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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해서여진(1). (2) / 만주족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123 16.01.04 21: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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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통권 030호 | 사람과 글 人ㆍ文

 

 

 

해서여진(1) 훌룬에서 울라로

 

이훈

 

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청조의 만주지역에 대한 시각과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청대 건륭기 만주족의 根本之地 만들기」(논문), 『만주족의 청제국』(공역)이 있다.

 

 

지도. 17세기 요동과 만주지역

 

 

누르하치(1559?-1626)의 건주여진이 여진세계를 통일한 것은 해서여진의 강력함을 고려하면 의외의 결과였다. 해서여진은 울라· 하다· 여허· 호이파 4개의 초기국가(部. aiman 혹은 gurun)로 나뉘어 있었지만, 누르하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건주여진보다 경제력와 무력의 면에서 우위를 점해왔었다. 특히 하다의 수장인 완(wan. 王台. ?-1582)은 여진 부족의 수장을 지칭하는 ‘버일러’ 칭호를 넘어서 여진 최초로 ‘한’(han)을 칭했고, 그의 통치시기에 하다는 해서여진 뿐만 아니라 건주여진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

 

누르하치는 강자인 해서여진을 상대로 건주여진을 존속시키기 위해 외교전과 무력전에 진력해야했다. 다시 말해 해서여진은 건주여진이 여진을 통일하기 전까지 여진 세계의 주축이었다. 이러한 해서여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는 건주여진처럼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여진을 통일하고 청제국으로 발전시킨 주역이 건주여진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관심이 그에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해서여진이 건주여진에게 멸망당하면서 자신들의 역사를 서술하여 후세에 남길 기회를 잃어버려서 해서여진에 관한 사료가 영성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래 울라의 마지막 버일러 부잔타이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던 족보와 조상의 계보도가 발견되고, 여허나라씨 족보의 존재가 알려지는 등 새로운 사료의 발굴과 연구자들의 주목에 힘입어 해서여진의 역사가 종전보다는 주목을 받고 선명해지고 있다.

 

원이 중원에서 축출되고 몽고의 영향력이 축소된 후에도 여진족은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수많은 부족과 씨족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신생국가 명은 건국 이후 수십년간에 걸쳐 차례로 여진족을 회유하고 복속시켜 나아갔다. 복속한 여진족에게는 명의 군제단위인 衛와 所를 설치했으며, 여진 부족장에게는 명의 관직을 수여하고 교역권을 부여함으로써 명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명은 여진족을 크게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구분해서 지칭했다. 그 가운데 해서여진은 16세기경 울라江· 하다江· 여허江· 호이파江 연안에 각각의 강 이름을 집단의 이름으로 하는 네 개의 초기국가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들이 네 강의 유역에서 정주하기 이전에 그들의 본래 거주지는 그보다 북동쪽의 훌룬강[忽喇溫江. 현재 黑龍江省 呼蘭河] 유역이었다. 명대에 해서 4부를 훌룬(h?lun. 扈倫) 4부라고도 칭한 이유는, 그들의 최초 거주지가 훌룬강 유역이었고 그들이 그곳에 세운 초기국가의 명칭이 훌룬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명이 훌룬강과 그 인근 송화강 하류역에 거주하는 잡다한 여진족들을 통칭하여 ‘하이시[海西]’여진이라고도 부른 이유는 ‘하이시’가 훌룬강의 본류인 송화강의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훌룬강 유역에 거주하던 시기에, 혹은 송화강 만곡부를 거쳐 더 남쪽으로 이주한 후에도 명은 이들을 훌룬(扈倫, 忽喇溫)이나 海西, 海西女眞이라고 통칭했다. 조선은 이들을 훌룬강 연안에 거주하는 우디거 부족이라는 의미의 ‘훌룬 우디거’[忽剌溫兀狄哈, 火剌溫兀狄哈]라고 불렀다.

 

훌룬강 연안에 거주한 다양한 집단의 해서여진 가운데 훗날 울라와 하다를 건국하는 일족의 시조는 나치불루(nacibulu. 納齊卜祿. 1367?-1427?)였다. 나치불루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뀌는 시기를 살았던 인물로, 훌룬강 일대에서 15세기 초기에 상당히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고 그 초기국가를 훌룬이라고 칭했다.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그의 후손 가문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나치불루는 金代 完顔씨의 후손이고 할아버지부터 시버족 사이에서 함께 거주했으며 대대로 시버의 구왈갸씨와 혼인관계를 형성했다. 그는 시버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훌룬국을 칭했다.

