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93
6월19일[연중 제1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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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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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mF7k4R0vg5Y
[수원교구 정연진 베드로(홍보국 부국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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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또한 자연에게 별의별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죄를 쌓아갑니다. 때로 이 산더미 같은 죄 어떻게 보속해야 되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선•기도•단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있는 자선•기도•단식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외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래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 그리고 또 다른 부인 시간, 재능, 경험과 연륜 등등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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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rUjytA2b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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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 세 가지를 실천하지 않으면 목표가 없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도 산상수훈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2천 년 동안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사순절 동안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은 왜 세워질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곡식이 저절로 자라기는 하지만, 물을 주고 풀을 뽑아주고 거름을 주는 등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이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평생 유지할 기도, 자선, 단식의 매일 루틴을 결정한 자는 이미 믿음으로 삼구와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은 비록 종교인만이 아닌 모든 꿈을 좇는 선한 이들이 매일 하는 일입니다.
우선 꿈이 있는 사람들은 매일 독서, 명상, 감사일기 등을 씁니다. 우리로서는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책 100권 읽기를 하였고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씩 썼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독서, 감사일기를 하였고 트위터 공동 설립자인 잭 도시는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묵주반지를 끼고 대회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꿈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이 꿈의 성취를 방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일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싸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단식한 것과 같습니다. 잭 도시는 간헐적 단식을 하였고 긴연아 선수는 “야식이 뭐예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 육신의 욕망을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연예인 중 유재석이나 박진영 씨의 몸 관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자기 육체를 괴롭힐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드웨인 존스가 왜 굳이 매일 새벽에 운동을 몇 시간씩 하겠습니까? 자기를 이기는 게 곧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꿈이 있는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자선입니다. 매일 자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왜 굳이 김연아 선수가 많은 돈을 기부하였을까요? 돈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더 나은 성과가 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잭 도시는 코로나 구호 활동 및 기타 자선 활동에 10억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10억 달러는 1조 3천억 원 정도 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재단까지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하고 주윤발 씨는 자신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도 1조 원 가까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돈으로 퇴색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루카 복음 6장 20~23절 행복 선언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배고픈 자는 복이 있으며, 지금 박해받아서 우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속, 육신, 마귀를 이긴 이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루지 않고는 ‘사랑’이라는 목표가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구는 사랑과 반대 욕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 나라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매일 삼구와 싸우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도-자선-단식을 매일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자선, 단식을 하지 않아도 천국을 원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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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있는데 그 중에 요한복음 8장 32절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강의를 들으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전제조건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전제 조건은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머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비로소 진리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때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겁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은 많습니다. 자명한 수학적인 진리도 있고, 존재의 근거를 알려주는 철학적인 진리도 있고, 현대사회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자본과 물질의 진리도 있습니다. 수학적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경제적인 진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황제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그는 감시의 그물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 집행일에 그는 성당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삶이 끝난다는 생각에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자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사형집행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10년 동안 유배를 갔습니다. 추운 시베리아에서 10년을 보낼 수 있었던 힘은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유배가 끝나 자유인이 되었던 그는 성경 말씀이 녹아있는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유명한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러시아가 공산주의가 되면서 성경이 금서로 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읽을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지성들은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솔제니친이 감옥에서 위로를 받았던 것도, 극한의 고독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이 말씀이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가 극한의 순교와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순교한 후, 한국교회는 파리외방 전교회의 사제들이 올 때까지, 30년간 목자 없는 교회로 있었습니다. 사제가 없이, 미사가 없이 한국교회가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성경직해’라는 성경말씀입니다. 교우들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박해가 심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조직이 무너져서도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자본주의와 물질의 파도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우리가 말씀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990년도에 ‘2000년대 복음화’를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사목지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2000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된 내용은 ‘복음나누기 7단계’였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복음나누기는 미국의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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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올바른 자선>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는 그 자선이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사람들 앞에서 베풀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되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몰래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띌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말씀하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남 앞에서 넘치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자선은 자랑하려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오른손은 의인이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왼손은 죄가 되는 행동이나 죄인들을 말한다.