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누워서 햇살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걸 본다
나도 그 위에 누워서 차츰 녹아들어 간다
바위 속의 고요하고 아득한 하늘이 열리고
수십 가지 색깔의 바람들이
나부끼고 한줄기 길이
뻗어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람은 멀리 안드로메다까지 뻗어 있었고
가지가지의 빛깔로 빛나며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빛깔에 흔들리며 바람을 흔들어 본다
우수수 나뭇잎이 내리고 눈이 그리고 비가 내린다
봄 여름 갈 겨울이 함께 내려서
아득하다 누가 바깥을 흔들고 가는지 기우뚱거려도
언제나 제 자리에 동그랗게 뭉쳐져 있는 나의 집이여
나는 이제 나가기가 싫다 들어온 햇살도 나가지 않는다
지난 겨울의 눈도 천년 전의 비도 여기 다 모여 있다
오늘도 한 여자가 녹아드는 햇살을 바라 바위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아 본다
머나 먼 우주로의 여행
우주의 날씨는 맑았다
이제 모든 별들이 앞쪽으로만 몰려들어*
멀리 별들의 무지개가 떠오른다
대 마젤란 은하가 모든 별들을 중력 렌즈**로 모아서
저들을 수많은 여럿으로 만들어 보인다
아 현란한
별들의 무지개의 파도여!
있고 없음이 저 안에 있고
저 안에는 없음마저도 잔상의 빛을 뿜고 있도다
안드로메다까지는 15년 161일 남았다
어떻게 13년을 달려왔는지
이미 지구에서는 100만년이 흘렀으리
은하를 벗어난 지도 2년이 지났다
지금 내 우주선의 속도는 광속의 99.9999999999452%
나는 나의 생을 우주선 안에서 보내기로 한 이후
이제 최대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중력의 렌즈에 맺혀져 오는 만상의 빛 속에서
영원의 한순간 순간이 튀어나오며
나를 저의 속으로 꽂아 넣는 것이어니
나는 이제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우주의 건너편 해안에 이 작은 배를 대어야 한다
영원의 바다에 점 하나 찍으며 나의 생은 흐르지만
이제 나는 나만의 것이 아니고
우주 또한 저 홀로 있지 아니하여서
또 다른 우주의 생명이 내게로 흘러 들어오리
그리하여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리라
빛이 우주를 다 돌아와서야 저의 의미를 이루듯
나는 안드로메다에 이르러 다시 시작하는 아침을 일구리라
내 생명 시계는 지구에 도착하면 멎으리
내 돌아가면 지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앞으로 41년 161일 남았다
360만년 남았다
*우주선의 속도가 광속에 접근해 가면 뒤쪽에 있는 별들이 앞쪽에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이
는 현상. 광속의 90%에 도달하면 우주선의 앞쪽에 대부분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보인
다고 한다.
밝은 별의 집단 주위를 오렌지색의 별이 고리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이 현상은 ‘별
무지개 STARBOW’라고 불리우고 있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공간을 굽게 한다. 그것은 바로 앞에 있는 은하나 은
하단의 중력이 공간을 일그러뜨려서 렌즈와 같은 구실을 하여 먼 곳의 천체가 여러 개로 보
이거나 그 형체가 일그러져 보이게 한다. 이 현상을 ‘중력 렌즈’ 효과라고 부른다.
땅
땅이 내쉬는 숨이 파아랗고
숲에 이르면 그 향기가 더욱 독하다
안개는 더욱 자욱하여서 허리를 감싸고
그 아래 흐르는 물소리 가득하다
거기에 목을 축이는 짐승들이 눈을 들어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파아랗게
숲이 내쉬는 숨으로 하늘은 더욱 자욱하고
더러는 숲을 지나서 산정에 올라
하늘을 우러르며 팔 벌려 소리친다
오라 오라
아아 누가 오나
땅이 내쉬는 숨 맡으러
파아랗게 하늘이 오는데
목 장
얼어붙은 눈길에 바람이 차다 차라리 몸이 없으면 발을 구르며 뛰지 않아
도 될 텐데 그러나 땅의 실팍한 경사에 기대어 오르는 목장을 보아라 지난
봄에 풀씨를 뿌리고 자라난 풀들이 시퍼렇게 오르던 언덕이 눈 속에 묻혀
서 풍만한 가슴을 꿈꾸며 나를 다시 오르게 하느니 발을 구르며 오르는
나는 허이허이 다 올라서야 목장을 보겠네 여기 아니면 내 쉬일 곳이 없
어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었으니 기댈 곳 없는 자여 너의 집 언덕에
