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정읍의 시기3동 정읍사 공원에는 기다림 끝에 죽어 돌이 된 정읍사 여인의 망부상이 있다.
정읍사 공원의 아름답게 조성된 산책로 밑으로 정읍시민들의 공익을 위한 시립도서관을 비롯한 정읍사예술회관, 정읍국악원, 시립 경음악단 등 지역의 문화예술을 익히고 표현하는 문화 공간들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정읍사 공원은 항상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정읍사 여인의 망부상과 영정을 모신 사우 주변에도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지만 정읍사가 정읍에,
그리고 우리나라 음악에 얼마나 어떻게 큰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정읍사의 또 다른 이름이 수제천 이라는 사실은 잘 설명되어 있지 않아 정읍사가 어떻게 변화되고 계승되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왜 정읍사를 수제천이라 하지 않고 정읍사를 수제천과 동일시하여 부르지 않는 것일까?
또 백제가요 정읍사는 작자, 연대 미상의 백제가요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백제가요 정읍사의 가사가 한글로 표기되었는지 또 다른 궁금증을 자아내게 된다.
흔히 정읍사의 가사가 태어난 것은 올해로 512년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어떻게 512년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읍사는 백제시대부터 정읍지역의 서민들에게 구전되어 전승된 가요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국내 유일의 백제가요이다.
이런 고전의 음악작품이 왜 512년 밖에 되지 않았을까?
이런 정읍사가 전하는 의문들은 정읍사 공원에서는 찾을 수 없다.
정읍사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정읍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제천을 통해 기록을 찾아야 한다.
수제천(壽齊天)이라는 원래 말뜻은 ‘영원히 하느님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잘 다스리신다.’라는 뜻이다.
결국 수제천의 함축된 의미는 ‘국가의 태평과 민족의 번영을 노래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제천이 우리나라 백과사전이나 국어 대사전에 수제천은 문묘나 종묘의 제례 때에 쓰이는 아악 계통의 음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표기는 우리지역의 꿈나무들인 청소년들이 자라 훌륭한 학자들이 되면 하루속히 잘못된 표기들을 고쳐줘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정읍사는 원래 백제시대 정읍지역 백성들이 불렀던 아름다운 지역 민요였다.
그러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며 전국의 민요로 불려지다 고려 초기인 중국 한나라 무제 때부터 이른바 악부(樂府 : 나중에는 궁중음악을 지칭하는 말로 됨)라는 관청에서 민간 가요를 수집하여 궁중에서 노래를 부르고 연주하게 됨에 따라 정읍사도 궁중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궁중에서 민간가요를 수집하여 이용했던 이유는 왕이 백성들과 더불어 즐기려는 정신과 민정을 알고 백성들의 심정을 파악 하려는 이유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서 정읍사가 고려 궁중에서나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연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민간에서 전승되어 궁중에까지 아름다운 곡으로 연주되던 정읍사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며 백제 때의 노래를 그대로 답습하며 연주, 가창되지 않고 궁중에서 필요에 따라 편곡되며 장중한 곡으로 탈바꿈 되게 된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편곡된 이유는 백성들의 노래는 빠르고 경박하여 궁중의 풍토에 맞는 느리고 장중한 음악으로 고쳐져 불려야만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는 이유 때문 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래의 백제가요 정읍사의 가사는 대부분 살리되 악곡은 전혀 다른 음악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때 정읍사 노래의 제목 역시 고상하게 변하여 수제천 이라고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런 수제천을 가리켜 향악, 아악, 속악 이라는 등 분분한 의견들이 많다.
수제천(정읍사)은 아악이 아니고 향악(鄕樂)이다.
향악은 각 지방에서 수집한 민간의 음악이라는 뜻이다.
속악(俗樂)이라는 말도 역시 세속에서 불렸던 노래를 궁중으로 가져온 음악이라는 뜻이라서 향악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여 수제천(정읍사)은 ‘조선 궁중에서 기악으로 연주되는 향악의 일종으로 정읍사 노래’라는 뜻이다.