후손 가문의 기록인 『烏拉哈薩虎貝勒後輩?冊』에서 그는 “倭羅孫, 那哈拉, 大?發, 莫勒根, 巴壓, 納拉氏, 納齊布祿”으로 불리고 있다. 倭羅孫(h?lun)은 ‘훌룬’의 음역이고, 那哈拉(na hala)의 na는 수장, hala는 씨족 혹은 姓의 의미이며, 大?發(da mafa)는 ‘大始祖’의 의미이다. 莫勒根(mergen)은 용사 혹은 名射手의 의미이고, 巴壓(bayan)은 富者 혹은 貴人의 의미이다. 전칭을 해석하면 “훌룬국의 태조 명사수 귀인 나라씨 나치불루”이다. 일설에는 그가 훌룬국을 세운 곳이 현재 吉林市의 울라가[烏拉街] 일대, 즉 훗날 울라국이 건립된 지역이라고 하지만, 나치불루의 후손들이 15세기를 거치며 남쪽으로 이동하여 울라 일대에 자리잡은 사실을 고려하면 나치불루 시기에 훌룬국의 영역은 현재 吉林市 일대가 아니고 그보다 동북쪽의 훌룬강 연안이었다. 나치불루의 활동 시기인 1406년(영락4) 명은 훌룬강 유역에 塔山衛를 설치했고 塔剌赤를 탑산위의 指揮同知에 임명했다.塔剌赤라는 인물은 나치불루와는 다른 자로 생각된다. 탑산위와 훌룬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치불루의 증손자인 수허터를 언급하는 부분에서 설명하겠다.

 

나치불루의 후손의 계보를 청대의 문헌인 『淸太祖武皇帝實錄』, 『滿洲實錄』(Manju i yargiyan i kooli), 『八旗滿洲氏族通譜』(Jak?n g?sai Manjusai muk?n hala be uheri ejehe bithe) 등에서 전하고 있는데, 각각의 계보에 약간의 상이점이 있다. 나치불루의 후손, 즉 울라와 하다의 수장 일족의 가장 상세한 계보는 아마도 근래 발견된 <烏拉哈薩虎貝勒後輩?冊>(ula의 hash? beile의 후손의 문서)일 것이다. 이 계보를 참고하고 수장의 계승자에 초점을 맞추어 후손들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나치불루를 계승하여 훌룬의 수장이 된 자는 그의 아들 도르호치(dorhoci. 多爾和齊)였다. 현재 그의 후손 가문의 기록에서는, 도르호치가 1천 여里에 달하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훌룬국을 경영했고, 그 영역 내의 嘔罕河衛, 肥河衛, 兀者衛, 弗提衛, 塔魯木衛를 연맹세력으로 포괄하는 연맹의 수장이자 훌룬국의 국왕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강력한 국가가 명이나 조선 측의 기록에 부재한 것으로 보아, 이 가전기록은 과장이 섞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만주실록』 등의 청대 기록에서 이 시기의 훌룬을 h?lun gurun(훌룬國)이라고 표현했고, 도르호치가 ‘主人’이라는 의미어 여진어 ‘샹갼(?anggiyan. 商堅, 上江)’을 호칭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주위의 많은 해서여진 부족들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구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르호치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장남 갸마카(giyamaka, 嘉瑪喀)가 훌룬의 통치자 지위를 계승했다. 갸마카는 명의 기록에 加木哈이라고 기록된 인물로, 명에 의해 兀者前衛의 指揮에 임명되었다. 갸마카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 둘기(dulgi. 都爾機. ?-1493)가 훌룬의 수장 지위를 계승했다. 둘기는 『명실록』에 都里吉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成化 연간(1464-1487)에 명에 의해 兀者前衛 都督에 임명되었다. 갸마카와 그의 아들 둘기 시대에 훌룬은 급속히 쇠퇴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몽고의 침입 때문이었다.

 

15세기 초기부터 해서여진은 눈강 유역에서 거주하던 몽고 우량카이로부터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후 1430년대 초기에 서몽고 오이라트는 세력이 급팽창하면서 동몽고 타타르의 아루타이(?-1434)를 공격했고, 오이라트에 밀린 아루타이의 세력은 동쪽으로 훌룬강 유역의 해서여진을 압박했다.

아루타이의 침입 이후에도 해서여진에 대한 몽고의 침략은 지속되었다. 1430년대 중기부터 1440년대 중기까지 몽고 우량카이 3衛는 지속적으로 해서여진을 공격했다. 1447년 우량카이 3위는 오이라트에게 참패를 당하고 세력이 위축되었지만, 그 후에도 해서여진은 몽고의 공격과 약탈을 당해야했다. 1450년부터 1451년까지 동몽고의 톡토부카 칸은 해서여진을 공격했고, 이때 해서여진의 수많은 지휘자들이 피살되었다. 여러 부류의 몽고에 의해 공격을 당할 때마다 해서여진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

 

15세기 후기부터 둘기가 이끄는 훌룬(올자전위)은 세력이 위축되었고, 거주지역도 훌룬강 유역을 떠나 송화강 만곡부 지역으로 이동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훌룬이라는 명칭을 쓰지도 않은 것 같다. 16세기 초기부터는 둘기의 동생인 수허터(suhete, suhede, 速黑?, 蘇赫德, 舒和德)가 이끄는 탑산전위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해서여진이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태어난 탑산전위는 그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탑산좌위와 위치도 달라졌다. 탑산좌위의 위치는 훌룬강의 중상류 남쪽에서 현재 依蘭縣의 서북지역 일대였다. 그러나 이들이 15세기 중후반기를 거치며 남쪽으로 이동함으로써 16세기 초에 새로 만들어진 탑산전위의 위치는 송화강의 만곡부인 현재 吉林省 夫餘와 農安 일대의 탑산 남쪽이었다. 탑산좌위에서 탑산전위로 이름이 바뀐 것도 그 위치가 바뀐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연구자들은 울라와 하다의 기원이 1406년 설치된 탑산위 혹은 1446년(正統11)에 탑산위에서 분리되어 설치된 塔山左衛에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수허터가 1502년경 명에 입조하여 塔山前衛 都督에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수허터가 탑산전위의 수장임을 근거로 연구자들은 수허터의 조상들, 즉 나치불루의 후손들이 탑산위와 탑산좌위의 수장들이었으리라 추정했다. 그러나 수허터가 탑산전위의 수장인 사실이 그의 조상들이 탑산위와 탑산좌위의 수장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탑산위의 지휘동지 塔剌赤와 나치불루의 관계도 명확치 않거니와, 1446년 탑산위에서 분리되어 신설된 탑산좌위의 都指揮 弗剌出(조선실록의 不剌吹) 또한 수허터의 조상 즉 나치불루의 후손들과 부합하지 않는다.

