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어항부터 시작하여
2005년 1월 8일 토요일.
서울 용산역에서 9시 57분 장항선 기차를 탔다.
세 시간이 채 안 되어 낮 12시 50분경에 충남 보령시 대천역에서 내렸다. 대천역 광장 바로 건너편 100m 거리에 있는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대천어항에 가는 일반버스를 탔다. 요금 950원. 30분이 안 되어 대천항 수산시장 앞에서 내렸다.
해산물 좌판을 벌려놓고, 어깨를 부딪치며 걷는 사람들을 상대로 호객하는 장사꾼들이 많았다. 파닥거리는 생선류, 꿈틀거리는 대하(大蝦), 횟감을 떠 준다며 옷깃을 잡는 생선장수 아낙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갯비린내 나고 질퍽거리는 어항시장을 구경하려고 바지 끝자락을 두 번 접어 올린 뒤 방파제 안쪽으로도 들어섰다.
오른쪽 대천항 안에 정박한 어선들, 연안부두로 떠날 채비를 하는 여객선들.
모든 게 살아 있고, 어수선하고, 분주했다.
아들 형제와 함께 조개구이집에서 굴과 대하(큰 새우)를 연탄화덕의 이글거리는 불로 구워 먹었다.
"아주머니, 얼마쯤 벌어요?"
"비밀, 직장생활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보면 되어요."
어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2km 떨어진 대천해수욕장 북쪽 끝 입구에서 내렸다. 버스를 타는 것보다 택시를 타는 게 훨씬 쌌다. 1,500원.
대천해수욕장에는 행락객들이 추워하면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거센 파도가 몰아닥쳤다가 모래장불에서는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평선이 안 보일 만큼 뿌연 눈발이 갯바람에 날렸다가 얼굴에 차갑게 내렸다.
외투 깃을 세워 올렸으며 입마개를 쓰고 얼굴을 반쯤 가렸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대천해수욕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보령시 남포면 대섬(竹島)에서 내렸다. 택시비 5,000원.
대섬 좁은 터에 만든 주차장 벼랑 아래로 넘실대는 파도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를 향해 즐비하게 늘어선 횟집을 후이 둘러보았다. 3.7km 남포방조제(1999년 12월 완공) 위를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망망대해, 서해를 바라보았다.
30여 분 걷자 보령시 요트경기장에 다달았고, 요트경기장 사무실 마당을 가로질러 다시 남녘으로 내려갔다.
용머리해수욕장은 쓸쓸하였다. 용머리(龍頭)해수욕장 동백장을 지나고 갯바람을 막는 소나무숲(松林)을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더 내려갔다.
야트막한 산을 등진 여수물(아주 작은 만 灣)은 제방둑을 막아 만든 양식장.
양식장은 포클레인으로 마구 파헤쳐져 있었고, 양식장 안에 가둬둔 갯물은 빼작거렸다.
갯물을 뽑아낸 양식장 안에는 새들의 천국이어서 잿빛, 흰빛의 여러 종류의 철새 무리들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우리가 제방둑을 걸을수록 키 큰 풀 속에 숨어 있던 새들이 후루룩 힘찬 날갯짓을 하며 건너편으로 날아갔다.
포구(浦口)를 빙 돌아 무창포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오후 다섯시 15분이 살짝 넘었다.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해변가를 따라 걷자니 눈발이 세차게 날렸다. 걷기에는 너무 추웠으며 바람도 매서웠다.
"야. 할머니네로 그냥 가자."
오후 다섯 시 50분 버스를 타고 내가 자란 곳 곶뿌래(花望마을)로 향했다. 5분 거리.
2005. 1. 9. 일요일.
오전 10시 40분 버스를 타고 무창포(원 지명은 무챙이)로 갔다.
날씨가 추워서 시사이드호텔 샤우나장에서 언 몸을 녹였다. 아들 형제의 아랫도리를 슬쩍 훔쳐보니 선홍빛 도는 xx가 탱탱해 보였다. 탐낼 만했다.
샤워를 끝낸 뒤 12시부터 남쪽으로 자꾸만 걸었으나 길게 이어진 모래장불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조(滿潮)한 파도가 흰 포말(泡沫)을 말아내며 모래장불을 때렸다. 바닷물이 스르르 몰려 왔다가 스르르 뒤로 물러났다. 파도가 흰 거품이 되어 비누방울처럼 바람에 날렸다. 살짝 언 얼음들.
