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포기선(凉飇弃扇)
찬 바람이 불면 부채는 버려진다는 뜻으로,
가을철의 부채는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자나 철이 지나서
쓸모없이 된 물건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凉 : 서늘할 양
飇 : 폭풍 포
弃 : 버릴 기
扇 : 부채 선
지금은 한여름 더위가 닥치면 문명의 산물인 에어컨을 켜고
손 선풍기까지 들고 다니지만,
옛날에는 부채가 대세였다.
하여 여름이면 사람들은 손부채(합환선 合歡扇)
하나씩 들고 있었다.
지금도 여름이면 곳곳에서 손부채를 선물로 주기도 한다.
부채는 옛날부터 매우 주요한 더위 퇴치의 수단이었으며
아름다운 공예품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애지중지(愛之重之)하던 부채도
가을 찬 바람이 불면 손에서 멀어지고 쓸모를 잃어버리게 된다
(凉飇弃扇 양포기선)
그것을 흔히 가을 부채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가을부채(秋扇子 추선자)는
곧 양포기선(凉飇弃扇)이다.
다시 말해서 가을 부채는 버려지는 부채가 된다.
전한의 12대 황제 성제(成帝)는
효성황제(孝成皇帝) 유오(劉驁)였다.
성제 때 반첩여(班婕妤)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그녀는 한때 성제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랑도 유한한 것이었다.
뒷날 반첩여는 성제의 사랑을 잃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죽었다.
반첩여는 현숙한 후궁이었다.
그녀는 성제가 황제에 오른 직후 궁녀로 입궁하여
소사(少使)에 머물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첩여(婕妤)로 책봉되었다.
첩여는 후궁 중 소의(昭儀) 다음의 2번째 품계로
상당히 높은 품계(비빈들의 품계는 황후를 제외하고
11단계가 있었는데 가장 낮은 11등급은 소사이고
최고등급은 소의(昭儀)로
첩여는 2번째 품계)인지라 상경과
열후와 같은 작록을 받았다.
반첨여가 단번에 9단계를 뛰어넘은 것을 보면
성제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성제는 재위 기간 부평후 장방의 농단에 가려져
황제로서의 실권이 크게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재위 기간 거의 주색에만 빠져 있었다.
그러나 반첩여는 그런 황제를 늘 현숙하게 보좌하였다.
성제는 궁원을 다닐 때도 항상 호화로운
능라장막(綾羅帳幕: 비단장막)을 치고
안에는 비단 요를 깐 연(수레, 輦)을 타고 다녔는데
수레 앞에는 두 사람이 뛰면서 수레를 인도했다.
황후나 비빈이 수레를 탈 때는 한 사람이 끄는
수레에 태워 뒤를 따르게 했다.
성제의 연(輦)은 황제 외에
겨우 한 사람만 더 태울 수 있었다.
성제는 반첩여와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으며,
나들이 때마다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수레가 작았다.
하여 특명을 내려 더 큰 수레를 제작하라 했다.
이에 반첩여는 성제에게 이렇게 고하며 만류했다.
"제가 옛부터 전해오는 그림이나 서적을 보았는데,
성군(聖君)은 모두 명신(名臣)을 측근에 두었고
하상주(夏商周)의 마지막 임금들인
걸왕(桀王), 주왕(紂王), 주유왕(周幽王) 등은
비빈들을 곁에 두고 총애했습니다.
비빈들을 곁에 둔 왕들은 나라를 망치고
자신도 죽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폐하의 수레를 함께 타고 출입을 한다면
그들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데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해 주십시오."
성제는 반첩여의 이런 만류에 감동하여 생각을 접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왕태후는 매우 기뻐하며
좌우의 측근들에게 반첩여를 번희(樊姬)에 비유하며
"옛날에는 번희(樊姬)가 있고
지금은 반첩여가 있도다"라고 극찬했다.
번희는 춘추 때 초장왕의 부인으로
현명한 내조로 초장왕이 패자가 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반쳡여는 성제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 모두 죽었다.
반첩여는 성제의 총애를 받는 제1의 후궁이었다.
하지만 조비연과 그 여동생이 후비가
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조비연 형제는 궁에서 심부름하던
한낱 궁비(宮婢)의 신분이었지만 요염한 몸매와
넘치는 애교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후궁이 되었다.
두 형제는 놀랍게도 황제의 눈에 들어
동생은 소의(昭儀), 언니는 첩여(婕妤)라는
1, 2위의 작위를 받고 사랑을 독차지했다.
성제 3년 때였다. 후궁에 갑자기 벼락이 떨어졌다.
이 사건을 두고 소문이 흉흉했다.
성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반첩여가
허황후와 짜고 후궁에서 황제의 사랑을 받는
여인들을 저주하고 황제를 욕하였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반첩여와 허황후는 하옥되었다.
이 소문은 허황후와 반첨여를 매우 질투하던
조비연 형제가 조작한 사건이었다.
재판에서 허황후와 반첨여는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
황제는 반첩여의 착한 마음에 감동되어
황금 백 닢을 주고 후궁으로 들게 했다.
그러나 허황후는 건시(建時) 하평(河平) 연대에
특별히 총애를 받았던 일이 화근이 되어 폐위되고
미인(美人)이란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반첩여는 후궁으로 돌아왔지만,
황제는 찾지 않고 주위엔 여인들의
무서운 질투와 시기만 난무하였다.
특히 조비연 형제의 질투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반첩여는 옛날 고조(高祖)의 애첩 척희(戚姬)가
여태후(呂太后)의 질투로 눈알이 뽑히고,
혀뿐 아니라 손목과 발목까지 모조리
잘린 것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반첩여는 하루빨리 질투의 도가니인
후궁을 떠나 살길을 찾고 싶었다.
궁리 끝에 장신궁(長信宮)에 있는
황태후 왕씨를 떠 올렸다.
황테후는 지난날 자신의 겸손하고
현숙한 자세를 칭찬하며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적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황태후는 반첩여를 반갑게 맞이하여
장신궁에 머물며 말벗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황태후의 말벗이 되는 일을 제외하면
늘 홀로 방에 앉아 거문고를 타거나
옛 서적을 뒤적거리는 일로 외로움을 달랬다.
반첩여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달랬다.
'그 옛날 황제와 함께 하였던
들놀이는 얼마나 즐거웠던가?
흰 비단으로 감은 몸에 금은보석이 촛불에
눈부시게 번쩍일 때 황제의 사랑스러운 눈길이
온몸을 어루만져 주지 않았던가?
그때 나는 요임금의 딸 아황(蛾皇), 여영(女英)
그리고 순임금의 아내처럼 부덕을 칭송받으며,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과
무왕의 어머니 태사(太姒)같은
부덕 높은 여인이고자 빌었지 않았나.
아, 슬프도다. 낳은 왕자마저 둘 다
젖먹이 때 저세상으로 가버렸으니,
황제의 사랑을 잃은 것이 그 탓일까?
황제의 사랑은 위첩여(衛捷伃)에게로
다시 조비연 형제에게로 가고,
임을 잃은 옥계(玉階)에는 이끼가 끼고
뜰에는 풀만 무성하구나.
금침에 엎드려 님의 버신 끝에 달린 구슬을 생각하며,
어전을 바라보면서 눈물로 지샌 밤이 얼마였던가?
돌아보니 인생만큼 무상한 것이 없으며,
은혜(恩惠)만큼 덧없는 것이 또 있을까?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