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애 개인전 2017. 12. 13 - 12. 19 토포하우스(T.02-734-7555, 인사동)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전경애의 작품에는 자신이 바라는 절대적인 희망과 평안이 담겨있다. 그것은 어떤 강요나 형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배경과 색채와 선에서
우러나온다. 혹독한 현실에서도 눈에 보이는 앤틱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더하는 색깔과 디자인이 많은 위로를 주었다.
글 : 이종태(아트 칼럼니스트)
전경애 작가의 작품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차별화 된다. 영국과 유럽에서 15여 년간 체류했던 삶을 디아스포라의 시각으로 그려냈다. 그때 그 풍경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린 작품은 독특한 감흥을 자아낸다. 전경애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대해 남다른 재능을 보여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 필기도구만 있으면 사물을 재빠르게 묘사를 하는 재능이 있었고 일찍이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가졌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전경애 작가의 그림에는 가족과 사람이 전경 속에 파묻혀 있다. 자연 보다 사람이 우선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검정색 피아노가 있는 거실에서 엄마는 책을 읽어 주고 어린 아들과 딸은 탁자에 앉아 공부를 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전경애 작가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삶 그 자체다. 작가는 살아 있는 것, 죽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가 끈질기게 집착을 가지고 그리는 그림은 가족과 공동체인데, 군상들의 표정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작가는 평화로운 일상의 삶과 함께 위트와 웃음, 때로는 외로움과 고즈넉함을 표현하려고 했기에 그들이 지쳐있는 모습조차 행복하게 그렸다. 영국의 도심은 물론 시골 구석구석을 심도 있게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전경을 캔버스에 담았다. 영국의 집들이 마치 인형의 집과 같아서, 마루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붉은 벽돌집과 다양한 색깔의 집들을 보면 마치 인형의 나라에 온 것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그래서 작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전경애 작가가 인물을 그릴 때는 얼굴 모양만 있고 이목구비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몸으로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얼굴이란 잘나고 못난 것 없이 조물주의 뜻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 되었다는 것을 섭리로 받아들인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외면을 통해 내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이란 상상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대부분 경험 했던 것들이 축적되어 표출된다. 춥고 가난했던 남편의 유학시절을 회상하면서 붓질을 했다. 전경애는 가정의 행복과 자녀들에 대한 신앙과 교육이 우선이라는 투철한 신념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전경애의 작품에는 자신이 바라는 절대적인 희망과 평안이 담겨있다. 그것은 어떤 강요나 형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의 배경과 색채와 선에서 우러나온다. 혹독한 현실에서도 눈에 보이는 앤틱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더하는 색깔과 디자인이 많은 위로를 주었다. 이것들을 바라보며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의미와 그 안에 내재된 신성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가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과 세상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현실과 불가피한 삶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자발적 순응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푸른 풀과 붉은 벽돌, 커다란 나무들이 상처받은 에고를 다 내려놓게 했고, 빛나는 자신의 참된 본성을 만날 수 있게 했다. 작품이 그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서구교회의 그림과 조각은 설교의 영적 이미지를 되새겨주고 성서를 깨닫게 하는 유용한 도구였다. ‘지식인은 문서를 읽으면서, 문맹자는 회화를 보면서 진리에 접근한다’라고 그레고리는 말했다. 중세의 성화는 평신도들의 성서나 다름이 없었다. 17세기까지 서양의 시각 예술사는 서양의 교회 및 종교예술의 역사와 일치한다. 기독교의 비옥한 토양 위에서 서구인들은 세계정사의 예술품을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인간중심의 인본주의 해석으로 흐르면서 정당한 신앙적 정체성을 잃고 세속화 되어버린 부분도 적지 않다. 과거에 은폐되었던 사회병리적, 심리적 문제들이 남아 있기에 오늘날 그림을 통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신앙적 열정까지 선포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경애의 작품은 선진국에서 연구 개발 되는 아트테라피 처럼 작품 감상을 통해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질병까지도 치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전경애 그림에는 영국의 소박한 집마다 정원이 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기하학적인 형식을 기반으로 하며 자연을 왜곡하는 형태의 정원이 사랑받았다.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권위적이었던 당시 프랑스의 정원 형태는 영국인에게는 너무 인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는 17세기 프랑스식 정원과는 반대되는 형태의 자연주의적 정원이 만들어지고 이른바 영국식 정원이 등장했다.
17세기 프랑스의 많은 정원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던 것과는 반대로 18세기 영국식 정원에서는 자연과 풍경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연못, 다리가 설치된 연못 주위로 형성된 구릉지 등 인위적인 요소를 최대로 줄여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는 정원이 바로 영국식 정원이다. 목가적이고 소박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는 영국식 정원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향수가 강해지는 현대에 이르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다.
영국의 전원적인 생활에 흡족했던 전 작가는 영국의 낭만주의 대표적인 시인 윌리엄 워즈워즈가 추구했던 자연과 낭만에 대한 시 속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워즈워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력에 의해 환상으로 바꾼 산물이 자연이라고 했다. 전원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보다 높은 단계로 고양시켜 주는 원천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 속의 삶을 영위하면서 거기에 깃들어 있는 인간의 근원적인 모습을 순수한 언어로 표현했는데, 전 작가는 그것을 그림으로 옮겼다. 워즈워드의 대표적인 시 무지개와 전경애의 작품이 오버랩이 되는 이유다.
전원생활은 인간의 감정을 성숙시키고 아름답게 만드는 토양이 된다. 시인은 그 세계에 깃든 인간의 근원적 법칙을 소박하고 꾸밈없는 언어로 노래했다. '무지개'에는 바로 이러한 시인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무지개에 대한 명상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심성인 동심의 소중한 가치를 새삼 일깨워 주고, 자연에 대해 새삼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한다.
무지개
하늘에 무지개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願)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천생의 경건한 마음으로 이어질진저..
전경애 작가에게는 이번 전시회가 첫 개인전이다.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의 기법과 화풍을 과감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신부가 시집가는 날처럼 두려움과 기대가 남다르다. 수 년 동안 작가는 붓을 갈고 닦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족함과 번뇌를 느끼는 것은 화가들의 공통점이다.
전경애 작가는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탤런트를 감사히 생각한다. 그림을 그릴 수 있기에 붓 터치를 할 때마다 생명의 귀함을 깨닫는다. 전시회에서 화가가 감독이라면 작품은 주연배우나 마찬가지다. 관객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온다. 작품을 통해서 전 작가가 염원하고 기도 하는 (누가복음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관객들에게 깃들길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