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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와 스리랑카 문화유적 탐방
일시:2020년 2월 3일 월요일~12일 수요일(9박 10일)
장소:남인도 코친, 알레피, 마두라이, 탄자부르, 폰디체리, 마말라푸람, 첸나이
스리랑카 콜롬보, 폴론나루와, 담불라, 시기리야, 캔디
2020년 2월 3일 월요일 인천 국제공항 제2 터미널 출발
* 인천 국제공항 제2 터미널 출발
겨울인데 영상 3도로 날씨가 포근하다. 집을 나서는 걸음이 편안하다. 여행지가 여름기온이어서 얄은 옷을 여러 겹 끼어 입었다. 최근 중국 우한지역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관계로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했다. 집에서 나서면서부터 리무진 안에서도 그렇게 하고 왔다. 공항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런 차림으로 왕래한다. 언제 와도 복잡하던 인천공항이 한산하다. 우리 부부도 걱정스럽게 출발하는 여행이다. 사실 5일 전쯤 심가하게 발표하는 보도를 보고 여행사에 취소관계를 문의하니 취소에 따른 위약금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가느 인도나 스리랑카는 아직은 의심 환자가 1명씩만 나와서 그래도 안전한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 답을 듣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인도나 스리랑카는 전염위험 지역 지도에 하얀색으로 안전국가였다. 오히려 한국이 붉은색이다. 전용 마스크도 20매, 장갑 등 챙겨서 간다. 잘 다녀올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19시 40분에 미팅을 했다. 22시 40분 스리랑카 콜롬보행 대한항공 473 항공을 탑승한다.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에서 나가지 않고 남인도 코친행을 환승할 것이다. 두 아들과의 안부는 이미 집에서 카톡으로 전화로 마치고 왔다. 왜냐하면 다음날 4일 새벽 스리랑카를 거쳐 남인도 코친으로 아침에 가서 낮에 바로 여행하고 저녁에나 호텔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데이터도 문제지만 충전도 아껴야 해서 그렇다. 집에서 지정해온 좌석 51A, 51B 티켓팅을 마치고 짐을 남인도 코친까지 부쳤다. 2, 4,2 좌석제라서 창가쪽으로 우리 부부만 앉는 자리다. 게이트는 249다. 여기는 인천공항 국제선 제2 터미널이라서 어떤 게이트도 트램을 타는 구간이 없다. 게이트 앞으로 와서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약간만 먹었다. 이륙하면 곧 비행기 안에서 석식을 제공할 거라고 티켓팅할 때 직원이 말해주었다. 22:10분이 보딩타임이다. 정시에 탑승하고 정시에 이륙했다. 밤을 날아서 간다. 스리랑카 콜롬보까지 9시간 소요 예상이다. 기내석식으로 비빔밥이 쇠고기, 야채나물 등으로 충실하게 나온다. 아이스크림과 차까지 좋은 식사다. 잠을 자야해서 조용필의 음악만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아서 영화 한편을 보았다. '물랑 루즈' 128분짜리 영화다. 영국의 젊은 남자 시인 크리시티앙과 프랑스의 한 클럽에서 춤추는 샤틴 여인과의 사랑이야기다. 종말은 그 여인이 폐결핵으로 죽으며 비극으로 끝난다. 과정은 오페라가 가미되어 매우 유쾌하기도 하고 코믹한 장면도 더러 나온다. 두 연인 사이에서 공작이 행패를 부리지만 주변에서 도와줘서 잘 극복했는데 험하게 살아온 샤틴, 그 여인은 병이 들어 죽은 것이다.
원제 ‘물랑 루즈’는 빨간 풍차라는 뜻으로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파리 몽마르트르에 실존하는 클럽이다. 붉은 네온사인으로 만든 풍차 때문에 생겼다. 이곳은 낭만과 사랑도 있지만 마약, 매춘 등 환락 산업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곳으로,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던 앉은뱅이 화가 로트렉이 그린 포스터로 더욱 유명해졌다. 로트렉은 프랑스 출신의 소묘 화가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13년 동안 술집, 매음굴, 음악홀 등의 모습을 소재로 창작활동을 했다. 특히 물랑 루즈를 자주 드나들며 무희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많이 남겼다. 로트렉은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두 차례의 사고로 어린 시절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춰버려 어른이 된 그의 키는 152cm에 불과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알코올 중독과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다 사망했다. 영화에선 존 레귀자모가 실존 인물인 그를 연기한다. 인상파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가 로트렉은 풍경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대도시의 화려한 카바레나 공연 그리고 창녀촌 등을 화폭에 담았던 독특한 작가였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그린 물랑 루즈의 선전 포스터와 간판 그림들이었다. 원래 카바레였던 물랑 루즈의 장식과 공연들은 로트렉에게는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인들은 물랑 루즈 하면 툴루즈 로트렉을 이야기한다. 물랑 루즈의 역사 속에는 불운한 예술가였던 로트렉의 열정과 눈물이 숨어 있는 것이다.
물랑 루즈는 댄스홀로 한때 파리 명물의 하나로 알려졌다. 그러나 1929년 유성영화에 밀려 영화관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물랑 루즈는 2001년 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19세기 파리의 명소인 물랑 루주를 배경으로 사랑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영화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감독 바즈 루어만이 연출하고 니콜 키드먼, 이완 맥그리거 등이 출연하였다. 1900년대 파리의 시대적 배경 속에 현대의 포퓰러뮤직 을 조화시켜 유쾌하면서도 비극적인 독특한 분위기의 영화를 탄생시켰다.
영화의 줄거리는 '젊은 시인이자 음악가가 꿈에 그리는 사랑을 찾아 지하의 세계로 간다'는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루어만 감독은 '인생은 비극이라는 비관론과 이상주의 그리고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 이 신화 속에 담겨 있다'고 설명하였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파리 물랑 루주의 아름다운 뮤지컬 가수 샤틴은 신분상승과 성공을 위한 야심을 품고 있다. 클럽의 매니저로부터 스폰서를 구하고 있던 샤틴은 우연한 기회에 젊고 이상에 사로잡힌 시인 크리시티앙을 만난다. 물랑 루즈라는 신비의 세계에 합류한 크리시티앙은 샤틴을 만나는 순간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이 둘의 사랑은 슬픈 결말을 맞게 된다. 이 영화는 특히 주인공인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직접 부르는 노래들과 영화 속의 화려한 쇼 장면 등으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9세기 말 파리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세트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세워졌고, 수백 명의 엑스트라와 100명이 넘는 무용수가 출연하여 뮤지컬 영화의 재미를 더해 준다. 2002년 제59회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부문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니콜 키드먼)·작곡상(그레이그 암스트롱)을 수상하였다. 제74회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8개 부문 후보에 올라 미술상과 의상상을 수상하였다.
어두운 밤 영국 출신의 젊은 작가 크리스티앙은 슬픈 눈빛으로 타자기에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 받는 것이다’라는 글을 쓰며 환락의 왕국 ‘물랑 루즈’에 대해 묘사한다. 특별히 그가 사랑했던 여자 샤틴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1년 전 여름에 물랑 루즈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고한다. 시인 크리스티앙은 진리와 아름다움, 자유와 사랑에 대해 글을 쓰려고 파리에 왔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사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을 쓰기란 쉽지 않았다. 이때 그에게 이웃의 남자들이 찾아왔고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 크리스티앙은 새로운 계획을 짜고 샤틴 앞에서 사랑의 시를 읊어주기 위해서 동료들과 물랑 루즈로 간다. 그녀도 그의 시에 감등을 받고 시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시인이다. 그래서 젊은 영국 시인 남자에 더욱 관심이 많았고, 그가 쓰는 시에 나도 동감하며 보았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영화 한 편이 밤하늘의 비행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저장시킨다. 잠을 반납했어도 충분하 가치로 보상해주는 훌륭한 영화다.
2020년 2월 4일 화요일 스리랑카 콜롬보, 남인도 코친
* 스리랑카 콜롬보공항에서 남인도 코친행 환승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가 어느새 다음 날 새벽을 맞았다. 한국시간 아침 7시경, 스리랑카 시간으로 새벽 3시 30분경 기내식 피자와 바나나와 쥬스로 조식을 준다. 한국과 스리랑카, 남인도의 시차는 -3시간 30분이다. 식후에는 간단히 치약으로 입안을 소독했다. 잠을 자지 않았어도 상쾌한 새벽이다.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온다. 곧 콜롬보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콜로보 기온은 23도란다. 04:20분 정시에 착륙했다. 콜롬보 공항에 내려서 남인도 코친으로 가기 위해 Transit 환승 안내표식을 따라 이동했다. 코친행은 11번 게이트다. 부처상을 지내 11번 게이트로 와서 보딩타임을 기다렸다. 코친행은 07:20분 128 UL 스리랑카 항공이고 보딩타임은 06:20분이다. 기온은 약간 서늘하다 공항에 사람들이 많다. 여행객보다 현지인이 대부분이다. 한국공항에서는 마스크를 쓴 사람이 많았는데 이곳 공항에서는 공항직원과 극히 일부 사람 외에는 거의 없다. 중국에서 발병한 신종 코로나가 스리랑카와 인도에는 확산되지 않은 이유다. 그 만큼 이곳 공하은 안전하다는 증거다. 마스크를 쓴 우리가 오히려 부끄럽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남편은 22E, 나는 23C 좌석인데 고맙게도 내 곁의 외국 남자가 바꿔주어서 우리 부부는 나란히 앉아서 갔다. 비행기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보니 콜롬보 공항에는 Srilankan 항공 비행기가 많다. 우리가 탄 비행기도 스리랑칸 항공이다. 스리랑카의 아침이 밝아온다. 기내의 기온은 조금 싸늘하다. 온통 푸른 물결의 야자수 풍경이 창문에 들어온다. 내 조국의 앙상한 겨울나무와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비행시간은 1시간 10분이다. 정시에 이룩하여 남인도를 향해 힘차게 하늘을 날아간다. 북인도는 가 보았는데 남인도는 처음이라서 참 궁금하다. 인도는 워낙 큰 나라여서 북인도와 남인도는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남인도에 대하여 배우고자 이번 스리랑카와 남인도 코스의 여행을 선택한 것이다.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많이 담아갈 것이다.
* 남인도 코친 공항 도착
오전 8시 30분 정시에 도착했다. 입국수속이 복잡하다. 쓰는 것도 많고 입구에서 스탬프도 받아야 되고, 사진 찍고 지문 채취하고 한참을 힘든 절차 속에 보내고 나서야 출국장에 나왔다.
인도는 데칸 지역을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로 구분된다. 데칸은 남쪽 나라를 뜻한다. 나르마다 강 이남의 고원 지대를 말다. 그런데 데칸이라는 말은 실제는 아리인이 사는 북인도에서 그들의 높은 문화에 비해 드라비다인이 사는 남인도의 문화가 낮다는 데서 붙여졌다. 원래 데칸 지역은 통행이 불가능한 밀림 지역이어서 이를 기준으로 남부와 북부는 문화와 관습 및 생활상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북부 아리아인의 문화는 아소카 왕의 남부 진출로 남인도의 맨 끝 타밀 지역까지 늦게나마 알려졌다. 남인도는 데칸 중심지역과 이남의 타밀 지역으로 구분한다.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국가 전까지는 북인도가 아리아인 문화일 때, 남인도는 드라비다인 문화였다. 남인도 타밀 지역은 마우리아와 굽타 왕조 시대에도 독립적이었다. 그들의 문명은 북인도와는 조금 달라도 높은 수준었다. 또한 북인도가 이방인의 유입으로 문화가 변질될 때, 남인도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된 드라비다족의 문명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아 고유의 문명을 간직했다. 그리고 드라비다 문명의 남인도 지역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바다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과 접촉했고 페르시아 만, 홍해, 그리고 인도의 서해안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했다. 남인도는 또한 바다를 통해 태평양의 여러 섬들과도 교류했다. 그로인해 기원 전후로 인도의 문명이 이들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남인도와 로마 제국의 해상무역이 매우 왕성했다. 로마 제국은 인도의 향료, 면화, 진주 등을 수입했다. 폰디체리와 케랄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 이 지역이 로마 제국이나 지중해 지역과 해상 무역을 하던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된 화폐와 유물들은 남인도 지역이 높은 수준의 문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인도의 가장 남쪽 타밀 지역에는 촐라, 체라, 판드야의 세 왕국이 존재했다. 그들은 안으로는 드라비다적인 정치 체제를 이룩하고 밖으로는 지중해나 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무역을 통하여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매우 높은 수준의 경제적인 부를 이루고 있었다. 남인도 지역의 주민은 대부분 아리아인이 아닌 드라비다(타밀)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 역시 드라비다적인 요소를 강하게 드러냈다. 드라비다인은 주로 토템적인 씨족체제를 구성하고 토템의 상징을 숭배했다. 오늘날에도 나야르족의 뱀 신앙이 있다. 그러나 마우리아 왕조의 통일제국 이후 북인도 아리아인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아소카 왕의 불교 전파 정책으로 힌두이즘보다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늦게서야 힌두교 영향을 받았다. 남인도는 언어와 문화에서 드라비다인의 땅으로 구분되지만, 다른 민족 사람들도 거주하고 현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드라비다 사람도 인도의 다른 지역과 스리랑카, 오세아니아, 동남 아시아, 마다가스카르 등에 널리 거주하고있다. 북인도에는 타지마할, 아그라성, 바라나시 등이 있다. 남인도에도 명소가 많다. 남인도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들이 공존하고, 경제와 교육 수준이 높다. 우리는 남인도를 탐방하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인도 청년 가이드와 미팅했다. 29세 델리에서 왔단다. 고향이 바라나시라며 그곳에 대한 소개도 하며 자신을 소개한다. 혼자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한국에 가서 2년을 홀로 전국여행을 하며 한국문화와 지리, 역사 등을 익혔단다. 가이드 6년생이란다. 한국말을 잘 하는 편이다. 먼저 우리 일행이 어제부터 먼 곳까지 오느라 지쳐서 호텔로 안내다. 호텔까지는 1시간 소요 된다. 그 시간 동안 인도에 대하여 소개한다. 날씨가 쾌청하다. 지금은 32도인데 낮기온은 34도란다. 한여름처럼 더워지기 시작한다. 지금은 이곳이 겨울이라서 그렇지 한여름에는 45도~49도란다. 지금 한창 추운 겨울의 내 조국과는 많이 다른 국가다. 더위로 음식이 좀 짜단다. 코친은 400만 명 인구 도시다.여기는 케랄라주다.인도의 인구는 13억 5천만 명으로 1위인 중국에 이어 2위다. 29개주를 가지고 있다.수도는 뉴델리다. 코친 거리가 매우 깨끗하다. 거리 풍경이 북인도와는 다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리에 동물이 없다. 그리고 코친은 북인도와는 다른 드라비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역사, 문화가 다 다르다. 인도는 29개 주마다 수도가 있다. 23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지방마다 방언을 합하면 420개의 언어가 있다. 각 주마다 왕이 있어서 영사, 문화가 모두 다르게 형성 되었다. 또한 지역마다 지방마다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남인도는 29개 중 5개 주를 품고 있다. 5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그 중에서 케랄라 주와 타밀라두 주 2개 주만 여행한다. 야자수와 약초도 많은 곳이다. 망고 생산지이기도 하다. 남인도는 사원도 많다. 화장실과 신발 맡기는 곳 모두 유료다. 식당도 팁문화가 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호텔에 도착했다.
* 코친 호텔에서 본 풍경
방을 배정받아 투숙했다. 복도에서 보는 창문 바깥 풍경이 비경이다. 역시 우리 방 베란다에서 보는 풍경도 비경이다. 코친의 드넓은 초원 풍경이 장관이다. 여기는 진정 광활한 인도, 더운 날씨의 푸른 식물들이 절창이라고 외치고 있다.
코친은 인도 남서부 케랄라 주 중서부에 있는 주요 항구도시다. 뭄바이 남쪽으로 아라비아 해 연안을 따라 있다. 옛 왕국의 이름이기도 한 '코친'은 때때로 지금의 에르나쿨람, 바탄체리, 코친 요새, 윌링돈 섬, 비핀 섬, 군두 섬 등을 포함하는 섬과 도시군을 일컫기도 한다. 대도시권에는 에르나쿨람과 마탄체리가 포함된다. 이름 없는 어촌이었던 코친은 고츠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하천과 아라비아 해의 역수가 이 내륙항구를 본토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인도 서해안에서 가장 안전한 항구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항구는 곧 새로운 전략요충지가 되었으며, 상업적인 면에서도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양을 횡단하여 인도 남서해안에 상륙하던 15세기말 포르투갈의 항해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 이곳에 인도 최초의 유럽인 거주지를 세웠다. 1502년에는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가 최초의 포르투갈 해외상사 무역소를, 1503년에는 포르투갈인 부왕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가 최초의 유럽인 요새를 각각 건설했다. 그후 이 도시는 1663년 네덜란드에 정복될 때까지 포르투갈의 통치를 받았으며, 시내에는 지금까지도 많은 포르투갈 양식의 건축물이 남아 있다. 1663~1795년의 네덜란드 통치기에 코친은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항구를 통해 후추·소두구 등을 비롯한 향신료와 마약·코이어·코코넛·코프라 등이 선적되었다. 이 시기에는 다민족이던 힌두인과 이슬람교도, 시리아인 그리스도교도, 유대인 등의 소수집단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이 인종과 종파를 떠나 도시의 번영을 함께 나누었다. 네덜란드의 뒤를 이은 영국인의 통치는 1795년부터 인도가 독립한 1947년까지 계속되었다. 20세기초에 건선거와 선박수리소를 갖춘 현대식 항구가 축조되었고, 부두의 내부수로 준설작업을 거치면서 윌링돈 섬이 생겨나 철교와 도로편으로 코친 요새를 에르나쿨람 및 다른 도시들과 이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코친은 인도 독립 후 인도 해군의 주요 훈련 중심지가 되었다. 해안선과 나란히 내륙 수로망이 갖추어져 수송료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교역이 촉진되었다. 심해항은 계절풍이 부는 여름을 비롯하여 1년 내내 개방되어 있으며, 에르나쿨람까지 연결되는 철도가 있다. 공항에서는 뭄바이와 첸나이 등의 국내 주요도시들을 잇는 항공편이 운항된다. 곳곳에 형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석호와 역수로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코친 요새에는 1510년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인도 최초의 유럽인 교회로 바스코 다 가마의 유해가 포르투갈로 옮겨질 때까지 묻혀 있던 상프란시스쿠 교회가 있다. 그밖에 힌두사원, 모스크, 역사적인 유대교 예배당(마탄체리 소재) 및 다른 교회들이 있다. 4세기부터 형성되었다고 하는 인도 최고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으나 수천 명에 달했던 유대인들은 20세기말에 거의 모두 이스라엘로 이주해갔다. 인도 남부의 하이라이트는 코친항이다. 한때 세계에서 기장 번성했던 국제 무역항이다. 아랍의 이슬람, 중국 광둥의 어업, 유대인 상업, 포르투갈 가톨릭 등이 모두 녹아 있는 ‘문화의 융합로’다. 구도심 마탄체리에서 향신료 향기를 가장 선명하게 맡을 수 있다. 대형 향신료 창고, 시장 골목, 포르투갈의 성 프란시스 성당, 네덜란드 궁전, 유대교회당(파르데쉬 시나고그) 등 중세 국제 도시로서의 기능과 특성을 완벽히 갖췄다. 바스쿠 다가마 상륙 이전엔 유대인이 이곳 상권을 주도했다. 약 2000년 전에 이미 향신료 장사가 큰 돈벌이가 된다고 생각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이다. 20세기 중엽 이스라엘 건국 이후 모두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고 지금은 몇 명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인근 해안에는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리고 끌어올리는 중국 광둥식 조업망이 그대로 남아, 실제 고기를 잡아 팔기도 한다. 인도스럽지 않은 케랄라서 오히려 가장 인도다운 모습과 마주칠 수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케랄라를 ‘꼭 가봐야 할 50곳의 세계 여행지’ 중 하나로 선정했다. 남인도 여행지 중 특히 인기 있는 곳이 바로 향신료 무역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코친이다. 유서 깊은 항구 도시였던 코친은 중국, 동남아, 로마, 아라비아, 유럽 등과 활발하게 교류했고 현재도 다양한 국적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 도시 어디에서나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더치 팰리스'라고도 불리는 마탄체리 궁전, 포르투갈의 항해자인 바스코 다 가마가 매장되었던 성 프란시스 성당을 방문하면 유럽과 얽힌 인도 역사의 한 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현재 골동품 거리로 변모한 유대인 마을, 아라비아해를 장식하고 있는 중국식 어망, 화려한 전통 무용극 카타칼리 등도 코친의 아름다운 여정을 제공하는 대목이다.
호텔에서 중식 후 0층 로비에서 오후 2시 20분에 집합이다. 오늘은 오후 여행만 한다. 호텔 식당 곁에 수영장도 있고 시설이 좋은 호텔이다.
* 남인도 코친 시내버스
오늘은 먼저 마탄체리 궁전을 탐방한다. 그리고 유대인 마을, 성프란시스 성당을 간다. 마탄체리 궁전까지는 호텔에서 40분 정도 걸린다. 한국은 미국식 영어인데 여기는 영국식 영어다. 포르투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 국가였다. 그래서 영어가 조금 달라서 좀 알아 들을 때가 있다. 시내버스가 지나간다. 요금이 한화로 400원이다. 더워서 창문이 없는 시내버스도 있다. 색상도 붉은 색, 초륵색 등이 있다. 차도인데 오토바이와 삼발이 택시인 오토릭샤도 지나간다. 낯선 이국의 풍경들이다.
* 코친 마탄체리 궁전
마탄체리 궁전 건물이 아담하다. 정원의 숲 그늘이 시원하다. 바깥에 있는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 당시의 가마가 있다. 그런데 실물이라서 사진촬영 금지다. 곳곳에서 사진 허용과 금지되는 곳이 정해져 있다. 그 당시의 왕과 왕비 의상, 칼 등이 전시되어 있다. 궁전의 내부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이 궁전은 성프란시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의에 16세기 포르투칼인들이 지은 궁전이다. 포르투갈 사람들이 건설해 1555년에 코친의 지배자인 비라 케랄라 바르마에게 선사한 건축물이다. 코친에 대한 무역허가를 따내고 싶어하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당시 코친의 지배자인 바르께랄라바르마에게 바친 일종의 뇌물이다. 1663년 궁전이 부식되자 당시 께랄라의 마하라자는 네덜란드의 장인들을 불러 궁전을 보수했다. 네덜란드가 증축한 후 지금도 현지에서는 ‘네덜란드 궁전(Dutch Palace)’ '더치 팰리스'로 불린다. 아잔타 벽화 이후 인도에서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아름답다는 궁전이이도 하다. 궁전 안뜰에 있는 크리쉬나 사원은 힌두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입장할 수 없다. 밖으로 나와 뒤편으로 가보니 주차장에 오토릭샤 택시가 많이 들어와 있다. 나에게도 나가겠냐고 묻는 듯하다. 궁전 건물 지붕 바로 아래 높은 곳에 코끼리 상아로 만든 코끼리상이 부착되어 있다. 인도에서 코끼리는 신이다. 오후의 그늘을 밟으며 다음 여행지 유대인 마을로 이동했다.
* 남인도 코친 유대인 마을
유대인 마을은 마탄체리 궁전 바로 곁에 있다. 마탄체리와 빠르데쉬 시나고규 사이에 있는 길 일대를 유대인 마을이라고 한다. 힌두교인 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부터 인도에 최초로 유대인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마탄체리 궁전 북쪽에 있다. 현재는 골동품 거리로 변모한 마을이다. 4세기부터 형성되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공동체였다. 실제로 이 구역은 유대인들이 살던 구역으로 한때 2,500명에 달하는 유대인 집단 거주 구역이었는데 이스라엘 건국 이후 거의 본국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로 귀환했다. 2001년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는 7가구 22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는 인도에서 가장 큰 골동품 거리다. 한국의 인사동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현대식 건물들이 옛거리를 침범하는 막개발의 인사동과는 달리 옛스러움이 한결 빼어난다. 향신료와 그림, 탈, 인형, 목공예품 등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많다. 향신료 무역을 위해 자리 잡았던 유대인들은 바스코 다 가마가 상륙하기 이전까지 이곳 상권을 주도했다. 상점을 지나면 유대인 회당이 있다. 이곳 내부에는 중국 광둥성에서 왔다는 대리석 바닥과 벨기에에서 수입한 촛대가 있다. 긴 바지를 입어야만 입장할 수 있다. 반바지나 반소매 옷차림은 입장을 거절 당하므로 옷을 잘 갖춰 입어야 한다. 골목 한 군데만 유대인 마을이다. 골동품들이 많다. 코친은 무역과 향신료로 유명하며 아기자기한 도시다. 그런 향수가 이곳 골목에서 풍긴다. 골목 끝까지 걸어가면서 살펴보고 나왔다.
