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겟세마네가 있다.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 더 이상 한 걸음도 뗄 수 없는 한계의 끝 지점. 그때에도 우리는 믿음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때 우리의 느낌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을까?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그분이 서실 수 있는 마지막 백척간두에 서 계셨다.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생명의 위협이나 심적 압박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냥 모든 걸 잊고 딱 눈 감아버리면 그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는 단순한 삶의 무게가 아니었다. 겟세마네에서 그분이 겪으신 고통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께서 인간의 죄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와 영원히 분리되어야 하는 그분의 심판 곧 자비가 전혀 섞이지 않은 공의의 심판에 직면하는 것이다.
자애로우시던 아버지의 얼굴은 죄를 짊어지신 사랑하는 아들을 마치 원수의 자식을 쳐다보시듯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셨다. 그랬다. 그분이 겪어야 했던 겟세마네의 고민은 죄로 인한 아버지와의 영원한 분리였다. 그분은 아들이 아니라 죄 그 자체가 되셨다. 죽음 너머를 기대할 수 없는 깜깜한 단절의 심연이 그분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심연의 절벽 위에 서서 한 걸음만 내디딘다면 밑도 끝도 없는 무저갱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 같은 칠흑 같은 어두움이 떡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치가 떨리는 죄 덩어리로 보셨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깊은 절망과 고민은 그동안 어떤 반대와 원수들의 공격에도 의연하셨던 그분을 심하게 흔들어놓았다. 절망과 고민 중에 주님은 연신 심음을 쏟아내셨다. 기도하려고 엎드렸으나 시시각각 영혼을 파고드는 생각은 사탄이 심어주려는 헛되고 부질없는 희생이 될 것이라는 시험이었다.
(마 26: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분은 제자들의 위로를 구하였다. 언제나 위로하시던 분께서 위로받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저들의 선생님의 이런 고통을 깨닫지 못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할 수만 있으면 비껴가고 싶은 그 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막다른 길이었다. 포기하든지 아니면 직통하든지 오직 두 길 외엔 대안이 없었다. 그분이 이 길을 포기한다면 그분은 아버지와 분리되지 않아도 되지만 지구는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것이었다. 그분의 이마에서 핏빛 같은 땀방울이 그분의 고민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시간 자고 있었다. 오직 그분 홀로 그 포도즙 틀을 밟고 계셨다. 오직 그분 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이 겟세마네에서 서신 그 경험을 하지 못했다. 인간은 아무도 그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 부활 후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곧 둘째 사망을 당할 때는 비로소 영원한 멸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 경험을 하고서라도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고자 하셨는가? 그러나 그때에는 너무 늦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저희의 기도가 되게 하소서. 저희를 자기 자신에게서 구원하시고 탐욕적 삶의 유혹에서 건지소서. 인생의 겟세마네에서 섰을 때 주님처럼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름으로 진정으로 승리하는 경험 얻게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