이런 정읍사의 기록은 고려사 악지에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백제의 정읍을 중심으로 한 선운산곡, 무등산가, 방등산가, 정읍사가, 지리산가 등 백제가요 5곡이 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정읍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있게 된 이유는 정읍사가 그중 가장 뛰어난 음악 이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친 정읍사는 조선9대왕인 성종(1493년)의 왕명에 의해 악학궤범에 채록되며 하나의 악곡으로 정착되며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국악인 음악문화로 정착되며 전성기를 맞는다.
또한 이때 성종의 왕명으로 정읍사가 전하는 아름다운 구전속의 망부석을 신하들이 찾기에 이르러 “정읍사 망부상은 정읍현 북쪽 10리에 있다.”라는 기록을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남겼는가 하면 유자광을 비롯한 학자들에 의해 1759년 서명응이 만든 대악후보에 있던 정읍사에 처음으로 한글 가사가 붙게 된다.
이렇게 악학궤범에 수록된 기준으로(1493~2005) 정읍사의 가사는 2005년 현재기준으로 512년이 되었다고 전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악의 백미로 궁중에서 춤의 반주나 왕위계승, 왕이나 왕세자의 거동 시에 연주되고 경조사에 쓰이며 궁중의 아름다운 문화로 정착되었던 정읍사(수제천)는 계속 궁중에서 전승되지 못하고 곧 시련기를 맞게 된다.
고려시대 시중 이혼에 의해 무고정재 되었다는 이유로 문제의 구절인 ‘즌디를 듸디올세라’의 노랫말은 음란한 문구라는 해석으로 치부되며 중종(중종신록13년4월조)때에 이르러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 후 궁중에서는 불교음악에서 유래한 영산회상을 비롯한 오관산 등 새로운 곡들이 주로 연주 되며 수제천의 자리를 대신했지만 오늘날 정간보에 실린 수제천은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정악으로 지금도 국립국악원에서 최고의 악곡으로 대접 받는 연주곡이 되고 있는가 하면,
정읍에서도 1996년 민간주도로 출발했던 정읍문화원 수제천 연주단에 의해 10여 년 동안 매주 월요일 밤 시간대에 이 수제천이 연주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수제천이 1970년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개최되었던 제1회 세계 유네스코 아시아 전통음악 부문에서 최우수 악곡으로 선정되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런 수제천(정읍)이 세계가 인정하는 곡으로 알려지며 더욱 부각된 음악이 되었어도 아직도 정읍사공원 어디에도 정읍사와 수제천에 대한 이런 설명은 아직 표기되지 않고 있다.
정읍의 청소년들이 정읍사 공원에 위치한 망부상을 바라보며 정읍사 여인으로부터 출발해 이 나라에 음악을 만들고 전했던 정읍사의 여인으로 기억해,
그동안 어른들만의 전유물로 기억되던 백제여인의 지고지순 했던 사랑의 노래만이 아닌 전통음악을 만들어 전한 아름다운 자긍심의 정읍사여인으로 다시금 기억되는 망부상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의 참가치를 인정할 줄 모르고 특히 서양 사람들이 훌륭하다고해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한심한 작태를 수없이 보게 됩니다. 고질적인 사대주의 근성이 언제쯤 청산될지, 혹 남북통일이되면 가능할까요?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키큰 난쟁이님 잘계시죠?
^^~! 그럼요 ^^ 감사합니다.^^
정읍사여인의 고결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봄이 어떠할런지....이시대에 꼭 필요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리 스스로 우리 것의 참가치를 인정할 줄 모르고 특히 서양 사람들이 훌륭하다고해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한심한 작태를 수없이 보게 됩니다. 고질적인 사대주의 근성이 언제쯤 청산될지, 혹 남북통일이되면 가능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