* 남인도 코친 아라비아해 백워터Back Water
유대인 마을 골목에서 나와 다른 상가 골목을 지나 걸어가 보니 바다 같은 물이 있다. 이곳은 아라비아해에서 들어온 백워터Back Water다. 강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닫힌 물이다. 이 물은 코친 공항에서 호텔로 올 때도 보았다. 내일 우리는 알레피로 이동하여 저 아라비아해의 하우스보트를 타고 유람할 것이다. 백워터 트립을 할 것이다. 깨끗하진 않지만 큰 규모의 물이다.
* 코친 성프란시스 성당 외경
성프란시스 성당은 도로변에 있다. 오후의 그늘이 드리워 조금 어둡지만 그 위용은 성당 건물 꼭대기에서 대단하게 치솟아 오른다. 포르투칼인이 세운 성당인데 정원 마당에는 영국 상징탑이 세워져 있다. 나무와 시멘트의 조합으로 세워진 건축물이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외형보다도 내부에 포르투칼 항해사 바스코다가마의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바스코다가마가 세번 째로 이곳에 왔을 때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그때 이곳 성당에 무덤을 만들었는데 사후 12년 후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유해를 포르투칼 리스본으로 옮겨 갔지만 여전히 그 무덤은 기념으로 남아 보존되고 있다. 성당 정원을 두러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 코친 성프란시스 성당 바스코다가마 무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본당 우측에 바스코다가마의 무덤 유적이 있다. 사각 틀 안에 아무 것도 없지만 여기가 그가 묻혔던 무덤이란다.사각 틀 안에 아무 것도 없지만 여기가 그이 무덤이란다. 벽에는 그의 사긴과 그 당시의 글자로 새긴 문구가 부착되어 있다. 성프란시스 성당은 코친 요새에 1503년~1510년 포르투갈인들이 세운 인도 최초의 유럽형 교회다. 마탄체리지구에 있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 된 성당 중 하나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의 유해가 포르투갈로 옮겨질 때까지 묻혀 있던 성당이다. 인도양 개척 항해에 나선 바스코 다 가마는 1502년 코친에 도착했다가 1524년 포르투갈의 인도 무역 책임자로 부임했는데 과로로 숨지고 성 프란시스 성당에 묻혔다. 이 성당이 유명해진 것은 152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말라리아에 걸려서 죽은 포르투갈의 항해왕 바스코 디 가마가 이곳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성당 한쪽에는 포르투갈 항해사의 모습을 담은 액자와 그의 무덤을 덮었던 묘석이 놓여있는데, 그의 유해는 12년간 이곳에 있다가 포르투갈의 리스본으로 옮겨졌다. 인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성지의 하나지만, 인도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 침략의 알리는 시작점이다. 코친 포구에서 10분 거리인 마탄체리 지구에 있는 이 성당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흔적이다. 포르투갈 식민지였고 중세까지 중국과 아라비아, 유럽상인들이 드나들었던 코친에는 과거 흔적들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나는 포르투칼에도 다녀왔다. 그 나라에서도 바스코다가마에 대한 항해 유적을 많이 보았다. 남인도에 왔다가 죽어 시신으로 묻힌 바스코다가마에 대하여 다시 공부하는 뜻깊은 여정이다.
* 남인도 코친 아라비아해 중국식 어망
중국식 어망(차이니스 피싱넷)은 아라비아해에 있는 거대한 고기잡이 시설이다. 아라비아해 바다에 들어서자 중국식 어망이 줄지어 늘어서 외객을 반긴다. 어망 앞에 방을 지어놓고 아슬하게 올라앉아 살림을 하는 풍경도 있다. 드넓은 아라비아해를 그물망으로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중국식 어망으로 코친의 상징물이다. 성 프란시스코 성당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코친항이 자리잡고 있다. 코친 인근 해안에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리고 끌어올리는 중국 광둥식 조업망이 그대로 남아, 실제 고기를 잡아 팔기도 한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넓은 포구에는 집채만한 어망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20m가 넘는 기다란 나무 5개에 그물을 엮어 펼치고 그보다 더 큰 나무로 지지대를 만들어 대여섯 명이 그물을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고기를 잡는 식이다. 기중기 형태로 그물을 내렸다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다. 다소 미련스럽게 보이는 어획법이지만 어획량은 제법 쏠쏠하다. 이 어업 방법은 원래 중국 광둥성의 어부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것으로 원나라 황제인 쿠발라이 칸이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인 1400년대 세계를 호령하던 몽골군들이 여기까지 내려와 코친항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꽤 앞선 어획법이다. 그 옛날의 향수를 젖어보며 잠시나마 옛스런 풍경에 흐뭇했다.
* 코친 아라비아해 해변 수산시장
이곳 수산시장은 중국식 어망이 있는 바로 곁에 있다. 아주 큰 물고기부터 작은 물고기까지 해물가게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해물이 푸짐하다. 싱싱하다. 중국식 어망에서 지금 잡는 곳도 있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를 바로 곁에 있는 이곳 시장에서 판매한다. 아라비아해 바다이기 때문에 맛있는 해물탕 재료의 물고기들이다. 바다가 주는 풍요로운 정경이다.
* 남인도 아리비아해 코친항구 입항하는 화물선
수산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짐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서서히 들어온다. 크루즈 여행 중 큰 항구에서나 보았던 장면이다. 코친 무역항의 그 화려했던 시절의 재현처럼 풍요로운 정경이다. 여기는 케랄라 주의 항구 도시 코친이다. 아라비아 해와 인도 최대의 벰바나드 호수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코친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이질적이다. 포구를 따라서는 독특한 생김새의 중국식 어망이 해변에 펼쳐져 있고 거리에는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코친은 인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항구다. 예로부터 케랄라 해상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중국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열강이 몰려들어 각축을 벌였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넓은 포구에는 집채만한 중국식 어망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모두 아라비아해의 멋진 명화로 뜬다.
* 코친 아라비아해 해변 비경
해변 산책로를 따라 현지인들과 만나며 바다 깊숙히 들어간 둑길로 갔다. 그곳에서 아라비아해 해변을 조망했다. 넓은 폭의 바다에서 파도가 소리치며 부서져 밀려온다. 저쪽 중국식 어망 부근에서 본 바다와는 다른 큰 규모의 바다 풍경이다. 아라비아해는 동쪽으로 인도, 북쪽으로 파키스탄과 이란, 서쪽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의 뿔과 접해 있다. 인도 남단에 위치한 코모린 곶과 소말리아 동부 해안반도인 하푼포인트를 연결시켜주는 가상 경계선의 북쪽에 있다. 아라비아 해와 접하고 있는 국가로는 인도, 파키스탄, 이란, 오만, 예멘, 소말리아 등이 있다. 주요항만은 인도의 뭄바이, 파키스탄의 카라치, 예멘의 아덴이다. 아라비아 해의 대부분 지역은 깊이가 2,900m 이상이며, 동북쪽의 파키스탄과 인도 앞바다를 제외하고는 해안선 가까이까지 수심이 깊다. 수세기에 걸쳐 유럽과 인도 간의 주요한 항로역할을 해왔다. 조금 전 눈앞에서 화물선도 보고, 그 옛날의 중국식 어망도 보고, 풍요로운 코친 항구도 보고, 모두가 아라비아해가 키운 넉넉한 비경이다.
* 코친 산타크루즈 성당
일정에는 없는데 잠시 시간을 내어 왔다. 성프란시스 성당에서 300m 떨어진 곳에 있다. 산타크루즈 대성당은 화려한 외관으로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많이 오는 성당이다. 1904년 건설 되었다. 포르투갈에 의해 지어졌다. 그런데 영국에 의해 파괴되어 1904년에 다시 지어졌다. 저녁 짙은 노을이 건물을 가려서 어둡지만 외경도 내경도 매우 웅장하다.
* 남인도 코친 까따깔리 전통극 공연 관람
이 까따깔리(카타칼리 Kathakali) 공연은 남인도의 대표적인 전통극으로 케랄라 주에서 매우 유명하다. 경전이나 고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극화한 공연이다. 총 공연 시간이 2시간인데 화장 1시간, 공연 1시간이다. 공연장에 입장하여 들어서니 출연자들이 무대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다. 아주 짙은 화장이다. 화장품 재료는 모두 돌이마, 식물 등 천연재료에서 얻은 것들이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 된다. 악기와 실제로 부르는 구성진 음악이 흐르고 화장한 사람들이 나와서 공연한다. 이 극은 아주 섬세한 동작들이 얼굴이나 손, 발 등에서 나온다. 왕과 왕비, 원숭이 등으로 꾸민 등장인물이 우스꽝스 러우면서도 깊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공연 내용은 그때마다 다르게 구성한단다. 코친에서 꼭 관람해야 되는 여행 코스이다. 인도의 5대 고전 무용 가운데 하나로 ‘카타’는 이야기, ‘칼리’는 연극을 뜻한다. 어두침침한 무대 한쪽에 악사가 자리를 잡고 앉아 북을 두드리고, 두 명의 배우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얼굴로 표현한다. 잔뜩 부풀린 치마를 입고 화려한 장식을 한 배우는 모두 남자다. 어쩜 지루한 공연인데 정숙한 분위기에서 공연을 마치고 질서있게 나왔다. 오래도록 구석에서 공연 내내 목청높여 인도의 구성진 전통 가락을 외치던 그 남자의 음성을, 가슴 깊은 곳의 훈훈한 인간 본연의 서정을 그리던 그 곡조를 잊지 못할 것 같다.
2020년 2월 5일 수요일 알레피 하우스보트 유람, 마두라이 차밭, 성당 등
* 알레피 하우스보트 유람, 알레피 마을풍경
코친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알레피로 왔다. 이곳도 케랄라 주다. 코친에서 버스로 2시간을 달려왔다. 오늘 우리는 알레피에서 하우스보트 유람을 할 것이다. 알레피 마을은 벌써 차창 밖 풍경으로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실개천 같은 물이 흐르고 있더니 점점 물줄기가 넓어진다. 알레피는 인도 남서부 케랄라 주 남부 아라비아 해 연안에 있다. 알레피 행정구의 행정중심지로 해상교통이 발달한 도시다. 알레피 행정구는 1968년에 설치되었다. 코친 남쪽, 아라비아 해와 벰바나드 호 사이의 좁은 갑에 자리잡고 있다. 알레피 항은 16㎞ 떨어진 포라카드에 있는 네덜란드 무역소의 상업 패권을 종식시키려던 영국인들에 의해 18세기말 외국 무역항으로 개항되었다. 코코넛 기름 제조 외에도 매트, 양탄자와 코코넛 겉껍질에서 채취하는 코이어 섬유로 짠 밧줄 등을 제조, 수출했다. 오늘날 도시의 경제는 주로 코코넛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검은 후추도 생산된다. 코친과 트리반드룸을 잇는 간선도로변에 위치한 알레피는 철도는 없으나 운하망이 설치되어 있어 북쪽으로 트리추르, 남쪽으로 트리반드룸까지 연결된다. 앞바다로 1.6㎞쯤 떨어져 있는 정박지는 진흙둑으로 보호되어 있다. 케랄라대학교 부속 단과대학이 3개 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마을은 매우 평화롭다. 물가에 매어둔 하우스보트가 낭만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 알레피 하우스보트 유람, 들어갈 때
알레피 하우스보트에 승선했다. 오늘 우리는 왕복 2시간 정도의 유람을 한다. 하우스보트는 여러 종류가 있다. 길고 긴 물길을 잠을 자며 가는 호텔과 같은 배도 있고, 우리처럼 유람만 하는 배도 있다. 여행객들이 알레피에 오는 것은 이곳 하우스보트 유람을 하기 위해서다. 이곳 물은 아라비아해의 백워터Back Water로 내륙수로다.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을 연상케 하는 물길이다. 알레피는 동방의 베니스라 불리는 인기 여행지다. 아라비아 해로 흘러드는 44개의 강이 서로 얽혀 있는 케랄라 주의 내륙수로(backwater)는 길이가 무려 900km에 이른다. 열대우림 사이로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는 강물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운하처럼 마을을 서로 연결하는 교통로 역할을 한다. 하우스보트는 대나무 틀에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집을 얹은 목선이다. 원래 쌀을 싣던 화물선인 라이스보트를 관광용으로 바꾼 것이다. 큰 보트는 침대 객실, 회의실, 부엌과 라운지까지 갖추고 있어 물 위 호텔과 같다. 선장과 요리사, 선원이 함께 탑승한다. 하우스보트는 좁고 넓은 수로의 물길을 따라 유유히 흘러 간다. 물가에는 야자수들이 울창하다. 수변 민가는 물가에 자가용인듯 배를 정박해놓고, 생활터전도 물가에 마련해놓고 있다. 보트는 그 사이를 느린 속도로 안전하게 흘러간다. 모든 것이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낭만적이다. 어느 곳을 사진을 찍어도 아침 햇살이 드리우며 참으로 고운 풍경을 그려내는 명화로 찍힌다.
* 알레피 하우스보트 유람, 물가 휴게소
한참을 달린 보트가 물가 휴게소에 정박했다. 그곳에서 하선하여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다. 물가에는 새도 있고, 물 위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보트들이 지나간다. 야자수 울창한 숲속 가게에서 차도 한 잔씩 마셨다. 야자나무 열매가 껍질과 함께 널려있다. 이곳 수변 마을 사람들은 이곳 물가에서 빨래하고, 목욕하고, 그릇을 닦고 그야말로 생활터전이다. 물가 시멘트 바닥에 비누와 그릇이 놓여 있다. 정겨운 휴게소의 아름다운 휴식이다.
* 알레피 하우스보트 유람, 돌아나올 때
물가 휴게소에서 휴식 후 다시 보트에 승선했다. 돌아가는 유람이다. 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이 있다. 그들은 일상인데 우리 이방인의 눈에는 신기하여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물은 식수만 금지하고 모든 생활용수로는 사용을 허락한다. 하우스보트는 점점 깊고 넓은 아라비아해로 유람하며 흥겨운 백워터 트립을 이끈다. 이제 더욱 행복이 젖어드는 순간이다. 아까와는 다른 물길로 나간다. 아주 넓은 물에서는 물 위 식물들이 즐비하게 자란다. 수변 마을을 잇는 다리도 지나간다. 이제 햇살은 하늘 높이 올라 보트로 깊이 들어오지 않는다. 흥이 오른 인도 가이드가 핸드폼으로 한국가요를 틀어주어서 함께 손뼉치며 노래를 불렀다. 먼 타국에서 듣고 부르는 내 조국의 가요가 참으로 자랑스런 순간이다. 물가의 정경은 여전히 황홀한 비경이다. 어느새 보트는 승선했던 선착장에 도착했다. 두고두고 그리울 여정이다.
* 남인도 들녘 벼농사
우리는 이제 다음 여정인 마두라이로 간다. 알레피에서 7시간 소요된다고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9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도시를 벗어나자 인도 들녘이 전개된다. 들녘에 버농사를 짓는 논이 드넓게 전개된다. 이곳 벼농사는 2모작이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렇게 익어가기도 하고, 어떤 논에서는 지금 보는 저 풍경처럼 파랗게 벼들이 출렁이기도 한다. 저 장면만으로는 내 조국의 여름 벼농사 풍경과 동일하다. 정겨운 풍경이다.
* 남인도 야채 가게
알레피에서 마두라이로 가는 길은 먼 여정이다. 그래서 간간이 소도시 마을을 지나곤 한다. 길이 고속도로가 아니고 정겨운 시골길이다. 더운 나라로 과일이 풍성하여 과일가게가 자주 보인다. 매우 당도가 높은 과일은 맛이 있다. 우리도 호텔 식사 때 먹었다. 긴긴 시간 달리며 가이드는 인도에 대하여 알려준다. 인도는 대가족제도다. 가이드 집도 23명이 한 집에 산단다. 형이 5명, 형수가 5명, 조카 9명, 부모 60세 55세 2명, 본인과 동생 등이 함께 산단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단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여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에서 일을 한단다. 일부다처제로 부인은 몇 명이든 관계없단다. 무제한이란다. 능력있는 남자는 여자를 많이 거느리고 한 집에서 산단다. 결혼은 중매결혼으로 1주일 동안 파티를 연다. 돈봉투 대신 선물을 교환한다. 중매라서 이혼율이 낮다. 결혼부부의 1/1000~2/1000 정도만 이혼한다. 이혼하겠다고 부모에게 통보하면 중매인과 함께 다 모여 그 원인을 듣고 논의하여 해결책을 찾아주고 이혼을 막아준다. 둘이 이혼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회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혼은 매우 어렵다. 본받아야 할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의 장례문화는 돈이 많이 든다. 그리고 코친과 알레피는 케랄라 주에 속하고, 지금 가는 마두라이는 타밀라두 주에 속한다. 또 코친과 알레피는 아라비아해에 접하고 마두라이는 인도양에 접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인도를 배우는 시간이 흐뭇하다.
* 알레피에서 마두라이로 넘어가는 고산지대 산길
소도시에 들러서 비빔밥으로 중식을 했다. 야채소스와 밥을 비벼서 밀전병 같은 호밀가루 구운 것에 싸서 먹었다. 소스가 좀 매워서 남겼다. 인도는 고기를 잘 안 먹는다. 한 달에 1회~2회 정도 먹는다. 인도는 약초가 많아서 암 같은 질병이 적다. 치아에 좋은 약초도 있다. 중식 후 계속 마두라이로 이동한다. 점점 산길로 접어든다. 도로는 2차선으로 잘 조성되어 있다. 절벽 산길로 들어선다.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다. 버스기사는 절벽길을 서행으로 안전하게 운행한다. 산녘 곳곳에 자생하는 토란도 많다. 매우 높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간다. 고지대라서 귀가 먹먹하다. 산중턱 도로변에 소가 지나가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아예 산길 도로변 그늘에 앉아 있는 소도 있다. 아마 더위를 피해서 여기 산길에 온 듯하다. 산녘에 더러 민가도 보인다. 이 깊은 산중에서 어떻게 살까 궁금하다. 예전에 중앙아시아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넘어갈 때의 그 높고 아득한 절벽 산길을 연상케 한다. 그래도 지금은 그때보다는 서행으로 안전하다. 어느 산녘에서부터 차밭이 보인다. 점점 더 커지는 차밭이다. 민가도 곁에 있는 곳도 있다. 한동안을 달려온 산중에서 버스가 잠시 멈추고 우리는 하차하여 휴식시간을 가졌다.
* 남인도 마두라이 고산지대 차밭
버스가 멈춘 이곳은 온통 차밭이다. 남인도 마두라이뿐만 아니라 타밀라두 주에서도 최고로 녹차와 홍차가 많이 생산되는 차밭이다. 이곳 최대 생산지에서 이 많은 차들이 넓은 인도지역에 퍼져나간다고 생각하니 덩달아 흐뭇하다. 산중 산길을 달려올 때 차창 밖으로만 보았던 차밭을 눈앞에서 보니 더욱 그렇다. 지나오면서 차를 따는 사람들도 보았다. 산을 따라 비스듬히 드러누운 드넓고 상큼한 초록의 차밭이 참으로 싱그럽고 풍로운 정경이다.
* 마두라이 고산지대 차밭 프란시스 바울 성당
차밭 가운데 있는 성당이다. 오롯하게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차밭을 보며 긴 계단으로 걸어 성당으로 갔다. 그곳 본당에도 들러보았다. 웅장하다. 그리고 높은 음으로 읊는 예배의 소리가 방송으로 타고 나오며 산녘을 적신다. 성당 앞에서 바라보니 주변에 온통 차밭이 가득차 있다. 산중에서 차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성당인 것 같다. 이제 다시 마두라이로 달린다. 여기서 2시간이면 마두라이 시가지에 도착한다.
* 알레피에서 마두라이로 넘어온 산녘 파이프관
산녘을 거의 넘어온 산길에서 아주 통이 크고 긴 길이의 웅장한 4개의 관이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정유관이거나, 가스관으로 보인다. 가스관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저 산중을 넘어올 때 보았던 민가와 차밭 재배지의 가공공장 등으로 운반하는 가스관일 것 같다. 두 군데서 그런 정경을 보았다.
* 남인도 마두라이 고산지대 들녘
고산을 넘어오니 평원이 전개된다. 야자수와 바나나 등을 재배하는 곳도 있다. 벼농사를 짓는 곳도 있다. 아직 높은 산이 남아 고산지대 들녘이지만 험한 절벽 산길을 달려온 후라서 아주 평화롭게 보인다.
* 남인도 마두라이 과일 가게
마두라이의 소도시를 지나간다. 산골마을 가게에 바나나, 파인앺ㄹ 등 열대과일이 가득하다. 야자나무 열매를 파는 상인도 있다. 산녘 평원의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은 듯하다. 약초와 꽃을 파는 가게도 있다. 거리의 길가에서는 소가 먹이를 먹는다.
* 남인도 마두라이 들녘 벼농사
벼를 심어 놓은 논이 광활하다. 벼를 베어 놓은 논도 있고 다양한 풍경의 평원이다. 2모작 지역이어서 그렇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곳도 있다. 길가에서 사탕수수 대를 팔기도 한다. 트럭에 사탕수수를 한가득 싣고 간다. 이집트 룩소에서 보았던 풍경이다.
* 남인도 마두라이 학생들 제복
마두라이 시가지 가까이에 들어왔다. 도로변에 제복을 입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남녀 학생들이 많이 서 있다. 고등학생 같기도 하다. 단정한 모습을 내 예전 학창시절 향수로 정겨웠다.
* 남인도 마두라이 수박 가게
수박가게가 보인다. 남인도 식당 곳곳에서 먹었던 수박이다. 달고 맛있었다. 이곳 남인도에서 수박이 많이 생산되는 것 같다.
* 마두라이 시가지 풍경
복잡한 마두라이의 한 시가지를 지나간다. 차와 사람들이 엉켜 대란이다. 우리 버스도 한동안 멈추었다. 그런데 버스가 멈춘 이유가 교통문제만은 아니었다. 어떤 이유로 경찰이 조사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이 길어서 버스는 그곳을 떠나 도시의 외곽에 우리를 내려놓고 다시 일처리 관계로 갔다. 한참을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남인도 타밀라두 주의 마두라이다. 남인도는 지역마다 법이 달라서 케랄라 주의 여행버스가 돈지불 관계를 이 지역에 맞춰 처리를 미리 하지 않아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다행히 회사에서 잘 해결해 주어 다시 버스가 왔고 우리는 목적지로 이동로 이동했다. 각 주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주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가이드도 글자를 못 읽고, 말을 못 알아 듣는단다. 5천년 전부터 화장문화가 이어져 오는 나라다. 화장은 1회에 20명 정도 한다. 한 번도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화장하는 곳도 있다. 대나무를 사용하여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갠지지스 강물이 깨끗하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호텔로 간다. 어두워지는 시간이다. 대형버스가 시가지로 접어드는 것은 참 위험했다. 교통이 참 나쁘다. 시장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버스의 도시 도로를 힘들게 통과하는 것을 보며 인도의 도로 사정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인도에서는 난립하던 동물들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남인도에서는 도로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남인도에도 거리에 동물은 있다. 지금 마두라이 시가지에서도 저녁 어둠의 쓰레기장을 뒤지는 소들이 보인다. 저녁으로 먹어야할 먹이를 찾는 것 같다. 그러나 남인도는 동물이 그리 많진 않다. 어쩌다 간혹 한 두 마리 보일 뿐이다. 교통문제는 지역 간 이동할 때는 다른 도시를 거치치 말고 직접 그 목적지로 가는 도로를 조성해야 교통이 원활할 텐데 남인도는 그게 안 되어 있다. 알레피에서 여기 마두라이로 오면서도 많은 소도시를 거쳐 복잡한 시장길을 통해 빠져나오곤 했다. 알레피에서 마두라이까지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로 9시간이나 걸려 겨우 마두라이에 도착한 것이다. 무사히 운전하여 우리를 데리고 온 버스기사에게, 인도 청년 가이드에게 참으로 고마웠다.
