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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 너무 좋다 그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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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무 좋다 그치>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나의 것을
벗어버리니
나만 남았네
너의 것을
벗겨버리니
너만 남았네
이렇게 나
이렇게 너
참으로 만나니
너무 좋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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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1 05:25
- 하느님의 작품인 것 맞나?
“우리도 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려 살면서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가운데서 유독 ‘한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때 육의 욕망에 이끌리고 육과 감각이 원하는 것을 따른 우리라고 합니다.
‘한때’라는 말은 과거를 지칭하는 말이고
그 후에 달라졌을 경우 쓰이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한때 우리는 잘 지냈다.’라고 하면 지금은 안 그렇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한때 우리는 원수지간이었다.’라고 하면 지금은 사이가 좋은 거지요.
아무튼 ‘한때’라는 말은 인생 반전을 뜻하는 말인데
오늘 저는 어떤 반전을 살아야 하는지 보려 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야 할 반전은 은총을 받는 반전이고,
저는 진정 은총을 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일부러 죄에 빠져 살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20세를 전후해서 악마적인 꼬드김이 있었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처럼 한때 방황과 방탕한 삶의 그 쓰라림을 겪어야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생기며 반전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옛날에 예비고사를 보러 갈 때 부러 술을 마시고 갔고,
그래서 시험에 부러 떨어졌으며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살고 싶었고,
그렇게 신물이 날 정도로 죄의 어둠에 있다 보면 빛을 찾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용기가 없어서 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한때 그리고 한동안 저는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했다는
바오로의 말씀을 잘못 신봉하며 일탈하고 싶어 했고 은총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제가 잘못 이해한 것이긴 해도
은총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은 잘못이 아니기에
그렇게라도 은총을 받고 싶어 했던 그때가 아름답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는 현재의 저에 대한 반성입니다.
현재 저는 은총을 받고 싶은 갈망이 그때만큼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이미 은총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은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현재의 은총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은총에 안주한다는 것은 현재의 은총에 만족하며
더 큰 은총 또는 더 많은 은총에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죄를 뭉개고 있으면서도 은총에 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털고 일어나서 은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인데도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그 하느님 은총만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에 기대어 일도 안 하고 마냥 방탕하게 사는 것만 같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의 말씀을 가지고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데 우리는 은총으로 구원받고 있습니까?
은총으로 구원을 향해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 가느냐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라고 또 말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인 것이 맞습니까? 훼손된 작품은 아닙니까?
하느님 은총 중에 있는 것 맞나?
하느님 작품인 것 맞나?
이런 반성을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과 참여 덕분에
비가 엄청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바자회가 잘 끝났습니다.
여러분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하느님과 여러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수익 금을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쓰였는지 나중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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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 강원도에서의 강의를 마치고 영동 고속도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앞 차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좌우로 흔들리더니 차선을 벗어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졸음운전인 것 같아서 경적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경적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뒤에서 경적을 울려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차선을 옮겼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 차선을 달리던 트럭과 추돌했습니다. 정말로 큰 소리와 함께 문제의 승용차는 몇 차례 굴러서 보호난간에 부딪힌 뒤에 멈췄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혹시 몰라서 차간 거리를 두었고, 또 옆 차선으로 옮겼기에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갓길에 차를 대고 119에 사고 신고를 한 뒤에, 사고 차량으로 다가가니 다행히 운전자가 별 이상 없이 창문을 통해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섬뜩합니다. 만약 차간 거리를 지키지 않았다면, 또 차선을 옮기지 않았다면 저 역시 사고 당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불과 몇 초의 차이로 말이지요.
순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최악의 시간도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항상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 정도면 괜찮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유산 분배에서 불합리한 부분을, 형의 정의롭지 못함을 고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하시면서, 세상의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이어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해주십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전부이고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삶을 마친 뒤에는 아무런 쓸모없는 것임을 이야기하십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삶을 찰나(刹那)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매우 짧은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고 있을까요? 이 세상 삶 안에서만 필요한 것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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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많은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편견을 재배치해 놓고 이것이 새로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윌리엄 제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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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군중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루카 12,1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루카 12,14)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러합니다. 형제들 사이에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 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중재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신의 옳음을 밝혀 주며, 자신을 지지해주고 상대의 부당함이 들추어지기를 도모하기 일수 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면, 시시비비를 가려달라고 하거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맡기고 의탁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응답하게 도와달라고 간청 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사랑할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이 아우는 겉으로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재판과 중재를 요청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탐욕이 아닌 사랑에 가득 찬 아우였다면,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스승님, 제 형더러 저의 유산을 가지라고 일러 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재물에 대한 탐욕에 걸려 있고, 탐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루카 12,15)
그렇습니다. 사람이 재물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사람에게 걸려 있듯, 사람의 생명 또한 자신에게 걸려 있지 않고 주인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이 재산의 주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인도 아님을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떠나야 할 일입니다. 진정, 주인께 달려 있는 이는 탐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탐욕의 온상지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떠나야 할 일입니다. 사실, 탐욕은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주인으로 중히 여기는 데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정 주님께 소유당한 사람만이 탐욕으로부터 떠나게 되고, 탐욕을 채우는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으로부터 떠난 사람은 자신에게 소유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입니다. 묘한 것은 하느님께 소유당한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소유가 되면서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은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주인이 되시지만, 동시에 우리를 소유하기에 우리의 소유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지게 되면, 다른 모든 것들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나에게는 하느님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고 안토니오 더블류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전부를 가진 것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전부인 당신이 저를 차지하소서. 당신께 온전히 소유당한 자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의 곳간에 탐욕이 아니라 사랑을, 제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채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 12,15)
주님!