 

수허터 이전에 탑산좌위와 훌룬국의 수장 가문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1450년부터 1451년 사이에 해서여진이 몽고 톡토부카 칸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는 대참사를 겪은 때문이었다. 이때의 대참사로 인해 해서여진의 衛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兀者衛의 都督 剌塔, 肥河衛 都督 別里格 등 수백명의 해서여진 수장들이 살해당했다. 塔山左衛의 都指揮 불라출(弗喇出, ?-1450. 조선실록의 不喇吹)도 이때 피살되었고 탑산좌위는 붕괴되었다. 명은 탑산전위라는 새로운 위를 신설하여, 나치불루의 후손으로서 해서여진의 유력가문 출신인 수허터를 그 수장에 임명한 것이다. 수허터가 수장이 된 탑산전위는 탑산좌위의 수장 일족이 분화되어 설립한 것이 아니고, 탑산좌위가 몰락한 후 그 잔여세력을 흡수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衛였다.

다시 말해 나치불루와 그 후손들은 탑산위 혹은 탑산좌위의 수장 일족과 다른 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장의 가문과는 별개로 탑산전위가 탑산좌위의 부족민들을 흡수했고 그 세력이 훗날 울라로 발전한 측면에서 보면 울라국의 기원이 탑산좌위에 있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수허터는 송화강 만곡부에 자리잡고 송화강의 북쪽과 그 상류역의 부족들과 명의 교역로를 장악했다. 흑룡강 유역과 무단강(후르카강) 유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은 명의 開原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허터의 영역을 지나야했고 수허터는 교역로를 통제하여 이익을 획득했다. 이런 통제권은 수허터 자신이 교역로를 장악하고 세력을 보유한 것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명의 허가가 있어야만 했다.

명은 교역로의 통제권자에게 여진인이 명의 변경을 침입하거나 사람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를 통제해 줄 것을 요구했고, 수허터는 그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명의 신뢰와 교역로 통제권자의 자격을 획득했다. 일례로 수허투는 塔魯木衛 指揮僉事인 치르가니와 그의 아들 추쿵거가 명의 변경을 침입하자 교역을 차단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했다. 16세기 전기에 해서여진의 실질적인 수장은 둘기의 후손이 아니고 탑산전위의 都督인 수허터였다.

 

둘기가 1493년 사망한 후 그의 수장 지위는 셋째 아들인 구터이 주얀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둘기와 마찬가지로 구터이 주얀의 세력은 삼촌인 수허터의 세력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수허터가 사망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수허터가 사망한 후에 탑산전위의 수장 지위는 수허터의 동생 수이툰(suitun. 綏屯)의 아들인 커시너(kesine. 克錫納)에게로 이어졌다. 커시너는 수허터에게 발급된 명의 勅書를 가지고 명에 입조했기 때문에 명의 기록에서 커시너를 수허터로 기록했고, 이런 원인으로 현재 많은 연구에서 수허터를 커시너와 동일인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커시너는 수허터의 조카였다. 1531년(嘉靖10) 커시너는 開原의 邊外에서 준동하던 산적 猛克의 세력을 진압했다. 猛克은 開原 동쪽에서 명과 부족민의 교역을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한 커시너에게 명은 하사품을 내리고 그를 우대했다. 구터이 주얀은 사촌형인 커시너의 명성과 세력의 하위에 있었다.

 

1533년 탑산전위에 일대 격변이 발생했다. 커시너의 독주에 불만을 품은 그의 일족인 바다이 다르한(badai darhan. 巴岱達爾漢)이 커시너와 그의 장남 처처무(cecemu. 徹徹木)를 살해한 것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바다이 다르한은 탑산전위의 도독을 자임했으나 내부적으로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고 외부적으로 명은 교역을 중단시켰다. 1년 후 구터이 주얀은 군사를 동원하여 바다이 다르한을 공격했다. 바다이 다르한의 쿠데타는 성공한지 1년 후에 진압되었고 그는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향후 해서여진의 정권 지형이 바뀌고 하다국이 설립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이유는 커시너가 피살되면서 그의 직계 후손들이 이곳저곳으로 도주했고, 그들이 훗날 하다를 건립한 때문이었다. 바다이 다르한의 쿠데타로 인해 커시너의 직계 후손들만 도주한 것이 아니고, 구터이 주얀과 그의 세력도 훗날 울라국이 설립된 지역인 현재 길림시 일대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된다.