마두라이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 마두라이 행정구의 행정중심도시로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다. 서쪽으로 케랄라 주와 접한다. 타밀나두 주에서 2번째로 큰 도시다. 바이가이 강을 끼고 아나이말라이(코끼리) 구릉, 나가말라이(뱀) 구릉, 파수말라이(소) 구릉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잡은 아담한 옛 도시였다. 판디아 왕국(4~11세기)의 수도로서 미낙시순다레슈바라 사원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이 사원과 티루말라나야크 궁전, 흙 제방으로 만든 테파쿨람 저수지, 1,000개의 기둥으로 장식된 홀은 마두라이가 모두 파괴되었던 1310년에 무너졌다가 비자야나가르 왕조시대(16~17세기)에 다시 세워졌다. 도시의 성벽은 1837년 영국인들이 도시를 넓히려는 목적으로 없애버렸다. 강 북쪽에는 행정중심지와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교외지역에서는 면방적, 면방직업과 함께 수송장비, 담배, 설탕 제조업을 중심으로 대규모 산업이 발전해왔다. 베틀로 짠 비단과 면제품은 소규모로 생산되지만 옛날부터 마두라이의 전통상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해진 시대에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타밀 문학회가 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새로운 문학회는 1901년 설립되었다. 마두라이카마라지대학교(1966)가 있다. 마두라이의 고대역사는 판디아 왕조의 왕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판디아 왕조 이후로는 촐라, 비자야나가르, 이슬람, 마라타 왕국에게 지배를 받다가 영국에 넘어갔다. 1940년대에는 영국 지배에 대항하는 시민 불복종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라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마두라이 행정구는 농업지대이기는 하나 1895년 페리야르 강 관개공사와 1960년 바이가이 강 관개공사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쌀을 자급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환금작물인 땅콩, 목화, 사탕수수, 커피, 생강, 감자, 배를 재배한다. 바이가이 강 주변에 위치한 도시 마두라이는 유럽 식민지 역사를 거치지 않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다. 고대 로마와 무역을 하며 경제를 키웠던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부터 11세기까지 판드야 왕국의 수도였고, 16세기 중반에는 나야크 왕조의 수도로 성장해왔다. 이슬람 문화가 혼재된 북인도의 주요 도시나 영국 식민지 이후에 발달하게 된 첸나이와 달리, 마두라이는 인도 고유의 힌두 문화를 잘 지켜온 도시로 꼽힌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스리 미낙시 사원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행렬에서 이곳이 여전히 타밀나두의 정신적 중심지임을 알 수 있다.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 마두라이는 인도 최남단 타밀나두의 주도 첸나이에 버금가는 제 2의 도시로, 교통망이 발달했으며, 스리랑카와 께랄라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고대부터 드라비다 문화의 중심지로, BC 5세기~AD 11세기까지는 판디아 왕국의 수도였다. 16세기 중반부터 1743년까지는 나야크 왕조의 수도였다. 인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스리 미낙시 사원을 중심으로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겹쳐진 형상을 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존재한 이도시는 인기 있는 교역의 중심지였고 향신료 무역으로 유명했다. 인구는 약 1,200만 명이다. 첸나이가 타밀나두 주의 심장이라면 마두라이는 타밀라두 주의 영혼과도 같은 도시다. 우리는 오늘 밤 호텔에서 유숙하고 내일 역사 깊은 도시 마두라이를 여행한다.
2020년 2월 6일 목요일 마두라이 스리미나시 사원, 스리랑감 사원, 탄자부르 브리하다슈와라 사원
* 마두라이 호텔
6시 모닝콜, 7시 조식, 7시 45분 출발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식사하고 호텔 주변을 돌아보았다. 호텔 뒤켠 주차장에는 우리 버스가 있고 직원들은 분주하다. 호텔 뒷문으로 나가보니 아침을 여는 마두리아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조금 더 걸어가서 호텔 정문에 이르렀다. 바로 앞에는 공사중인 건축현장이 드넓게 자리하고 있다. 먼지가 벌써 자욱한 느낌이다. 차도와 인도 구분이 없는 도로에는 차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 우람한 호텔 정문 앞에는 오토릭샤도 한 대 들어와 대기중이다. 좀 더 질서 있는 거리였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 마두라이 스리미낙시 사원 고푸람 동문
호텔에서 스리미낙시 사원까지는 10분 소요된다. 주차장에서는 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완전히 맨발로 입장해야 된다. 사진도 내부는 촬영 금지다. 짐도 맡기고 입장한다. 여권과 돈만 소지하고 들어간다. 동문 앞까지 걷는데 매우 덥다. 오늘은 아침기온으 22도였지만 낮기온은 33도란다. 그런데 해가 뜨면서 바로 더워진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장엄하다.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동문 고푸람이 아득하다. 동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북문 고푸람으로 이동했다.
* 마두라이 스리미낙시 사원 고푸람 북문
동문을 떠나 사원 곁의 골목길을 걸어 북문으로 향했다. 북문 입구에서 모든 것을 맡기고 여권과 돈만 몸에 지니고 들어간다. 내부 사진은 불가다. 검색이 철저하다. 이 사원은 매우 크다. 고푸람이 크게는 동서남북 4개지만 총 14개다. 고푸람은 마름모꼴의 사원에 입장하는 탑문을 말한다. 내부를 관람하며 중요한 것만 살펴보았다. 원래는 동문 입장이 가능했었는데 얼마 전에 불이나서 입장을 폐쇄했고, 고푸람 안에서부터 사진 촬영도 금지했다. 힌두교 신자만 입장하는 황금사원도 있다. 큰 사원은 황금 1500Kg이고, 작은 사원은 황금 850Kg이다. 우리는 멀리서 지붕만 바라보았다. 다른 부분은 건물에 가려서 안 보인다. 남인도 사원의 극치를 이루는 건축구조다. 단지 내에 1000개의 기둥이 있는 예술 박물관이 있다. 안쪽 건물로 들어가서 시바신이 타고다녔다는 난디상 황소도 보고, 코끼리 신과 남녀교합 장면도 보았다. 좁은 문으로 멀리 황금사원의 장면도 잠시 보았다. 철저한 힌두교사원이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타밀나두의 문장에 새겨진 힌두교 최고의 사원이다. 바이가이 강이 관통하는 마두라이 역시 남인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과거 판디아 왕국과 나야크 왕국의 수도였던 마두라이는 도시 곳곳에서 화려했던 과거를 볼 수 있다. 남인도 최고의 사원으로 꼽히는 미낙쉬 암만 사원은 마두라이의 상징 같은 곳이다. 하루 수만 명 이상이 찾는 이 사원에 위풍당당하게 솟아 있는 고푸람은 특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푸람은 인도에 건설된 중세의 탑문으로 힌두교 사원의 울타리 역할을 한다. 스리미낙시 사원은 인도 제일의 고푸람, 타밀나두 주 최고의 힌두교 사원이다. 힌두교의 시바신과 미낙시의 사랑을 그리며 그들에게 봉헌하기 위해 17세기 나약왕조에 지어진 건물이다. 이 사원은 드라비다 힌두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사원 동서남북의 거대한 탑문인 고푸람에는 33,000의 신과 악마,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본전 안에는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여신의 황금연지’라 불리는 연못과, 985개의 돌기둥과 그 기둥에 각종 모형이 새겨진 만다파가 있다. 타밀나두의 무장에도 새겨진 최고의 남인도 스리미낙시 사원은 쉬바신의 또다른 화신인 순다레스와레와 그의 아내 미낙시를 모신 사원이다. 미낙시 여신 파르바티와 그의 남편인 시바 순다레스와라와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이며 호랑이 머리의 신인 가네샤와 시바가 타고 다니는 황소인 난디를 모시는 대표적인 드라비다 양식의 힌두교 사원이다. 실제는 가슴이 3개 달리고 물고기의 눈을 가진 미낙시 여신만을 위한 사원이다.
사원 입장시, 신발을 신을 수 없고, 가방 소지가 불가능하다. 민소매 및 반바지 착용시 입장 불가다. 사진은 절대 촬영금지다. 아예 핸드폰이나 사진기는 소지 불가다. 이런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으면 입구에서 입장이 되지 않는다. 그 만큼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사원이라고 생각된다. 햇살도 따갑고, 발바닥도 뜨겁고 드넓은 사원을 걷는 것이 잠시나마 고행이다. 그러나 비록 타국이지만 이것이 신과 대면하는 종교의 예절이며 오늘까지 보존해오는 그 종교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 마두라이 스리미낙시 사원 주변 풍경
스리미낙시 사원 주변은 매우 혼잡하다. 과일과 야채 등 농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바닥에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다. 소도 지나 다닌다. 차와 오토바이 리어카 등이 사람과 함께 움직인다. 우리나라도 예전엔 저런 풍경이 있었을 텐데, 지금은 모두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길가 노점상은 재래시장 외에는 거의 없어져서 생소하게 보인다. 방문객에게는 새로운 볼거리이기도 하다. 한참을 걸어 나오며 많은 진풍경을 보았다.
* 마두라이 티루말라이나야카 궁전
궁전에 들어서자마자 기둥이 양편으로 줄지어 늘어선 풍경이 장관이다. 등근 통대리석에 천연색상을 칠한 것이다. 정원에는 외객을 맞이하는 의자가 가득하다. 건물 내부의 통로를 따라 들어가니 붉은 색 왕좌가 덩그러니 비어 있다. 바로 곁에 있는 박물관에는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석상과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 크진않지만 옛 궁전의 모습을 잘 보존한 유적이다.
티루말라이 나야키 궁전은 이 지방을 다스르던 티루말라이 나야카 왕이 1636년경 건축해서 궁의 이름도 동일하게 붙였다. 오늘날 마두라이를 건설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나약 왕조의 궁전이다. 후에 마하라자들의 별궁처럼 쓰이다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1971년 이후 크고 작은 공사를 거치며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유럽식 건물 양식에 인도 스타일 조각을 입혔다. 식민지 시대에 이탈리아에서 온 건축가가 했다. 스리미낙시 사원의 드라비다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인도.사라센양식(힌두+무갈건축)으로 건축 되었는데 대부분이 파괴되어 현재는 왕의 공간, 알현장소 등 일부만 남아 있다. 마두라이라는 17세기 나야카 왕조 때부터 도시가 성립되었다. 원래의 왕궁은 현재의 4배 크기였다. 12미터의 성벽 안 왕궁에는 거주지역, 정원, 극장, 음악실 등이 있다.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어 왕의 공간, 알현장소 등 일부만 남아있다. 그는 좋아서 매일 궁에서 음악회와 파티를 열였다. 그런데 티루말라이 나약의 손자인 초카난트 나약왕(1662~1682)에 의해서 왕궁의 일부가 해체되어 트리치로 옮겨져 그곳에 왕궁을 세우는데 이용되었다. 위대한 왕과 손자의 이야기까지 서린 웅장한 궁전이다.
* 마두라이 과일가게
이제 우리는 마두라이를 떠나 탄자부르로 이동한다. 가면서 스랑감사원도 탐방하고 중식 후 탄자부르로 갈 예정이다. 마두라이 시가지를 거쳐 나갈 때 과일가게가 보인다. 수없이 보아온 과일가게지만 볼 때마다 정겹다. 낯선 꼬부랑 글씨의 남인도 가게 상호도 신비롭고, 풍성한 열대과일을 보는 것도, 열심히 사는 주민들을 보는 것도 흐뭇하다.
* 마두라이 시가지 바이가이 강
마두라이 시가지를 흐르는 바이가이 강 다리를 건너서 간다. 옛 나야키 왕조의 수도였던 위용을 드러내듯 아직도 큰 폭의 강이 그날을 읊조리는 듯하다.
* 마두라이 시가지 동상
마두라이 시가지 곳곳에 동상이 많이 서 있다. 난디상, 부처상, 남자상 등이 대로 가운데, 또는 대로변에 세워져 있다. 사다리가 놓여 있어 동상 곁에 오를 수 있게 설치했다. 동상에게 여러 가지 물품을 걸어둔 장면도 보인다. 신적 존재만의 동상이 아니고, 아마도 그 지역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의 동상 같기도 하다. 독특한 정경이다.
* 마두라이 거대한 붉은 통바위 돌산
마두라이 시가지를 벗어날 즈음 차창 밖으로 거대한 돌산이 보인다. 붉은 통바위산이다. 붉은 바위 하나로 된 거대한 산이다. 길이도 길다. 독특항 풍경이다.
* 남인도 들녘 풍경
고속도로를 진입하여 달린다. 날씨가 매우 화창하다. 북쪽으로 가면서 풍겨을 본다. 야자수 농장, 파란 향신료 식물 재배지, 기름진 농토 들녘 등 풍요로운 풍경이다. 어제 달려오면서 보던 풍경과는 조금 다르다. 거대한 돌산도 지나간다.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유두화로 보이는 분홍꽃도 화사하다. 이것이 남인도의 절창이라고 외치는 듯한 정경들이다. 내 조국은 지금 싸늘한 겨울인데, 여기는 화창한 여름 온통 초록 물결이다. 이것 또한 세계여행에서 체험하는 소중한 여정이다.
* 스리랑감 사원으로 가는 도로 풍경
스리랑감 사원은 일정에는 없는 옵션으로 가는 여행지다. 여행 중에 참 많이 보는 사원들인데 얼마나 유명하기에 돈을 30불씩이나 지불하고 보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버스가 유턴한다. 이제 거의 온 것이다. 거리에는 차와 오토바이가 많다. 소를 몰고가는 여인도 조금 전에 지나왔다. 모두 이색적인 풍경들이다.
* 스리랑감 사원으로 들어가는 강 다리
중식을 마치고 스리랑감 사원으로 간다. 이곳 지명이 스라랑감으로 알고 있다. 스리랑감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넓고 긴 강 다리를 건너간다.
* 스리랑감 사원 외경
스리랑감 사원은 인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다. 사원 입구의 골목길에 들어서자 탑문인 고푸람이 거대한 위용으로 끝에 자리하고 있다. 양편으로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차와 사람도 왕래하는 골목이다. 원래 이름은 스리 랑가나타스와미 사원이다. 스리랑감 사원으로도 불리는 이 곳은 비슈누 신의 8개의 자기 파괴 성지 중 가장 중요한 장소다. 108개의 비슈누 사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스리랑감 사원은 매우 넓은 자락에 지어져 거대한 규모다. 7개의 울타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울타리들은 두껍고 거대한 성벽으로 되어있다. 21개의 거대한 타워들이 웅장하다. 코베리와 콜리담 강 사이에 형성된 섬에 위치하고 있다. 아득하게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고푸람은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는 장관이다.
* 스리랑감 사원 맨발로 입장
고푸람 앞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입장했다. 한낮 데워진 바닥이 매우 뜨겁다.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데워지는 느낌이다. 타국이지만 이 나라의 종교예법에 충실해야 한다. 소도 만나고, 크고 작은 고푸람을 지나서 계속 내부로 걸어들어간다.
* 스리랑감 사원 전망대 조망
한참을 걸어서 전망대로 올라갔다. 하얀 바탕색을 칠해 둔 곳은 그래도 뜨겁지 않다. 하얀색 배닥에 서서 설명도 듣고 스리랑감 사원의 전경을 조망했다. 우리가 조금 전 거쳐온 고푸림이 겹겹이 보인다. 저 멀리 크로 작은 사원들, 하얀 높은 사원 등이 이 사원의 규모를 드러내고 있다. 왜 스리랑감 사원이 돈을 지불하고 옵션으로 보는지 여기서 해답이 나왔다. 참으로 웅장하고, 근엄한 경관의 인도 최대 힌두고 사원이다.
* 스리랑감 사원에 온 순례자들
인도의 사원은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이 많다 이곳에도 많이 있다. 특히나 인도 힌두교인만이 입장할 수 있는 내부의 깊은 사원이 따로 있다. 우리 같은 외객은 문 앞에서 내부를 아련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 사원 문앞에서 순례자 여자 두 명을 만났다. 반가워 하며 함꼐 기념사진을 찍었다. 인도인들은 손님을 신이라고 믿는다. 항상 웃음으로 반긴다. 배워가야할 덕목이다.
* 스리랑감 사원 재건축하는 고푸람
새로 짓는 하얀 색 고푸람이 우람하게 서 있다. 수많은 힌두교 신들이 부착되어 있다. 나무 기둥으로 주변을 받들고 바닥에도 나무기둥이 놓여 있다. 아직도 공사가 진행되는 현장이다.
* 스리랑감 사원의 화강암 통기둥
화강암 통기둥들로 열을 세운 공간이 있다. 신자들의 휴식 공간이다. 곳곳에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다. 높고 커다란 하나로 된 돌기둥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오롯이 사원을 받들고 있다. 사원 곳곳에서 이런 정경을 보아왔다. 그 옛날 사원을 건축할 때 얼마나 큰 노고로 정성들인 것이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본당에서뿐만 아니라 바라보며 경건해지는 건축물이다.
* 스리랑감 사원을 나오며 만나는 여러 곳의 문
사원에 입징할 때처럼 퇴장하는 길도 많은 크고 작은 문을 거친다. 인도사원은 이것을 고푸람 탑문이라 부른다. 스리랑감 사원은 규모가 상당히 큼을 다시 알게 해준다.
* 스리랑감 사원 안에서 만난 소
사원을 나오며 소를 만났다. 한국의 젖소와 같은 얼룩이 소다. 목에 줄이 있고 남자가 곁에 따라 다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데리고 온 소 같다. 인도의 소들은 주인이 있으면 목에 줄이 매어 있고, 목에 줄이 없으면 주인이 없는 거리의 소다. 인도인들이 소를 기르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쇠고기는 안 먹지만 우유를 생산하고, 똥으로 흙과 섞어 집을 짓고, 똥을 연료로 사용하는 등이다. 죽으면 묻어준다. 참 행복한 소들이다.
* 스리랑감 사원을 나와서 본 풍경
스리랑감 사원을 나와서 신발을 신고 온 길을 되돌아 나간다. 아까 본 사원 풍경인데도 다시 보니 거대한 사원의 고푸람이 발길을 자꾸 잡는다. 아까보나든 그늘이 옅어져서 조므 더 자세히 보인다. 결코 인도 최대의 힌두교 사원이라는 말은 허울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힘든 과정을 거쳐 탐방한 스리랑감 사원은 결코 온 것을 후회하지 사원이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장엄한 사원이다.
* 스리랑감 사원에서 나오며 본 코끼리 사원
이제 탄자부르로 이동한다. 버스가 강 다리를 건너자 큰 바위덩이가 나오고 꼭대기에 사원이 있다. 코끼리 사원이다. 스리랑감 사원에 들어갈 때도 보았던 사원이다. 인도에서 코끼리는 신이다. 버스가 빠르게 달려 시내를 빠져나간다. 온통 들녘이 풍요로운 초록 물결이다. 야자수와 바나나 재배지도 보인다. 탄자부르는 여기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 탄자부르 브리하다슈와라 사원
탄자부르 시가지에 들어서자 대단한 위용의 브리하다슈와라 사원이 시야에 다가온다. 붉은 화강암 사원으로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 맡기고 맨발로 입장했다. 이곳 사원은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붉은 화강암 사원이 곳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풍경이 대단한 규모로 장엄하다. 300Km내에 산이 없는 지역인데 먼 곳에서 화강암을 어떻게 운반해서 건축했는지 신기한 일이다. 촐라 왕조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이다. 1010년 촐라왕조의 최전성기의 왕 라자라자(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 1세에 의해 지어진 시바 사원이다. 지어질 당시 세계최대 규모의 사원이었으며, 현존하는 인도의 사원 건축물 중에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촐라왕조 라자라자 1세(985~1012)가 건축한 이 힌두 사원은 높이가 66m로 남인도에서 가장 높다. 피라미드형 탑 꼭대기에 올린 힌두사원 꼭대기 시카라 무게가 81.3톤이나 된다. 성인 1500명 무게와 같으며 매우 큰 무게다. 사원정문인 고푸라 2개를 지나야 본당에 들어간다. 사원 내부와 외부의 프레스코화와 부조상들이 주요 볼거리다.
탄자부르는 9~13세기에 걸쳐 촐라왕조의 수도로 번창한 고도다. 이 시대에 시바 사원이 많이 건축되고 바라문 문화가 번성했다. 매우 작은 도시지만 촐라건축의 최고 건축으로 꼽히는 브리하다슈와라 사원과 왕궁 등의 볼거리가 다양한 지역이다. 또한 탄자부르는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에 있는 탄자부르 행정구역의 행정중심도시다. 인도 남동부 타밀나두 주 동부, 코베리 강 하류 연안 코베리 강 삼각주에 자리잡고 있다. 9~11세기에 초기 콜라 왕국의 수도였다. 비자야나가르, 마라타 왕조와 영국 식민지시대를 거치면서 중요한 도시로 번성했다. 지금은 관광 중심지로 브리하디슈바라 콜라 사원, 비자야나가르 요새, 마라타족 왕자 사르포지의 궁전 등의 관광지로 유명하다. 예로부터 내려온 수직기를 이용한 직조 외에도 면직업과 비나(남인도의 현악기) 제조가 활발하다. 마드라스 대학교에 부속된 8개의 단과대학이 있다. 탄자부르 행정구는 인도의 중요한 쌀 경작지 가운데 하나인 평평하고 기름진 코베리 강 삼각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남동쪽으로 팔크 해협과 벵골 만이 합류하는 칼리메레 곶까지 뻗어 있다. 삼각주에는 관개 운하를 통해 연결되는 코베리 강의 수많은 물줄기들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이들 운하 가운데는 10세기 이상 이용해온 것도 있다. 주요작물은 쌀, 사탕수수, 땅콩이며, 곡물 가공이 주요산업이다. 여러 도시들 가운데 탄자부르, 쿰바코남, 나가파티남이 가장 크다.
남인도 사원 하나 하나를 탐방하면서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건축규모도 대단하고, 그 당시 왕조의 종교정신도 대단하고, 현재의 인도 백성들의 신앙심도 대단하다. 비록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도지만 이런 정신은 본받아가도 좋을 듯하다.
* 탄자부르 브리하다슈와라 사원 난디상
사원에는 따로이 마련 된 건물에 거대한 난디상도 있다. 난디는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황소다. 공사중으로 얼기설기 나무기둥으로 엮어매어 황소상이 잘 보이는 않는다. 난디는 시바가 타고 디니는 황소다. 브리하디스와라 사원 본당에 가려면 두 개의 사원정문인 고푸라를 지나가야 한다. 육중한 돌로 건축된 거대한 고푸라에는 시바 신의 춤추는 모습이 여러가지 형태로 새겨져 있다. 고푸라를 지나가면 중앙에 흑색의 거대한 황소 석상이 있는 사당이 있다. 무게 25톤, 높이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소상인 난디상 앞에서는 힌두교 요가 수행자인 사두들이 힌두경전을 읊는다. 사람들은 난디에게 공양물을 바친다. 사두는 공양물 중 꽃은 난디상에 뿌리고 다른 공양물은 밑에 놓는다. 난디에게 공양물을 바치고 시바 신에게 경배를 하기 위해 본전 비마나로 향한다. 높이 66m의 비마나는 시바신이 거하고 있다는 카일라스 산을 본떠 만든 것이다. 난디 상의 귀에 대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 사람들은 기도하며 난디 상의 머리와 등에 꽃과 풀을 장식하고, 입에는 밥이 물려준다. 난디는 시바신이 타고 다니는 신성한 황소다. 힌두교도들은 이 황소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모든 신들이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난디의 귀에 대고 소원을 말하면 그 안에 있는 신들이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는다. 난디 사당 앞에서는 화려한 복장을 한 무희들이 시바 신이 추었다는 전통춤을 춘다. 이곳 사원에는 지금 외객보다 자국민이 많이 들어와 있다. 난디상 주변에도 상인과 자국민 신자들 붐빈다. 난디상을 제대로 보지 못함이 아쉽지만 아련하게 본 황소 머리가 그 큰 규모를 가늠케 한다.