탐욕의 온상지인 제 자신을 경계하게 하소서.
제 곳간이 아니라 당신 곳간에 희망을 두게 하소서!
제 곳간이 비워지고 당신 곳간이 채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비워지고 당신 뜻의 거룩함을 이루소서.
주님, 당신 안에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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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부자가 되십시오
부자가 되고 싶은 바람을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참된 부자가 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자는 얼마만큼 돈을 버느냐, 재물을 가진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만큼 잘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자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께 달려 있고,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잘 실행하는가에 영원 생명에 가까이 갑니다. 그중 물질에 대한 성경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주님을 경외하며 가진 적은 것이, 불안 속의 많은 보화보다 낫다”(잠언15,16). “돈을 좋아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이다”(코헬5,9). “참으로 재물은 믿을 수 없다. 거만한 사람은 견디어 낼 수 없다”(하바2,5). “큰 재산은 소심한 사람에게 걸맞지 않다. 구두쇠에게 재물이 무슨 이익을 주겠느냐”(집회14,3).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예지를 포기하지 마라(잠언23,4).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비12,8). 인간에게 주어진 욕구는 정당한 영역이나, 이미 충분한데도 욕심을 내는 것은 탐욕입니다. 모든 탐욕은 우리를 생명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생명은 지상의 재물이나 넘치는 부의 산물이 아닙니다. 생명을 안배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십니다. 현대의 의학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할 수 있을지언정 영원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소유를 통해서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하더라도 결코 부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느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큰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가 되십시오. 석가모니도 말했습니다. “만족함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더라도 가난하고, 만족함을 아는 사람은 가난하더라도 부유하다”.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게 됩니다. 자기의 능력만 믿고 자신이 옳고,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때로는 욕심을 부려야 하겠지만, 정당한 욕구의 수준을 넘어 욕심을 부리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신명기 (8,17-18)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이 재산을 마련하였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거든’)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분은 오늘 이처럼,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계약을 이루시려고, 너희가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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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1,0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투자된 비용도 많았고, 직원도 많아서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식당에 가서 축성하였고, 직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바쁘고, 지친 형제님에게 수호천사가 있었습니다. 수호천사는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형제님의 종교를 따라서 천주교를 택하였고, 예비자 교리를 받고 있습니다.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 형제님의 눈빛은 피곤해 보였고, 힘들어 보였습니다. 자매님을 만나면서 형제님의 눈빛은 밝아졌고, 생기가 있었습니다. 자매님의 권유로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고 합니다. 술을 끊으니, 정신도 맑아지고 사업의 전략도 새롭게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매님을 만나기 전에는 재물이 목적이었는데, 자매님을 만나면서 신앙심도 깊어졌고, 봉사하는 기쁨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년에 자매님이 세례를 받으면 두 분이 혼인성사를 받고, 신앙 안에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내년에는 가게 축성이 아니라, 혼인의 축복을 할 것 같습니다.
면담도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자매님은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목사님과 결혼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편 목사님을 따라서 미국으로 왔다고 합니다. 어려서 성당에 다녔기 때문인지 목사님의 아내로 사는 것이 늘 어딘가 불편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불편함을 아시고 자녀들을 축복해 주었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모두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가 모두 성당에 다닌다고 하기에 말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쁜 손자가 성호경을 하면서 기도하는 영상도 보았다고 합니다. 아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어릴 적 생각도 났다고 합니다. 남편이 투병 끝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고, 이제는 자유로워지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매님은 한국에 다녀오면 성당 옆으로 이사 와서 앞으로는 성당에 다니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개신교와 천주교라는 건물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중요한 건 ‘누구의 아내’라는 직분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자매님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수호천사를 만난 형제님을 생각합니다. 재물을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고달프고 힘들었다고 합니다. 자매님과 함께 성당에 다니면서 사업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재물보다 더 소중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자매님을 생각합니다. 누구의 아내라는 직책을 떠나서 하느님과 대면하면서 신앙의 기쁨을 찾을 겁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선행은 잘못 전달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행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행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선행은 연옥에 있는 분들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식당 탁자 위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산다.’ 분명 우리는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과 삶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끝이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다가올 죽음을 준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가난해서, 몸이 아파서 선행을 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선행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도, 자선, 희생, 봉사, 나눔, 친절, 온유, 겸손도 선행입니다. 시간이 없어도, 여유가 없어도, 가난해도, 몸이 아파도 우리는 충분히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곳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고, 좀이 생기고, 남이 와서 빼앗아 가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곳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길이와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갈 곳을 모르는 우리에게,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가장 믿을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렇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 이후에도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세상의 곳간에 쌓아 놓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선행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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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은 충분한 재산을 모으고 자신에게 쉼을 주고자 하는 어느 부유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한 재산을 모아 두었으니 이제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말입니다.
