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파 싸움★
/정옥성
항상 역사를 공부하다가 보면
조선의 당파싸움이 나옵니다.
궁금한 것은 이 당파가 언제부터 만들어졌고,
당파가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이 듭니다.
저의 짧은 역사 지식으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아주 복잡한 당파의 계보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좀 무리가 따르겠지만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4색 당파가 만들어지고 당파 간의 당쟁이
처음 시작된 것은 조선시대 선조 때입니다.
역사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비롯됐습니다
김효원과 심의겸의 사소한 갈등이
무려 300년 가까이 서로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다툼으로 번질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윈래 둘은 같은 사림파였지만
김효원은 퇴계 이황쪽 신진세력이었고
심의겸은 율곡 이이 쪽 기성세력이였습니다.
참고로 사림파는 조선왕조의 건립을 반대했었던
중소 지주 출신의 온건 사대부들이 중심으로
성리학자들이 주축을 이룬 정치 세력집단으로
경전에 치중하여 인간의 심성에 대한 연구를
학문의 주류로 삼았으며,
따라서 명분을 중시하는 왕도정치를 주장했습니다.
조선왕조를 세웠던 혁명파 사대부 후예로
현실정치를 중요시 하던 훈구파와 대립하였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훈구파는 기득권을 쥔
보수 세력이라 한다면,
사림파는 지방자치를 중시하는 진보세력이라고
설명하면 조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1575년 조선 14대 임금 선조9년.
동대문쪽 건천동 집으로 향하는 김효원이
갑자기 발길을 멈춰서며
두 주먹을 불끈쥐며 혼잣말을 내뱉었습니다.
"니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게냐?
그래 어디 두고보자."
이 혼잣말이 그 질기고 처절한 당파싸움의
씨앗이 될 줄을 그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김효원은 당대의 꽃보직으로 통하는
"이조전랑"직에 오릅니다
그런데 이 직위의 천거 과정 속에서
심의겸은 김효원이 외척 윤형원(몰락한 훈구파)의
집에 식객으로 자주 드나들었다는 이유를 들면서
김효원의 '이조전랑' 임용을 극렬 반대하여
그와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를 가슴속에 증오심으로 품고
보복의 칼을 갈던 차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나서서 심충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남동생인 외척이라는
이유를 대며 극렬이 반대합니다.
"절대로 아니되옵니다
이조전랑직이 무슨 외척집안 물건이란
말입니까?
라면서 반대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감정싸움이 깊어지면서
파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로인해 밀고 밀리는 파쟁이 일어나
김효원과 심의겸,
그 둘을 중심으로 동인과 서인으로
파가 갈리게 됩니다.
어이없게도 김효원의 집이
동대문쪽이라서 동인이라 하였고,
심의겸의 집은 그 반대 쪽인
서대문 근방이라서 서인이라 칭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김원효이 임용된 '이조전랑'직책이
어떤 보직이었기에 이토록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을까요?
조선시대 최초로 붕당 발생의 계기가된
"이조전랑"직은 그리높은 직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직위는 최고급 고위직에 오르기 위한
필수코스였습니다.
이조전랑의 권한은 대단했습니다.
삼사 (사헌부,사간원,홍문간)의 인사권을
쥐고있는 직책으로 그 권한과 임무가 막중하여
자기 당파 인물로 채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쌈박질을 해대는 현대판 꽃보직이었습니다.
이렇게 '동인'과 그 반대파인
'서인'으로 갈리었습니다.
동인은 당시 서인의 대표인물인 좌의정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는 이유로
선조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동인의 대표격인 이해산의 계락으로
실각 위기에처한 정철을 어떻게 처벌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하다가
정철의 강력처벌을 주장한 쪽은'북인'으로
정철에 온정적인 입장을 취한 부류는 '남인'으로
갈리었습니다.
한편으로 서인은 남인에 대해 반대적 입장을
취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남인에 우호적 입장을 고수하는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들은 숙종이후 조선의 주요집권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곤 노론,소론은 남인,북인과 함께
당당(?)하게 사색당파를 이루어
사시사철 주구장창 끊이지 않는 당파싸움으로
조선을 파멸의 길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냈습니다.
이렇듯 당파가 갈리는 이유는
뭐 거창한 국가관이나 정치 철학을 기반으로
나뉘여진 것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어느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것과
어떤 사람의 밑에 줄을 서느냐가
당파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당파싸움을 살펴보면
어떤 것이 옳으냐 그르냐라든지
나라의 미래를 위해,
백성을 위해서라는 명제는 없습니다.
오직 내편과 네편만 있고
어느쪽에 줄을 서야 자리가
보장이 되느냐에 마춰져 있습니다.
완전 패거리 정치가 조선의 당파정치입니다.
어떻습니까?
2021년 대한민국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현실과 무엇이 다른점이 있습니까?
어쩌면 더하면 더했지 다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르다면 조선의 왕은 당파에 속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대통령이 당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당파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서,국민을 위해서
싸우고 협력을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정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상대편엔 가혹하리만치
법의 잣대를 드리대고,
자기편은 한없는 온정을 베푸는 정치를 한다면
조선시대의 당파정치보다 더 저질스런 정치가
된다고 봅니다.
당쟁의 핵심은 민생을 외면하고
예학(禮學)의 힘을 빌려서
정적을 내쫓는데 주안점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통치 이념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는데
세자를 누구로 삼느냐는 문제,
왕비가 죽으면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를 놓고
끝없이 대립하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인 파당은 시파요,
정략의 목적으로 세자에 대한 허위 보고를 올리고
이를 옹호한 세력은 벽파였습니다.
송시열도 자기편 사람은 무조건 옹호하였습니다.
당쟁은 서원을 기반으로 학맥을 따라 뭉친
패거리 집단으로 대를 이어 절치부심
권력 투쟁에 나섰던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성무 교수가
쓴 "단숨에 읽는 당쟁사 이야기" 서문에서
광해군 시대를 이렇게 정의 했습니다.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망을 품고
소북이 비웃는 상황에서
반정(反正)이 일어났다.” 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야 봐야 합니다.
내편 네편만 눈에 보이는 정치를 하다가
나라는 골병들어 갑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철학도 없고
생각도 없고
국민도 없고
오직 보이는게
내편의 이익만 보이니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백성들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