2020년 2월 7일 금요일 탄자부르에서 폰디체리로 이동, 폰디체리 오로빌 공동체마을
* 탄자부르 호텔
어제 저녁에 투숙하여 석식도 이 호텔에서 했다. 메뉴가 참 좋았다. 어젯밤에 사진을 정리했다. 시간이 여유로워서 머리도 감았다. 11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모닝콜 새벽 4:30분, 조식 05:15분, 출발 06:00시, 분주한 일정이다. 서둘러서 일찍 기상하여 조식을 했다. 어제 저녁식사처럼 식단이 한국음식에 가깝다. 계란, 오믈렛, 흰죽, 콩 등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호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캄캄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로비 곁에는 코친에서 보았던 까따깔리 전통극에서 나온 왕과 왕비 의상의 사진액자 벽에 걸려 있다. 여행은 늘 설레게 하고 행복한 순간의 연속이다. 오늘도 참 행복한 여정이 전개되는 남인도 탄자부르의 캄캄한 새벽이다. 폰디체리로 출발한다. 탄자부르에서 폰디체리까지 거리가 300Km 6시간 소요예상이다. 고속도로가 아니어서 그렇다. 폰디체리를 보고 가는 길에 악어은행을 탐방하고 마말라푸람으로 갈 것이다.
* 남인도 사원축제 거리의 인파
남인도는 장거리 가는 길에 화장실 문제가 좀 불편하다. 주행 2시간이 넘어갈 때 새벽 기온이 서늘하여서 화장실이 급하다. 특히 여자들은 더욱 그렇다. 가이드가 식당 앞에 버스를 주차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식당주인은 우리가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돈을 받는다. 나를 포함한 급한 여자 4명만 다녀왔다. 그런데 조금 가니 남자들도 급하단다. 할 수 없이 도로변에 버스를 세우고 남자는 우측 도로변에서 여자는 좌측 숲속에서 소변을 보았다. 생리현상인 것을 어쩌겠냐며 한바탕 웃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곳 사원행사 축제지에서도 버스가 정차할 때 일부 미처 앞전에 소변을 보지 못한 일행남녀가 하차하여 볼일 보기에 마땅한 곳을 찾았는데 버스 곁은 낭떠러지고 또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올라왔다는 후문에 다시 또 화장실 문제로 한바탕 웃었다. 내 조국이라면 이랬을까? 아닐 것이라고 하며 우리의 조국을 함께 예찬했다.
사탕수수 재배지를 지나 한참을 달린 소도시에서 아주 귀한 종교 행사 장면을 만났다. 사원 축제 행사로 왕복 차선이 꺼가 막히고 수많은 인파가 도로 가득 몰린다. 오토바이, 자전거, 자가용 등이 도로변과 마을길에 가득 찼다. 오늘은 금요일 힌두교 사원의 축제일이다. 아담한 사원에서 물을 뿌리고 등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원 꼭대기에 오르기도 한다. 신자들이 사원에 넘쳐서 도로변까지 밀려나온 것이다. 차들이 꼼짝하지 않고, 크락션 하나 누르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디. 차의 예절도, 행사의 예절도 숙연한 장면이다. 어전 9시 30분~10시 35분까지 1시간 정도를 그렇게 정차했다. 행사를 마치고 사람들이 질서있게 흩어진다. 잠시 후 버스도 서서히 움직인다. 신에 대한 자세를 보는 등 매우 큰 종교체험 시간이었다.
* 폰디체리 숲속 오로빌 공동체마을
폰디체리 가는 도중에 중식을 했다. 아주 맛있다. 음식도 즣지만 이제 서서히 인도 음시에 적응되는 것 같다. 이곳 남인도 중식메뉴는 어느 식당이던 동일하다. 둥근 양은쟁반에 가운데는 밥, 가장자리에는 작은 스텐종지 10개 정도에 인도 특유의 소스를 섞어 야채숲을 올려 내온다. 감자를 넣어 만든 국도 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모든 소스를 넣어 비벼서 국과 함께 먹으려 했는데 맵고, 특유의 향으로 다 못 먹고 남겼다. 그래서 지금은 소스를 하나, 하나 먹어보고 맵지않고 향이 적은 것만 넣고 비벼 먹는다. 그런데 이 식당 음식은 향이 약하고 덜 매워서 맛있게 잘 먹은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희망에 따라 호밀 전병을 나누어 준다. 얼마든지 추라고 더 준다. 우리도 많이 받아서 조금씩 손으로 잘라 비빔밥을 싸서 먹었다. 현지인들은 모든 음식을 손으로 먹는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전병을 자르는 것도, 밥에 싸는 것도 모두 손으로 해야 되기 때문이다. 남인도 여행으로 음식문화까지 배우는 흐뭇한 시간이다.
중식 후 폰디체리로 이동했다. 뱅골만 다리를 지나 간다. 호수 같기도 하고 강 같은 뱅골만이 매우 넓고 크다. 이 뱅골만은 폰디체리를 나갈 때도 보아서 뒷부분 목록에 다시 쓸 것이다. 가이드가 귤과 사과를 사 주었다. 맛있게 먹으며 간다. 인도에서 쇠고기를 안 먹는데 소를 사육하는 이유는 우유생산, 집짓는 재료, 연료, 농사일 때문이란다. 어린아기들 산모가 사망시 우유를 먹여야 한단다. 염소젓은 영양이 우유와 달라서 성장에 우유보다 안 좋단다. 소똥과 흙을 섞어 집을 지으면 소똥 냄새 떄문에 뱀, 쥐 등 해충이 못 들어온단다. 소똥을 연료로 사용하고, 소가 농사일을 하고 등 소사육하는 이유를 제대로 배웠다.
인도는 부분적으로 도시가 식민지였다. 그런데 영국에 의해 인도 전체가 식민지가 되었다. 동인도회사를 건립한 후 식민지화 했다. 폰디체리는 프랑스가 지배했다. 전형적인 타밀나두 주의 도시임에도 ㅍ랑스 식민지 였던 기간 때문에 자갈도로, 노랑색 집 등 유럽의 분위기가 간간이 엿보인다. 프랑스에서 온 히피의 영향을 받은 인도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창작한 물품들을 판매하여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도시다. 이런저런 인도에 대한 공부를 하며 폰디체리 오로비 공동체마을에 도착했다.
먼저 영상실에서 영상을 관람했다. 오로빌 공동체마을 탄생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전시관을 거쳐 숲숙 길을 걸어서 500m쯤 가면 마뜨리만디르도 있다. 200m지점에서 아주 큰 나무를 만났다. 숲속 길인데도 많이 더워서 잠시 나무 밑에서 쉬었다.
폰디체리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17세기 말에는 프랑스, 네덜란드 간의 세력 다툼이 있었고 1761년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푸두체리는 1674년 프랑스가 인도를 식민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도시다. 17~18세기 프랑스령 인도의 수도였고, 프랑스 무역의 중심지였다. 인도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식민지였던 도시다. 30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1954년에서야 인도에 반환되었다. 1963년 인도의 연방직할시로 승격되었다. 프랑스 식민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아직도 프랑스어를 하는 인도인들이 있다. 현지인들은 식민지 시절 이름인 ‘폰디체리(Pondicherry)’로 부르고 있다. 폰디체리에 1926년에 세워진 스리 오로빈도 힌두교 아쉬람은 요가와 현대 과학을 결합한 힌두교 수양지로 유명하다. 해안가에 있어 인도의 주요 관광지다. 인도의 주 가운데 관할 면적이 가장 적다. 오늘날 인도에서 가장 프랑스 문화를 느끼는 곳이다. 거리와 해안가에는 지중해와 유사한 건축물이 많다.
폰디체리 오로빌 공동체마을은 모두가 꿈꾸는 세상으로 인류 공동체 마을이다. 스리 오르빈도의 이상향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 세워진 공동체 마을 오로빌이다.
푸두체리에서 북쪽으로 약 12km 거리에 있는 오로빌(Auroville)은 전 세계 40여 개국 2,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평화와 공존을 실험하고 있는 인류 공동체 마을이다. 1968년 세워진 이곳은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이상을 꿈꾸던 인도의 사상가이며 영적 지도자인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의 신념에 따라 만들었다. 종교, 인종, 국적을 초월하여 조화롭게 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오르빌이란 이름은 이 ‘스리 오로빈도’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오로빌리언(Aurovillian, 오로빌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물이 부족한 이 땅에 댐을 건설해 숲을 가꾸고, 싱싱한 과일과 채소를 직접 재배해 왔다. 석유 대신 태양, 물, 바람 등의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고 화폐가 없는 자급자족 경제도 오로빌의 특징이다. 또 오로빌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국적, 인종, 종교, 계급에 관계없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상의 도시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필요한 물자를 무료로 배급하고 교육의 기회도 무료로 부여한다. 학력이나 자격증이 없어도 누구나 원하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서로가 가진 배경이 아닌 인간 그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다국적,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오로빌이다. 최근 오로빌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오로빌 내에서 자급자족의 불균형이나 초기 정신이 잊혀지는 등의 문제점들이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오로빌이 앞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오로빌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게 될 것인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사람과 자연을 한 몸으로 엮는 생태 공동체이자 개인의 탐욕을 버리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위해서 오로빌의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숲속 길 곳곳에는 오로빌에 대한 유적,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발전해온 사진과 비석 종류다. 사람들이나 민가는 잘 볼 수 없지만 그들의 숭고한 뜻은 우리도 배워가야할 대목이다.
* 폰디체리 마뜨리만디르 사원
오로빌 숲속을 한참 걸어간 곳에서 둥근 구조의 마뜨리만디르 사원을 만났다. 황금빛 사원이 들녘 가운데 있다. 미리 예약을 해야 들어가는 사원이다. 우리는 줄이 쳐진 곳에서 조망만 했다. 일명 명상사원이다. 오로빌을 상징하는 건물로 외부 관람을 한다. 전세계 121개국의 흙을 모아 빚어 만든 황금빛 구형 건축물이다. 은하계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한다. 오로빌 마을에 황금색 골프공 모양으로 건축된 명상홀이다. 마트리만디르는 인류 공동체의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는 정경이다. 나올 때는 덥고 먼 거리로 셔틀버스를 타고 나왔다. 주차장에서 소 2마리를 만났다.
* 남인도 뱅골만
오로빌을 오가며 뱅골만을 보았다. 오로빌에 들어가면서 뱅골만 다리를 지나갈 때는 매우 폭이 넓고 컸다. 오로빌에서 나오면서 본 뱅골만은 드넓은 바다였다. 뱅골만은 인도의 동쪽 바다로 넓게는 인도양 바다다.
오로빌에 들어오면서 뱅골만 다리를 지날 때 본 뱅골만
* 남인도 악어 은행
폰디체리에서 마말라푸람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2시간 소요다. 가는 도중에 악어 은행을 탐방했다. 여러 종류의 악어가 많다. 뱀, 거북이 등도 있다. 가장 큰 악어도 있고, 종류별로 나누어서 사는 곳이 다르게 분류했다. 자세한 설명의 안내판도 세워놓았다. 악어 은행이라고 부를만하다.
* 남인도 거리 곳곳에서 만난 소
악어 은행에서 나오는데 누런 황소가 돌아다닌다. 주차장에 가는데 쓰레기장을 뒤지는 소도 2마리 있다. 그 세 마리 중에서 1마리만 목에 줄이 있다. 인도의 소 중에서 주인이 있는 소는 목에 줄이 있고, 주인 없이 떠도는 소는 목에 줄이 없다. 그리고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려 톨게이트 앞에 다다랐을 때 톨게이트 도로 곁을 지나가는 소도 있다. 인도에서는 교통체계도 동물 우선이다. 절대로 치고 가면 안 된다. 길에서 소를 다치게 하면 사람이 그랬든, 차가 그랬든 벌금을 물어야 한다. 300만원 정도라니 엄청 큰 벌금이다. 주인이 있는 소는 달라는대로 돈을 줘야 한단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소를 함부로 대하다가 다치거나 죽으면 어디선가 즉시 경찰이나 주민, 또는 주인이 달려온다. 그리고 길거리의 주인 없는 소는 의사들이 보살펴준다. 먹이도 주고, 질병도 고쳐준다. 농촌에서는 소를 기르기도 한다. 기르던 소가 죽으면 절대 먹지 않고 묻어준다. 소에 대한 장례문화도 있다. 인도의 소와 동물들은 참 행복하다.
* 마말라푸람 리조트의 밤 풍경
악어 은행에서 마말라푸람 호텔로 이동한다. 20분 소요된다. 원래는 해변사원에 가서 일몰을 보는 일정인데 늦어서 내일 가기로 했다. 지금 시간 오후 5시 20분이다. 4시 30분경이면 해변사원 문을 닫는단다. 마말라푸람 호텔은 리조트 형식이다. 야자수 울창한 정원에 군데군데 숙소가 떨어져 있다. 우리 부부의 숙소는 301호로 3층이 아니고 3동 1호라는 뜻이다. 매우 넓고 시설이 참 좋다. 밤 풍경이 참 그윽하다. 열대의 풍경이 곳곳에서 우리를 환영하다. 짐을 풀고 호텔에서 베풀어주는 석식을 맛있게 했다. 친절하게도 아이스크림을 직원이 퍼 준다. 남인도 호텔에서 뷔페식단 메뉴에는 꼭 아이스크림이 나온다. 아마도 더운 나라여서 열을 식히라고 주는 메뉴 같다. 나도 꼭 먹었다. 내일은 새벽 4시 모닝콜, 5시 조식, 5시 30분 출발이다. 마말라푸람의 여행일정을 마치고 첸나이로 가야 한다. 60Km거리다.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출근시간대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인도는 주 6일 근무제다. 토요일도 근무한다. 은행은 격주로 토요일에 근무한다. 우리는 오늘 첸나이 공항에서 스리랑카 콜롬보행 16:20분 비행기를 타야 한다. 첸나이 공항은 복잡하고 스리랑카가 가깝지만 국제선이라서 1시까지는 공항에 가야 한단다. 머리도 감고, 속옷도 빨고 잠을 청했다. 참 행복한 여정이다.
2020년 2월 8일 토요일 마말라푸람 해변사원, 파이브 라티스,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 크리쉬나 버터볼 등
* 마말라푸람 해변사원
새벽 일찍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조식을 했다. 메뉴가 참좋아서 맛있게 먹었다. 5시 30분에 버스가 출발한다. 우리는 지금 마말라푸람의 해변사원으로 가고 있다. 리조트 숙소에서 45Km로 45분 소요된다. 새벽 기온이 서늘하다. 마말라푸람은 1,400년 전 빠라바 왕조의 가장 강력한 군사기지였던 곳으로 '위대한 전사의 도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관광, 휴식, 여유 모든 면에서 만족시켜주는 작은 해변 마을이다. 원래는 마하발리푸람이었는데 너무 길어서 마말라푸람으로 지명을 바꿨다. 마말라푸람은 아름다운 사원이 있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비슈누 신이 마하발리라는 거인을 무찌른 신화에서 이름을 따 마하발리푸람이라고도 한다. 첸나이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져 있는 인구 약 1만2000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작은 마을로 석공들의 도시이다. 석공들의 돌깨는 소리가 들린다. 마을 곳곳에 정교한 돌조각들이 있다. 마말라푸람은 한때 남인도를 호령하던 7세기 빨라바 왕조 시대에 세워진 항구도시로 중동 및 그리스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활동을 하며 동서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전국에서 모인 석공들의 도시로도 명성을 얻었다. 시바 성지순례의 출발지다. 바위를 깎아 조성해놓은 아름다운 해변의 사원이 있는데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에는 아름다운 유적지와 카페, 해산물 레스토랑이 가득한 여행지다. 설악산 흔들바위를 연상시키는 크리쉬나의 버터볼, 거대 석조 기념물인 아르주나의 고행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파이브 라타스와 해변 사원 등으로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해변사원은 남인도 최초의 석조사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두 동으로 이뤄져 있으며 한 쪽은 시바, 한 쪽은 비쉬누를 모시고 있다. 해변사원은 입장료를 내야 한다. 문 앞 시가지 광장에 노숙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어린아이와 함께 자는 가족도 있다. 이불을 덮고 오가는 발걸음에 까닥하지 않고 잠을 잔다. 가이드에게 더워서 나와 자느냐 물었더니 집이 없어서 나와 잔단다. 참으로 애잔한 정경이다. 해변사원은 입장해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 간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풍경이 어스름 새벽을 가르고 해변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잔디 광장에서 먼저 조망했다. 화강암 돌을 깎아서 조각하여 건축한 아담한 사원이다. 100년만에 밀려온 2004년의 쓰나미에 사원이 물속에 잠겨 파손 되었다. 지금도 잠겨 있단다. 오직 저 2개의 건물만 남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거센 바람과 파도에도 자리를 지키는 사원이다
벵골 만 마말라푸람 바닷가의 이 사원은 촐라 왕조의 대왕인 나라심하 바르만 2세가 재위했던 7세기 빨라바 왕조 시대에 처음 지어져 나라시마바르만 2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팔라바 문명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남인도 최초의 8세기경 화강암을 깎아 만들어진 석조 사원이다. 남인도 최초의 석조사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7기의 석조사원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2개의 탑이 남아있다. 오랜 세월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표면이 침식되고 부식되어 있다. 두 탑 사이에는 시바신을 모시고 있는 조그만 사원이 있다. 사원의 중심부에 시바의 남근상이 자리하고 있으며, 정교한 조각들이 사원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이 사원은 마말라푸람의 다른 사원들처럼 바위를 깎아 만든 것이 아니라 쌓아 올려 만들어진데다 해안선에 가까운 위치 때문에 2004년에 발생한 쓰나미에 의해 부분 침식과 조각 유실 등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거센 바닷바람과 파도를 이겨내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원의 강인한 모습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건축양식은 다른 인도 사원과 다르며 독특하다. 멀리서 볼 때 사원은 두 동이다. 각각의 신당에 쉬바와 비슈뉴를 모시고 있서 독립적이지만 두 개 사원의 담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해변 쪽의 더 큰 사원이 쉬바사원이고, 작은 사원이 비슈뉴 사원인데 두 사원이 붙어있는 이유로 비슈뉴신에 대해서 여성성을 부여해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해변사원 곳곳을 둘러 보았다. 어느새 서서히 밝아오고 인도양 뱅골만 바다에서 해가 떠오른다. 일출이 장관이다. 떠오른 햇살이 쉬바사원의 링감을 정면으로 비춰준다고 하는데 힌두교도들에게는 최고의 장엄한 순간이라고 한다. 우리는 걸음을 해변으로 옮겼다.
* 마말라푸람 해변사원에서 본 아침의 인도양 바다
해변사원 바로 곁의 바다로 갔다. 사원의 담장이 있어서 나가진 못하지만 비경이다. 저 인도양 뱅골만의 일출 햇살이 해변사원을 비추면서 비경을 자아내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그 비경을 보는 것이다. 큰 축복이다. 담장 사이로 보니 바닷가에 사람들이 많다. 사원의 일출과 인도양의 일출을 보는 사람들이다. 사원의 해변 북쪽이나 남쪽으로 가면 깨끗한 해변에서 휴식할 수도 한다. 벵골 해는 파도가 높고 물살이 빨라서 수영보다는 바다 낚시나 서핑을 즐기기 좋다. 해변사원을 나오면서 반대쪽에서도 담장 사이로 바다를 보았다. 일출과 함께 비경을 자아낸다.
* 마말라푸람 해변사원에서 나오는 길에 만난 제복의 학생들
해변사원에서 나오는데 제복의 학생들이 들어온다. 초등생부터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인솔교사와 함께 줄줄이 들어온다. 해변사원을 탐방하는 것이다. 나는 교사였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든 학생들을 보면 참 반갑고 기쁘다. 그래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학생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외객을 반긴다. 그 웃는 모습이 참으로 다정하고 아름답다.
* 마말라푸람 파이브 라타스
파이브 라타스는 해변사원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아직 해가 높이 뜨지 않은 아침시간이어서 일부의 건물에 그늘이 드리워 있다. 파이브 라타스는 크고 작은 사원이 5개란 뜻이다. 힌두어로 파이브는 5, 라타스는 전차를 뜻한다. 파이브 라타스는 전차모양을 한 5개의 사원이다. 5개 사원 각각의 이름은 인도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판다바의 다섯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모두 고대의 통바위를 세밀하게 깎아서 만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하나 하나의 바위 5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내는 신전으로 조각한 기술은 경이롭다. 모대 속에 숨어있던 거대한 석조 사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화강암 사원이다. 라타스 외부와 내부에는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라타스 주변에는 코끼리와 소 조각들이 맴돌고 있는데 실제 크기와 비슷하다. 앞편에는 거대한 코끼리상이 있고, 뒷편에는 난디상이 있다. 특이한 구조의 사원을 건축한 파이브 라티스는 오밀조밀 정겹다. 도로변에서도 담장 사이로 보인다.
* 남인도 거리를 활보하는 소
파이브 라타스에서 나오는데 거리를 활보하는 소 2마리가 있다. 수없이 많이 보아온 소지만 아스팔트 길을 씩씩하게 걸어나오는 소가 참으로 진풍경이다. 인도의 소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행복한 정경이다.
*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
거대한 바위벽에 새긴 부조가 병풍처럼 서 있다. 코끼리, 소 남녀들의 움직임을 조각해 놓았다. 먼저 지붕과 기둥이 있는 사원 같은 공간에 들어갔다. 소 젓을 짜는 장면의 부조가 바로 중앙에서 보인다. 높이 15m, 폭 27m의 거대한 바위에 각종 신화들이 가장 채워져 있다. 그날의 이야기를 다 일 수는 없지만 이곳은 아르주나라는 사람의 종교적 고행을 벽화부조로 새겨 놓은 것이다. 다양한 인도의 신화가 새겨진 거대하고 아름다운 조각이다. 거대한 암석 전면에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새겨진 마말라푸람 석공들의 솜씨를 알 수 있는 부조다. 힌두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아르주나가 시바신을 대상으로 고행하는 장면을 바위에 새긴 조각상이다. 지름 30m, 높이 9m, 길이 27m의 거대한 화강암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아르주나의 고행상 외에 다른 신화들도 생생히 새겨져 있다. 이 바위는 남인도에서 가장 섬세한 조각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위에 새겨진 코끼리상은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조 조각 중 하나로 실제 코끼리와 거의 비슷한 크기다.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 조각은 마말라푸람에 존재하는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나고, 인도의 고대 예술 작품 중 가장 아름답다. 거대한 바위 위에는 힌두교의 신화와 남인도의 생활 모습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중앙에 있는 뱀 형상의 틈새는 강가(갠지스 강)를 의미하며, 왼쪽에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아르주나는 고행을 통해 시바 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빠수빠따를 얻으려 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이 아르주나가 아닌 바가리타의 고행을 표현했다고 말하는데, 그의 고행은 시바 신에게 천상에 있는 강가가 땅으로 내려와서 선조들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기 위함이다. 작품에 얽힌 두 가지 해석에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의 강가가 본래 천상에 있던 강이라는 내용은 동일하다. 이는 힌두교에서 강가가 가진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마말라프람에 있는 두 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보다 더 인기있는 마말라푸람의 최고 볼거리로 인도의 각종 신화들이 새겨져 있다. 각 조각마다 사연이 있다. 한쪽 다리를 들고 있는 조각은 아르주나를 뜻한다. 신화시대의 고행은 요즘과 달리 무지막지한 힘이 있다. 고행만으로 산을 정복시킬 수 있었다고 믿었다. 고행 속의 아르주나는 현재 쉬바신에게 시위 중인 모습 등 여러가지 모습이 새겨져 있다. 위로는 거대한 바위산이다. 세계문화유산 유적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수간이다. 수많은 내외국 탐방액들로 부조를 보는 줄이 장사진이다.
* 마말라푸람 코끼리 사원
아르주나의 고행 부조를 지나 위로 조금 올라가니 코끼리 사원이 있다. 사원 안에는 코끼리 모양의 상이 모셔져 있다. 치장도 하여 사람과 같이 보인다. 인도는 코끼리가 신이다.