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하고,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된다. 기도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대천사가 토비트에게 “너희의 기도를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토빗 12,12) 했다. 골방이라는 것은 마음의 침실이다. 그 마음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분만을 생각하도록, 기도할 때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단식할 때도 겉꾸미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는 행위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들은 얼굴을 찌푸린다.”(16절) 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자랑거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라는 말씀으로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실제로 양인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말씀으로 언제나 참 열매를 맺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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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엘리사에게 이어진 사명을 통해서 하느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름을 묵상하게 됩니다. 엘리야의 사명이 엘리사에게 넘어가며 주님의 시간과 사업은 계속 이어집니다. 엘리야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엘리야라는 한 인간의 생애에서 본다면, 그 사명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한 인간의 생애는 하느님의 사명이 완전히 이루어지기에 너무나 짧습니다. 온 생애를 통한 엘리야의 헌신에도 이스라엘은 아직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뜻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불러올리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간에서 엘리야의 사명은 엘리사에게 넘어갔고, 구원사는 변함없이 계속해서 흘러갑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저마다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사명으로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복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우리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루어진 것이 없어 보이고, 목적지는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교회와 사회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가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할 듯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명은 다른 이를 통해서, 다음 세대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그분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우리 노고의 열매가 비록 이 시대에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 속에서 사명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입니다. 그분께서 맡기신 사명을 묵묵히 충실하게 실천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나라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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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1)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위선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누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를 내면서 그것을 부정합니다. 위선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위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주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 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이 있습니다. “케파(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이방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계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위선인데, 이방인계 신자들 쪽에서 볼 때에도 위선이고, 유대인들 쪽에서 볼 때에도 위선입니다. <아마도 이방인계 신자들은 그 일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일을 직접 본 바오로 사도는 몹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라는 말은, “평소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잘 했으면서”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라는 말은, “당신의 행동은 유대교 율법과 관습을 지켜야 한다고 이방인계 신자들에게 강요한 것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은, “당신은 위선자다.”입니다. <사도들마저도 그렇게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위선이 그만큼 위험한 함정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베드로 사도가 그 비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티오키아에서 있었던 그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그 회의에서 ‘네 가지 필수 사항’(사도 15,29) 외에는, 유대교 율법들과 관습들을 모두 폐지하기로 공식 결정했습니다.>
2) 위선자들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실제로’ 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누군가가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돈이 아니라 그 돈을 내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분명히 도움을 받았는데도 전혀 고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움을 준 쪽에서 생색을 내거나 고마워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일 때, 그렇게 됩니다.> –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연기(演技)’입니다.즉 기도하는 척 하는 것이고, 가짜 기도입니다.– 위선자들도 단식할 때에는 ‘실제로’ 밥을 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선의 경우처럼 ‘굶는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하느님께서 속마음을 보시고 그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면, 굶는 사람은 쓸데없이 헛일을 한 것이 되고, 죄만 지은 일이 됩니다.
3)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숨은 일’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본인도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자선을 베풀 때에는 그 일이 자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하라는 뜻인데,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그것이 사랑과 선행인 줄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일이 사랑과 선행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일에 대해서 상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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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선 당시에 신앙의 실천으로 가장 높이 평가되던 자선, 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이 덕목들도 올바른 정신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자신에게 맡겨 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노력과 희생과 모든 것이 투자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재산이 하느님께서 맡겨 두신 것이라는 의미는, 나의 노력 위에 하느님의 허락이 더해져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재산이라는 뜻이고, 그래서 자기 재산을 쓸 때도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주시하십니다. 그러고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십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사랑을 베풀 때는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자신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실천해야 하느님을 위한 선행이라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나 단식을 할 때의 마음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거나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은밀한 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며, 그렇게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우리의 자선이나 기도가 마치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위선처럼 여겨져서 위축되거나, 하려던 것을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 주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내어 놓고 도우심을 빌며, 또 용감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하루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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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요? 어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을까요? 