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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2.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이장희 추천 0 조회 129 15.11.13 22: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문운이 왕성하기는 세종시대이고 그 뒤를 이은 세조, 성종 시대에도 문운은 계속 지속되었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활동한 문인과 학자들의 활약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시에 이들은 사상과 처세의 동이에 따라 파벌이 조성되었던 것도 이 시대의 일이었다.
먼저 훈구파는 조선 개국이래 조정에 출사해 온 이들로서 특히 세조의 등극에 협조한 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권근의 학파에 속하는 이들이 많았고, 경기 지역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국가에 출사하였다. 이들은 해박한 지식을 위주로 하며 특히 전례와 사장에 능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 주도하는 관찬사업에 대부분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정인지(鄭麟趾), 어효첨, 최항(崔恒), 양성지, 권람, 신숙주(申叔舟), 서거정(徐居正), 성현, 강희안, 이극배 등이다. 이들은 경세의 학문에 밝아 개국의 뒤를 이은 국가 질서의 안정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사림파의 중심인물은 길재-김숙자의 학문을 계승한 김종직인데, 따라서 사림파는 영남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김종직은 성종의 숭유책에 따라 관계에 진출하였고, 그를 따라 영남 출신 사림들이 많았다. 김종직의 문도는 김굉필, 정여창을 제외하면 시문을 위주로 하는 문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상이 높고 언론도 강직하여 훈구파와의 반목, 갈등이 심해져 갔다. 연산군으로부터 명종의 치세에까지 걸쳐 있었던 4대 사화는 이러한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종직(1431~1492)은 호가 점필재(佔畢齋), 김숙자의 아들로서 영남의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을 통해 가학을 계승하였는데, 특히 시문을 잘 하였다. 세조 4년에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하였는데, 특히 경연관으로서 성종에게 특별한 예우를 받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저술을 많이 남겼으나, 실천궁행에 힘쓴 부친과는 달리 도학 상의 문자를 남긴 것이 없다. 뒷날 퇴계는 “김점필은 학문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종신사업이 단지 사화(문예) 상에만 있었던 것을 그 문집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비평한 바 있다. 뒷날 무오사회의 화근이 된 「조의제문(吊義帝文)」은 그의 작품이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 김일손이 사관이었을 때, 훈구파의 한 사람인 이극돈의 비리와 관련된 풍설을 사초에 기록하였고, 또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재하고 “종직이 일찍이 꿈에 감동하여 「조의제문」을 지어 충분(忠憤)한 뜻을 표하였다”라고 기재하였다. 이것이 무오사화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무오사화로 인하여 김일손 등 김종직을 따르던 사림파 수십 인이 처형되었고, 김종직은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다. 이것은 실제로 김종직의 문도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와 훈구파 간의 알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무오사화가 있은 지 6년 뒤에 갑자사화가 있었다. 이 해에는 정여창, 김굉필 등 김종직의 문도 가운데 겨우 살아남았던 이들이 다시 형벌을 받았다(정여창은 부관참시). 이 결과 선비들의 기운이 떨어져 출입이 적어지고, 학교는 쓸쓸해져 거리에 글 읽는 소리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김굉필(1454~1504)의 호는 한훤당(寒暄堂), 경상도 현풍 사람이다. 젊어서는 호탕하여 거리낌이 없었으나, 장성해서는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김종직이 『소학』을 가르치자, 이에 명심하고 실천에 힘썼다. 나이 50에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칭하였다. 사문의 흥기와 후생의 교도로 자기소임을 삼아 많은 제자를 길렀다. 그 학문은 시련을 위주로 하여 항상 『소학』, 『대학』을 외워 수신의 표본으로 삼았다.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 이장곤(李長坤) 등이 모두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무오사화 때에 희천으로 정배되었고, 뒤에 순천에 이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에 극형을 받았다. 광해군 때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 조광조의 도학정치
연산군을 폐위시킨 반정신들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즉위 후에 연산군의 모든 패정을 혁신하였다. 학궁을 수리하고 다시 박사를 두었고 다시 경연을 개설하였다. 지난날 화를 당한 사람들을 신원하는 한편, 문치에 전심하여 유학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하여 수기치인의 학문을 계발하고 교화사업을 펴자, 사림들이 다시 등장하였다. 이때의 중심인물이 김굉필의 문인 조광조이고, 그가 지향한 것이 도학정치였다. 도학이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로써, 수기치인의 유교적 이념에 근거한 행도수교(行道垂敎)의 실천학문을 말한다.
조광조(1482~1519)는 한양 사람으로 호는 정암(靜庵)이다. 젊어서 김굉필에게 배워,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조광조는 체험공부에 치중하고 사장에는 힘쓰지 않았다. 1515년에 알성시에 급제하고 홍문관 학사가 되었다. 임금의 지우를 받아 그 3년 뒤에는 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광조와 그 동지들은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의 도학정신은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라는 말속에 압축되어 있다. 조광조는 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가 바로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경연석상에서 항상 임금이 솔선하여 수기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 실현 방법으로 임금이 마음을 밝히는 격물ㆍ치지ㆍ성의ㆍ정심의 공을 이루어서 군자ㆍ소인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조광조의 주장에 동조한 신진사류들은 전래의 숙폐를 개혁하고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실현코자 한 시책을 열거하면, 소격서(昭格署)의 혁파, 현량과의 설시, 선유의 표창, 위훈의 삭제 등이고, 아울러 백성들의 교화에도 마음을 써, 열읍 향교 교육에 『소학』을 필수적으로 권장하였다.
조광조 등의 혁신적 개혁안은 기성 훈구대신들의 배척을 받아 급기야 ‘조광조 등이 붕당을 만들어 조정을 그르친다.’는 무고를 받고 조광조와 그 추종자들이 모두 죄를 받고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이다.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뒷날 선조 때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해군 때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광조를 위시한 당시 기묘명현들은 대부분 30대의 청년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사화에 희생되었는데, 김안국ㆍ김정국 형제는 파직은 되었지만 유배되는 화는 입지 않았다. 김안국은 여주에 물러나 지내면서 각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언적과 이황도 서울을 왕래하는 중에 여주의 김안국을 찾아가 문학한 일도 있었다. 「천명도설」을 지은 정지운도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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