* 마말라푸람 크리쉬나 버터볼
바위절벽 위에 붙어있는 듯한 크리쉬나 버터볼은 거대하고 동그란 바위다. 가파르고 넓은 바위 절벽 위에 올라앉은 형상이 아슬한 비경이다. 올라앉은 그 바위 역시 거대하고 동그란 바위인데 떨어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신비롭다. 언덕 중간에 위치하여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다. 과거 팔라바 왕조의 왕들이 코끼리를 이용해 바위를 옮겨보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래로 굴러 떨어져야 정상일 것 같은 모양새이지만 밑면의 아주 좁은 면적으로 바위에 잘 붙어 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저 바위는 그대로 앉아 있다니, 아마도 아래의 넓은 바위와 하나로 조각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바위라면 사연이나 전설이 깃들어 있을 법한데 이야기꾼들이 많은 인도인들이 이곳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만들어 왔다는 것이 놀랍다. 앞과 뒤 모두 조망하였는데 모두 믿기지 않는 풍경이다. 바위에서 바라본 저 아래는 광활한 마을이다. 야자수가 많은 평화 가득한 남인도의 정경이다. 바위 능선을 타고 내려왔다.
* 첸나이 산토메 성당 외경
마말라푸람에서 첸나이로 2시간 여 달여서 이동했다. 거리는 멀지 않은데 고속도로가 아니어서 많이 걸렸다. 남인도의 마지막 탐방 도시다. 첸나이는 인도 남부의 최대 도시이자 정치, 문화의 중심지다. 뱅골만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남부 인도 최대의 도시이자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원래 이름은 마드라스였으나, 1996년 첸나이로 도시명이 변경되었다. 1640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이곳에 세인트조지 성채를 구축하고 동방무역과 교역기지로 삼은 것이 시로 발전하게 된 시초이다. 성채를 중심으로 해안의 사구를 따라 시가지가 발달하고, 성채 북쪽에 오래 된 상업지구인 조지타운이, 남서쪽에 새로운 상업지구이며 부도심인 마운트로드가 형성되었다. 성채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뻗은 마리너비치로드는 아름다운 거리로 알려져 있으며, 시민의 산책로이다.항구는 성채 북쪽에 인공적으로 굴착된 것으로, 1만t급 이상의 선박이 접안 가능한 부두 18개가 있다. 철도는 북부의 센트럴역으로부터 콜카타, 델리, 뭄바이, 벵갈루루로 뻗고, 남쪽의 이그모아역으로부터 주내 및 케랄라 주, 마이소르 주,방면으로 협궤철도가 뻗어 있다. 국제공항도 있어서, 유럽·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와 항공로가 개설되어 있다. 면직물·기계·차량·정유·고무·비료 등의 공업이 성하며, 피혁·철광석·면직물을 수출한다. 또 영화산업의 도시이고, 마드라스 대학교를 비롯하여 공과대학·의과대학 및 미술관·박물관 등이 있다. 인도 타밀나두 마드라스 주의 주도로 벵골 만과 접한 남인도의 최대 도시이다. 과거 명칭인 마드라스로 알려져 있다. 종교적으로 엄격한 색채를 띠기 때문에 전통 복장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도시화가 꽤 진행된 구역에서는 비교적 서구 스타일의 옷을 입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대가족제 아래서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전통 복장을 입는 것을 문화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여성은 사리를, 남성은 베스티와 셔츠를 즐겨 입는다. 언어는 타밀어를 많이 쓴다. 마드라스 바샤이라고 해서, 타밀어를 모국어로 쓰는 화자처럼 자연스러운 슬랭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첸나이 하면 자동차라고 할 만큼 자동차 산업이 크게 발달돼 있다. 자동차 산업의 허브로 각광받으면서 심지어는 인도의 디트로이트라는 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다. 정부의 산업친화적인 정책, 항구와의 접근성, 전통적 산업기지라는 점이 자동차 산업을 크게 키웠다. 진한 파란색 도색이 특징적인 첸나이 지하철이 있다. 2월 기온은 21도~31도다. 2월 초순인 오늘 상당히 덥다.
먼저 간 곳은 산토메 성당이다. 도심에 하얀 성당 건물이 오롯하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고 순백의 하얀 예쁜 건축물이다. 예수의 제자 도마가 안치된 성당이다.
* 첸나이 산토메 성당 내경
이곳은 예수의 제가 도마가 묻힌 성당이다. 그래서 유명하다. 지하로 내려가니 모다의 묘지가 있다. 도마의 동상이 잠든 형상으로 조각되되어 누워 있고 그 아래에는 실제 그의 무덤이 있다. 다시 지하에서 올라와 박물관을 둘러보고 성당 본당에 갔다. 그곳 성전 본당 중앙에 조금 전 보았던 도마 무덤이 바닥의 작은 구멍으로 보인다. 예수제자 도마의 시신은 안내글자 아래 지하에 있다. 구멍으로 아련히 보인다. 첸나이의 산토메 지역에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인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도마가 인도로 와서 AD 52~72년 동안 선교하다가 순교한 후 묻힌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1504년에 포르투갈이 탐험가들이 건축했다. 1893년에 영국인들이 신고딕 양식인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한 성당이다. 아름다운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로 성당 뒤편에는 도마의 무덤을 참배할 수 있는 별도의 건물이 있다. 1956년 3월 16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준대성전급으로 승격되었고 2006년 2월 11일 가톨릭 성지가 되었다. 본당 회중석은 길이가 34m, 너비가 10m이며, 회중석과 성소 사이에는 길이 32m, 너비 7.6m의 익부가 있다. 뾰족탑은 3층 규모이며 최상층에 시계가 있고, 뾰족탑에 달린 십자가의 끝은 지면으로부터 50m 높이이다. 성당 건물 옆에 박물관이 붙어 있으며, 도마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곳이 보존되어 있다. 인도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예수의 제자가 인도에 묻혀 있다는 것이 숙연한 의미로 다가온다. 선교로 왔다가 순교한 그가 오늘날까지도 종교자들에게 추앙받으며 순례자들을 부르고, 비종교인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 첸나이 마리나 해변
산토메 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해변에 도착하자 가이드는 20분의 자유사간을 줄테니 다녀오란다. 우리는 이 더운 날씨에 무슨 20분씩이나 보라고 하냐고 의아하면서 버스에서 내렸다. 그런데 백사장을 걸어도, 걸어도 바다가 다가오지 않는다. 인도양 뱅골만 드넓은 바다는 아주 먼 곳에서 우리를 부르는데 우리는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 걸어도 가까이 가기엔 아직 멀었다. 관광객을 태운 말도 지나가고, 새나 말이 쉴 공간인 듯한 초록 잔디밭도 지나간다. 10여 분을 걸어서 간 곳에서 바다를 만났다. 왜 가이드가 바쁜 일정에도 20분의 시간을 주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바닷물은 매우 탁하다. 크고 작은 배도 있고, 수영하는 사람도 있다. 마리나 비치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해변이다. 인도 타밀나두 주 첸나이 벵골만에 인접해 있는 해변이다. 첸나이 도시를 따라 이어진 인도양 바다의 해변이다. 해변 북쪽에 있는 세인트 조지 요새로부터 남쪽에 있는 포어쇼어 이스테이트까지 6km로 인도에서 가장 긴 자연 도시 해변이다. 마리나 해변은 도로에서 바다가 아득하고, 백사장이 아득하고, 긴긴 해변이 아득한 것이 비경이다.
* 첸나이 성조지 요새
이곳은 버스 안에서 지나가며 조망했다. 외교관이 실제로 저 안에서 거주해서 외관만 본다. 하얀색 영국식 건축물이 나무 사이로 보인다. 외관상으로는 동인도 회사가 세운 인도 최초의 요새다. 1653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완공한 이 건물은 현재 타밀나두 주의 총무부와 입법부로 사용되고 있다. 요새 박물관에는 식민지 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요새 안에는 1680년에 완공된, 인도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국식 교회인 세인트 메리 교회가 있다. 건물 끝부분 시가지에서는 첸나이의 기차도 지나간다. 내려서 자세히 보지 못함이 아쉬운데 요새 앞의 이 큰 도로는 교통량이 많아서 멈출 수가 없다. 이것으로 남인도의 탐방은 모두 마쳤다. 이제 중식 후 공항으로 이동할 것이다.
* 첸나이 시가지
첸나이 한국식당에서 돼지고기 김치찌개, 시금치나물, 김치, 전 등 풍성한 한국요리로 점심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모두들 반가운 내 조국의 식단에 행복해 한다. 한국에서 먹는 맛, 그대로다. 첸나이 시가지를 달려 첸나이 공항으로 간다. 첸나이는 매우 큰 도시이고 문화 경제의 중심도시라고 매우 세련된 도시다. 빛이 나는 시가지다. 복잡한 도심에서는 잠시 엉켜서 한동안 머물다 간다. 남인도 여행의 마지막 도시 첸나이, 잘 보고 많이 배우고 간다.
* 남인도 첸나이 공항 출발
첸나이 공항은 아담하고 예쁜 공항이다. 공항 입구에서 4박 5일간 남인도 여행을 도와준 가이드와 작별을 고하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16시 20분 128UL 스리랑카 콜롬보행 탐승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왔다. 우리 부부는 21E, 22D 좌석이다. 날씨는 쾌청한데 하늘은 뿌옇다. 20분 지연 출발했다. 탑승하여 3, 3제인 좌석에서 내 곁의 인도 남자가 자리를 바꿔 주어서 남편과 나란히 앉아서 간다. 1시간 20분 소요다. 기내식으로 약식 피자와 바나나와 쥬스를 준다. 지난번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에서 남인도 코친공항으로 올 때와 같은 메뉴다. 맛있게 먹었다. 북인도을 몇 년 젼 여행하고 나서 꼭 와보고 싶었던 남인도 탐방을 마치고 떠나간다. 참으로 기쁘고 보람된 여정이다.
2020년 2월 9일 일요일 콜롬보에서 폴론나루와로 이동, 담불라 석굴사원, 폴론나루와 궁전, 옛불치사, 갈비하라
* 스리랑카 콜롬보 공항 도착
스리랑카 콜로보 공항에 정시에 도착했다. 사뿐히 착륙한다. 스리랑카는 1월까지 입국을 신청한 외국인에게 무비자다. 우리 일행도 첫날 도착이 2월 4일인데 여행사에서 사전 입국신청을 1월 말에 해서 무비자로 쉽게 통과된다, 지난번 한국에서 이 공항에 왔을 때는 공항 밖으로 나가지 않고 남인도 코친공항으로 환승해서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았지만 오늘은 스리랑카 콜롬보에 입국하기 때문에 비자가 필요하다면 까다로울 텐서 무비자라서 쉽게 나왔다. 스리랑카 중년 남자 가이드가 나와서 반긴다. 저녁이라서 날씨가 약간 서늘하다. 호텔로 향한다. 약 40분 소요된다. 호텔에서 뷔페로 석식을 했디. 메뉴가 좋아 맛있다. 우리 부부는 3105호실이다. 층은 1층으로 좋다.
2020년 2월 9일 일요일 콜롬보에서 폴론나루와로 이동, 담불라 석굴사원, 폴론나루와 궁전, 옛불치사, 갈비하라
* 콜롬보 호텔
호수변 호텔이다. 조식 식당 곁에 드넓은 호수가 있다. 일찍 식사를 마치고 둘러보았다. 잔디밭과 야자수와 호수 조망대를 잘 조성해 놓았다. 호수변 의자에 앉아보니 참 낭만적인 분위기다. 작은 보트도 있다. 건물 곁에는 수영장도 있다. 인도에서부터도 호텔마다 수영장은 있는데, 수영복은 준비해왔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아 들어가진 못했다. 오늘부터는 스리랑카를 여행한다.
* 스리랑카 시골 버스정류장과 야자수
먼저 콜롬보에서 플론나루와로 간다. 가다가 담불라에 먼저 들러서 간다. 콜롬보 시가지를 벗어나자 야자수가 지천이다. 열매를 맺은 나무도 많다. 들녘에뿐만 아니라 야자수 농장도 있다. 야자수는 30년 동안 열매를 맺는다. 열매 1개에 한화로 700원 정도다. 음식재료로 사용한다. 이곳 라람들은 야자수 열매 1개로 2일 동안 요리해 먹는다. 야자수 울창한 곳에 시골 버스 정류장이 있다. 사람들이 서 있다. 남인도에서는 힌두교 신자가 많아 특히 여자들이 온통 천으로 두른 모습이 많았는데 스리랑카는 종교가 다양해서인지 여자 옷차람이 남인도와는 약간 다르다. 좀 편안해 보이는 자유복장이다. 스리랑카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카톨릭교 등 다양한 종교를 허락한다. 그리고 신자 숫자도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카톨릭교로 많다. 불교신자는 70%로 제일 많다. 국기에도 4개의 보리수 잎이 있는데 4개의 종교를 상징한다. 그리고 바탕의 피 색깔의 적색도 4개 종교가 같은 하나라는 의미다. 중앙의 사지는 숲의 왕을 상징하낟. 이 나라에는 사자가 1마리도 없는데 국기에는 사자가 있다. 국기의 깊은 뜻을 배우고 나니 서로의 종교에 대한 배려가 참 잘된 국가라는 생각이 든다.
스리랑카는 남부 아시아 인도의 남쪽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이다. 18세기 말부터 영국 식민지로 지내다 1948년 영국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하였다. 1972년 국명을 실론(Ceylon)에서 스리랑카공화국으로 바꾸고 영국연방에서 완전 독립하였다. 1978년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정식명칭은 스리랑카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이다. 북서쪽으로 만나르 만을 사이로 인도의 타밀나두 주와 마주 대한다. 동양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경치가 아름답고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교 등 고대 문명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문화의 보고다. 또한 세계 굴지의 보석 산출국이다. 1985년 수도를 이전하여 콜롬보는 행정수도이고,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코테는 입법과 사법수도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양 실크로드 요충지로 고대부터 주목 받아왔다. 인구는 남서부에 집중해 있다. 행정구역은 9개 주로 이루어져 있다.
국토 면적은 남한 전체의 3분의 2 정도다. 기후는 적도에 가깝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연중 고온다습한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은 27~28도 정도에 이른다. 지역에 따른 기후변화도 적은 편이다.
스리랑카의 의료제도는 병원비가 무조건 무료다. 외국인도 2일 동안은 무료다. 학교도 무료다. 콜롬보 대학은 무료에다가 오히려 1인당 월 5만정도의 생활비를 준다. 학용품도 정부에서 준다. 야생 코끼리가 많은 나라다. 민가에도 내려온다. 소금을 먹기 위해서다.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그래서 외딴집은 소금을 항상 병에 담아 문앞에 놓고 잔다. 그러면 밤에 코끼리가 내려와 먹고 간다. 코브라 뱀도 나온다. 가고가도 야자수가 많고 나무가 울창하다. 남인도와는 약간 다르다. 이곳 나무들이 남인도보다 더 크고 우람하다. 호주와 동일한 풍경이다. 신기한 풍경을 보며 스리랑카를 배운다.
* 스리랑카 도심 산정 부처상
콜롬보에서 폴론나루와까지는 6시간 소요된다. 그래서 여러 작은 코고 작은 도시를 거친다. 시골 도시를 지날 때 남인도보다는 거리가 질서 있다. ㅏㅇ인들이 나무하지도 않고 가게가 잘 정비되어 있다. 제법 큰 도시를 지날 때 도심 외곽 큰 산정에 부처상이 오롯이 앉아 있다. 타국에서보는 이색 풍경이다. 스리랑카의 불교신자가 70%라니 그것에 대항 증명이다.
* 스리랑카 휴게소에서 본 도로 풍경
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에 갔다. 통나무로 지어 상쾌하다. 화장지도 있다. 남인도에서는 화장실마다 화장지가 없었는데 스리랑카 화장실에는 휴지가 있다. 도로변에 나가보았다. 차들이 많이 왕래한다. 그 중에서 독특한 것은 시내버스 색깔이 2가지다. 붉은 시내버스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것이고, 하얀색 시내버스는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다. 날씨가 쾌청하다. 틈틈이 툭툭이도 지나간다. 인도에서는 오토릭샤로 부르는데 스리랑카에서는 툭툭이로 부른다. 두 나라 모두 4명까지 타는 택시다. 스리랑카의 툭툭이는 인도에서 도입한 것으로 요금은 400원 정도다. 저 택시는 남인도에서도, 스리랑카에서 매우 많이 있다.
* 스리랑카 거리 종교자
남인도에서도 스리랑카에도 도시나 시골 지날 때 내부분이 종교자의 의상차림이다. 지금 어느 도시를 지나는데 하얀천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른 여인이 지나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카톨릭의 수녀와 같은 차림이다. 이곳도 카톨릭 신자가 있다하니 아마도 그 종교으 여인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 불교 복장이었는데 보기 드문 복장이었다.
* 스리랑카 들녘 벼농사
들녘에 벼농사를 짓는 곳이 가끔씩 보인다. 남인도에서도 본 풍경이다. 식당에 나오는 밥은 한국과는 다르게 끈기가 없고 바시시해 맛이 없었다. 저런 풍경은 내 조국의 들녘과 유사하여 정겹다.
* 스리랑카 사망 알림표식 흰천
울창한 숲길에서 시골 마을 입구에 흰천을 걸어둔 것을 보았다. 그 흰천은 이웃의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알림표식이다. 다른 도로변에서도 저보다는 작지만 저런 모양의 흰천을 걸어둔 것을 보았다.
*스리랑카 밀림지대 도로
울창한 숲속 도로를 달려왔는데 지금은 완전 밀림지대를 달린다. 국립공원 근처의 도로다. 크고 우람한 나무들이 솟구쳐 오른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싱그러운 밀림지대의 도로가 상쾌하다.
* 담불라 석굴사원 외경
원래 일정은 콜롬보에서 폴론나루와로 먼저 가는데 지금은 담불라로 와서 석굴사원을 간다. 웅장한 산중 입구에서 계단을 많이 올라간 곳에서 담불라 석굴사원을 만났다. 기원 전 100년 경 바타가마니왕이 마누라디푸라에서 쫒겨난 후 머무른 곳으로 다시 귀환하게 되자 감사의 뜻으로 석굴사원을 건립하였다. 거대한 흑갈색 바위산 정상 부근에 뚫린 천연동굴과 극채색의 벽화, 그리고 수많은 불상이 우명한 곳이다. 신발을 벗어 맡기고 맨발로 입장했다. 데워진 바닥이 매우 뜨겁다. 산정인데로 매우 덥다. 타국이지만 신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다. 주변도 모두 우람한 산들로 둘러 싸여 있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아주 큰 통바위가 지붕처럼 상부를 덮고 있다. 그리고 하얀 5개의 석굴사원이 있다. 모두 통바의를 깎아서 세운 사원이다. 그 옛날 어찌 건축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담불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이 있는 도시다. 담불라는 스리랑카 중부 거점의 센트럴주 시기리야에 있는 고대도시 관광의 거점이 되는 작은 마을이다. 스리랑카 황금사원과 최대 석굴사원으로 유명하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다양한 불상과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석굴사원은 높은 바위산 중턱에 조성되어 있다. 제1굴에는 열반불과 힌두교의벽화, 제3·4굴에는 채색된 입불상과 좌불상 등 2,000년이 넘는 유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BC 1세기경 아누라다푸라에서 쫓겨난 바타가마니 왕이 이곳에서 수도 수복의 기회를 노렸으며, 아누라다푸라로 돌아가게 된 후 감사의 뜻으로 석굴사원을 건립한 것이다. 입구에 석탑이 있는데 원래는 그곳에 부처사리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단다. 이제 사원 하나하나안으로 들어가서 볼 것이다.
* 담불라 석굴사원 내경
첫 번째 사원에 들어가니 입구에 큰 부처가 누워 있다. 부처의 누운 와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열반상은 죽어서 누운 부처상이고 와불상은 그냥 누운 모습의 부처상이다. 부처의 열반상과 와불상이 다름을 처음 알았다. 그 구분은 발바닥을 보고 구분한다. 발가락이 나란히 있으면 열반상이고, 발가락이 좀 차이나게 있으면 와불상이다.
담불라는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이 있는 도시다. 담불라는 바위라는 뜻의 담바(Damba)와 샘이라는 뜻의 율라(Ulla)가 합쳐진 지명이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B.C 1세기 경 5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다양한 불상과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80m의 높은 바위산 중턱에 홀로 우뚝서있는 거대한 5개의 석굴사원에는 다양한 불교 설화를 다룬 벽화가 있다. 15~20여분 정도 바위산을 오르면 동굴사원 입구에 이르며 평지에 솟은 바위산이라 주변 숲의 경관이 좋다. 20Km 떨어진 시기리야 록도 멀리 보인다. 평지에서 우뚝 솟은 거대한 흑갈색 바위산에 있는데 ‘황금색으로 빛난다.’는 뜻의 ‘란기리(RAN GIRI)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기원 전 1세기경에 건조된 사원으로 그 당시 신할라 왕인 발라감 와라감바후 왕이 당시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로에서 타밀군의 침략에 추방당해 이곳 담불라로 피신한 뒤 피신해 타밀군을 무찌르고 왕권 회복을 꾀하였다. 담불라 석굴사원은 그 당시 5개의 동굴 피난처가 있던 곳이다. 다시 왕좌에 오른 바후 왕은 감사의 뜻으로 이곳을 사원으로 바꾸었다. 1번부터 5번 둥굴까지 하나의 바위에 연결되어 있다. 바위 위에다 하얀 옻칠을 하여 다양한 불교설화 벽화를 제작하였다. 하나의 바위는 불처님이 열반에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제1굴에는 열반불과 힌두교의벽화, 제3·4굴에는 채색된 입불상과 좌불상 등 1굴부터 4굴까지 열반불과 힌두교의 벽화, 채색된 입불상과 좌불상 등 2,000년이 넘는 유물들이 있다.
현지인들은 '담불라 가라' 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원 안 오른쪽으로 동굴을 따라 복도가 있고 5개의 동굴이 나란히 있다. 첫번째 동굴은 약 14미터정도의 자연석에 새겨 놓은 열반에 든 와불상이 있다. 벽에는 15세기에서 18세기사이에 그려진 프레스코 형식의 다양한 그림들이 남아 있다. 가장 크고 잘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2번째 동굴에는 다양한 신들의 조각상과 수많은 불상이 보존되어지고 있다. 천장 또한 프레스코 형식으로 부처의 삶을 그려 놓았으며, 이 벽화는 싱할라인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플론나루와와 캔디 시대에는 각 시대의 왕에 의해 여러 차례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담불라 석굴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처럼 동굴을 파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산의 자연 동굴에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고쳐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암벽에 홈을 파서 빗물이 동굴안으로 흘러들지 못하게 하고 동굴 내의 바닥은 고르게 정비하여 굴 속은 구석구석 하얀 옻칠을 하여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지나 벽화의 색이 바래면 그 위에 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렸는데 원래 있던 그림의 무늬를 그대로 활용한 경우도 있고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 경우도 있다. 불상을 포함하여 벽도 전면이 채색되었으며, 그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조는 아직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담불라 석굴 입장시 신발을 벗고 들어간다. 민소매 및 반바지 차림으로는 입장이 불가하다. 담불라 석굴 주변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있다. 먹을거리를 들고 사원에 입장하면 원숭이들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제1 석굴만 열반상이 있고, 나머지 4개의 석굴에는 와불상이 있다. 담불라의 5개 석굴사원은 내부가 크고 작은 규모로 서로 다르다. 1,2,4번 사원은 아누라다푸라 시대에 지어진 것이고, 3번은 캔디 왕조에, 5번은 영국식민지 시절에 캔디의 장관에 의해 창건된 것이다. 피난처가 시기리야 근방에 있는데 그 왕이 수도를 재탈환한 뒤 이곳을 화강암의 사원으로 바꾸었다. 부처님이 악마와 싸우는 모습들을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려놓은 벽화가 유명하며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제2 석굴의 마하라자 비하라 즉 위대한 왕의 사원이다. 각 사원 안에도 좌불상이 많은 곳이 있고, 입불상이 많은 곳이 있고 서로 다르다. 바위를 통째로 깊숙히 뚫어 이 대규모의 사원을 만들었다니 놀랍다.
