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의 절대성을 주장한 '성철 불교'는 전체주의 독재 정권에 종교적으로 조응한 것이었다."
캐나다 출신 예수회 신부로 성철 스님을 20년 동안 연구해 온 서강대 종교학과 서명원(徐明源·본명 베르나르 세네칼·60·사진) 교수가 성철 스님이 주창한 불교 해석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로 민주화된 오늘의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신간 '가야산 호랑이의 체취를 맡았다'(서강대 출판부)에 실린 영문 논문 '퇴옹 성철 선사의 유산'에서 한국 현대불교의 최대 논쟁인 '돈점(頓漸) 논쟁'의 정치적 배경을 분석하며 성철 스님의 불교를 민주화 이전 시대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철(1912~1993) 스님은 해인사 방장으로 추대된 1967년 '백일법문(百日法問)'을 통해 지눌(1158~ 1210) 스님의 '돈오점수'(頓悟漸修·단박에 깨친 후에도 계속 닦는다)가 잘못된 수행법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이후에도 '한국불교의 법맥(法脈)'(1976년), '선문정로(禪門正路)'(1981년) 등 저서를 통해 지눌 스님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조계종의 종조(宗祖) 중 한 명인 지눌 스님에 대한 과격한 부정은 거센 논란을 일으켰고 지금도 잠복해 있는 상태다.
서명원 교수는 퇴락한 불교의 중흥을 모색하던 성철 스님이 전통과의 과감한 단절을 택했고, 지눌 스님을 과녁으로 정했다고 봤다. 불교계의 사상적 쿠데타에 해당하는 이런 시도는 그보다 앞선 5·16 쿠데타와 조응 관계에 있다는 것이 서 교수의 분석이다. 성철 스님은 모처럼 안정된 박정희 정권 아래서 불교와 승려의 지위를 높이고, 해인사의 주도권을 강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흑백논리에 빠져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은 점도 성철 스님과 군사정권이 '구조적 공명'을 이루는 부분이라고 분석했다. 성철 스님이 한반도에는 깨달은 고승이 없다며 스승의 인가(認可)를 받지 않은 점도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박정희·전두환 정권과 유사한 점이라고 봤다. 서 교수는 성철 스님이 불교계가 신군부의 탄압을 받은 1980년 '10·27 법난(法難)'과 1987년 6월 항쟁 때 침묵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성철 스님 제자인 원택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은 "돈오돈수는 1940년 성철 스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 평생 견지했던 지론이고, 1950년대 파계사 성전암에서의 동구불출(洞口不出) 10년 시절에도 찾아오는 선객(禪客)에게 늘 돈오돈수를 말씀하셨다"며 "이같이 일관된 성철 스님의 사상이 어떻게 5·16 쿠데타와 맥락이 닿아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원택 스님은 또 "성철 스님이 10·27 법난이나 6월 항쟁 때 침묵했다고 하지만 스님께서는 '산승(山僧)은 산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견지하시면서 수행승의 기개를 높이신 것이지, 정권에 동조해서 침묵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1985년 한국에 온 서명원 신부는 1993년 성철 불교를 처음 접한 이래 그의 모든 저술을 파고들었고, 2004년 성철 스님에 대한 논문으로 프랑스 파리 7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
이선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