는 높이와, 크기 경쟁을 하다 지금은 태극기가 70평 크기에 높이 100m 인공기 가160평에 160m 이며 북한에 인공기 계양및 하양식 때는 북한군 40여명이 동원된단다. 태극기는 사시사철 펄럭이고-- 17:00 : 비무장 지대를 지나니 늠름한 한국군의 모습이 보인다.웬지 다른 공기 다른 풍경같다. 이것이 내땅에 대한 애증인가. 나와 같은 전주이가라서 반갑다며 대화를 나눈 리ㅇㅇ 내친구 하 진이를 닮아 한컷한 박ㅇㅇ 나더러 이해찬 선생은 기자선생 맞지요 하면서 관광내내 기자선생 기자선생 하며 말부치 던 또다른 박ㅇㅇ선생 그들과의 짧은대화 또는 잠깐의 논쟁,미국의 대선 후보를 정확히 당명까지 알고 누가 되면 한국에 좋겠냐는등 최 신정보까지 훤이 알고 있는 그들 자신들의 논리 주장 에 대해서는 추 호의 양보가 없다. 지금의 우리 정부에대해 그들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이또 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가 아닐런지 우리보다 더 통일을 갈망하는듯한 그들의 태도 그렇타면 어떻게 통 일을 원하는지 그리고 거리낌 없이 정치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토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뿐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나 는 그쪽에 남아있고 싶지않았기때문이다. 돌아오는 버스는 내 답답한 맘을 아는지 더디게 더디게 출발점을 찿아갔고 돌아가며 소감을 토로 하는데 모두 나와 유사한 기분들 인가보다. 해단식을겸한 뒤풀이 소주가 다른날보다 유난이 쓰다. 22:30 : 내집에 돌아오다. 다음번 개성 방문은 시내에 흐르는 냇물에서 등목이라도 할수 있으 면 그리고 아직 총각인 리 ㅇㅇ선생이 결혼해서 그가 사는 집에 찿아가 들쭉술을 함께 나눠 마시고 흥에 겨워 그가 구성지게 부르던 찔레꽃을 함께 목청것 불렀으면 그날을 그리며 북한 방문기를 마친다.고단한 몸인데도 잠은 오지 않 는다.
박연폭포 용바위 황진이가 자신의 머리채를 휘둘러 썼다는 시 가 각인되어있다.
임진각 끊어진 다리위 비둘기
출입국 사무소
개성가는길 서울서 임진강역 63km 그곳서 북측출입사무소 7km그곳서 개성11km 지척이다.
기다림, 수속도 다 마쳤는데 이곳에서 약 40여분 기다리다 앉아있는이중에 17대여성국회의원도 있다
박연폭포 입구 찬양시 모두가 위대한 수령 어쩌구로 시작한다
박연폭포의장관
안내원여성선생 황진이 시를 김일성 장군만이 해석 했단다.
내친구 닮은친구
과자 빵 음료수가 있다.
13첩 반상기 왕들의 식사-- 바로옆에 어르신이 오세남 할아버님이다 부디 살아생전 통일된 고향에서 맘껏활보 하시길시 멀리 보이는 동상 그중 일부가 잘려나오면 벌금내야한다
한석봉이 쓴 비문 선죽교
선죽교 너무나 조그만하다.
입북 증명
숭양서원 안내원
70년대 건물
기자선생 맞지요 나를 종일 기자선생이라부르다.
개국사 석등 |
첫댓글 임진각, 개성공단, 박연폭포, 황진이, 선죽교, 정몽주, 이성계, 이방원, 13첩 반상기, 숭양서원, 남측 이해찬 기자, 기자의 고교친구 하준군- 과거,현재, 미래가 병존하는 제임스리의 월북기에는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염원도 담겨 있네, 저 박연폭포의 물줄기처럼 남북 경제도 철철 넘쳤으면 좋겠네.
나도 좀 데려가지, ............
만감이 느껴지는 관광이었을듯!! 몸소 북녘땅을 밟아보지앉아 실감이 덜하지만 . . . . 우리회장님! 산업전선에서, 지역전선에서 늘 열심인모습! 느켜지네^^
덕분에 잘 봤습니다.
세계 여러나라를 나녀 봤지만 가장 가까운 곳을 못가봤는데 덕분에 즐감 하였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