도벽이 있는 사람은 물건을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새에’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가 버리기 마련입니다. 어떤 행동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습관으로 이어져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도 그 행동을 하게 되니,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는 좋은 행동을 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미사에 참례하러 성당 가는 길에 묵주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집 대문을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묵주를 꺼내 듭니다. 주변을 깨끗이 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은 설거지할 그릇이 눈에 보이면 고무장갑에 손이 갑니다. 이외에도 어려운 이를 보면 도와주는 일, 슬픔에 잠겨 있는 이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 외로운 이들에게 찾아가는 일 등 오랫동안 몸에 배어서 왼손도 모르게 하는 오른손의 일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왼손도 모르게 오른손이 베푸는 자선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자선을 베푸는 이들을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실제 우리 사회에는 남모르게 자선을 베푸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코로나19 사태에 대구 어느 시장의 청년 상인들은 의료진에게 200인분의 도시락과 커피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소외 계층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9년째 선행을 이어 오는 익명의 기부 천사가 있다고 합니다. 산골짜기 은둔 장소에서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는 봉쇄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려고 다짐하고 몸에 배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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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십계명의 응용 : 자선, 기도, 단식>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통용될 새로운 "의로움"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선포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되었으며, 이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의 틀을 깨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구현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약의 의로움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구약의 율법을 글자 그대로 준수함으로써 예수로부터 위선자로 책망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의(義)"를 인정받았다. 이는 구약의 율법 자체가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구약의 모든 율법과 규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十誡命, Decalogue)이 건재(健在)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위해 선포하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나은 의로움이 십계명의 기본 정신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이라는 단어가 모세오경에 들어 있지는 않다. 이 단어는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경(五經)에는 "증거판"(출애 31,18; 32,15; 신명 4,15), "훈계와 계명의 돌판"(탈출 24,12; 25,16), 또는 "두 돌판"(신명 5,22)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로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구약에 주어진 십계명(탈출 20,2-17; 신명 5,6-21)의 참 뜻을 하나하나 새겨들어야 한다.
십계명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께서 그분이 선택하시는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이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을 의미하며, 인간의 응답에 대하여 하느님은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며, 이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품위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다.
십계명의 참된 의미에 대한 해설은 도서출판 "일과 놀이"가 펴낸 해설판 공동번역 성서를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116-119 페이지 참조)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십계명 전부를 열거하여 각각의 계명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해 주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은 십계명에 대한 충분한 풀이로 간주된다. 마태오복음 5장의 여섯 개 대당명제는 우선 십계명의 5계명부터 10계명까지의 새로운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오늘부터 토요일까지 4일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는 산상설교의 둘째 부분(마태 6장)이 봉독된다. 마태오복음 6장은 대당명제와 같은 비중의 율법에 속하지는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지녀야할 성덕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는 "십계명의 응용"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신앙인의 성덕으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제시하신다. 그렇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유대교 안에서 널리 수행되었던 덕목들이며, 예수님 당대에는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선행을 쌓을 목적으로 사용했던 수단들이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하여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움은 무엇인가?
일단 이러한 선행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부러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1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선행이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수행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그 자체가 이미 상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다음 선행지침을 엄수해야 한다. 즉,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것"(3절)이며,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할 것"(6절)이고, "단식할 때 얼굴을 깨끗이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할 것(17절)"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숨을 일까지 모두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답해 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내리시는 선행지침을 글자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모든 선행이 사람의 인정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숨을 일도 다 보시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 등의 선행을 행하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고싶어하는 마음은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조그만 선행을 하고도 크게 불려서 나팔을 불며 떠벌리고, 남이 몰라주면 오히려 섭섭해하는 우리들이다.
자신의 선행을 남들이 알아줄 때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받을 상을 다 받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과 신뢰심과 겸손의 마음이다. 신앙인은 이웃에 대한 자선을 통하여 사랑을 배우게 되고,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신뢰심을 얻게 되며, 음식과 육정을 절제하는 단식을 통하여 겸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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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6,4.6.17)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 하고 예수님은 당부하셨습니다. 착한 행실, 선행의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로써 우리 역시 존재적인 보람과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인간의 칭찬이나 인정에 연연하기보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 행하는 게 올바른 선행의 동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선행동기가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에 치우치다 보면 자칫 의도적이며 선심적인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착한 행실의 3가지 실천을 예로 들었습니다.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하는 것은 율법의 속죄 행위이기도 하겠지만, 더 나아가서 특별한 공로를 쌓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자선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본디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먼저 받았기에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모든 것은 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받은 것을 베풀 때 그 비워진 영적 곳간에 주님께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베풂은 남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받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일방적인 베풂은 세상에 없습니다. 베풂은 때론 되돌려 받기 마련인데 그것은 나의 베풂을 받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기쁨을, 행복을 선물로 되돌려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존재들이고 이런 자선은 곧 참된 형제애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선을 베풀 때 자존심을 빼앗지 않도록 늘 조심합시다.