제 1 동굴(데바 라자 비하라)
가장 오래된 석굴 사원으로 사원 최대의 불상인 열반들이 있다, 벽과 같은 자연석으로 조각된 열반상 전체 길이는 14m이다. 전신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발바닥은 빨갛게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상의 발바닥을 빨갛게 물들이는 특징이 있는데 이것은 기원전 5세기에 비자야 왕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의 손바닥이 새빨갛던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제 2 동굴(마하 라자 비하라)
폭이 약 52m, 깊이가 약 25m, 높이는 입구 부분이 약 6m이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낮아지는데 담불라 최대의 동굴이다. 동굴 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벽과 천장에는 석가의 생애 및 스리랑카의 역사에 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제 3 동굴(마하 알트 비하라)
18세기의 왕인 킷티 사리 라자하에 의해 지워졌으며 길이 9m의 와불을 비롯해 약 57개의 불상이 있다.
제 4 동굴(파스시마 비하라)
‘서쪽의 절’ 이란 의미인 이 동굴에는 좌상이 많다. 주 불상은 명상하는 부처상이다. 가장 작지만 아름다운 벽화와 조각품이 많다. 중앙에는 아름다운 색상의 불탑도 있다. 담불라 석굴을 처음 건설한 바라감 바후 1세의 부인 소마와티의 귀한 소장품이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설로 1980년 도굴 당하기도 했다.
제 5 동굴
1915년에 지어진 가장 근대의 절이다. 와불상과 11기의 부처상이 있다. 가장 늦게 건축한 신의 사원으로 한때는 창고로 쓰이기도 했다.
5개의 석굴마다 독특한 특징으로 건축된 담불라 석굴 사원을 다 볼아보고 나왔다. 참으로 경이로운 석굴 사원이다.
* 담불라 석굴사원 하산길
담불라 석굴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매우 힘든다. 오를 때도 그랬다. 거대한 산정에 있으니 그렇다. 하산길에 본 주변의 산들도 울창하고 거대하다. 마지막 계단에서 원숭이가 올라간다. 사람을 보아도 놀라지 않고 당당히 올라간다. 독특한 풍경이다.
*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담불라 야채시장
담불라 석굴에서 나와 담불라 시가지를 지나며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야채시장을 지난다. 버스가 시장을 빨리 통과해서 끝부분의 과일가게만 찍었지만 매우 큰 시장이었다. 이 시장은 나중에 시기리야에서 캔디로 갈 때도 보았다. 이곳 큰 야채시장에서 스리랑카 콜롬보로 야채와 과일을 보낸다.
* 폴론나루와 시가지
폴론나루와 시가지에 들어왔다. 매우 깨끗하다. 중세 불교 최대 유적지로 콜롬보에서 플로나루와까지는 6시간 소요되는 먼 거리다. 폴론나루와는 신할리 왕조가 인도의 침공을 받아 피신해 내려와서 만든 수도다. 태국이나 미얀마 승려들이 찾아와 공부하던 찬란한 불교 도시로 그 유적이 구시가지에 남아잇다. 거대한 인공 저수지 파라쿠마 부근에 위치해 있다. 폴로나루와에는 쿼드랭글 유적군(갈포타, 옛 불치사 흔적 하타다게 등), 폴로나루와 궁전, 랑카틸라카, 포토굴 비하라&수수께끼 석립상, 갈 비하라 등 유적이 많다. 폴론나루와는 화려했던 중세시대 싱할라 왕조의 수도였다. 12세기 건축양식의 사원과 수도원 등의 건출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대표 관광지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궁전이 있는 왕궁, 스리랑카의 최대 석비 갈포타를 볼 수 있는 쿼드랭글, 14세기에 세워진 바위 위 서있는 랑카틸라카, 포토굴비하라, 갈비하라, 수수께끼 석립상 등이다. 폴로나루바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는 368년 이후 실론의 중심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폴로나루와는 9세기경 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수도가 아누라 다푸라에서 이 곳으로 옮겨졌다. 993년에 아누라다푸라가 파괴된 이후부터 건설된 고대 도시로 스리랑카의 두 번째 수도였다. 폴로나루와 고대도시에는 촐라 왕조가 세운 브라만교의 기념물뿐 아니라, 12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만든 전원도시의 놀라운 기념물 폐허가 남아 있다.
13세기 후반까지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나 타밀족의 침공을 피하여 다시 천도했기 때문에 폐허가 되었다. 12세기경의 대규모 불교유적이 복구 중이며 옛 관개용 저수지가 마을 주변에 남아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도시 근처에 마하웰리 강이 흐른다. 고대 실론의 수도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현대에 들어와 그 중요성을 되찾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쌀과 담배가 경작되는 주변 농업지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근처의 오래된 저수지가 복구되면서 현대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철도역이 있으며 대부분 12세기에 건립된 많은 불교사원과 불교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유적으로는 높이 24m, 두께 3.5m의 담으로 둘러싸인 길이 52m의 건축물이 훌륭한 것으로 꼽힌다. 그밖에도 조심스럽게 발굴되어 보존되고 있는 많은 유물들이 있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몇 개의 문명에 대해 말해 주고 있는데, 특히 브라만교를 신봉한 정복 세력 촐라 왕조의 문명과 12세기와 13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신할리즈족의 문명을 찾아볼 수 있다. 12세기에 과대 망상적인 군주 파라크라마바후 1세가 건설한 이 어마어마한 수도는 역사상 가장 놀라운 도시 건설 중 하나이다. 이는 그 특별한 규모 때문이기도 하고 건물과 자연환경의 매우 특수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는 불교와 신할리즈족 역사의 성지이기도 하다. 폴로나루와 고대 도시의 전성기는 12세기였다. 당시 두 군주가 연속하여 기념물들을 남겼다. 파라크라마바후 1세(1153~1186)는 3중벽으로 된 성곽 안에 굉장한 전원도시를 만들었다. 이 도시의 궁전과 성지들은 전원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뒤따르는 기념물들은 그의 치세 기간에 만들어졌다. 거대한 불상을 잘 보존하고 있는 커다란 벽돌 구조물 랑카틸라카, 신할리즈족 예술의 걸작으로 꼽히는 거대한 바위 조각품이 있는 갈 비하라, 자타카(부처의 전생을 묘사한 설화)를 묘사한 13세기 벽화인 티반카 필리마게 등이 그것이다. 니삼카말라는 파라크라마바후 1세의 것만큼 정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뛰어난 기념물들을 빠르게 건축했다. 그중 지름 175m, 높이 55m의 거대한 사리탑인 랑코트 비하라가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이다. 그 배치와 규모가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다가바(석가의 유골을 넣은 성 건조물)를 연상시킨다. 이 황금시대 이후 폴로나루와 고대도시는 마지막에 쇠퇴하기까지 1세기 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도시는 타밀족과 마가족에 의해 침략당하고 위태로운 체제에 재정복당했다. 쿠루네갈라에서 정권을 세운 브후반나이카부하 2세가 침략한 13세기 말까지 이 도시는 정기적으로 수도가 되었을 뿐이다. 폴로나루와는 10~12세기 당시 신할리 왕조의 고대도시였다. 당시 상당한 규모의 불교 도시로 영화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시기리아 바위요새로도 유명해졌다. 오랜 역사의 고대도시에 역사에서 우리는 중식을 하고 모두 탐방할 것이다. 보람되고 뜻깊은 여정이다.
* 폴론나루와 중식식당 주변 풍경
중식식당에 올 때 보았던 고무나무가 식당 근처에도 많다. 담불라에서 석굴사원을 보았는데 식당 건물도 돌집이다. 아마도 이곳 주변에 돌이 많은가 보다. 매우 울창한 ㅏ누 숲이 상쾌하고 시원하여서 잠시 쉬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했다. 여기서 폴론나루와 궁전까지는 1시간 20분 소요된다.
* 폴론나루와 궁전
폴론나루와 궁전은 그 터만 남아있다. 방, 화장실, 연회장 등 뼈만 남은 앙상한 유적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궁전은 스리랑카 중앙부의 고대도시 폴로나루와에 있는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궁전 유적이다. 파라크리마바후 1세의 궁전의 흔적과 의장, 집회장, 목욕탕, 화장실 등이 있다. 화장실은 오늘날의 무릎 꿇고 앉아서 보는 재래식 화장실과 유사하다. 직접 앉아서 자세를 취해보니 아주 편안하디. 그 옛날의 빼어난 건축 기술에 놀랍다. 중세 스리랑카 왕국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궁전이다. 파라크라마 사무드라 호숫가의 레스트 하우스 동쪽에 있다. 니산카 말라 왕의 목욕장과 벽돌로 지은 집회소 등이 있으며, 동쪽 구성벽 내부에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궁전 유적이 있다. 궁전은 한 변이 각각 45.7m인 정사각형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3층 벽까지만 남아 있다. 36개의 돌기둥은 당시의 홀 지붕을 받치고 있었던 것이며, 방이 50개나 되었다. 서기 10세기 남인도의 강성한 촐라왕조의 등장으로 아누라다푸라에서 남동쪽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긴 싱할라 왕조의 파라쿠라마 바후 1세는 이곳에 거대한 왕궁을 만들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와 유사하다. 이 왕궁의 본래 규모는 가로 31m, 세로 13m의 규모로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인 7층의 높이 30m에 육박하는 거대한 왕궁이었다. 30개의 튼튼한 벽과 기둥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엔 총 50개의 방과, 두개의 거대한 홀이 있었다. 3층까지는 벽돌로 지어졌고, 나머지 4개의 층은 나무로 지어졌다. 흔적만으로도 웅장하고 대단한 규모다 조금 떨어진 건너편의 직사각형 큰 연화장까지 둘러보았다.
* 폴론나루와 옛 불치사
폴론나루와 궁전에서 5분 거리의 근거리에 있다. 이곳도 궁전처럼 옛 불치사 흔적만 남아있다. 이곳은 부처의 치아가 두 번째로 모셔졌던 곳이다. 3세기경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불치를 모셔왔다. 여러 곳을 거쳐 지금은 캔디 불치사에 모셔져 있다. 그러니까 이곳 폴론나루와 불치사는 부처의 치아가 캔디 불치사로 옮기기 전까지 보존되어 있던 전당이다.
스리랑카의 최대 석비 갈포타를 볼 수 있는 쿼드랭글는 스리랑카 중앙부의 고대도시 폴로나루와에 있는 불교유적이다. 갈포타, 사트마할 프라사다, 하타다게, 바타다게, 와다다게, 라파 만다파야, 투파라마 등이 있다. 폴론나루와에서 가장 예술적인 건물이다. 도로에서 2m 정도 높은 곳에 서 있는 아름다운 건물이다. 궁전 북쪽 일대에 펼쳐져 있으며, 싱하리 왕조 때는 불치사가 있던 지역이다.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투파라마는 불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옛 싱하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벽돌 건물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여러 모습이 그려져 있다. 투파라마 북동쪽에는 둥근 바타다게 불당이 서 있다. 네 군데 위치한 입구 계단 앞에는 반월석과 가드 스톤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네 군데에 모두 좌불상이 있다. 불당 건너편에 불치사의 유적인 하타다게가 있고 하타다게 서쪽에는 비자야 바후 1세가 세운 불치사 유적 아타다게가 있다. 하타다게 동쪽에 있는 스리랑카 최대 석비인 갈포다는 니산카 말라 왕이 미힌탈레에서 가져오게 한 것인데, 장식에서 힌두 문화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 불치사는 매우 크다. 광범위한 자락으로 앉았던 옛 흔적이 기둥으로 또는 건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불치가 있던 장소는 신발을 벗고 입장해야 한다. 그리고 본당에는 목이 잘린 흔적이 있는 좌불상이 있는데 그곳도 신발을 벗어야 입장한다. 그 옛날 옮기던 큰 돌도 전시되어 있다. 탑도 오롯이 솟구쳐 오른다. 다음 여정에서는 현재 불치가 보존되어 있는 캔디의 불치사를 꼭 탐방할 예정이다.
* 폴론나루와 갈 비하라
갈 비하라 사원은 거대한 바위 사원이다. 갈 비하라 사원 입구에는 큰 호수가 있다. 한참으로 걸어가니 긴 바위가 사원을 품고 있다. 갈은 바위, 비하라는 사원을 뜻한다. 거대한 바위 하나에 부처의 탄생부터, 활동, 열반까지 부처 4개를 조각해 놓았다. 이 4개의 불상이 유명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불교사원으로 거대한 화강암를 깎아서 만든 입상, 좌상, 부조상 등의 부처상이 있다. 묵상을하고 있는 좌불상,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길이가 13m인 부처의 누운 열반상, 완만한 신의 자태가 편안함을주는 입상과 좌상도 잇다. 긴 형상의 열반상 이 마지막 끝에 있다. 플론나루와 불교 유적을 대표하며 돌 조각 기술의 정수를 보는 사원이다. 갈 비하라는 파라크라마바후왕이 건립한 것으로서, 바위면에 조각한 열반상, 입상, 좌상의 거대한 불상이 있다. 높이가 4.6m인, 한가운데 팔을 교차 시키고 서 있는 조각은 석가의 수제자인 아난다이다. 곁에 누워 있는 그의 스승 석가가 열반에 들어 슬픔에 젖은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눈 주위나 교차 시킨 팔에서 그의 슬픔이 전해져 온다. 연꽃 대좌에 서 있어서 제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석가라는 설도 있다. 높이는 7m이다. 그 옆에 13m의 열반상이 바로 부처이다. 유선형의 평온한 자태로 누워 열반에 들려 하고 있다. 그 얼굴은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조각상 하나하나가 큰 바위를 깎아서 파서 만든 것이라니 기막힌 건축물이다. 일정 선에 줄을 쳐 놓았다. 사진으로 한 창에 담기 어려울 만큼 광폭의 사원이다. 간신히 사진 한 장에 전경을 담아 가지고 나오면서도 그 놀라운 광경을 다시 보고 싶어 자꾸 바라보았다.
* 폴론나루와 갈 비하라 근처에서 먹은 야자수 열매음료
갈 비하라 사원에서 걸어나와서 호수변에 있는 가게에서 야자수 열매의 음료를 먹었다. 노란 야자수 열매를 가이드가 하나씩 사 주었다. 매우 시원하고 상큼하고 맛이 있다. 현지에서 먹는 야자수 열매가 스리랑카의 자연 맛 그대로 담백하게 전해진다.
* 시기리야 롯지 투숙
시기리야 롯지는 주변 경관이 참 좋다. 그리고 수많은 롯지 건물이 넓은 자락에 들어서 있다. 수영장, 호수, 짙푸른 나무숲이 산책 걸음을 끌어 당긴다. 피곤하지만 남편과 함께 어스름 롯지의 낭만의 즐기며 한 바퀴 산책했다. 저녁에는 맛있는 특식 메뉴로 풍성한 뷔페 석식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석식 후 남편이 먼저 숙소로 갔는데 나는 혼자 207호 우리 부부 숙소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맸다. 몇 골목을 헤매도 200단위 롯지가 안 보인다. 어느 골목에서는 롯지 밖의 민가가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 무서워서 얼른 그 골목을 뛰어 나왔다. 세계여행에서 밤시간에 호혼자 다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직원을 만나 물묻기도 하고, 일행을 만나서 묻기도 하여 찾아왔다. 로비에서 먼 곳은 아닌데 입구에 100단위의 롯지 건물이 있어 그 뒤의 200단위 롯지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도 잊지 못할 밤의 추억이다. 방에 들어와 남편에게 말했더니 걱정해준다. 내가 어린아이처럼 안쓰러웠는가보다. 내가 길눈이 좀 어둡다. 남편도 어둔 길에 ㅅ왔는데 한번에 찾아 왔다는 것이다. 남편이 나보다 길눈이 밝아서 그렇다. 우리 부부가 함께 70고개 전후로 늘어가면서 서로 챙겨주는 것은 무언의 불문율이다. 남편은 다음부터는 꼭 저녁시간에는 나를 챙겨서 데리고 다닌다고 다짐했다. 걱정을 끼쳐주어 미안하다. 참 고마운 남편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만큼 우리가 유숙한 시기리야의 롯지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큰 롯지라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낭만의 롯지라고 곱게 품고 행복한 잠을 잤다. 욕실 물이 참 매끄러운 단물이어서 머리를 감았는데 머릿결이 참 매끄럽고 좋다. 기분 좋은 밤이다.
2020년 2월 10일 월요일 시기리야 바위요새, 시기리야 록 등정, 캔디 불치사
* 시기리야 롯지의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조식을 마치고 주변을 산책했다. 여전히 짙푸른 나무숲이 이국의 낭만을 더해준다. 오늘은 시기리야 록을 보고 캔디로 간다.
* 시기리야 들녘
스리랑카의 역사 깊은 도시 시기리야다. 시기리야 바위 요새인 시기리야 록으로 간다. 시기리야의 아침 푸른 들녘이 참으로 평화롭다. 가끔은 코끼리도 나오고, 원숭이 등 여러 동물이 도로에 나온단다. 지금도 버스가 달리는 도로에는 공작새도 가로질러 건너가고, 들녘에는 개도 뛰어 다니고, 식물도 동물도 모두 행복한 풍경이다.
시기리아는 사자산이란 뜻이다. 고대도시로 푸른 초원에 우뚝 솟은 시기리아의 상징이다. 199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되었다. 카샤파왕의 피난처이자 바위궁 성터 로 시기리아 미녀도, 정상 궁전터 등이 있다. 카시야파 왕의 성 유적과 함께 있는 불교 고고학 유적지다. 불교 승려들의 수련장으로 유명했던 고대의 시기리야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에 오른 카샤파는 동생의 복수가 두려워 시기리야 바위산 꼭대기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다. 시기리야는 바위산 요새와 더불어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작 '시기리야 레이디'로 유명하다. 시기리야 레이디는 5세기에 그려진 아름다운 풍취의 프레스코화로 요정 압사라와 시녀들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시기리아'라는 말의 어원은 '사자(Sinha)'와 '목구멍(Giriya)'의 합성어로 '사자 바위'로 알려진 천연 요새 왕궁이다. 400년 동안 전설로만 전해오던 이 바위는 19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높이가 200m에 이르는 이 거대하고 웅장한 바위에 기원전 475년 카사파 1세가 요새 겸 성채를 건축했다. 바위의 정상에는 카사파 왕의 연회장, 목욕장, 왕궁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시기리야, 즉 '사자의 암석'은 매혹적인 고고학 유적으로, 그 중심부에 있는 입방체 형태의 바위 언덕이 이곳을 온통 지배하고 있다. 화산의 폭발로 생성된 이 바위 언덕의 높이는 370m로, 네 면이 다 깎아지른 듯한 수직이다. 꼭대기 부분의 평평한 표면 넓이는 1.4헥타르에 이른다. 시기리아 바위요새로 폴로나루와도 유명해졌다. 시기리아는 5세기경 신할리 왕조의 왕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바위산 자체가 하나의 왕궁인 셈이다. 시기리야는 4세기의 불교 수도원이었으며, 주위에 조성된 단지는 한 세기 이후에 카시야파 왕이 세운 도시일 것이라 여겨진다. 이 유적지와 정글 사이에는 정원들이 있어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진흙으로 된 해자가 정원 가장자리 경계선을 긋고 있다. 바위 언덕 꼭대기에는 카시야파 왕이 요새 삼아, 혹은 유희용 궁전 삼아 지은 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의 저수지 유적이 남아 있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왕이 죽은 후, 건물들은 예전처럼 수도원으로 되돌아갔으나 16세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시기리아는 기원전 475년 부왕을 살해한 왕 카샤파 1세가 피난을 위해 사자바위 위에 세운 거대한 요새도시다. 물을 공급해주는 저수지 기능을 하던 물의 정원과 테라스의 정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프레스코화 유적의 18미녀도, 사자의 입구, 정상에 자리한 카샤파 왕의 연회장, 왕궁 등의 유적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드 웅장하며 정상에서는 시기리아 지역의 절경을 볼 수 있다. 암벽 한쪽 면을 깎아 만든 테라스에는 '거울의 벽'이라 알려져 있는 길이 140m, 높이 40m의 벽이 있다. 이 벽의 벽토 위에는 머리에 꽃을 장식한 500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나타낸 프레스코화 스무 점이 그려져 있다. 과거에는 최대 500점의 프레스코화가 있었던 듯하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라져 버렸다. 다양한 색으로 채색된 벽화들은 수백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들이 쓴 사랑시가 벽에 남아 있다. 테라스 위에는 폭이 좁고 철로 만든 나선형 계단이 돌로 된 사자의 두 앞발 사이에 놓여 있다. 이 두 앞발은 '사자의 문'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인데, 원래는 사자의 머리도 달려 있었다. 방문객들은 아마 크게 벌어진 사자의 입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던 것 같다. 계단을 통해 관광객들은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주변의 평원들 너머로 몇 마일이나 멀리 펼쳐져 있는 경치를 즐길 수 있다. 계단은 몹시 좁아서 한 계단에 한 발만 겨우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이다. 높은 곳을 힘들여 올라가야 한다. 등정 시에 최대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힘든 경우 포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포터의 도움을 받으실 경우 $5~10 팁을 개별적으로 지불한다. 시기리야에 대한 공부를 하며 상쾌한 들녘을 달려간다. 멀리 시기리야 록 바위가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앉은 좌측편으로 아침 운무에 서려 아련한 정경으로 뜬다. 평원 위의 오롯한 시기리야 록 비경이다.
* 시기리야 바위요새 물의 정원
시기리야 바위요새에 입장하니 맨처음 보이는 것이 해자처럼 길고 넓은 폭의 물이다. 강 같기도 하고 시내 같은 물이 있고 그 물 위 다리를 건너서 들어간다. 안으로 더 걸어들어가자 길 양편으로 균형있게 잘 조성한 연못이 있다. 이것은 시기리야 바위요새 물의 정원이다. 사각형 연못으로 혹자는 궁중 목욕탕이었다고 하고, 혹자는 건기에 사용할 물의 저장소였다고 한다. 어떤 용도였던 지금 보아도 물이 있어 아름다운 정원이고, 또한 그 옛날 매우 과학적인 정원을 만든 것에 대하여 놀랍다. 물의 정원은 바위요새인 시기리야 록으로 가는 내내 도로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졌다. 거의 끝부분에서만 잔디 광장으로 조성했다. 시기리야 요새는 연꼴 수로와 석굴 사원 등으로 조성되었다. 모두 거대한 록 아래의 상큼한 비경이다.
* 시기리야 록
시기리야 록은 걸어들어가는 내내 도로 중앙 끝에서 웅장한 품으로 우리를 이끈다. 역광으로 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운무 그윽한 풍경이다. 간간이 계단이 나오면서 서서히 지대가 높아진다. 가까이 다다르자 계단은 더욱 많아지고 가파라진다. 크고 작은 바위도점점 많아진다.
시기리야 록은 스리랑카 세계유산 7개중 하나다. 5세기에 건설된 180미터 바위절벽 왕궁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왕 카샤파 1세에 의해 세워진 수도의 폐허다. 자신의 위세를 높이고자 했던 카샤파 왕이 바위의 아랫 부분을 깎아 사자 모양으로 만들고 정상에 궁전을 지었다. 예술가이자 정신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사파왕이 부왕을 죽이고 왕좌에 오른 뒤 후환이 두려워 바위 꼭대기에 세운 궁전터이다. 해발고도 370m, 산 위에 암산의 높이만 200m이다. 넓은 마당에서 사자바위 절벽에 판 계단 1200개와 60도가 넘는 가파른 철제 계단을 올라가면 암산 위에 궁전 터가 있다.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 받는 시기리야 벽화 때문이다. 시기리야 벽화는 왕의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압사라라는 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시기리야의 숙녀들'은 당초 5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훼손돼 18명만 남아 있다. 테라스 위 바위에 설치된 철계단 및 돌계단을 약 50분 정도 올라가야 록의 정상 궁전터에 도달한다. 폭이 좁고 나선형 철계단으로 교행하기도 힘들고 매우 위험하다. 개인적인 신체 특성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부득이하게 일정 참가가 어려우신 분들은 오르기 전 미리 가이드와 상의하란다. 나는 다리가 좀 약해서 일행과 남아 오르지 않기로 했다. 남편만 올라가기로 했다. 바라보기도 아슬한 시기리야 록이다.