 

과거 훌룬국의 수장 지위는 구터이 주얀 이후 그의 아들 타이란(taran. 太蘭)에게 계승되었고, 그 후 타이란의 아들 부얀(buyan. 布?)으로 이어졌다. 울라국을 건국한 것은 부얀이었다. 그는 1561년에 울라강(송화강)의 연안 홍니(hongni. 洪尼, 洪尼勒. 현재 吉林市 烏拉街 일대)에 성과 궁궐을 축조하고 버일러를 자칭했다. 이후 울라국의 버일러 지위는 부얀의 아들 부간(bugan. 布干)을 거쳐, 부간의 아들 만타이(mantai. 滿泰)로 계승되었고, 만타이 사후에는 그의 동생 부잔타이(bujantai. 布占泰. ?-1618)로 이어졌다. 부잔타이는 울라국의 마지막 버일러였다. 부잔타이가 건주여진 누르하치와의 오랜 충돌에서 끝내 패배하고 1613년 여허로 망명함으로써, 훌룬으로부터 내려온 울라의 오랜 역사도 종식되었다.

 

 

1) ula(울라)의 hash? beile(부잔타이)의 후손들이 보존해 온 계보도인 <烏拉哈薩虎貝勒後輩?冊>(ula의 hash? beile의 후손의 문서)에 대해서는 아래 논문 참조. 叢佩遠· 張曉光, 「烏拉哈薩虎貝勒後輩?冊與滿文譜圖初探」, 『滿族?究』, 1986, 3期; 趙東升, 「關於《烏拉哈薩虎貝勒後輩?冊與滿文譜圖初探》的幾點補充說明」, 『滿族?究』, 1988, 3期. 해서여진에 대한 근래의 주목할만한 연구는 아래와 같다. 趙東升· 宋占榮, 『烏拉國簡史』, 永吉縣委史志辦公室, 1992; 尹鬱山· 趙東升, 『烏拉史略』, 吉林文史出版社, 1993: 趙東升, 『扈倫四部?究』, 吉林文史出版社, 2005.

흥미롭게도 해서여진의 역사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의 일부를 해서여진인의 후손들이 점하고 있다. 해서여진 울라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힘쓰고 있는 趙東升은 울라의 마지막 버일러 부잔타이의 후손이고, 여허나라氏의 족보를 정리하여 『葉赫那拉宗族譜』(2001)를 자비출판한 那世垣 등은 여허의 시조인 싱건 다르한의 19世孫임을 주장한다.

2) “女直野人頭目塔剌赤· 亦里伴哥等四十五人來朝, 置塔山衛, 以塔剌赤等爲指揮同知· 衛所?撫· 千百戶, 賜誥印· 冠帶· 襲衣及?幣有差.” 『明實錄』 永樂 4年 2月 己巳.

3) 우량카이 3위란 복여위(福餘衛. 몽고명 오지예트[Ojiyed. 烏齊葉特]), 태녕위(泰寧衛. 몽고명 옹리우드[Onglighud. 翁牛特]), 타안위(??衛. 몽고명 우량칸[Uriyangkhan. 兀良哈])를 가리킨다. 명에서는 명과 가장 가까운 남쪽의 우량칸의 이름을 따라 3위를 ‘우량카이 3위’(兀良哈三衛)라고 불렀지만, 몽골에서는 자신들에 가장 가까운 북쪽 오지예트의 이름을 따라 “山前의 6천 오지예트(?lge-in jirγuγan mingγan ?jiyed)”라고 불렀다.

 

 

 

 

2013년 11월 통권 031호 | 사람과 글 人ㆍ文

 

 

 

 

해서여진(2) 하사와 여허의 경쟁과 멸망 

 

하다의 건국은 훌룬국 내부에서 발생한 권력투쟁에서 비롯되었다. 1533년 훌룬국 탑산전위의 수장인 커시너와 그의 장남인 처처무가 일족인 바다이 다르한에게 피살되자, 홀룬국의 수장인 구터이 주얀은 일파를 이끌고 울라강 유역으로 도주했고, 커시너의 직계 가족들도 훌룬으로부터 각지로 도주해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은 훗날 처처무의 동생인 왕주 와일란(wangju waila, 王忠. ?-1552)과 처처무의 아들인 완(wan, 萬, 王台, ?-1582)이었다. 왕주 와일란은 훌룬의 일부를 이끌고 하다江(哈達河. 현재 遼寧省 西?縣 小?河) 유역으로 피신하여 치치하다라는 지역에 요새를 세우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하다국의 설립자였다. 그의 조카인 완은 시버족 영역인 수이하城(suiha hoton, 綏哈城. 현재 吉林市의 서쪽 25km의 大綏城)으로 도주했다. 그는 훗날 왕주 와일란을 계승하여 하다국을 최전성기로 이끈 자였다.

 

왕주 와일란은 하다강 유역에서 세력을 확대해서 하다국을 수립했다. 그가 자리잡은 하다강 유역의 치치하다는 명의 廣順關 동쪽 靖安堡(청대의 尙陽堡)의 변외로 70리 가량 떨어진 곳으로, 명과의 교역에서 요충지였다. 광순관은 開原의 동쪽에 설치된 관문이었고, 개원의 서쪽과 북쪽에 각각 설치된 新安關(현재 開原 서북쪽 20km 慶雲堡 雙樓台村) · ?北關(현재 開原市 威遠堡)와 함께 개원의 3대 관문이었다. 진북관이 개원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명에 의해 北關이라고 불린 반면, 광순관은 진북관보다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南關이라고 불렸다.