기도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깨달을 때, 우리의 기도는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와 찬미, 찬양과 영광 그리고 그분 앞에서 나답지 않게 살지 못했음을 깨닫고 참회와 용서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삶의 필요한 은혜를 청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응답의 종류보다 참된 기도는 주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에 있기에 이 점을 늘 명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단식은 단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료 그리고 담배 등의 기호품을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줄이는 게 아닙니다. 물론 이런 노력도 하느님 보시기에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더 좋아하시는 단식은 이사야가 선포한 것처럼,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이58,6) 참된 단식은 음식이나 그 무엇으로 채우려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이며 영적 탐욕을 버리고 비워서 그 비운 그 자리에 하느님의 것, 영적인 것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한 단식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선행보다 더 중요한 오늘의 가르침의 방점은 이 모든 것을 행할 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하느님 앞에서”(6,4.6.18) 행하는 데 있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행하는 이런 선행은 비록 사람들의 인정이나 칭찬받지 못하겠지만 하느님께서 분명 30배, 60배 아니 100배로 그 상급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위선자들처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을 받으려는 행동,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행동, 침통한 표정으로”(6,2.5.16) 하는 선행은 ‘하느님의 영광 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이기심과 허영심에서 기인하기에 하느님이나 사람들 눈에 역겨운 행동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행보다 그 선행의 동기이며 마음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시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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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분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저 때문에 자기 아이가 잘 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들어 보니 제가 독서를 강조해서 자신도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는데, 어린 자녀도 시간이 나면 자기 옆에서 책을 읽고 읽는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 다른 아이들처럼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조를 수도 있는데, 아직까지도 스마트폰 없이 지낼 수 있는 것은 책에 취미를 갖게 되어서인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자녀 역시 그 모습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갖춘 좋은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 독서는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큰 도움을 책 안에서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행동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 역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모범을 따른다고 해서 내게 큰 손해가 올까요? 반대로 큰 영향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범을 따름으로 인해 다른 누군가에게도 좋은 영향이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의 뜻이 이 땅 곳곳에 펼쳐지게 됩니다.
나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하나의 변화를 통해서도 세상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참 많습니다. 특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 기준은 세상의 기준보다 더 엄격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시지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다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이 아닌,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선, 기도, 단식은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목적을 두고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고, 이런 모범이 나의 이웃들에게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더욱 넓게 펼쳐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하느님께 잘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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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로부터 오는 상>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다시 깨어나지 않으면 어찌하나? 하는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주교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사람의 속은 언제 드러나느냐 하면, 대수술을 받고 마취에서 깨어날 때인데 어떤 사람은 욕을 하고, 어떤 이는 숨겨놓은 애인의 이름을 부르고, 자녀의 이름이나 배우자의 이름을 부른단다. 그의 속을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깨어나서 제가 한 행동을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십니다. 누구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 부름을 받았습니다.(성 마더 데레사)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지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구애받지 않고 당당해야 합니다.
자선을 베풀든, 단식하든, 기도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바랍니다. 생색내기가 아닌 사랑의 진정성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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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둘만 있는 듯>
마태오 6,1-6.16-18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둘만 있는 듯>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벗을
만나는
자선
둘만
있는 듯
오직
벗에게
몸과 마음을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
둘만
있는 듯
오직
하느님께
몸과 마음을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나를
만나는
단식
둘만
있는 듯
오직
나에게
몸과 마음을
그럼으로써
하느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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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자유로운 삶”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 86,4)
위 시편과 더불어 하심공경(下心恭敬)하는 마음으로 사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기도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땅에 뿌리내린 신비가 장일순 선생님입니다.
“밤이면 달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낮이면 해처럼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열왕기 하권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오늘은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는 장면입니다. 흡사 신명기에서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를 연상케 합니다.
이름 뜻도 흡사하니 엘리사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God saves)”이고,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The Lord saves)”입니다. 말그대로 엘리사와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후계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장면을 묵상할 때마다 요셉수도원에서 저와 현재의 빠코미오 원장수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992-2014년까지 원장직 책임을 해오다가 자치수도원으로 승격되면서 현재의 빠코미오 수사가 원장으로 뽑혀 자연스럽게 뒤를 이었기 때문입니다. 빠코미오 수사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요셉수도원에는 큰 복입니다.
