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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지나간 시대의 대위법적인 예술의 후계자였다. 그는 그의 마음의 열정과 인간애로 이 예술에 활력을 부여했다. 그는 바로크 음악에 정점을 이룬 인물이며 예술 역사상의 거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독일의 아이제나흐에서 한 세기 반에 걸쳐 그 지역 교회와 마을 악대에 음악가들을 배출해오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 살에 고아가 된 그는 오르드루프시에서 오르간 주자로 있던 큰 형 밑에서 자라났고 그에게서 가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처음부터 그는 그의 예술에 관한 모든 방면에 관해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후에 그 일에 대해 쓴 글에서 그는 “나는 열심히 공부해야만 했다.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은 성공하게 될 것이다.”라고 별로 정확하지 않은 말투로 술회했다. 1.아른슈타트 (1703-1707)와 뮬하우젠(1707-1708) 시대 18세에 아른슈타트의 어느 교회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면서 직업적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의 임명증서는 이 젊은이에게 “고귀하고 가장 인자하신 백작이며 상전에게 진실 되고, 성실하며, 순종할 것”과 “모든 일에서 하느님과 고위당국과 그대의 상관에게 훌륭한 종과 오르가니스트로 어울리게 처신하라”고 권하고 있다. 고위당국은 얼마 안 되어서 이 오르가니스트에게 “코랄을 괴상하게 변주하고 이상한 음들을 많이 섞어 넣었고 회중들이 그 때문에 현혹된 사실”을 꾸짖는 일이 생겼다. 얼마 후에는 교회 원로들이 “그가 무슨 권리로 근자에 낯선 처녀를 위층 성가대석에서 노래하게 하는가?”를 물어왔다. 이 처녀가 1707년 결혼한 그의 사촌 마리아 바바라였던 것 같다. 뮬하우젠의 어느 교회에서 2년간 봉직한 후 23세의 바하는 바이마르대공의 오르가니스트와 실내악 악장으로 최초의 중요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2.바이마르시대(1708-1717) 그는 공작의 궁정에서 9년간 보냈고 공작은 종교음악에 마음이 끌리는 편이므로 바하 자신의 경향과 일치하는 통치자 밑에서 근무했다. 바이마르 시대에 그는 오르간 연주의 대가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오르간 작품을 많이 작곡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공작이 그를 승진시켜주지 않는데 실망한 바하는 안할트 괴텐공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바하는 그의 상전에게 전직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공작은 노해서 이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섰다. 법정기록에 의하면 “11월 6일 전 악장이며 궁중 오르간 주자인 바하는 그의 면직문제를 지나치게 고집스럽게 강요함으로써 군 판사 유치장에 구류되었다가 12월2일 불리한 해고 통지를 받고 풀려 남”이라고 되어있다. 3.괴텐시대(1717-1723) 괴텐에서 바하는 유난히 실내악을 좋아하는 군주에 봉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봉직하던 6년 동안 그는 조곡, 협주곡, 여러 종류의 악기들의 소나타 그리고 많은 클라비어 음악을 써냈으며 브란덴부르크 백작에게 헌정된 6곡의 합주협주곡도 여기서 작곡되었다. 괴텐시대에 마리아 바바라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겪었다. 후에 안나 막달레나라는 젊은 여가수와 결혼했다. 그녀는 성실하고 이해가 깊은 반려자가 되었다. 그는 20명의 자녀(첫 결혼에서 7명, 두 번째 결혼에서 13명)중 반은 어려서 죽고, 아들 중 하나는 20대에 죽었고, 또 하나는 정신박약아였다. 