이 때문에 명은 광순관의 동쪽에 있는 하다를 南關이라고 부르고, 진북관의 동쪽에 있는 여허를 北關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왕주 와일란은 명과의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해 북쪽의 여허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왕주 와일란이 하다강 유역에서 하다국을 발전시켜가던 16세기 중기에 그 북쪽 여허강 유역으로 진입해있던 塔魯木衛도 여허로 불리며 성장하고 있었다.

 

 

 

 

 

 

여허는 해서여진의 다른 세 부인 울라, 하다, 호이파와는 건국자의 민족적 계통이 달랐다. 울라, 하다, 호이파의 시조는 여진인인데 반해, 여허의 시조인 싱건 다르한(singgen darhan, 星墾達爾漢/星根達爾漢)은 투머트라는 성을 가진 몽고인이었다. 『만주실록』과 『팔기만주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15세기 중기에 서쪽으로부터 훌룬강 유역의 장(jang, 璋) 지역으로 진입하여 나라(nara) 姓을 쓰는 집단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정착한 후 성을 나라로 바꾸었다. 싱건 다르한이 훌룬의 나라 성씨 집단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을 그가 자신이 이끈 몽고인으로 현지의 여진인을 대체한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이 기록은 싱건 다르한을 수장으로 하는 몽고인 집단이 훌룬의 나라 성씨 집단을 정복하고 절멸시킨 것이 아니라 양자가 제휴하여 혼성의 정권을 구성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싱건 다르한이 본래의 성인 투머트를 버리고 새로운 이주지의 토착 집단의 성씨인 나라를 사용한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싱건 다르한이 멸망시켰다는 훌룬의 나라 姓 집단은 塔魯木衛이거나 그 일파인 것으로 추정된다. 탑로목위는 훌룬국과 관련있는 塔山衛가 설치된 연도와 동일한 1406년(永樂4) 설치되었고, 打葉이 그 指揮에 임명되었다. 훌룬국의 시조 나치불루와 塔山衛의 指揮同知인 塔剌赤를 동일시하는 설이 있는 것처럼, 혹자는 여허의 시조 싱건 다르한과 탑로목위의 수장 打葉을 동일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싱건 다르한의 활동 시기는 15세기 중기로서 打葉의 활동 시기보다 뒤늦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싱건 다르한은 훌룬강 유역으로 진입해서 기존에 있던 탑로목위의 세력을 차츰 잠식해간 것으로 보인다.

 

몽고인 싱건 다르한이 수립한 여허의 전신 부족은 여진의 땅에 세워졌고 여진인과 혼융하여 해서여진의 일부가 되었지만 그 몽고적 속성은 계속되었다. 여허는 다른 해서여진이나 건주여진과 달리 몽고어와 여진어가 혼합된 언어를 사용했다. 여진의 다른 집단과 다른 여허 언어의 특이성은 먼 훗날 여허가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점에 대해 누르하치는 “여허와 우리는 다른 말을 쓰는 여진”(yehe, muse oci, encu gisun-i ju?en gurun kai)(『滿文老?』1, 太祖4)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여허는 몽고와의 연대 관계에 있어서도 여진의 다른 집단이 몽고와 가졌던 관계보다 더 긴밀함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몽고의 대칸이자 마지막 칸인 릭단 칸의 황후인 수타이(sutai. 蘇泰)는 여허의 마지막 버일러인 긴타이시의 손녀였다. 이러한 태생적 특이성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허는 해서여진 내에서 하다와 계속 충돌했다. 울라가 하다의 해서여진 내 수장 지위를 인정하고 하다와 평화로운 협력 관계를 유지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여허와 하다 두 국가는 훗날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세력이 급성장해서 그 외의 모든 여진 세력이 건주여진을 상대로 연합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16세기 말기까지 수시로 충돌했다.

 

싱건 다르한이 사망한 후 여허의 전신 부족의 수장 지위는 그의 아들인 시르커 밍가투(sirke miggatu. 席爾克明?圖)가 계승했고, 그 후에는 그의 아들 치르가니(cirgani. 齊爾?尼)가 계승했다. 치르가니는 1484년(成化20) 명으로부터 塔魯木衛 都指揮 지위를 인정받았다.

명 초기에 탑로목위의 수장이었던 打葉의 후손을 싱건 다르한의 후손이 대체한 것이다. 치르가니 시기인 15세기 후기부터 여허의 전신 부족인 탑로목위는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명의 開原의 북쪽 방면으로 상당히 접근했다. 이 이동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훌룬강 유역의 여진인들이 대거 남서쪽으로 이동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치르가니는 개원의 북쪽 지역에서 거주하면서 그들의 서쪽에 거주하는 여진인과 명의 교역을 가로막았다. 아마도 그는 교역로에 위치한 지리적 잇점을 살려서 명과 여진의 교역을 통제함으로써 이익을 획득하려고 의도했던 것 같다. 결국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조공로를 막았다는 이유로 명은 군대를 파견하여 치르가니를 공격하여 살해했다. 치르가니의 수장 지위를 계승한 것은 그의 아들 추쿵거(cukungge. 祝孔格/?孔格)였다.