10년전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밤새워 썼던 강론이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이었습니다. 미사 시 한 강론이 아니라 그냥 기록상 남겨두려 쓴 강론 서두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어제 사랑하고 신뢰하는 제 후배이자 도반인 최종근 빠코미오 신부가 원장좌 자치수도원 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주신 느낌입니다. 경사중의 경사요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리고 오늘 많은 분들을 모시고 대망하던 자치수도원 승격 감사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아랫집 수녀원의 모든 수녀님들이 두 개의 꽃다발을 들고 신임원장과 퇴임하는 저에게 인사차 방문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신임 원장과 ‘감사합니다.’라는 제 꽃다발에 붙은 내용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마치 신임원장과 퇴임원장의 아름다운 조화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순간 떠남의 여정은 감사의 여정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도 저와 흡사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오다 마지막 승천의 떠남을 앞두었을 때, 엘리야에게는 바로 떠남의 여정, 감사의 여정에 대한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떠남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엘리야가 그동안 그 힘들었던 날들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버리고, 내려놓고, 비우면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아오다가 오늘 맞이하는 마지막 승천의 떠남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지요!
평소 삶을 그대로 요약하는 참 멋진 승천의 떠남입니다! 그동안 하루하루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기에 하느님은 참 좋은 선물인 후계자 엘리사를 마련해주셨고, 이렇게 홀가분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같은 승천의 떠남을 갖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둘사이가 얼마나 돈독한 신뢰의 관계인지 오늘 전 독서는 물론 승천의 장면을 목격하고 부르짖는 엘리사의 외침이 이를 입증합니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의 병거이시며 기병이시여!” 그는 이어 엘리야에게서 떨어진 겉옷으로 강물을 치면서 마침내 하느님의 응답을 받아냄으로 명실공히 엘리야의 자랑스러운 후계자임을 확인시킵니다.
“주 엘리야의 하느님께서는 어디에 계신가?” 하고 엘리사가 말하며, 물을 치니 물이 이쪽저쪽으로 갈라지면서 엘리사가 강을 건너니 이제 엘리야가 떠난 자리에서 이제부터 엘리사가 새역사를 시작합니다.
떠나야 할 때 잘 떠나는 일은, 특히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이라면 얼마나 아름다운 선물같은 죽음이겠는지요! 말그대로 엘리야의 승천처럼 영적승리의 기쁨의 축제같은 죽음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축제같은 떠남의 여정을, 마지막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지요?
오늘 복음이 답을 줍니다. 하느님 중심의 수행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자유로운 삶이요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는 축제같은 멋잔 삶이겠습니다. 바로 모든 수행을 오늘 복음의 참된 기도, 참된 자선, 참된 단식의 영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과시욕의 허영과 교만의 위선적 삶에서 벗어난 철저히 숨겨진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이웃에 자기에게 활짝 열린 사랑의 삶이요, 참으로 내적자유와 평화의 삶이요, 그대로 진리체현의 삶입니다.
이런 숨겨진 삶에서 샘솟는 맑은 기쁨, 참된 행복입니다. 다음 한마디 주님의 약속이 큰 위안이요 힘이 됩니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다산의 다음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사랑과 진실, 겸손한 인생을 뜻할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성실함이 비범한 인생의 조건이다.”
특히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기념하는 성 로무알도 아빠스가 이런 인물입니다. 평범의 비범을 살았던 사랑과 진실, 겸손과 지혜의 은수자 성 로무알도입니다. 951년경 출생한 로무알도는 972년경 베네딕도 수도원에 입회하여 생활하다가 아빠스의 허락하에 마리노라는 수도승과 함께 고독한 삶중에 스승과 제자라는 동방의 모델에 따라 살고자 수도원밖 라벤나 근교에서 공동체를 시작합니다.