네사람은 다음 세대의 지도적 작곡가들이 되었는데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알 필립 에마뉴엘은 마리아 바바라의 아들이었고, 안나의 아들들은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크리스찬이었다. 그가 전 독일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위의 하나인 라이프찌히 성 토마스 교회의 합창 지휘자로 임명된 것은 38세였다. 4.라이프찌히 시대 (1723-1750) 합창 지휘자는 그 도시의 중요한 교회들의 합창대원들을 훈련시키는 성 토마스 합창학교에서 가르쳤고(그는 음악 이외의 과목도 담당해야 했다), 음악감독, 작곡가, 그리고 토마스 교회의 성가 지휘자와 오르간 주자로서 근무했다. 그의 임명에 앞서 다른 몇 사람이 고려되었고, 그 중에는 사양한 당시의 보다 유명한 작곡가 텔레만이 들어 있었다. 시참사위원중 한 사람의 보고서에는 “최고의 인물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보다 못한 사람을 받아들여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라이프찌히시는 역대 합창지휘자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을 이런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라이프찌히에서 바하는 27년 동안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써냈다. 그의 심오한 내적 생활에서의 실마리는 오로지 그의 음악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의 생활은 외면상 평범한 것이었고 대가족의 뒷바라지, 건실한 친구들의 모임의 즐거움, 분주한 직업상의 잡일들, 그리고 유능한 오르간 주자 이상으로 그를 대하려하지 않는 시와 학교, 그리고 교회의 수 많은 공직자들과 끝없는 말다툼으로 지새는 것이었을 뿐이다. 시의 원로들은 바하의 종교음악의 연극성 때문에 감명을 받기는 했으나 한편 걱정도 했다. 더구나 모든 다른 관리들 처럼 비용을 아꼈고 바하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권리나 사례금을 잘라버리는데 서슴치 않았다. 그는 보다 나은 일에 돌릴 수도 있었을 시간과 감정을 소모해가면서 하나 하나의 문제를 놓고 완강히 싸웠다. 그는 여러 가지 불평에도 불구하고 계속 라이프찌히에 머물렀다. 그리고 해가 감에 따라 시참사회는 그들의 합창지휘자의 고집을 견디어내는데 익숙해졌다. 바하가 독일에서 제일 훌륭한 오르간 주자였기 때문이었다. 판에 박힌 듯한 그의 일상생활은 때때로 새 오르간 시험연주나 첫 연주를 요청 받았을 때 직업적인 여행으로 활기를 띠었다. 그의 마지막이며 가장 흥미 있는 원정은 1747년 그의 아들 카알 엠마뉴엘이 플룻주자인 군주의 반주자로 봉직하던 포츠담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 간 일이었다. 기억할 만한 저녁에 프리드리히 대왕은 흥분한 어조로 ”여러분, 늙은 바하가 여기 왔소“하고 그의 신하들에게 발표했다. 그는 바하를 인도하여 궁정 안을 다니며 당시 하프시코드를 대신하기 시작한 새 피아노를 보여 주었다. 바하의 요청으로 왕은 하나의 주제를 내어 주었고 그는 그 주제를 가지고 놀라운 푸가를 즉흥 연주했다. 그는 라이프찌히로 돌아간 후 왕의 주제를 더욱 정교하게 꾸미고 트리오 소나타를 첨가해서 음악의 헌정(The Musical Offering)을 ”전쟁의 기술, 평화의 학예 뿐 아니라 특히 음악의 기량이 만인의 감탄과 존경을 받기 합당하신 위대하시고 재능 많으신 군주“에게 보냈다. 평생에 걸쳐 그의 막대한 노고의댓가로 시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한 번 중풍으로 쓰러진 후 완전히 눈이 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작업으로 오르간을 위한 18곡의 코랄전주곡의 개작을 고집하였다. 죽어가기 전에 그의 사위에게 마지막으로 받아 쓰게 한 코랄 전주곡은 "나는 당신의 보좌 앞에 섰나이다(Vor deinen Thron tret ich hiermit )"라는 제목이었다. #감상곡 <토카타와 푸가 D단조 > Toccata and Fugue in D Minor https://www.youtube.com/watch?v=ho9rZjlsyY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