다 올라서야 불을 켜 들고 약한 마음을 뉘우치며 휘날리는 눈보라를 내려
다 보느냐 눈보라는 한 열흘 내려서 누리를 덮고 모든 숨쉬는 것들을 제
숨 속에 있게 한다 나는 이 놈 저 놈을 쓸어안으며 그 껌벅거리는 눈 속
에 내가 기대어 서 있는 것을 아아 아직도 비척거리며 기대어 서서 무럭무
럭 김오르는 두엄더미에서 피어나는 나를 본다 보아라 그들의 숨결을 타고
오르는 나의 숨결 목장의 경사가 하늘로 이어지며 펼쳐 오르는 것을 눈이
멎은 어느 날 하얗게 이어져 끝간 데 없는 것을 하도 눈이 부시어 무어라
할 말도 잊고 서서 보고만 있느니 몸이 없으면 저 빛도 바라보지는 못하였
으리 발을 동동 구르며 달음질치지도 못하였으리
아아 얼어붙은 눈길에 바람이 차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자의 별
네가 왔다 가는 걸 나는 냄새로 안다
너의 땅을 두고 너는 그림자처럼 지나만 간다
너의 빈 집에서 나는 화초에 물을 주고 언 창을 닦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너의 침대보를 갈아 낀다
밤새 너를 기다리며 뜨락에 나가 서성이다가
나는 너의 장의자에 쭈그리고 앉아서 잠이 든다
밤새 네가 오는 발자욱 소리 들리는 듯하고
그렇게 밤새 비가 내리고 그 비 발자욱 소리에
한 알 과일처럼 너 없는 별이 굴러가고 있다
그래도 아침이면 온 들판에는 네가 지나간 발자욱
거리마다 너의 냄새로 가득하고
안개는 먼 바다 소리를 낸다
해마저 너 없는 땅에 씨를 뿌리고
온 여름내 가꾸어 네가 온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이제 가을이 오고 해는 들에서
얼굴을 빛내며 알곡을 거두어 들이리라
나는 네가 오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안다
너는 땅으로부터 피워 올리고 있구나
안개며 바다며 산이며 해며 별들을
나는 이 별이 뉘 별인지 알겠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별이여
모래
누가 와 있는 것 같다
이미 준비되어 있는 사막
한가운데
바람도 불지 않는 긴긴 태양 아래
모래의 불구덩이에
나
한 마리
움츠리고 접혀서
입안에서
버석거리는 모래를 씹으며
마른 침들이 나를 삼키며
나를 모래
한 알로 만들며
누가 와 있는 것 같다
물구나무
밤마다
그대와 헤어져
돌아올 때는 물구나무를 선다
한 알 과일처럼
지구를 손에 들고
하늘에 발을 딛으면
그 별에 그대는 살고
하루에 서른 세번이나 해가 지는
쓸쓸한 별에서
그대는 나를 바라본다
내 무거운 사랑의 형벌을
그대는 울고 있구나
우리 눈물의 강이 하염없이 흐르고
강물의 길을 따라
나는 그대가 살고 있는 별을 들고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
길가의 겨울나무들도
앙상한 다리를 하늘에 담그고
봄을 기다리는 휘파람을 불고 있다
우 정
안녕!
이따금 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인사를 한다
하릴없이 내 주위를 매일같이 돌아 주는 친구여
그대의 큰 덩치와 그대와의 거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대의 우정이 너무도 큰 것임을 안다
언젠가 내가 먼 우주로 떠나서
그대를 쳐다보지 않는다해도
그대는 여전히 기웃거리며 나를 찾아오겠지
안녕!
바 다
그는
외줄을 탄다
출렁출렁 중심을 잡으며
부지런히 빈 개펄을
달려오고 달려나가며
어진 아낙이 제 바깥을 그러하듯이
기우뚱한 지구를 바로잡으며
모든 별의 한가운데에 있게 한다
방파제에 홀로 앉아
네 눈물처럼 맑은 소주를 마시며
네가 한없이 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물방울 별 1
가만히 지구를 두들겨 본다
땡땡
반대편에 있는 누군가
발밑을 내려다 본다
자식 뭘 보냐
씩 웃는다
물방울 별 2
물방울이 공되어 통통 튀어 오르는 걸 보았니?
별빛이랑 햇빛 달빛이 아롱져 풍선 되어 날아오르는 걸
흐르는 강물에서 누군가 치는 피아노에서 부글거리는 장바닥에서
너의 몸에서 풀잎 위에서 땀방울 물방울들이 돋아나
서로 손잡고 날아오르며
우리를 제 품 속에 가두는 방을 보았니?
우리는 그 속에 있어 한 물방울로
제 얼굴에 무지개랑 거울이랑 풀어서
아득한 방을 꾸미고 있어
나는 그 방에 들어가고 싶다
어둠 속이거나 빛 속이거나
섬 하나 떠오르며
하늘로 만들어진 창과 바다로 만들어진 벽만이 있는
아침 저녁마다 노을로 달려오는 그대 편지를 읽는
그런 방에 가고 싶다
모든 물방울들이 제 몸 속으로 팔을 집어넣는다
고요가 땀방울로 배어오르며
나를 감싸고 투명한 막을 이룬다
물방울 별 3
어떻게 바다에 이를까
바다에 잠겨 있어도
물이 내게 잠겨들지 않고
허옇게 소금만 일어난다
나를 뒤덮는 억겁의 별이여!