당시 10-11세기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부유와 세속화로 타락한 획일적 공동생활에 환멸을 느낀 많은 수도자들이 은수생활쪽으로 향하던 시기였고 이의 대표적 수도회가 까말돌리회와 카르투시오회입니다. 언제나 수도회 개혁과 쇄신은 부유에서 가난으로, 세속화에서 고독으로의 전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까말돌리 수도원은 약 1023년경 성 로무알도가 설립한 마지막 공동체입니다. 로무알도의 까말돌리 수도회 영성의 특징은 은수적 관상과 사도적 활동이 절묘하게 조화된 관상적이며 수도승적이고 베네딕도회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답게 사는 것은 참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떠남의 여정의 궁극의 목적지는 하느님이기에, 하느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기에,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충실할 때 저절로 자발적 홀가분한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도 가능하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사랑의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시편31;24ㄱ,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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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칭찬 결핍증?>
“네가 자선을 베풀 때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칭찬받으려고 선행하지 말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악령이나 세상은 칭찬을 위해 선행하라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칭찬받으려고 선행하는 것이 왜 나쁘다고 말씀하실까요?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말입니다.
우선 선행하는 것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고, 제 생각에 칭찬받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니며, 다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나쁜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칭찬받으려는 것은 왜 나쁠까요? 그것은 칭찬받아야 행복한데 야단맞으면 괴롭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칭찬받으려는 것이 더 나쁜 이유는 그것이 칭찬 결핍증 더 나아가 애정 결핍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애정 결핍증의 사람은 늘 애정의 결핍을 느낄 뿐 아니라 인정과 칭찬도 고파합니다.
그렇습니다. 애정 결핍증은 사랑을 받아도 받아도 바다처럼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름다운 갈망이 아니라 지옥 같은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칭찬을 받아 행복하려고 하지 말고, 칭찬을 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이유입니다. 사람의 칭찬이 하느님의 상을 가로막기 때문이고, 이 세상 행복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가로막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저의 통탄할 가련함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아직도 바랍니다.
칭찬이 고프지는 않아도 아직도 바라기는 한다는 말입니다. 칭찬이 귓전을 울릴 때 사탕이 달콤하게 하듯 달콤한 것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주실 상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뿌리치지 못합니다.
더 통탄할 가련함은 사람들의 비난이나 모욕을 이것이 참을 수 없게 하고, 비난이나 모욕을 받을 때 그것을 주님 때문에 받지 못하게 하는 점입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하니 비난이나 모욕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지금 칭찬의 달콤함을 의지적으로 물리치려고 하는 수준이고, 그래서 저를 칭찬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마귀라고 하며 물리치려 합니다. 멀쩡한 사람을 마귀로 만들고 고마운 사람을 마귀라고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칭찬하는 사람이 마귀가 아니라 그의 칭찬을 하느님 상 대신 받고 싶어 하는 제가 육의 영을 지닌 자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저입니다.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신성한 두려움과 지혜와 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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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올바른 구원행위!'>
오늘 복음(마태 6,1-6.16-18)은 '올바른 자선'과 '올바른 기도'와 '올바른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구원행위'입니다. 이 구원행위를 지금 여기에서 할 때 이렇게 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라."(마태 6,3-4ㄱ)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7-18ㄴ)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ㄴ.6ㄷ.18ㄷ)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내가 한 일을 드러내고 싶고, 자랑도 하고 싶고, 너로부터 인정받고 싶기도 한 마음이 우리의 보편마음인데, 내가 하는 모든 구원행위들을 드러내지 말고 감추라고 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ㄴ)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2열왕 2,1.6-14)는 위대한 예언자인 엘리야의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실어 하늘로 들어 올리실 때였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걸어가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그러자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ㄱ.11)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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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82KGYm_0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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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3)
쥐었던 손을
놓아야
기도가 되고
자선이 되고
단식이 됩니다.
오른손이 왼손을
씻어주고 왼손이
오른손을
데리고 갑니다.
오른손도 왼손도
하느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
돌려주어야
하느님의 길을
잃지 않습니다.
왼손도
오른손도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른손이
왼손이 하는
선행을
우리가
묶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야
울게 되는
진짜 사랑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않는
것이며
드러내지 않기에
하느님께
멀어지지 않습니다.
기꺼이 하느님께
시간과 마음과
사랑을 바칩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공기를 호흡합니다.
갚아드릴 길 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사랑입니다.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요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팔며 살았습니다.
오른손과
왼손 사이에는
속죄의 눈물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봉사해야
할지를 주님께서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위한 봉사이며
사랑입니다.
기도도 단식도
자선도
하느님을 향한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아십니다.
오른손도 왼손도
하느님을 향하는
기도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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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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