* 시기리야 바위요새 정원
시기리야 바위요새는 시기리야 록으로도 부른다. 그 옛날 카샤파 1세가 왕이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후대의 왕이 되기 위해 이곳에 궁전을 건축한 것이다. 평화로운 시절이었다면 저토록 큰 바위를 깎아 바위절벽 정상에 궁전을 짓지 않고 이곳 낮은 편지의 정원에 궁전을 지었을 텐데 슬픈 역사의 유적이다. 카샤피 1세는 그의 당시 왕이던 아버지에게 아들을 생산한 두 부인이 있었는데 첫쨰 부인의 소생이었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째 부인 소생의 아들을 왕으로 계승하 기미가 보이자, 카샤파 1세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자신이 와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도망온 곳이 이곳 시기리야 바위절벼이다. 동생이 찾지 못하도록, 와도 오르지 못하도록 거대한 바위 위를 다듬어 궁전을 짓고 피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카샤파 1세도 스르로 왕이 되긴 했지만 이곳 바위요새 록의 정상 궁전에서 스스로 자살했다. 왕자의 난과 같은 스르픈 비극의 유적이다. 시리리야 바위요새 정원은 매우 넓다. 물의 정원, 바위정원, 잔디 정원 등 울창한 나무숲과 함께 비경을 이룬다. 그 정원의 중앙 도로를 걸으며 그 옛날 카샤파 1세 왕의 슬픈 족적을 밟는 것은 타국이지만 시린 역사체험이다. 이런 비극이야 세계 여러 국가의 역사에도, 내 조국의 역사에도 등장하니 인간이 사는 지구상에는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 시기리야 바위요새 바위 정원
시기리야 바위요새 입구에서 록에 이르는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록 바로 아래 이곳 바위요새 정원까지 매우 많이 걷는다. 계단도 많았다. 육중한 바위가 예술조각품처럼 바위요새 록 밑에 늘어서 있다. 담불라에서부터 아니 스리랑카와 남인도 곳곳에서 바위가 많은 지역을 보아왔는데, 지금 눈앞에서도 거대한 바위군락을 본다. 시기리야 지역엔 돌이 많다. 그래서 돌의 정원도 조성한 것이다. 시기리야 바위요새는 돌과 바위가 많아서 경사진 곳에 돌이나 벽돌로 장치하여 완만하게 조성했는네 그 형상이 테라스처럼 생겨서 테라스가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도 있다. 바위 곁에는 굴도 많아 불교 수행처로 쓰였다. 정말 크고 작은 바위로 정원을 잘조성해 놓았다. 바로 이곳이 시기리야 바위정원이다.
* 시기리야 록 등정
이제 눈앞에 다다른 시기리야 록을 등정해야 할 순간이다. 나는 전날 담불라 석굴 오르내릴 때 좀 무리했는지 다리가 아프다. 그래서 가파른 철제 계단 1400여개를 오를 자신이 없어 밑에서 기다렸다. 록 아래 쉼터 의자에 앉아서 나처럼 오르지 못하는 우리 일행과 담소를 나누었다. 주인 없는 개가 우리들의 가방을 자꾸 냄새 맡는다. 짐을 모두 버스에 놓고 와서 줄 아무 것도 없어서 그냥 돌려보냈다. 남인도나 스리랑카 사람들은 동물을 신처럼 생각한다.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이 행복한 국가다. 시기리야 록에 남편만 등정한다. 잘 다녀오겠다고 손을 흔들며 올라가는 남편이 참 자랑스럽다. 노약자는 결코 오르기 힘든 록이다. 70도 각도의 아주 가파른 계단도 있고 적어도 1200에서 2000개라는 말까지 그야말로 철과 돌 계단은 엄청나게 많다. 록 입구 오르기 전에만 남편이 찍어온 바위 절벽의 계단만도 아슬한 비경이다.
* 시기리야 바위요새 정상궁전터
스리랑카 섬 나라의 청청한 하늘과 저 아래의 광활한 시기리야의 초록 평원, 그리고 거기 바위절벽 정상 궁전터가 시린 비경이다. 얼마나 많은 희생으로 이 바위를 깎았을지, 얼마나 큰 고통으로 카샤파 1세 왕은 이 궁전을 건설했을지 참 아슬한 전설이다. 어떻게 바위를 깎아 방을 만들고, 연못을 만들었을까. 바위 정상 그 어디에서도 물이 흘로들어 오지 않는데 물은 어디서 흘러 고인 걸까. 남편이 촬영해온 사진을 보는 것만로도 아득한 전설 앞에 선 듯하다. 내 성치 않은 다리 사정으로 오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지만 이토록 놀아운 광경을 촬영해온 남편에게 참 고맙다. 그리고 녹녹치 않은 70대 초반 노년의 나이인데 젊은이도 힘든 거대한 바위절벽 길을 용감하게 오른 남편이 참으로 자랑스럽다. 참 훌륭하신 분이라고, 일행 여자분이 남편을 칭찬해주는 말을 들으니 더욱 흐뭇하고 기뻤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남편, 앞으로도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다.
* 시기리야 록 하산
시기리야 하산 길은 장엄하다. 바위절벽을 타고 내려오는 그 길이 쉽겠는가. 오름 못지 않은 아슬한 비경이다. 바위절벽 길 입구에는 양편으로 사자 발이 새겨져 있다. 시기리야가 사자의 암석이라는 뜻이다. 사자의 무서운 위용을 드러내는 형상이다. 카샤파 1세 왕은 그렇게 정상궁전터를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중국 계림 갔을 때 계림 시가지 조망 전망대 산정을 오르는 계단이 500개였다. 그때 참 힘들게 오르던 기억이 저 아슬한 계단에 접목 된다. 계림보다 더 많은 계단, 더 가파른 계단이기에 1시간여 오르고 1시간여 내리는 시기리야 록은 강한 인내와 강한 건강을, 강한 다리를 요구하는 도도한 역사 현장이다. 나의 남편 유기섭 수필가님은 당당하게 저 아슬한 바위절벽 길을 오르고 내려왔으니 정녕 몸도, 다리도, 정신도 건강한 남자라고 자부해도 될 듯하다. 참 행복한 순간이다.
* 시기리야 시가지
이제 시기리야를 떠나 캔디로 이동한다.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된다. 시기리야 시가지를 지나간다. 아담한 도시다. 도심에 큰 불상이 있다. 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서 여행 내내 많이 보아온 정경이다. 담벽에 불교 그림을 그려놓은 곳도 있다. 고풍스런 역사가 담긴 시기리야다.
* 스리랑카 도로변 대형부처 사원
지난 번에 이곳에 들어올 때도 지나만서 보았던 대형부처 사원을 나가면서 또 다시 본다. 도로변에 거대한 종과 불상이 금빛으로 빛난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오기 전 담불라 시가지에서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야채시장도 보았다. 스리랑카 콜롬보에 보내준다는 거대한 야채시장이다. 어제 들어갈 떄도 보았던 그 시장이다. 끝없이 야채시장 골목이 지나갔다. 시기리야와 담불라는 이웃한 도시다. 이곳 주변에는 큰 규모의 바위산이 있다. 담불라에서 보았던 석굴사원의 그 바위 외관과 같은 형상의 바위가 산정에 있다. 이곳 주변에서는 바위가 많음을 증명한다. 대형부처 사원과 함께 근엄한 비경이다.
* 스리랑카 전통음식 뷔페 중식
캔디에서 전통음식 뷔페로 종식을 했다. 한국음식에 가까운 요리로 우리를 반기는 식당이 고마웠다. 음식뿐만 아니라 과일, 아이스크림까지 완벽한 메뉴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수박이 남인도와 스리랑카에서 많이 나오는 과일이다. 가끔은 사과와 오렌지도 나온다. 남인도보다 스리랑카가 더 남쪽 나라여서 그런지 과일들이더 달고 맜있다. 특히 파인애플은 인도와 스리랑카 모두에서 무척 달았다. 이번 남국 여행의 맛있는 식사도 이제 거의 마지막이다. 내일이면 콜롬보로 가고, 거기서 국제선 인천행 귀국 항공을 탑승해야 한다. 모두 여정의 마지막으로 아쉬운 시간이다.
* 캔디 들녘의 벼농사와 야자수
중식 후 캔디 외곽의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하고 길 건너편의 천연재료의 숲과 천연재료를 파는 건물로 갔다. 직원이 나와서 2층 실내에서 스리랑카의 천연 물품을 소개할 때 창문 밖으로 본 캔디 들녘의 벼농사와 야자수 풍경이다. 캔디로 이동하며 수없이 보아온 풍경인데 정지됭 공간에서 자세히 보니 참으로 평화롭게 아름다운 정경이다.
* 캔디 천연재료의 식물들 숲 탐방
스리랑카의 천연재료의 숲에는 여러 가지 특이한 식물들이 있다. 계피나무 등 소중한 재료를 생산할 수 있는 식물들이다. 물론 이곳은 심어서 기르는 곳이겠지만 스리랑카에서 자생하는 천연재료의 식물들이라니 신기하다. 그런 재료들로 만든 물품의 가게도 둘러보았다.
* 캔디 시가지 풍경
캔디 시가지를 관통한다. 캔디는 고산지역으로 기온이 사철 23도 정도로 부자들이 사는 도시다. 외적인 풍경에서도 느껴진다. 캔디는 스리랑카 제2의 도시로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다. 실론 최후의 왕조가 있었으며 지금도 왕궁, 사원, 민속무용 등이 훌륭히 보존되고 있다. 도심 시가지에 툭툭이 택시와 오토바이, 자가용 등 도로가 복잡하다. 여기 오기전에 무슬림 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소도시도 지나왔다. 그 도시에서는 여자들이 머리를 감싼 긴옷차림이었다. 종교가 다양하고 서로의 종교를 국가 스리랑카다. 태극기를 상가마다 걸어둔 풍경도 보였다. 스리랑카 독립기념일이 2월 4일이어서 그날 걸어둔 것이다. 시가지에는 제복의 학생들도 지나가고 종교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도 있다. 버스 안에서 캔디를 배운다.
* 캔디 도심 불치사 앞 강변 하교하는 제복의 학생들
캔디 불치사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큰 강변에 시민들이 많이 서 있다. 아마도 버스 정류장인 듯하다. 그런데 하얀 제복의 남녀 학생들미 많다. 저 하얀 제복의 학생들은 국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다. 그러니까 우수한 학생들이다. 스리랑카 학교는 모두 오전 7시 30분에 시갖하여 1시 30분에 하교한다. 더워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하교 무렵에는 교통이 매우 복잡하단다. 우리도 그 시간대에 시가지를 벗어나려고 무척 신경써서 달려왔다. 다행히도 캔디의 불치사는 바로 곁에 있다.
* 캔디 불치사 외경
캔디 불치사 앞에는 웅장한 영국호텔이 있다. 시간관계로 불치사를 보고 나와서 좀더 자세히 볼 것이다. 불치사를 입장하여 걸어 들어간다. 입구에서 한참을 걸어갔다. 불치사는 호반의 북쪽에 있는 백아의 화려한 건축을 자랑한다. 옛날 인도의 한 왕녀의 머리카락 속에 싸여 보존되었다는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매년 7~8월에 걸쳐 10일 동안 열리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는 이 치사리를 받드는 행사로 그 다양한 색깔의 행렬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불치사로 다가가는 길에 청청한 하늘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쬔다. 불치사는 부처의 치아가 보존된 사찰이다.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나무가 크고 우람하다. 하얀 건물도 웅장하다. 한참을 걸어간 곳에서 불치사를 만났다. 건물 앞에는 캔디 도심에 조성한 큰 인공호수가 있다. 캔디는 고산지역이어서 산언덕에 집들이 있다. 푸른 숲과 함께 고운 정경이다. 불치사는 사찰도 아름답지만 그 주변도 그렇게 아름답다.
* 캔디 불치사 내경
불치사는 맨발 입장이다. 그리고 원래 입장시 허락하는 복장은 긴 바지에 민소매가 아닌 하얀 웃도리 옷이다. 자국민에게는 지금도 그렇게 요구하는데 외국인에게는 흰옷이 아니어도 허락한다. 나는 그래도 이 나라의 종교예법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흰옷을 입었다. 불치가 보존된 전당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 이곳 전당 앞에서 1m 뒤에 부처의 치아 보존되어 있다. 문이 닫혀 보이지 않는다. 인도에서 가져온 불치다. 1년에 1회 불치를 보여준다.
분홍빛 벽에 붉은 기와를 얹은 전형적인 싱힐라 건축양식의 사원으로 내부에 부처의 치아를 담은 금빛 사리함이 있다. 탑 모양의 사리함은 루비와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등으로 장식되어 있고, 둘레에 7겹의 황금띠를 둘렀다. 이곳에 모셔진 부처의 치아는 362년 인도 남부 칼링가왕국에서 보내온 것이다. 당시 칼링가 왕국은 대기근과 전쟁이 그치질 않았는데, 어느날 국왕의 꿈에 부처가 불치(佛齒)를 스리랑카로 보내면 기근과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왕은 신통력이 있는 헤마말라 공주를 시켜 불치를 스리랑카로 보냈다고 한다. 이 때 불치는 아누라다푸라의 담마찻카에 모셔졌으며, 매년 무외산사에서 불치제를 올렸다. 불치는 이후 왕위 계승의 상징이 되었으며, 스리랑카인들의 확고한 신앙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지금도 매년 여름 11일 동안 페라헤라(불치) 축제가 열린다.
캔디가 영국에 양도하는 캔디약정이 맺어진 1815년 바로 직전에 건립된 "파띠리푸와라는 8각형탑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캔디 왕조의 수도로서 캔디가 도시로서 발전하게 되었던 시기다. 15세기 1473~1511년에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바후 왕 이후, 혼란한 정세를 바로 잡기 위해 위마라드하마수리야 1세로 알려진 코나뿌 반다라는 델가무와에서 캔디로 부처의 치아사리를 들여와 사원을 지어, 치아사리를 모시게 되면서 통합된 불교를 가질 수 있었다. 달라다 말리가와에 있는 8각탑과 그림같은 캔디 호수는 캔디 왕조의 마지막 왕인 스리 위크레마 라자싱헤 때 건립되었다. 하루에 세 번 거행되는 푸자를 볼 수 있다. 민소매 및 반바지 착용 시, 입장이 불가능하다. 사원 입장시 신발을 벗어야 한다.
불치사 나부는 매우 넓고 웅장하다. 부처의 치아를 보존한 전당 앞에는 하루 종일 묵상기도하는 불자들이 앉아있다. 미소가 아름다운 불상,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불치를 옮겨올 때 여자의 머리 속에 숨겨왔는데 그날 여자의 머리 속 치아에서 광채로 빛나던 그림, 한국불상도 전시된 불치사 본당, 부처 탄생부터 열반, 치아 승천, 치아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이동, 영국 떠나는 모습 등을 그린 프레스코화 등 대단한 규모의 불교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많은 시간을 불치사에서 보냈다. 스리랑카의 불교에 대한 역사와 깊은 불심이 서린 사찰이다.
* 캔디 불치사 앞 영국 호텔
캔디 불치사 바로 앞에는 영국 호텔이 있다. 하얀색 건물로 아주 웅대하고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다. 퀸즈 호텔이라는 상호가 있다. 영국과 스리랑카의 국기를 동시에 게양했다. 영국 식민지 지배의 잔재다.
* 캔디 마하웰리 강 다리
캔디 불치사에서 떠나 숙소로 이동한다. 그리고 가는 도중에 스리랑카 대표 민속춤 공연을 관람할 것이다. 마하웰리 강 다리를 건너서 간다. 이 강은 매우 큰 강이다. 우리가 유숙하는 호텔에서 더 자세히 쓸 것이다.
* 스리랑카 대표 민속춤 공연 관람
제법 큰 공연장에 자국민과 외국인이 많이입장하여 공연을 관람하다. 남녀 출연자들이 반복적으로 의상을 바꿔 입고 나와 공연한다. 스리랑카의 문화를 느낄 수 있는 전통 공연(KANDYAN DANCE)으로 공연시간은 60분이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민속춤 이다. 스리랑카 각 지역의 민속무용이 가미되어 있는 캔디안 댄스는 스리랑카 캔디 왕조의 궁전 연회 때 추던 춤이다. 강렬한 북소리와 다양한 전통악기가 만들어내는 음률과 함께 남성 댄서들의 기민하고 박력 넘치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여성 댄서의 화려한 의상과 부드러운 율동의 조화는 색다른 매력을 제공한다.독특한 악기연주로 무대와 객석을 흥이나게 울린다. 공연을 모두 마치고 건물 뒤편에서 하는 불쇼를 보았다. 공연장 건물 난간 복도에서 내려다 본다. 불을 입에 넣기도 하고 여러 가지 불쇼를 한다. 애처로운 정경이지만 재미있게 보았다.
* 스리랑카 캔디 고산 도로
캔디는 그 자체가 고산지역이다. 그래서 이곳은 연중 기온이 22~23도 정도로 서늘하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우리는 지금 숙소로 가기 위해 계속 산중 도로를 달린다. 고지대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 구릉지대의 스리랑카 제2의 도시이며, 제1의 관광도시다. 14세기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캔디는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다. 캔디는 콜롬보 북동쪽 115km, 580m 고원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10만 4000명이다. 15세기에 건설된 고도로 19세기 초 영국이 침입할 때까지 싱할라 왕조 최후의 수도였다. 캔디 왕조 왕궁과 박물관 등이 남아 있다.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전통적인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남서쪽 6km 페라데니야에는 스리랑카 대학이 있다. 시가지 중앙에는 인조 호수가 있고, 호수의 북안에 있는 달라다말리가바사원 불치사에는 석가모니의 치아가 봉납되어 있다. 새로 취임하는 총리는 이 사원에 참배하는 것이 관례이며, 매년 8월에 대제가 열린다. 고원에 위치하여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 상업의 요지이며,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스리랑카 문화의 중심지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캔디 자치회가 1865년 지방자치제 법령에 의거 1866년 수립되었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1815년까지 실론 최후의 왕조의 왕도로서 지금도 왕궁이나 사원, 민속무용 등이 훌륭히 보존되어 있는데 매년 7~8월에 걸쳐 10일 동안 열리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로 유명하다.
최초 이곳에 도시를 수립한 위크라마바후 3세 이후, 뒤를 이어 15세기 1473~1511년동안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부후가 캔디를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시켰다. 181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영국 통치가 강화되기 시작된 이후, 캔디의 도시 풍경에 급격하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로리의 기사에 의하면, 1818년의 반란 때, 캔디 지역에서의 영국법은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된 가문들은 거의 죽음을 맞이했다. 총과 칼에 살아남은 이들중 콜레라와 천연두, 영양 결핍으로 수백명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냉담해져 갔다. 그 뒤, 많은 해를 거듭해가는 동안 정부의 노력은 시작과 포기만이 계속되었다라고 당시 반란의 여파를 서술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캔디에 사는 것을 소원한다. 그러나 집값이 상당히 비싸서 살기에 쉽지 않다. 유명인사들이 많 배출된다. 그 이유는 오래 전부터 좋은 집안 사람들이 거주해서 그렇다. 2월인 요즈음도 낮기온이 스리랑카 타 지역은 낮기온이 35도로 무더운데 캔디는 23도라니 스리랑카 사람들로서는 선호지역이 아닐 수 없다. 들녘만 보며 달리던 스리랑카였는데 이곳 캔디는 숲속만 달리는 별천지다. 도로변 주택도 건물도 모두 아슬한 산언덕에 세워져 있다.
2020년 2월 11일 화요일 캔디에서 콜롬보로 이동, 콜롬보 강가라마 사원, 포트지구 등
* 캔디 시나몬 시타델 캔디 (Cinnamon Citadel Kandy) 호텔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800m 고지의 호텔이다. 방에서 바깥쪽 창문을 열고 나가니 바로 정원이다. 방도 넓고 쾌적하지만 수영장도 있고 훌륭한 시설들을 갖춘 호텔이다. 정원 아래로는 강물이 흐른다. 이 호텔은 불치사 근처의 4성급 호텔이다. 스파 이용도 가능한 아주 좋은 호텔이다. 시나몬 시타델 캔디 호텔에는 무료 주차장, 수하물 보괄실, 신문 가판대 있다. 1983년부터 캔디에서 운영된 호텔은 고급스러운 건축과 현대적인 편의 시설이 있다. 호텔은 캔디 시내 중심부에 도보로 30 분 거리에 편리하게 위치하고 있다. 숙소의 모든 방에는 에어컨, 노트북 크기의 금고, CD 플레이어 있다. 객실은 산림 이상의 숨이 막히는 뷰를 자랑한다. 타일 바닥 및 고상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룸은 샤워, 비데, 목욕 시트 있는 개인 욕실을 갖추고 있다. 고객께서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국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현장에는 스낵 바가 있다. 비즈니스 센터, 회의실, 복사기도 호텔에서 제공된다. 시나몬 시타델 캔디 호텔에서는 어린이 있는 손님들을 위한 어린이 식사, 아이돌봄 서비스, 놀이 공간 등을 제공한다.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헬스장, 헬스클럽 등이 제공된다. 좋은 시설의 호텔에서 유숙한 것도 큰 기쁨이고, 캔디의 고산지대 풍경도 눈앞에서 본 흐뭇한 여정이다.
불치사 근처의 4성급 호텔이다. 스파 이용도 가능한 아주 좋은 호텔이다. 시나몬 시타델 캔디 호텔에는 무료 주차장, 수하물 보괄실, 신문 가판대 있다. 1983년부터 캔디에서 운영된 호텔은 고급스러운 건축과 현대적인 편의 시설이 있다. 호텔은 캔디 시내 중심부에 도보로 30 분 거리에 편리하게 위치하고 있다. 숙소의 모든 방에는 에어컨, 노트북 크기의 금고, CD 플레이어 있다. 객실은 산림 이상의 숨이 막히는 뷰를 자랑한다. 타일 바닥 및 고상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룸은 샤워, 비데, 목욕 시트 있는 개인 욕실을 갖추고 있다. 고객께서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국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현장에는 스낵 바가 있다. 비즈니스 센터, 회의실, 복사기도 호텔에서 제공된다. 시나몬 시타델 캔디 호텔에서는 어린이 있는 손님들을 위한 어린이 식사, 아이돌봄 서비스, 놀이 공간 등을 제공한다.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헬스장, 헬스클럽 등이 제공된다.
* 캔디 호텔에서 본 마하웰리 강
우리가 유숙한 캔디 호텔의 정원에서 내려가서 마하웰리 강을 만났다. 스리랑카어로 마하웰리는 '큰 모래강'이란 뜻이며 길이 335㎞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긴 강이다. 스리랑카의 중부와 동부를 흐르는 강이다. 스리랑카의 동서 길이가 225km, 남북 길이가 437km이니 영토의 절반 이상을 흐르는 거대한 강이다. 거대한 저수지도 몇 군데 거치고 마지막은 캔디 도시를 지나 또 하나의 저수지에 정착하는 장엄한 강이다. 섬의 구릉지대 서쪽 해튼 고원에서 발원하여 차와 고무 재배지역을 지나며 북쪽으로 흐르다가 캔디 근처에서 동쪽으로 꺾어진다. 그런 다음 다시 북쪽으로 돌아 저지대를 가로지르고 주요지류인 암반 강과 합류한 다음 폴론나루와를 거쳐 트링코말리의 11.3㎞ 남쪽의 코디야르 만 어귀로 흘러들어간다. 스리랑카의 습지대에 원류를 두고 있어 1년 내내 물이 끊이지 않아 동부의 건조지대에 농업용수로 공급된다. 1970년대초 세계은행의 후원으로 마하웰리 강 개발을 위한 방대한 개발계획이 세워졌다. 관개와 수력발전에 역점을 둔 이 사업은 1990년경 마무리될 예정으로 시작되었다. 캔디 시가지를 지나면서도 잠시 보았던 강이다. 강 다리도 건너서 왔다. 고산지대라서 아침 강변이 서늘하다. 호텔 경비가 강변에서 근무한다. 우리 부부의 사진도 찍어주어 고마웠다. 긴 강과 주변의 산 풍경이 아름답다.