 

추쿵거는 16세기 초에 부족을 이끌고 여허강(현재 상류는 冠河, 하류는 ?河) 일대로 진입해서 자리잡았다. 여허의 전신 부족은 싱건 다르한 시기부터 존립했지만 여허라는 이름의 초기국가가 나타난 것은 추쿵거 시기부터였다. 새로운 거주지인 여허강 유역은 종전보다 명의 변경에 더 근접한 곳이었다. 추쿵거는 명의 변경을 공격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명과의 관계가 호전된 것은 그가 1519년(正德14) 명으로부터 塔魯木衛 都指揮 지위를 인정받은 때부터였다. 명으로부터 관직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곧 명과 교역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했고, 명이 발급한 교역증명서인 勅書를 분배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또한 인접 집단들과 칙서를 탈취하기 위한 투쟁의 장으로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1551년 음력 2월 추쿵거는 하다의 왕주 와일란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왕주 와일란이 추쿵거를 공격한 주요한 원인은 칙서를 탈취하는 데 있었다.

 

명측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해서여진은 칙서 1000통, 건주여진은 칙서 500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서여진이 보유한 칙서 가운데 절반은 하다가, 절반은 여허가 보유했고, 울라와 호이파는 칙서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왕주 와일란은 추쿵거를 살해하고 그가 보유한 여허의 칙서를 강탈함으로써 해서여진의 모든 칙서를 차지했다. 왕주 와일란은 칙서를 탈취하여 각 부락의 무역권을 통제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훗날 그의 조카 완이 해서여진의 맹주를 너머 건주여진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왕주 와일란이 축적한 경제적 기반 덕이었다. 명과의 교역을 장악하고 교역증명서를 탈취하기 위한 전쟁은 여진을 분쟁 속으로 밀어넣었다. 추쿵거는 그 기나긴 칙서 쟁탈전의 초기 희생양이었다. 훗날 누르하치가 주변의 집단들을 공격하고 정복해 나아간 원인도 칙서를 강탈하기 위한 측면이 컸다. 누르하치는 1599년 하다를 멸망시키면서 하다가 보유한 칙서 360통을 확보했는데, 따지고보면 그 칙서의 일부는 원래 추쿵거가 보유했던 것이었다.

 

추쿵거가 사망한지 한 해 뒤인 1552년 왕주 와일란은 하다 내부의 반란에 의해 피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왕주 와일란의 아들 볼콘 셔진이 반란자를 제거하고 시버의 수이하성에 피신해있던 사촌 형인 완을 불러서 하다의 수장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반란자를 제거한 볼콘 셔진 자신이 부친의 지위를 계승하지 않고 사촌 형을 불러들여 버일러 지위를 계승시켰다는 점에서 이 기록의 내용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마도 하다의 내부 반란자들을 제거한 것은 볼콘 셔진을 옹위한 왕주 와일란의 측근들이었고, 그들이 주도하여 완을 데려와서 나이 어린 볼콘 셔진을 대신하여 왕주 와일란을 계승하도록 했을 것이다.

완은 하다를 여진세계 최강자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는 누르하치 이전에 여진의 통일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완은 해서여진 뿐만 아니라 건주여진과도 혼인을 통해 동맹을 체결해갔고, 동고 부와의 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건주여진에 군사를 원조함으로써 건주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누르하치의 셋째 할아버지인 소오창가의 아들 우타이는 완 한의 사위였다. 누르하치도 따지고 보면 완 한의 사위였다. 누르하치의 둘째 부인인 컨저가 완 한의 양녀였던 것이다. 훌룬국의 정통 계승자이지만 세력이 쇠퇴한 부얀이 울라국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도 완의 후원 덕이었다.

 

추쿵거의 죽음은 여허와 하다를 대대로 충돌하게 만들었다. 추쿵거의 여허 버일러 지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타이추(taicu. 太杵)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위해 1558년에 하다를 공격했다. 타이추에게 불행하게도 완이 통치하는 하다는 당시 전성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타이추는 하다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여허의 버일러가 2대째 하다에 의해 죽임당한 것이다. 타이추가 사망한 후 여허는 그의 조카 혹은 아들이라고도 전해지는 칭갸누(cinggiyanu. 淸佳?. -1584)와 양기누(yangginu. 楊吉?. -1584) 형제가 이끌게 되었다. 두 사람은 東城(현재 吉林省 葉赫?의 서쪽 1km)과 西城(東城의 서쪽 2km)을 구축하고 각자 버일러를 자칭하며 여허를 분할하여 통치했다. 여허는 두 지휘자의 통치하에 강력한 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칭갸누는 여동생인 온저 공주를 하다의 완 한과 결혼시키고, 양기누를 완 한의 딸과 결혼시킴으로써 대대로 하다와 충돌해 온 갈등의 역사를 종식시키고 평화 기조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 한의 강력한 세력 하에 일시 유지된 여진의 평화는 그의 죽음 이후 산산조각이 났다.