언뜻 보면 좋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땅에서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출로 자신에게 쉼을 선물합니다. 그래서 곳간을 다시 크게 만듭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부유한 사람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존재와 나눔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하느님께 감사의 재물을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눔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는 사람은 그분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결정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태어남도 죽음도 말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은 삶의 중심이 그 자신이었습니다. 삶의 어느 곳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시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할 때, 우리가 바랄 때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 나타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특히 생명에 있어서는 더 그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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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회
한치회가 그립습니다.
예전에는 그리 많던 한치 횟집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치와 미나리와 깻잎, 그리고 양념장….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 마트를 거닐던 중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잘 손질된 한치회가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만에 만난 한치회인가. 그것도 아주 우연히 말입니다.
그날 저녁 한치회로 파티했습니다.
그렇다고 배불리 푸짐하게 먹은 것은 아니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였습니다.
그리움을 달래주는 한 끼였으니까요.
그리움이 그리움으로 남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그 그리움을 달래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가끔은 그 그리움을 달래는 우연이 찾아오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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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예술가藝術家
<예술작품藝術作品 인생을 만듭시다>
“기쁨으로 주님 섬겨 드려라.
춤추며 당신앞에 나아가라.”(시편100,2)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교황님 강론 내용의 소제목이 마음에 와닿아 나눕니다.
“섬김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생명의 길이다.”
(Service is Christian way of life)
“스포츠는 생명의 찬가다”
(Sports are the hymn to life)
얼마나 적확하고 멋진 표현인지요!
요즘의 우리나라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곳곳이 모두가 아름답기에 아예 요즘은 사진찍기를 접었습니다. 어제도 전형적인 아름다운 가을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도 유난히 밝고 맑습니다. 엊그제 자캐오의 집, 피정집 3층 제의방에서 바라보는 불암산은 참 장관이었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여전히 저를 행복하게 하는 이 시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때마다 한눈 가득, 가슴 가득 안겨 오는 산앞에 서도 주님앞에 서듯 행복합니다. 어제 찾아온 "이 희망에 산다"라는 시입니다.
“가을 단풍의 장엄함
끝이 아니다
겨울후
생명의 봄이듯
죽음후
새생명의 부활이다
이 희망에 산다”<2024.10.20.>
바로 하느님 희망에 산다는 고백입니다. 겨울이, 죽음이 끝이 아니요 봄이, 새생명의 부활이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희망이라는 것이며 이런 깨달음 역시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바로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에게는 탐욕만 있었지 이런 살아계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희망은, 사랑은 전무했습니다. 탐욕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탐욕에 눈멀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충고가 참 적절합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참으로 지당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든 불행과 재앙의 진원지가 무지의 탐욕입니다. 돈이 하느님이 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냐? 하느님이냐?”는 참 힘든 선택입니다. 돈이 현실이라면 하느님은 이상입니다. 하늘의 하느님이라면 땅의 돈같습니다. 이래서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란,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란 고백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선순위입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를 위한 우선 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제 지론입니다. 또 하나 자주 드는 극단적 예도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하느님 믿음이야말로 탐욕에 대한 근본적 대책입니다. 인간 누구나의 내적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온갖 두려움속에 포위되어 불안중에 살아가는 참 허약한 사람들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수도원 십자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는 여전히 "지혜의 빛"을 발하며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바로 이런 근원적 두려움에서 기인하는 소유욕에 탐욕입니다. 바로 탐욕의 뿌리에는 이렇듯 두려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두렵기에 돈을 모으고 재산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바로 어리석은 부자가 택한 길이요 땅에 보물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거대한 착각입니다. 생명을 보장하는 것은 재물이, 돈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으고 쌓아도 기쁨은, 평화는, 행복은 오지 않습니다. 모으고 쌓아도 두려움과 불안은 여전할 것입니다. 재물이 아닌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의 은총의 선물이 희망, 기쁨, 평화, 행복임을 어리석은 부자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지녔어도 그 마음에 희망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독백과 하느님의 응대가 실감나게 표현됩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아무리 부자도 세끼면 족하고 화장하면 한줌의 재만 남고 죽어도 가지고 갈 것은 빈손일 뿐입니다. 땅에 싸놓은 보물은 전혀 쓸모없을 뿐, 참으로 이때 빛을 발하는 꾸준한 선행과 자선으로 하늘에 쌓은 보물들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Ama et fac quod vis)”는 성 아우구스티노가 바로 하늘에 보물 쌓은 첩경의 길을 제시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참 어리석은 사람의 실상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무지의 탐욕을 일깨우는 회개를 촉구하는 예화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눈멀어 땅에 보물을 쌓다보니 온통 관계가 차단되어 스스로 자초한, 고립단절된 자기감옥에 갇힌, 닫힌 수인이 된 부자입니다. 도대체 좌우사방 문들은 없고 온통 벽뿐이니, 도대체 빛이, 희망의 빛, 기쁨의 빛, 평화의 빛, 행복의 빛이 전무한 어둠뿐이니 바로 이게 지옥입니다.