* 캔디 호텔에서 본 고산지대 마을
캔디가 고지역이라는 것을 호텔 주변의 풍경에서 그대로 본다. 울창한 숲속 산을 타고 흐르는 주택들이 신비로운 정경이다.
* 캔디에서 콜롬보로 이동하며 본 들녘
캔디를 떠난 콜롬보로 이동한다. 126Km 거리다. 3~4시간 소요된다. 도로가 나빠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리고 스리랑카 학생들은 오전 7시 30분에 등교하여 오후 1시 30분에 하교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일시에 등교하거나 하교할 시간에는 교통이 복잡해서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캔디가 고지여서 구불구불 고산도로를 한참을 달려서 들녘의 도로에 다다랐다. 들녘은 온통 야자수와 나무들, 그리고 가끔씩 벼농사 등으로 초록 물결이다. 싱그러운 아침 풍경이 참 평화롭다. 스리랑카는 동서 길이가 23Km, 남북 길이가 430Km다. 전체적인 땅의 모양은 눈물 형상이다. 스리랑카의 자동차 앞부분에 CP, WP 등의 영문자가 버호판 앞에 붙어있다. 그것은 NEWS(뉴스)에서 즉 북쪽N, 동쪽E, 서쪽W, 남쪽S의 약자를 따서 스리랑카의 서쪽지방의 자동차는 WP, 동쪽 자동차는 EP 등을 사용한다. 그런데 CP가 있다. 그것은 스리랑카 중앙의 캔디 지역 자동차를 말한다. 지금 지나가는 도로의 자동차들은 대부분 CP가 붙어 있다. 가끔씩 WP도 지나간다. 콜롬보는 서쪽 도시다. 아마도 그 근처 지역의 자동차인가보다. 날씨가 매우 청명하다. 투명한 하늘이 스리랑카의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환경을 선사한다. 이제 오늘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콜롬보 여정을 마치면 오후 인천행 비행기로 떠난다. 그 동안 쾌적한 무공해의 푸름 청청한 스리랑카를 가슴에, 두뇌에, 두 눈에 많이 담았다. 두고두고 그리울 때 꺼내보며 행복한 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부부를 더욱 젊은 시간으로 이끄는 노년의 화사한 선물이다.
* 캔디에서 콜롬보로 가는 도로
콜롬보 근처에 거의 들어왔을 때 도로변에서 경찰이 검색을 한다. 이런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다. 경찰이 대표로 가이드 신분만 보는 경우도 있고, 차에 올라와서 우리들 모두의 여권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밖에서 가이드만 검색한다. 도로가 상당히 깨끗하다. 콜롬보에 가까워서 그런가보다. 자동차와 버스, 오토바이, 톡톡이 택시까지 분주하게 지나간다.
* 콜롬보 시가지 연꽃 타워
콜롬보 시가지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건물 사이로 분홍색 연꽃 꽃봉오리 모양의 타워가 높이 솟구쳐 오른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남아시아 최고 높이의 연꽃 타워 완공식이 2019년 9월에 거행되었다. 연꽃 타워는 연꽃 모양을 형상화한 356m 높이의 건물이며 중국의 자금 지원을 받아 완공됐다. 콜롬보의 첫 번째 랜드마크인 로터스 타워 Lotus Tower다. 상층은 결혼 예식장이다. 콜롬보 시가지를 지날 때 종종 보였다. 포트 지구 탐방에서도 보았다. 내 조국의 남사 타워 같이 콜롬보를 빛내 주는 건축물이다.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구 지명 실론의 수도다. 스리랑카 섬의 남서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다. 스리랑카의 수도이며 인구는 70만 명 정도다. 동서교통의 요충지로 국제항이자 교역장이다. 켈라니 강 바로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인도양의 주요항구이다. 이 항구는 5세기중국의 여행가 법현의 기록에서 카오란푸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문헌에 등장한다. 콜롬보는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수송의 중계지로서 발전해 왔고 지금은 스리랑카의 경제, 정치의 중심지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랍 상인들이 향료와 보석을 교환해가는 교역장을 시작으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지 지배하에 항만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8세기 이후 아랍 상인들이 정착했으며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영국인들이 차례로 섬에 정착하여 발전시켰다. 1815년 스리랑카인 족장들이 실론 섬 중심부에 있는 캔디 왕국의 왕을 몰아내고 영토를 영국에 양여하면서 실론 섬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 독립 이후 서구 영향권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었다. 도시에는 국회의사당과 옛 국제연합 사무국, 시청, 산타루치아 대성당의 돔형 지붕, 도리아 양식 기둥으로 유명한 대법원 및 갈레파체 호텔 건물 등이 있다. 도시 주변에는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론 섬의 상업 중심지로 남아 있다.
스리랑카인들은 이 항구를 콜랑바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들은 이 이름이 망고나무 '잎사귀'라는 뜻의 Kola와 '망고'라는 뜻의 amba라는 스리랑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Koramba가 고대 스리랑카어로 항구나 나루터를 뜻하는 낱말이었다는 해석이다. 8세기 이후 오늘날의 항구 근처에 아랍 상인들이 정착했으며 16세기부터는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 및 영국인들이 차례로 섬에 정착하여 발전시켰다. 1815년 스리랑카인 족장들이 실론 섬(지금의 스리랑카) 중심부에 있는 캔디 왕국의 왕을 몰아내고 영토를 영국에 양여하면서 실론 섬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스리랑카가 독립한 뒤, 서구 영향권에서 차츰 벗어나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구역은 항만과 제일 가까운 지역으로서, 포트와 페타 즉 '요새 밖에 있는 시가지'라는 뜻의 타밀어에서 유래되었다. 포트는 지금도 행정과 상업 활동의 중심지이나 옛날보다는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페타는 작은 가게와 장터 및 노점 등 동양 시장의 독특한 특징을 모두 갖춘 지역으로 발전했다. 주거지역인 시나몬가든스는 네덜란드 식민지시대에 중요한 계피 재배지역이었다.
도시에는 고층 건물은 별로 없지만 국회의사당과 옛 국제연합(UN) 사무국, 시청, 산타루치아 대성당의 돔형 지붕, 도리아 양식 기둥으로 유명한 언덕 위의 대법원 및 갈레파체 호텔이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그밖에 1749년 네덜란드인이 세운 볼벤달 교회, 종합병원, 콜롬보대학교, 불교 사원 및 힌두교 사원들, 그리고 국가원수·총리 관저 등이 있다. 도시 주변에는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론 섬의 상업 중심지로 남아 있다. 지방 은행과 외국 은행의 본점, 독점권을 갖고 있는 보험회사, 주식중개소, 관영회사가 모두 이 도시에 자리잡고 있다.
섬의 그밖에 주요도시들과는 철도로 이어져 있다. 시내 및 스리랑카 전역으로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카투나야카, 라트말라나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수많은 공원과 유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바닷가에 있는 갈레파체그린, 비하라마하데비 공원, 골프장 등이 유명하다. 마운트라비니아 해변에서는 해수욕과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다. 남쪽 경계선 근처에는 데히왈라 동물원이 있다.
우리는 오늘 스리랑카 콜롬보를 마지막 여정으로 마무리 하고 저녁 비행기로 떠난다. 그래서 스쳐지나가는 하나하나의 풍경들이 아쉽고 정겹다.
* 콜롬보 시가지 아파트
콜롬보 시가지 곳곳에 고층 아파트가 많이 있다. 새로 건설하는 아파트도 있다. 독특한 구조의 아파트도 있다. 아파트는 스리랑카의 수도인 이곳 콜롬보에만 있다. 조금 전 이슬람 묘지를 지나온 도심이다. 내 조국의 도심 풍경과 같아서 정겹다.
* 콜롬보 시가지 신호등
콜롬보 시가지에 아파트에 이어 신호등이 보인다. 그 동안 보기 드물었던 신호등이서 시선을 이끈다. 콜롬보는 스리랑카의 수도라서 모든 도시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 콜롬보 시가지 풍경
하얀 색 담장의 건물의 한국대사관을 지나 중식 식당으로 간다. 내 조국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눈부신 정경이다. 중식으로 한식요리를 맛있게 먹고 콜롬보 시가지를 살펴 보았다. 드넓은 도로변에는 웅장한 건물들이 가득하다. 도로에는 온갖 종류의 차량이 왕래한다. 콜롬보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 콜롬보 시가지 국기를 단 톡톡이 택시
콜롬보 시가지를 조망하고 있는데 눈앞 도로변에 스리랑카의 국기를 단 툭툭이 택시가 들어온다. 운전기사 남자는 정차하여 전화를 한다. 애국심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 콜롬보 도심 코끼리상과 불교에서 사용하는 전통악기
콜롬보 시가지 도로변에 큰 코끼리 상과 사람상이 있다. 스리랑카는 코끼리가 많은 나라다. 코끼리 곁에 선 남자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스리랑카의 전통악기를 치고 있는 형상이다. 캔디 민속공연에서 출연자들이 무대에서 연주하던 그 악기다. 한국 불교사찰에서는 목탁을 치는데 스리랑카 불교행사에서는 저 악기를 사용한다.
* 콜롬보 강가라마 사원 외경
지금 시간이 오후 1시 20분이다. 조금 있으면 1시 30분에 하교하는 학생들로 거리가 혼잡하다. 그래서 빨리 강가라마 사원으로 달려간다. 알맞게 도착했다. 강가라마 사원은 버스가 도심을 지날 때 담장이 보였다. 아주 큰 자락으로 앉은 사원이다.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 사원으로 켈라니 강변에 위치한 사원이다. 강가라마야 사원은 콜롬보 최대 규모의 사원으로 스리랑카 불교의 불씨를 되살렸던 곳이다.
스리랑카 불교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레 스리 나야카에 의해 설립된 사원이다.
베일라 호수가에 위치한 강가라마는 물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으로 1885년 스리랑카 불교 재건 운동을 주도한 히카두웨 스리 나야카 스님에 의해 설립 되었다. 히카두웨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맥이 끊어져 굴욕적인 타이, 버마 스님들로부터 수계 받는 사건을 경험하고, 스리랑카 불교 재건운동을 벌인 사람이다. 그가 처음부터 주목했던 부분은 교육으로 1873년 비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를 남부 해안지대에 설립하였다. 그로 인해 스리랑카 불교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후 바도다야 피리베나 학교는 코테 대학으로 발전 하였다. 강가라마 사원은 100여년 밖에 안되었지만 꺼져가는 스리랑카 불교의 불씨를 다시 되살렸던 모태가 되는 성스운 장소이다. 현재 이곳엔 대법당과, 역대 조사스님들의 흉상과, 유물이 보존된 박물관, 부도탑과, 세계 각국의 귀중한 불교 문화재가 소장된 보물관이 있다.
우리나라의 조계사와 같은 절이다. 각국의 절에서 보내온 부처와 조각상이 있다. 캔디의 불치사(佛齒寺) 혹은 스리 달라다 말리가와는 스리랑카의 가장 신성한 불교 사원으로, 전 세계의 불교 신자들이 순례를 오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가 열반에 들어 그 다비장을 치렀을 때 부처의 왼쪽 송곳니가 장작더미의 재 속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치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마침내 칸디에 왔다. 불치사는 비말라다르마스리야 1세가 다스리던 1600년경 2층짜리 건물로 처음 세워졌으나 지금은 원래의 건물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키르티 스리 라자싱헤 왕(1747~1781년) 통치 때 재건되었다. 1998년 힌두교도인 타밀족 분리주의자들이 불치사를 폭격했으나 그 후 복구하였다. 붉은 지붕을 이은 흰 벽의 건물이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자와 석조 요새로 둘러싸여 있다. 벽은 겉이 내비치는 세공으로 정교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덕분에 단순한 디자인에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외관은 단순하지만, 실내는 나무와 상아의 상감 부조와 옻칠한 회화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해자 위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돌로 지은 문루가 나온다. 중앙의 안뜰에는 바다히티나 말리가와라는 이름의 2층짜리 장방형 사원이 서 있다. 박물관으로 통하는 정문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양쪽에는 두 마리 사자상이 서 있다. 사원의 맨 위층, 금과 보석으로 만든 겹겹의 상자 안에 부처의 송곳니가 모셔져 있다. 불치사는 1803년 스리 위크라마 라자싱헤 왕(1798~1815년 재위)이 지은 파티리푸와 탑과 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이 탑은 야자나무 잎에 기록한 귀중한 필사본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곳 사원 앞에서는 해마다 전통 탈과 복장을 입은 댄서들이 춤을 추며 행사를 벌이며, 종교와 문화가 뒤섞인 화려한 강가 라마 행사에는 매년 훈련받은 코끼리와 수많은 스님들과 시민들이 참가하여 불교문화축제를 벌인다.
신발을 벗어서 맡기고 입장하였다. 도심 도로에 있어서 탁 트이지 않은 사원이다. 입장하는 사람들이 많아 복잡하다.
* 콜롬보 강가라마 사원 내경
강가라마 사원은 콜롬보에서 가장 큰 절이다. 우리가 본 것은 일부지만 내부에는 부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표현한 벽화가 잇는 유명한 사원이다. 부처의 머리카락을 보존한 곳도 보았다. 거대한 코끼리 박제도 있다. 70년을 살다가 코끼리를 그대로 박제해서 전시했다. 상아도 보관하고 있다. 상아에서 나온 사리인 하얀색 진주도 전시해 두었다. 참 신기하다. 티크목으로 제작한 아담한 불상도 있다. 카메라와 시계가 진열되어 있다. 저것들은 이곳에서 교육한 자료들이다. 재건운동가가 설립한 사원이어서 그렇다. 스리랑카의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 유적의 유물이다. 한국에서 보낸 불상도 3개 있다. 코끼리가 생시에 생활하던 모습을 스리랑카 주지사와 사진에 담아 천장 아래 벽면에 걸어두었다. 네덜란드 지배시 시용하던 그림이 있는 접시도 전시해 놓았다. 이곳 사원은 기념품들의 사원 내부에 박물관처럼 모두 전시해 놓았다. 전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스리랑카의 종교역사에 대해서 배웠다.
* 콜롬보 인도양 바다
이제 콜롬보 포트 지구로 간다. 점점 해변으로 다가가며 우람한 건물들이 지나간다. 드디어 인도양 바다가 드넓은 품으로 다가온다.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보는 인도양 바다가 참으로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언제 또 인도양 바다 곁에 오겠는가. 남아공 희망봉에서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것을 보았던 추억이 떠오른다. 길게 늘어선 해변 풍경들이 참으로 정겹다.
* 콜롬보 포트 지구
콜롬보 포트 지구로 갔다. 포트는 지역 이름이다. 예전에는 식민지 시절의 성채 유적이 이곳에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고 출국차 콜롬보 공항으로 이동하며 본다. 인도양 해변의 번화가다. 높은 고층빌딩들이 즐비하다. 인공연못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포트 지구는 콜롬보의 중심지역이며 식민지 시절의 성채가 남아있는 지역이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의 성채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비즈니스 거리로 유명.국회, 관공서, 은행 등이 모여 있는 콜롬보의 핵심 비지니스 지역이다. 넓은 도로와 근대 건물과 좁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거리로 금속품, 섬유, 의류, 화학 등의 제조업이 발달한 콜롬보의 비지니스 지역의 핵심으로 국회, 관공서, 은행 등이 있다. 포트의 요크 거리에는 고급 상가들이 즐비해 있는 쇼핑의 거리로 유명하다. 포트(Fort)라는 명칭은 16~18세기동안 포르투칼과 독일의 점령지이자 군사적인 요새로 사용되면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포트지구 내에는 140년 전에 등대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시계 역할만으로 남아 있는 시계탑이 있다. 밀러 건물, 중앙 우체국, 차터드 은행 등의 대리석과 유리를 주재료로 하는 오래된 건물이 있는가 하면, 현대식 각종 비지니스 빌딩과 음식점이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다. 거리엔 차량도 많다. 호텔 2개는 IS 폭발로 사망자가 많았던 곳이다. 바라보는 눈이 소슬하다.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에서 높은 문화도 보고 잘 정비된 거리도 보고 역사와 문화 등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간다.
* 콜롬보 공항으로 가며 본콜롬보 시가지
이제 포트 지구를 벗어나 콜롬보 공항으로 달린다. 콜롬보 외곽의 시가지를 마지막으로 본다. 오른쪽은 인도양 바다로 항구인지 여러 가지 시설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시가지 건물이 보인다. 영국식 시계탑도 있고, 중국은행 분홍 건물도 있다. 남인도에서나 스리랑카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툭툭이택시도 있다. 여행기간 동안 정이 든 풍경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 가슴에 담아가는 고운 기록들은 살아서 나의 정원에 노년의 그늘이 질 때 화사한 회억으로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 스리랑카 현직 대통령궁
현재의 흰색 대통령궁 곁은 지나간다. 2하얀 색 아름다운 2층 건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1804년 이래로 스리랑카가 1972년에 공화국이 될 때까지 영국의 총독과 총독, 스리랑카 대통령의 거주지였으며, 국왕의 집 또는 여왕의 집으로 알려졌다. 외국인이 이렇게 현재의 대통령궁을 쉽게 본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리고 이렇게 쉽게 오픈해주는 스리랑카에게도 고맙다. 또한 그 만큼 안정된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대목이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 콜롬보 공항 출발
콜롬보 공항에 도착하여 스리랑카 가이드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공항 내부에는 들어오지 못하여 밖에서 인사를 했다. 3박 4일간 스리랑카에 대하여 여행을 도와준 고마운 분이다. 각자 항공권 티켓팅을 하고 검색대에서 짐과 몸을 검색한고 출국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왔다. 게이트는 12번이다. 커다란 좌불상이 게이트를 안내하듯 죽 나열된 게이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부처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걸어간 끝에서 12번 게이트를 만났다. 콜롬보 공항은 넓고 쾌적하다. 사람들은 신종 코로나 감염 관계로 마스크를 쓰기도 한다. 19:00 대한항공 474편 인천행을 탐승할 것이다. 18:30분 보딩타임이다. 우리 부부의 좌석은 50C, 50D다. 어젯밤 내가 인터넷상에서 지정한 좌석이다. 중앙 통로 나란한 좌석이다. 밤을 날아서 간다. 내일 새벽 06:1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정시에 이륙했다. 기내식으로 석식이 나와서 맛있게 비빔밥을 먹었다. 레드와인도 남편과 함께 조금 마셨다. 나는 조용필 노래도 듣고, 러브 스토리 영화를 보았다. 학창시절 가슴을 울렸던 사랑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러브 스토리>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 스토리(1970)〉는 미국 예일 대학교 영문과 교수였던 에릭 시걸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당시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뒀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음이 갈라놓는다는 애절한 스토리, 1970년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레이의 아름답고도 슬픈 멜로디의 주제곡, 라이언 오닐(올리버 역)과 알리 맥그로(제니 역)의 깔끔하고 청순한 모습의 연기, 그리고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 are sorry)”를 비롯한 주옥같은 대사들은 보는 이들의 영혼과 가슴을 적셔 주었다.
〈러브 스토리〉는 올리버가 “25세의 나이로 죽은 여자의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하나. 미인이었다고 하나? 영리했다고 하나? ···”라고 말하면서 회상 형식으로 전개된다. 부유한 명문가의 하버드대 학생 올리버 배럿과 레드클리프 여자대학교의 음악도인 가난한 제과점 딸 제니. 둘은 제니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서관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올리버와 제니가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에서 결혼 서약을 할 때 제니는 “··· 순수한 영혼을 분리해서 단 하루라도 사랑하게 해 주오. 비록 어둠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라고 말하고, 올리버는 “당신에게 내 손을 주노라. 돈보다 더 귀한 내 사랑을 바치노라. 설교와 법률을 떠나 내 자신을 바치노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둘은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바흐, 비틀즈, 그리고 올리버를 사랑했던 제니는 백혈병으로 올리버를 떠난다. 마지막 장면은 눈 쌓인 거리를 걷는 올리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보여 준다. 이때부터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하는 주제곡은 애절한 느낌을 더해 준다. 올리버는 추억이 서려 있는 텅 빈 스케이트장에 들어선다. 그리고 제니가 자신이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을 보며 좋아했던 그 자리에 앉는다. 카메라는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그의 뒷모습에서 멀어진다. 한 순수한 젊은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어찌 보면 매우 감상적이고 단순한 내용의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가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극도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회의를 느끼던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보여 지는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에서 감동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러브 스토리〉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1960년대 후반 전통적 가치관에 반기를 든 젊은이들의 반항문화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올리버는 1960년대 새로운 젊은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정의로운 올리버에게 아버지는 철저하게 보수적이고 전통적이다. 올리버에게 맹목적으로 일류만 추구하는 아버지는 한 마디로 ‘걸어 다니며 말하는 러쉬모어 산’이나 ‘목석’처럼 비친다. 반면에 제니의 아버지 필은 올리버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고 할 만큼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이다. 올리버는 부친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권위와 관습, 제도에 반발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과 갈등이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인 것이다. 성장 배경이 다른 올리버와 제니는 사랑을 통해 보수와 진보의 화해를 시도한다. 올리버는 제니의 집안을 옹호하느라 아버지와 부딪치고, 제니는 올리버의 가문까지도 사랑하노라 결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올리버와 함께 있기 위해서 파리의 장학금도 기꺼이 희생하는 제니는 올리버와 아버지를 화해시키고자 하지만 오히려 이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된다. 올리버의 거친 행동에 제니는 충격을 받고 집을 나간다. 올리버는 아내를 찾아 헤매다가 낙담한 채 집에 돌아오는데 현관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제니를 발견한다. 올리버가 “제니,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라고 말하자 제니는 사과의 말을 가로막으며 나직이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엔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는 거예요.”
영화의 마지막, 병원 문을 나서던 올리버는 아버지와 마주친다. 아버지는 올리버에게 제니의 죽음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올리버는 제니에게 배웠던 “사랑하는 사람에겐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대사를 되풀이한다. 올리버는 아버지에게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진보와 보수의 화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러브 스토리〉의 속편인 〈올리버 이야기(Oliver’s Story)〉는 변호사가 된 올리버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지만,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계속된다. 열렬한 사랑을 하던 연인 앞에 백혈병이나 다른 난치병으로 상대방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러브 스토리〉를 모방한 영화들이 이후 세계적으로 수없이 뒤를 이었지만, 통속적인 애정영화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인 주제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밤을 지새우며 날아왔다. 잠은 집에 가서 잘 것이다. 기내에서 즐기는 것도 여행의 한 부분이라고 나는 늘 생각하며 음악을 듣던, 영화를 보던 기내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한다. 이번 여정도 그렇게 보냈다. 이제 서서 내 조국 인천공항에 가까이 가고 있다.
2020년 2월 12일 수요일 인천공항 도착, 귀국
* 인천공항 도착
새벽 6시 10분 정시보다 약간 이른 5시 50분 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올 때는 갈 때보다 비행시간이 적게 걸려 7시간 40분 정도 소요되었다. 무시히 귀국하여 참 기쁘다. 공항 안의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요했다. 남인도와 스리랑카 공항에서 보던 장면과는 대조적이다. 그들 공항에서는 마스크를 착용한 우리가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직 감염이 중지되지 않아서다. 아침식사로 기내에서 간단히 준 식사로 그래도 배가 고프진 않다. 두 아들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아침 첫 7시 리무진 버스로 귀가길에 올랐다. 온 들녘에 겨울빛이 흐른다. 남인도와 스리랑카의 온 들녘에는 여름빛이 흘렀는데 너무나 상반된 풍경에 눈이 커진다. 사계절이 뚜렷한 내 조국의 겨울은 풍경은 저리 어둡고 침울해도 꼭 있어야할 계절이라고 나는 자부해본다. 추위로 인해 기생충이 죽고, 사람들과 동식물들은 더욱 강인해진다. 더운 국가에서는 저런 겨울을 보고자 내 조국에 여행올 것이다. 한동안 보지 못한 내 조국의 들녘과 도로 등을 보며 집에 잘 도착하였다. 참으로 행복한 여정이었다. 가족과 여행을 이끌어준 여행사와 가이드 등 모두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이제 일상에서 더욱 충실하고 올바른 삶을 엮어갈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사명에도 충실하여 내 조국의 문학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