 

1582년 완 한이 사망한 후 하다를 맹주로 하는 훌룬 연맹은 붕괴했다. 완 한의 강력한 통제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1583년부터 1592년까지 10년간 여진 각지의 크고 작은 수장들이 일어났고 서로간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각 집단의 여진이 명의 변경을 침략하는 사건도 수시로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명은 요동총병관 李成梁(1526-1615)의 주장을 수용했다. 그의 주장은 여진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변경 침입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1583년부터 명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 해에 이성량은 건주여진의 수장 중 한명인 아타이 장긴(atai janggin 阿太章京)을 공격하여 그의 구러 城을 초토화시키고 그를 죽였다. 이 때 구러 성에 있던 아타이의 동생 아하이(ahai janggin 阿亥章京)의 부인은 누르하치의 큰아버지의 딸, 즉 사촌누이였다. 이 때문에 그녀를 구하러 간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아타이 일족과 함께 구러 성 안에서 명군에게 피살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누르하치가 명에 무력 저항을 시작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여허의 두 버일러 칭갸누와 양기누는 1584년 칙서를 배급하겠다는 이성량의 유인에 빠져 그와 회견하러 왔다가 開原城 밖 관제묘에서 피살당했다. 이어 1588년에 이성량은 여허 城을 공격하여 칭갸누와 양기누의 버일러 지위를 계승한 그들의 아들들인 부자이(bujai. 布齋)와 나림불루(narimbulu. 納林布錄)의 항복을 받았다.

 

이성량은 완 한이 사망한 후 발생한 하다 내부의 계승 분쟁에도 개입했다. 이성량은 완 한의 손자인 다이샨을 계승자로 지지하고 강력한 라이벌인 그의 삼촌 멍거불루를 공격했다. 멍거불루는 울라국 영역인 현재 吉林市 인근으로 도주했다. 또 다른 경쟁자인 다이샨의 삼촌 캉구리는 이성량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다이샨은 명과 이성량의 지지하에 하다의 버일러에 등극했다. 그는 1589년 울라를 제외한 해서여진 3개 부와 건주여진의 수장들을 소집하여 완 한을 계승한 盟主의 지위를 확립했다. 울라는 멍거불루를 지지했기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다이샨이 건주여진의 지지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두해 전인 1587년에 자신의 여동생인 아민 거거를 누르하치와 결혼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즉 양자 사이에 혼인동맹이 결성된 것이었다.

 

당시 혼인동맹은 반드시 일대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허의 버일러 나림불루는 1588년에 자신의 두 여동생을 각각 하다의 멍거불루와 건주의 누르하치에게 결혼시켰다. 그전에도 여진 각 집단의 수장 가문들이 혼인을 통해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지만, 완 한의 강력한 통제력이 사라지고 만인이 만인을 상대로 투쟁하는 혼란기가 도래한 이때에 혼인동맹은 더욱 중요해졌다. 한 집단이 다수의 집단을 상대로 전방위적인 혼인동맹을 강화해야했다. 또한 한 집단을 상대로 한번의 혼인을 하는 것만으로는 동맹의 확고한 결속력을 보장받기가 어려웠다. 훗날 누르하치는 울라의 마지막 버일러 부잔타이와 일족의 딸 셋을 혼인시켰다. 겹사돈을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겹겹사돈의 체결이 필요했다. 혼인동맹의 인플레이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다의 버일러 계승 집회가 있은 후 멍거불루는 울라의 지원 하에 하다로 돌아왔다. 울라만이 아니라 사실상 여허도 그전부터 다이샨보다 멍거불루를 지지하고 있었다. 여허의 나림불루의 여동생이 멍거불루와 혼인하여 양자가 동맹을 체결한 원인도 있지만, 그 이전에 멍거불루의 어머니인 온저가 여허의 전 버일러 양기누의 딸이었다. 1591년 여허의 버일러 부자이는 자신의 딸과 다이샨을 결혼시키겠다는 미끼로 다이샨을 여허로 오도록 유인한 후 암살했다. 멍거불루의 또 다른 경쟁자였던 캉구리는 이미 병사했기 때문에 이제 그의 경쟁자는 없었다. 멍거불루는 하다의 버일러에 올랐다. 그러나 하다는 계승 분쟁의 과정에서 타격을 입고 쇠퇴했다. 하다 내부에서 벌어진 계승 분쟁은 명, 여허, 울라 등 주위 모든 세력의 침입과 간섭을 초래했다. 그 가운데 여허는 하다 계승 분쟁의 최대 수혜자였다. 최종적으로 멍거불루를 하다의 버일러에 등극시킨 여허의 나림불루와 부자이 버일러는 멍거불루와 하다의 후원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 하다가 여허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1591년부터 여허는 해서여진의 盟主로 올라섰다.

 

외부적 환경도 여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여허의 세력이 확대되어 가던 1591년 이성량은 부패 등을 이유로 요동총병관 직위에서 해직되었다. 그의 해직과 함께 명의 對여진 정책은 강경에서 유화로 급선회했다.