복음의 부자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제1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답을 줍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기감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합니다. 육의 욕망에서 벗어나, 육과 감각이 원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하느님 은총의 성령에 따라 자유롭게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는 바오로가 제시하는 이런 차원을 까맣게 몰랐지만 우리는 이렇게 알게 됐으니 우리는 행운아들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치명적 과오는 주님 없이 혼자 자기인생작품을 설계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참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누구나 자기 삶의 예술가들입니다. 사랑과 지혜의 예술가들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온갖 선행과 자선의 노력으로 협조해드리며 각자 또 더불어 주님과 함께 완성해가야할 예술작품인생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각자 예술작품 완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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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8-21)
선행의 습관
악마는 우리가 힘껏 노력할 때조차 음모를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힘을 새로 가다듬어야 합니다. 기름진 밭과 좋은 기후 덕분에 많 은 열매를 거두게 되면, 현재의 것들에 만족하여 “먹을 것이 많으니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마음 이 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거룩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승의 삶은 짧고, 누구나 예고 없이 죽음을 맞이하니까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사람은 준비 없이 최후를 맞아서는 안됩니다.
-대 레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심연은 신비로 덮여 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느님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는 이름이 없다. 하느님은 “무명씨다”다.
하느님은 자신을 “존재”로 드러낸다 - 나는 있는 자다. 이와 동시에 하느님은 숨어 있기도 하다. 위-디오니시우스의 부정 신학의 전통을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것을 가리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하느님 지식의 최고봉 이라고 불렀고, 엑카르트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있지 못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말하 든 간에,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리켜 말한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가리켜 말하지 않은 것, 그것이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은 이름이 없고, 이름 붙여지기를 거부하고, 한 번도 이름 붙여진 적이 없으며 … 실로 숨어 있는 하느님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은폐성을 존중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존중하게 된다. 우리는 부정의 길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과 합일하게 된다. 이러한 합일 속에서, 하느님에게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갔을 때보다 더 고귀하게 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피조물 사랑은 잊혀지지 않고 고양된다. 왜냐하면 거 기에서만 존재와 생명을 지난 모든 것이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쉼을 얻고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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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2코린 3,6-18
새 계약의 일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돌에 문자로 새겨 넣은 죽음의 직분도 영광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곧 사라질 것이기는 하였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직분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단죄로 이끄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사실 이 경우,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더 뛰어난 영광 때문에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
곧 사라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에 아주 담대히 행동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쳐다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얼굴에 너울을 드리운 모세처럼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들은 생각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그들이 옛 계약을 읽을 때에 그 너울이 벗겨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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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우리 가운데 어떤 누구도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매 순간 감사하며 주어진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 모습대로 창조하실 때 바라시는 것이 있었다면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 삶의 수많은 어렵고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 살겠지만, 그래도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행복을 어떻게 찾고 사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자기 삶에서 끊임없이 찾고 노력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구두장이 시몬의 가게에서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는 미하일,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땅으로 쫓겨난 천사인데 그가 풀어야 할 세 가지 수수께끼가 있었습니다. 그 수수께끼는 바로, ‘사람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이며, 이 세 가지 문제를 풀고 나면 미하일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직접 한번 이 문제를 풀어 보시고, 발견한 해답대로 산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늘나라로 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직접 한 번 풀어 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자신의 생애 동안 이런 질문을 받은 기회가 없었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혀 모른 채 큰 창고를 다시 짓고 곡식과 재산을 쌓아 둘 궁리를 하면서 이렇게 자신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자기 위로이며 최면인지도 모릅니다.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루12,9) 하지만 그의 바람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해 뜨는 광경을 보지 못한 채 저승으로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가면서 깨닫지만,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허락된 시간과 장소는 ‘지금, 여기’ 뿐입니다. 한 시간 후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랑하기도 충분하지 않은 세상에서 미워하며 살렵니까? 행복하기도 힘든데 불행하며 살아가렵니까? 행복한 삶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이고, 이런 삶은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지름길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아주 큰 부자가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가게 되었는데 그래도 생전에 선행을 한 것이 있어서 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앞장서서 천국을 안내하고 부자가 살게 될 집을 찾아갑니다. 역시 천국은 천국이었지요. 으리으리한 저택들이 즐비한 것을 보고 부자는 연신 벙글거렸습니다. ‘역시, 천국은 다르군. 아, 여기서 살게 되었다니 정말 좋구나.’ 그런데 천사는 그 으리으리한 저택들을 계속 지나쳐 가기만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자는 더 좋은 집을 기대하며 천사를 따라갔습니다. 둘은 다음 마을로 들어섰는데 이 마을에는 50평, 100평이 넘는 최고급 아파트들이 즐비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여기도 살만하겠군.’ 부자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집을 찾고 있는데 이번에도 천사는 그 마을을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저만큼 달동네가 나왔습니다. ‘설마 저곳은 아니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가는 부자에게 천사는 달동네 중에서도 가장 꼭대기에 세워진 어느 쓰러져 가는 판잣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여기가 당신이 살 집입니다.’ 화가 치민 부자가 따졌습니다. ‘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는 지상에서 살 때 호화주택에서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니 천국에 와서 이렇게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러자 천사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지상에 살면서 보내 준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니까요.’ 』