독산해수욕장을 지나고, 보령시 최남단 해수욕장인 소황리 장안해수욕장도 지나쳤다
아무도 없다. 단지 얕은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많았다. 사람은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입고도 추워하는데도 새들은 맨발가락을 차가운 바닷물 속에 넣고 둥둥 떠다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모래장불 위에는 조개껍질이 널브러져 있었고, 모시조개, 개랑조개의 껍질에는 작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배꼽고동(큰구술우렁이)이 치설(齒舌)로 모시조개 등의 겉껍질을 녹여서 구멍을 내고 잡아먹은 흔적을 아들에게 설명했다.
오각형 불가사리, 발이 긴 아무르불가사리가 죽은 채 파도에 떠밀려 갯장불에 내동댕이쳐졌다.
갯모래 뒤편에는 둥근 통대나무를 1m 길이로 잘라서 말뚝을 박은 시설물이 'ㄹ' 모양으로 길게 이어졌다. 모래가 바람에 날아들어 언덕(사구 沙丘)을 이루도록 한 방책(防柵)이었다. 갯모래의 가치를 깨닫고 난 뒤 모래를 모으려는 시설물이었다. '진즉에 갯모래를 아껴 둘 일이지.'
부사방조제(1997년 완공) 위에 올라서서 넘실거리는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파도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만약에 해일(海溢)이 밀어닥친다면 모든 것을 순식간에 덮치며 삼키겠다고 상상하며, 동남아의 해일 피해를 생각했다.
※ 2004년 동남아 쓰나미 :
12월 크리스머스 다음 날 아침.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쓰나미(강한 지진) 발생, 30여 만 명이 파도에 휩쓸려 죽었다(인니, 미얀마, 인도 등 12개 나라).
방조제 아래 조개구이집에 들러서 굴구이를 주문하고, 해물칼국수 두 그릇도 나눠 먹었다.
아들 형제는 조개와 굴이 많다며 더 먹기에는 질렸다고 혀를 내밀었다. 사이다 세 병을 포함하여도 값은 29,000원.
장안해수욕장은 외진 곳이라서 시내버스가 아주 드물단다. 지나가는 택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무창포로 되돌아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바삐 걷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잰걸음을 재촉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해변가에 몰려 있는 새떼에게 달려들며 '우우' 소리쳤다. 괭이갈매기 등 여러 종류의 새들이 하늘을 덮다시피 날아가고 나는 뒤좇았다.
갯물이 그득히 찬 만조(滿潮)다. 파도가 갯바위를 후려쳤다.
갯바위로 타고 넘어설 수가 없었다. 산 뒤편을 에둘렀다가 다시 갯마을로 들어섰다. 한 시간만에 무창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반 거리였으나 되돌아 올 때는 걸음을 재촉한 결과였다.
겨울바다
겨울철새
갯바람
텅 빈 공간
오후 4시 시내버스로 곶뿌래(花望마을) 내 집으로 되돌아왔다.
숨 돌리고 난 뒤 오후 6시 20분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주말을 이용한 어제와 오늘.
바닷가를 따라 여러 시간이 넘도록 걸었다.
아들 형제는 해변가를 따라 걸으면서 무척 신났다. 갯바람에 얼굴이 얼얼하게 얼었어도 갯냄새 밴 맑고 시원한 바다바람을 즐겼다. 50대 후반에 접어드는 아버지인 나, 20대 초반인 큰아들, 10대 후반인 막내아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겠다.
2005. 1. 9.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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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써 둔 산문일기.
2019년 지금은 갯바다 지형이 많이 변화했을 겁니다.
산업개발 운운하면서 갯물이 닿는 곳곳마다 포클레인 중장비로 산을 깎아서 바다를 메꾸고, 자연형상를 바꿔서... 돈벌이로 이용하대요. 위에서 나오는 유수물... 정말로 잔잔한 바닷가였고, 조개가 많이 나왔는데... 이곳에 수산물 양식장으로 만들었다가 지금은 흙으로 메꿔서... 육지/땅으로 만들어서... 서해안 갯마을을 부셔버리고 망친 개발사업...
이 글 쓴 지도 벌써 14년...
갯바다가 가까운 산골마을 태생인 나한테는 바다가 주는 의미는 색다르겠지요.
제 고향 산골마을... 지금 또 변형되고 있습니다. 농공단지, 서해안고속도로로 마을이 쪼개지더니 2016년부터는 발로 코앞의 들판, 앞산이 일반산업단지로 깨끗이 사라지고 대신 공장건물이...
대천어항부터 시작하여 보령시 남단 끝까지 잠깐 여행했던 때의 일기이지요.
그냥 다다닥한 수준.
그 고향에 또 내려가고 싶습니다.
용머리바다 해풍림 뒷편에 큰외삼촌네(어머니의 친정)가 있었는데 지금은... 제 기억 속에서나...
2019. 2. 15.
오늘은 그저 옛생각이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