명은 해서여진의 새로운 강자 여허를 인정하고 지지함으로써 여허를 통해 전 여진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울라는 하다의 수장 계승 문제에서 멍거불루를 지지하면서 여허와 의견이 일치해 있었다. 울라의 버일러 만타이는 다이샨의 하다 버일러 재위기에 하다의 외곽을 공격함으로써 멍거불루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왔었다. 울라는 멍거불루를 함께 지지해 온 여허를 굳이 적대할 필요와 역량이 없었다. 호이파는 내분으로 인해 외부의 분쟁에 개입할 여유가 없었다. 하다가 버일러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에 휩싸여 있는 동안, 호이파 또한 내부적으로 버일러 계승전을 벌이고 있었다. 호이파의 버일러 왕기누가 사망한 후 그의 손자 바인다리는 자신과 경쟁하던 숙부들 일곱 명을 모두 죽이고 버일러를 계승했다. 그러나 후유증이 심했다. 그의 계승에 반대하던 귀족들 다수가 여허로 망명한 것이다. 바인다리는 망명자들과 여허가 연합하여 자신을 공격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여허의 나림불루에 동조했다.

 

여허가 여진세계의 맹주로 등극하는 것을 위협할 만한 세력은 오직 누르하치의 건주여진 뿐이었다. 완 한의 사망 이후 여허와 건주여진 두 세력은 급성장했고 필연적으로 양자는 충돌했다. 여허의 버일러 나림불루는 건주여진을 공격하기 위해 해서여진 4부 뿐만 아니라 주셔리부와 너연부, 몽고 코르친과 시버, 구왈차까지 모두 아홉 개의 세력을 연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1593년 反건주여진 연합세력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건주여진을 총 공격했다. 이른바 九國之戰 혹은 구러山 일대가 주요 전장이었기 때문에 구러산 전투라고 불리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건주여진의 완승으로 종결되었다. 여허의 버일러 부자이는 전사했고, 울라의 버일러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는 포로가 되었다. 하다의 버일러 멍거불루와 코르친의 수장 밍간 등은 가까스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만주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전쟁에서 죽은 연합군 병사는 4천이었다.

해서여진의 주요 수장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의 병력을 동원하고 직접 참전한 이 전투에서 완패한 후 해서여진은 쇠퇴의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1597년 해서여진 4부는 건주여진과 화친을 결의했다. 이때 여허의 버일러 부양구(buyangg?. 布揚古)는 화친의 표시로 여동생을 누르하치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화친은 오래 가지 않았다. 1599년 건주여진의 공격으로 해서여진 가운데 하다가 가장 먼저 멸망했다. 하다의 마지막 버일러인 멍거불루는 생포되어 건주여진의 수도인 퍼알라에 끌려와 있다가, 누르하치의 婢妾과 사통하고 대신인 가가이 자르구치와 밀통하여 찬탈을 도모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1607년에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존재감이 약했던 호이파가 멸망당했다. 호이파의 바인다리 버일러는 방어를 위해 도성을 삼중으로 축성한 보람도 없이 누르하치의 공격을 맞아 패배했고 아들과 함께 살해당했다.

 

울라는 호이파가 멸망한 후에 6년을 더 버텼다. 부잔타이는 건주여진에 사로잡혀 3년간 포로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울라로 돌아간 후, 피살당한 형 만타이의 지위를 계승하여 버일러가 되었다. 그는 건주여진과 화친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하는 양면정책을 구사했다. 그러나 한번 기울어진 형세를 만회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건주여진은 하다와 호이파를 멸망시키면서 그 인민을 대거 흡수하여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져 있었다. 1608년에 부잔타이는 동해여진 와르카部 피오城(fio hoton. 현재 훈춘시 三家子滿族自治鄕 高麗城村)이 건주여진에 투항하자 피오성 주민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건주여진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두만강을 건너 조선의 종성 오갈암에서 벌어졌고 건주여진의 완승으로 종식되었다. 흔히 오갈암 전투라 불리는 이 전투는 조선 영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에 의해 전투의 참상과 경과가 자세히 관찰, 기록되어 조선실록에 전하고 있다.

조선실록에서 이때 건주여진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상대로 기록되어 있는 ‘忽喇溫’은 훌룬의 음역이며, 그 실체는 부잔타이가 이끈 울라의 군대였다. 조선실록에서 울라의 수장으로 기록한 何叱耳는 한 중국인 연구자의 의견처럼 조선이 부잔타이를 폄하하여 부른 卑稱이 아니고 부잔타이의 칭호인 하스후 버일러(hash? beile)의 하스후를 음역한 것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울라는 더 이상 저항할 동력을 상실했다. 1613년 건주여진의 공격으로 울라는 멸망했고, 부잔타이는 해서여진에서 마지막 남은 여허로 망명했다.

 

해서여진 후기의 맹주였던 여허는 해서여진 가운데 가장 오래까지 버티다가 1619년에 멸망했다. 몇 년간이나마 여허의 멸망을 막아주던 것은 명이었다. 그러나 명이 1619년 3월 10만이라는 대 병력을 동원하여 1616년부터 아이신 구룬(金國)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던 건주여진을 공격하고 그것이 철저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여허는 후원자를 상실했다. 여허의 후원자 명은 여허를 후원하기는 커녕 신흥 금나라 앞에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그해 가을 누르하치는 여허를 공격했고, 동성의 나림불루를 계승한 그의 긴타이시(gintaisi. 金台石)와 서성의 버일러 부양구는 피살되었다. 해서여진의 마지막 국가가 멸망한 것이다.

 

 

 

웹진 民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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