혹여 어리석은 부자처럼 불량 자재를 하늘로 배송하지 마세요. 그리고 여유 자본이 있으시다면, 제발 은행의 DLF(파생결합펀드), DLS(파생결합증권)와 같은 상품에 절대 투자하시지 말길 바랍니다. 사실 은행이나 보험 회사의 상품도 안전하지 않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가장 위험 부담도 낮고 이자율도 높은 보험 상품은 미래가 아닌 지금 자신의 가진 것을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지 말고”(12,21참조),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하는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입니다. (마태6,20) 그것은 선행을 베풀고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는 삶입니다. 그래서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12,20)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이지 않나요. 물론 자기 죽을지 모르는 채 뼈 빠지게 고생해서 모아 둔 돈이야 배우자나 자식들이 차지하긴 하겠지요. 결국 그렇게 죽자살자고 돈을 축적하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않나요. 한 번뿐인 인생살이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식들에게 남기는 게 전부라면 그렇게 살다 죽으시지요,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한번 진솔하게 물어보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게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인지 말입니다. 부디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앞에 부유한 사람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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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돌아갈 때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갈 우리는 /
박윤식 [big-llight] 241020 19:54 ㅣNo.176924
‘마음에 뿌린 씨앗’이라는 책의 내용이다. 온갖 사치를 누린 여인이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죽어 천국 문 앞에 당도하자 한 천사가 그녀가 머무를 집을 안내했다. 아름다운 저택들을 지나기에 그 가운데 하나가 내가 머물 집이겠지 생각했다나. 그리고 큰길 지나 작은 변두리로 왔다. 바로 그 언저리에 있는 오두막보다 나을 게 없는 집에 이르렀다. “자, 네 집이다.” 안내하던 천사의 말이었다. “뭐요! 이 집요? 이런 곳에 살 수 없어요.” “안됐구나. 하지만 네가 보낸 자재로는 저 정도밖에 지을 수 없었단다.” 하고 천사는 말했다. 천국에서 살 집은 우리가 살아생전 보낸, 딱 그 자재로만 짓는단다. 그 곳간에는 바로 지상에서 보내어진 만큼만 쌓인다나.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으셨다. “어떤 부유한 이가 많은 소출을 거뒀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모울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말하였다. ‘곳간들을 더 크게 지어 거기 모으자. 그리고 이렇게 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쓸 것 쌓았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 그러나 하느님께서 이르셨다.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목숨 되찾으리라. 그러면 그것들은 누구 차지냐?’ 자신에게만 재화 모으고 하느님께 부유하지 못한 이는 이러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지상 순례 때에 알려 준 재물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일 게다. 그는 자신이 쌓아 놓은 재물 모두에 온갖 희망을 걸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재물을 축적하는 데에만 있었지, 진정 남과 나눌 줄을 몰랐다. 그는 그 재물과 함께 영원히 살줄로만 생각을 했다. 예수님은 이 부자야말로, 하느님 눈에 가장 어리석고 가련한 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우리가 살면서 자선하고 비운 만큼의 재물이, 영원히 누릴 하늘의 곳간에 쌓인다는 거다. 지금 많은 이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에 빠져서 산다. 그들은 영적인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에, 하느님 나라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재물만을 위하면서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눈에 드는 부자일까, 아니면 어리석을까? 다들 하느님 눈에 드는 지혜로운 부자가 되자.
가끔 우리는 큰 곳간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그것만이 삶의 희망이요, 안전하다 여긴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른다. 졸지에 그것을 맞이하는 이를 종종 대하는 우리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일 수도. 쌓아둔 그 재물이 영생을 담보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그리 길게 죽음을 미루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 들에 있다가 해질 녘에 아궁이에 던져질 우리이기도 하다. 이처럼 소유한 것을 마음껏 써 보지 못하고 세상 떠난 아쉬운 이 곧잘 본다. 사실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이 멀게 느끼며 의식주가 걱정인 이가 더 많은 세상이다. 그렇지만 돈 땜에 가족 희생시키고 친구 배반하며 부모까지 모른 체하는 세상이 되었다. 경제가 최고의 경지가 된 지경이다. 자연도 서슴없이 파괴하고 질서도 금방 바꾸려 든다. 그렇게 하면 진정 행복한 세상이 당장이라도 오는 것인지?
어쩌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건 소유 본능을 이겨내는 나눔의 삶을 산다는 거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천금 같은 이 말씀은, 우리가 결국 하느님께 돌아갈 때 세상 것들을 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가야 할 것임을 분명히 기억하게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내가 소유한 것보다 나를 소유하고 계신 하느님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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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루카 12,21)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루카 복음서 12장의 본문에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부자는 곳간을 크게 짓고 재산을 쌓아 두면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 다가올지 알 수 없고, 쌓아 둔 재물은 그를 죽음에서 구하여 주지 못합니다.
죽음을 걱정하거나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서 죽음을 미루고 자기 수명을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12,25 참조).
복음을 약간 뒤집어서 읽는다면, 오늘 들에 서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풀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니 수명을 늘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12,31 참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고 아버지께서 돌보십니다.
오늘 밤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모르시게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나라를 찾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재물은 어떻게 할까요? 같은 장에서,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푸는 것이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12,33 참조).
곳간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자선으로 베푸는 것이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고, 그렇게 쌓아 둔 재물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12,34).
자선을 베풀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죽어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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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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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돈을 벌어 저축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의 삶을 위해서 가진 것을 모아두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라기보다는
필요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어떠할지 알지 못해서
갑자기 목돈을 쓰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진 것을 지금 전부 사용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축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비유의 부유한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다고 표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어떤 부분을 말씀하실까요?
인간의 삶이 각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인간의 노력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노력의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누구는 그것이 각자의 운명이 달라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노력하는 사람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생기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좋으신 분이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력의 결과가 다른 이유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없다고
자포자기하는 식도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을 비관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하지만
그 결과가 우리의 노력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그 이상은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노력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분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의 노력에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려는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께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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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 외에도 소중한 가치들이 참 많답니다!
연피정 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을 일주일 내내 동반해드리고 왔습니다.
수도회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길을 걸어가는 형제들이라 남 같지 않았습니다.
때로 존경스럽기도 하고, 때로 측은하기도 하고,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청빈의 삶을 서약한 수도자로서, 이 어려운 시대 어떻게 가난을 살수 있겠는지?
이토록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가난의 가치를 어떻게 세상에 설명할 것인지 고민도 참 많이 했습니다.
복음서 전반을 살펴볼 때 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시선은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의 인생 전체가 일관되게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가 싶습니다.
탄생부터 시작해서, 유년기, 청소년기, 장년기, 그리고 공생활 기간 내내 가난하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는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가난의 끝판왕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는 표현을 하시며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유랑생활을 계속하셨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한 예수님의 부자들을 향한 질책과 경고는 아주 매섭습니다.
그래서 때로 부자로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좀 더 심사숙고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부자, 열심히 일해서 벌은 돈을 아낌없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봉헌하는 부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낌없이 칭찬하시는 부자입니다.
매서운 질타의 대상이 되는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돈이라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돈의 위치를 하느님보다 위쪽에 설정해놓은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자선 한번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돈 많다고 함부로 가난한 사람들 업신여기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무서운 말씀, 섬뜩한 말씀입니다.
개념 없는 부자가 강한 경고를 받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한 가지 반성을 해보게 됩니다.
돈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는 수도자들, 그리고 가진 바가 없어 나눌게 없는 분들에게 오늘 말씀은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묵상입니다.
재물 외에도 ‘부’라고 칭할 수 있는 대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24시간이라는 시간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측면들입니다.
장점들, 경쟁력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좋은 재능들, 어떻게 보면 재물보다 훨씬 가치 있는 ‘부’입니다.
이런 ‘부’를 공동체와 이웃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기쁘게 내어놓는 노력, 그것이야말로 칭찬받는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설레는 마음으로 공동체와 이웃,
그리고 세상과 하느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도 중요하지만, 저 너머 세상, 하느님 나라에서의 성공과 부귀영화는 몇천 배, 몇만 배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돈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난을 결핍과 궁핍함으로, 비참함으로 느끼게 사회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부자들을 멀리해서도 안됩니다.
부자들에게 자신들의 재물이 여러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들을 잘 영적으로 인도하고 설득해야 됩니다. 감동을 줘서 많이 내어놓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일입니다.
부자는 크게 두 가지 부자로 나눠집니다. 안하무인의 부자들과 착한 부자들로 나눠집니다.
절대로 모든 부자들을 싸잡아 경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평생 땀흘리고 정직하게 모아서 일어선 부자들, 박수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로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설명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한 구원의 길을 선포하도록 도와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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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어리석은 자야!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조심하여 크고 작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어리석은 부자는 엄청난 소출을 거두고 근심에 빠져 한심한 말을 한다.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17절) 그는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미래를 내다보지 않았다.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동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땅에서 소출을 거두듯이 자기 목숨의 길이를 정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나 부자는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는 최후의 심판 날에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린 배가 자신의 곳간보다 더 안전한 창고라는 것을 몰랐다. 그 재산을 가난한 이들의 배에 쌓았더라면, 세상에서는 모두 없어졌겠지만, 하늘에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재물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재물을 쌓아 둔다.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은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모은 재물은 유산으로 상속된다. 선행, 덕행만이 죽은 사람의 동반자가 된다. 자비만이 우리를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를 하늘나라와 첫 번째 거처로 인도한다. 그래서 주님은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며, 영광스러운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누가 그런 사람일까? 재물보다 덕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손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며, 모든 힘을 다해 없는 이들의 슬픔을 달래 주는 사람이다.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보화를 쌓는다. 그는 덕행과 바른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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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주 받은 돈도 축복이 되게 하시는 분
복권이 당첨되었으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우리나라 돈으로 3억 원 상당의 복권에 당첨된 사나이의 가족이 벌이던 자축 파티가 살인극으로
돌변하여 일가족이 패가망신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93년 9월 25일 스페인에서 있었습니다.
스페인 바로셀로나 경찰은 이날 현지의 한 청년이 복권이 당첨돼 4천 9백만 페세타(약 3억 원)를
타게 되자 지난 23일 가족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즐기던 중 가족에게 나눠 줄 액수를 놓고 17세의 여동생과 심하게 말다툼하다가 그만 칼로 동생을 살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 형에게 자신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말해달라고 청합니다.
유산이라면 형제에게 모두 주었을 테지만 형이 모두 가로채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전혀 돈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예수님은 돈이 공평하게 분배되게 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돈보다는 사랑에 신경 쓰도록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불행은 돈 때문에 깨지는 관계 때문입니다.
월간잡지 'MONEY'의 통계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82%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돈이라고 합니다.
동시에 미국인의 53%가 최고로 걱정하는 것도 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돈보다 관계에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유태인 세 명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세 사람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파묻었었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몰래 그곳에
되돌아와서 돈을 꺼내 가지고 가 버렸습니다.
다음날 세 사람은 현자로 알려져 있던 솔로몬왕에게 가서, 세 사람 중에서 누가 돈을 가져갔는가를 알아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왕은 “당신들 세 분은 매우 현명한 분들이니까 우선 내가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당신들 세 분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한 남자와 결혼하기 약속했습니다.
얼마 후 아가씨는 다른 남자와 사랑하게 되어, 처음의 남자를 만나 헤어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위자료도 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위자료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파혼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노인에게 유괴되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결혼할 것을 약속했었던 남자에게 파혼하자고 요구했는데도 위자료도 내지 않고
허락받았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돈을 빼앗지 않고 그녀를 그냥 놓아주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칭찬받을 사람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첫째 번 남자는 “그녀와의 파혼을 허락해 주면서도 위자료를 받지 않았던 남자가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도 첫 번째 남자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남자는 “이 이야기는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첫째, 유괴라고 하는 것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짓인데, 돈도 받지 않고 놓아주었다는 것은
조리가 없는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솔로몬은 큰소리로, “그대가 돈을 훔친 범인이렷다!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이나 처녀와 약혼자 사이의 인간관계, 혹은 그사이의 긴장에 주목하는데, 그대는 오로지 돈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대가 범인임이 틀림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솔로몬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면 돈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복권 당첨금 때문에 형제끼리 싸울 때 부모가 마음 아파함을 느꼈다면 그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남매에게 부모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부모가 있다면 형제는 싸우지 못합니다.
그러면 돈이 관계를 깨지 못합니다.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진다면 이는 예수님의 현존이
그 사람들에게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손만 대면 다 금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 신화는 좋은 의미의 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미다스라는 왕이 신으로부터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는 축복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어버렸고 음식도 그래서 먹을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외동딸도 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신이 인간이 황금을 제어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다면 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역할을 하려고 하십니다.
돈을 나누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돈 때문에 관계가 깨지는 일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부모가 죽으며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는 마지막 말을 하듯,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그래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 일은 없습니다.
신학자 팀 켈러(Tim Keller)는 “진정한 자유는 ‘구속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구속을
찾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 멍에를 메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 멍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십시오.
그러면 돈과 관계의 행복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제어할 능력과 그릇이 된다면 하느님은 얼마든지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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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탐욕을 조심하여라.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 12,13-15)”
지금 이 상황은, 형제간에 유산 상속 문제로 다툼이 생겨서 예수님께 그것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그 요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듣는 앞에서 ‘탐욕’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형뿐만 아니라 그 사람 자신도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라는 말씀은,
세속의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시는 말씀입니다.
1)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라는 말씀이 연상됩니다.
유산 상속 문제로 형제가 다투는 것은 ‘죽은 이들의 다툼’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다툼을 해결하는 것도 ‘죽은 이들’이 할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을, “나는 너희의 탐욕을 채워주려고 온 것이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속의 부귀영화를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청해야 할 것도
세속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3) 뒤의 말씀을(탐욕에 관한 가르침을) 그 사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즉 형제간의 다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유산 상속 문제에 관한 다툼이 생긴 원인은 ‘탐욕’이기 때문에, 둘 다 탐욕을 버리면, 또는 한쪽이라도 탐욕을 버리면 그 다툼은 바로 해결됩니다.
(만일에 둘 다 끝까지 탐욕을 버리지 않으면, 그 다툼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생명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돈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그 돈으로 선행과 사랑 실천을 많이 할 수 있고, 그러면 그것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만일에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선행과 사랑 실천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선행과 사랑 실천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마음과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도 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선도 없고 사랑도 없이 돈으로만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돈이 많아서 그 돈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더 유리하다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다는 뜻이고, 그러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어떤 부자가 진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한다면, 언젠가는 ‘빈손’이 될 것이고, ‘빈손’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돈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부자였던’ 사람이 많지만, ‘부자인 채로’ 생을 마친 사람은 없습니다.
탐욕에 관한 가르침 뒤에 이어지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많이 가진 자들이 잘난 체 하지만, 그것은 결코 지혜가 아니고, 어리석은 탐욕일 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6-21).”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자기가 모은 재산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의 목숨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어리석음입니다.
세상 만물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재산도, 목숨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시간의 주인이신 분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생각도 없고, 또 이웃에게 고마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이웃에게 ‘나눔’을 실천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죄 - ‘탐욕’입니다.
또 그는 혼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두 번째 죄 - ‘방탕’입니다.
또 그는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세 번째 죄 - 교만입니다.
여기서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구의 차지도 되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 밤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에게 몇 시간의 여유는 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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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13-21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있지 않다."
어떤 초등학교의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학생들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돈 1억을 가진 사람과 자녀 열 명을 가진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요?”
그러자 똘똘하게 생긴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대답했습니다.
“자녀 열 명을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 답지않은 대답에 의외라고 생각한 선생님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묻자 그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1억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돈을 갖기를 원하겠지만 자녀 열 명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의 자녀를 갖기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참으로 지혜로운 학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라 더 이상의 것들을 원하지 않는 사람, 지금 가진 것들에 충분히 만족하며 기쁘게 사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고 그런 사람이 참된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가진 것을 베풀지 못하고 남들보다 더 가지려는 '욕심'을 버려야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 분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으로 많은 소출을 얻어 부유해졌음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려고 하기 보다는, 더 큰 곳간을 지어 그곳에 자신이 지닌 재물을 넣어놓고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의 크기를 더 키우려고 하는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그러나 욕심의 크기를 키우면 키울수록 그 욕심만큼 갈증도 커집니다. 뭔가가 빠져있거나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 그것만 채우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나면 행복은 잠시뿐, 다음엔 또 다른 것, 더 많은 것, 더 큰 것들을 채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채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참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채우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삶을 낭비하게 되고 먼저 챙겨야 할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자선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무들은 하루 종일 땅속에서 물을 빨아올리고, 새들은 새벽부터 일어나 쉬지 않고 여기저기 먹이를 구하러 다닙니다. 그러나 그것들과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갈 뿐, 스스로 더 큰 욕심의 곳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쫓기듯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욕심과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서, 나무처럼, 새들처럼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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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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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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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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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1. 연중 제29주간 월요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소망을 갖는 삶
<2024.10.21> 아침을 여는 묵상 (애 3:1~18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소망을 갖는 삶❞
❚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을 감내하며 그분의 뜻과 은혜를 구하고 회복될 날을 소망해야 합니다.
✔ 고난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
➲ 회개로 이끄는 하나님의 고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1~6절).
예레미야는 자신을 ‘진노의 매를 맞아 고난 당하는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매’는 일반적인 비유로 사용될 경우에는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나 선생의 ‘교훈’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노하심’과 연결되어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행사하시는 진노의 수단으로서 시인과 유다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나타냅니다. ‘이끌어’(2절)는 막대기로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 이미지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그를 치셨습니다(3절). 시인은 하나님을 목자처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때리고 혼내시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육체적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4~6절).
우리의 인생을 깊은 터널과도 같은 고난의 한복판으로 몰아가는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닥치는 고난은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 상실과 아픔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터널의 특징은 동굴과는 다르게 잠시 후면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만드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기 전에 속히 회개하고 죄악의 자리에서 돌아서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때론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일지라도, 모든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둠 속으로 이끄신 분께서 또한 밝은 빛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로 이끄는 하나님의 고난임을 깨달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송해야 합니다(7~13절).
시인은 자신을 죄로수 만들어 사방으로부터 격리시킨 것과 같은 고립감에 빠지게 하셨다고 탄식합니다. ‘...나를 둘러싸서...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감옥에 갇히 상태에서 죄수의 발목에 채워졌던 사슬을 더욱 무겁게 함으로써 도저히 도망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을 강조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고움을 요청하는 기도마저도 듣지 않으십니다(8절). ‘다듬은 돌을 쌓아 길들을...’(9절) 막고 시인의 뜻과 기대를 철저히 좌절시키고 있습니다. 즉, “돌로 내 앞길을 막으시고 내 삶의 길을 어렵게 만드셨다...”(9절, 쉬운성경)는 것입니다. 나아가 시인은 마치 짐승의 먹잇감이 된 것처럼 여호와께 고난을 당한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10~11절). 또한 자신을 과녁으로 삼으셔서 활을 당기셔서 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맞추셨다고 탄식(12~13절)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삶에 이유 없이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에는 합당한 뜻이 담겨 있으며, 도움을 구하는 자를 외면하시거나 기도를 물리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이 당장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직 그 고난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찾기보다 문제를 속히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닙니다. 당장의 고난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낙심하고 원망하고 더 큰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했는데 왜 고난을 해결해 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하고 낙심하기보다 이 일을 통해 무엇을 깨닫길 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깨달을 때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아 그분의 이름을 찬송하며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은혜로 감싸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소망해야 합니다(14~18절).
시인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주변의 이방 나라들로부터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14절).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고통으로 채우셨으며, 자갈로 이를 부수시고, 재 속에 밀어 넣으심으로 자신에게는 평안이 없고, 행복이 무엇인지도 잊어 버렸다(15~17절,쉬운성경)고 고백합니다. 현재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시인은 ‘...이제는 힘이 다 빠졌다. 여호와께서 도와주시리라는 희망도 사라졌다...’(18절)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평강과 행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거두어 가시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근심과 고통뿐입니다.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대한 소망은 이어 가야 합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해서 소망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이 갈수록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었고, 참된 평강과 행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이 은혜라면 마지막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 평강과 행복을 빼앗긴 것 같지만, 낙심하지 말고 다시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은혜로 우리의 삶을 감싸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시고, 해결하시기도 하심을 깨달아 하나님께만 해결의 답을 구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믿고 나아갈 수 있기를(애 3:1~1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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