어떻게 하늘에 이르렀느냐
물방울 별 4
이 흰종이 위에 무엇인가 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벌레들이
바글거리며 몸을 부벼대며
따스운 공기를 피워올리고
무수한 물방울들을 둥둥 올린다
발이 푹푹 빠지는 투명한 가슴들이
키를 넘치며 떠올라 나를 감싼다
나도 한 물방울이 되어 둥둥
무수한 별들 속으로 떠오른다
나는 그 순백의 나라에 살고 싶다
세상을 떠도는 모든 별들과 먼지들이
그 한없는 바닥으로 내려서 마침내 보이지 않는
숨결을 피워올리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고 싶다
한방울 이슬되어
물방울 별 5
잡다한 번뇌가 씻겨서 오는 새벽이 있다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허연
나무 뿌리들이 나를 칭칭
감고 있다가 물위로 텀벙 떨어뜨리고 튀어 올랐던 물방울들이 온몸으로
쏟아져내려 이미 나는 물
방울 한가운데에 안겨 있는 것이다
그때는 바깥의 사물들이 다 물방울을 뒤집어 쓰고 있어서 속빛이 다 들
여다 보인다 성벽이 되어
내 앞을 가로 막고 선 아파트며 오월의 거리를 질주하던 장갑차며 머리
에 띠를 두르고 누군가에
게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이들이 우리 회사 사무실에서 9년 동안이나 타
이프를 치고 있는 최양이
투명한 막에 싸여서 아롱거린다
모두가 그렇게 물방울 속에서 동동거리며 굴러다니면 좋으련만 해는 왜
떠올라서 우리들의 물방
울을 거두어 가는지
물방울 별 6
물로만 된 투명한 별이 있네
가장 깊은 곳에는
물방울 사람들이 버글거리며 살아
집도 먹을 것 입을 것 다 필요 없이
서로가 잘 들여다 보이는 눈과 가슴만 있네
그렇게 있으면서 없는 듯하여
어떤 별에서도 보이지 않게 된다면
그들은 그 곳을 영원히 살아가겠네
물방울 별 7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게 좋지
어차피 한 번 가는 이 세상 길에서
무엇을 기다려 주리며 먼 바다를 바란다지
만약에 바다가 하늘을 덮고 물밀어 와서
내 사는 별이 한물방울로 아득해진다 하면
우리 마을은 용궁이나 되는 것인가
꼬리치며 드나드는 금빛 해오라기떼
풍악을 울리는 물 위의 햇빛 달빛들 아 별빛들
나는 그런 것들에 녹아 흐늘거리며 물이 되리오만
아아 그 언제사 저 바다가 키를 세우고 오리
나는 취하여 밤마다 꿈을 꾸느니
그래 언젠가 바다는 오기는 오리라
더디고 더딘 그 발자욱 소리 밤마다 듣느니
무얼 기다려 먹지 않고 자지 않느냐
어차피 한 번 오는 이 세상 길에서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게 좋지
잘가라 지구여
가만히 누워 있으면
지구가 태엽을 풀면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빙글빙글 돌면서
자연을 풀어내고 사람들을
굴뚝과 안개를
자욱한 비눗물 곱사둥이 물고기를
허물어지는 제 살을 풀어내면서
어쩔수 없이 풀리는 태엽인 걸 뭐
중얼거리며 중얼거리며
빙빙 돌아버린다
돌아 내 몸도 돌아 누우며 풀린다
수십년 동안 내게 감기었던 햇살과
내 질긴 뿌리로 뽑아 올렸던
달빛 별빛
수천 겹 퇴적층의 넋들
가만히 돌아 누우며
다 달아나 버린다
잘가라
지도 위를 걸으며
저 네거리와 광장을 줄여서 말 밑에 깔고
굽이치는 개천과 산들도 성큼성큼 걸어서
웬만한 바다쯤은 그냥 건너리
하여 마음에 드는 땅에 이르면
나를 줄여서
그 거리와 집들 사이에 서 있으리
오늘 여기가 그 거리인가 싶다
이제 막 길모퉁이를 돌아간
어떤 여자를 놓친 채
툭툭 걷어차 버리는 담벼락들
나는 찾아야만 할 그 무엇들이 정녕 잡히지는 않고
그저 꿈틀거리며 빠져나가기만 하는
수도 없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 온 이곳 이 사람들
다시 몸을 키워 대동강변에 나가 앉아 볼까
아니면 만주벌 광개토대왕 비나 만져 보러 갈까
60만년 전 검은모루에 가서 소꿉장난이나 해볼까
한번도 떠난 적 없이 떠나는 걸리버여!
아인슈타인의 시
아인슈타인이 시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내게로 시를 보낸다
두루말이 휴지를 마구 뜯어서
눈이 내린다고 온방안에 뿌려대고
눈을 허옇게 뒤집어 쓴 아이녀석처럼
빛의 속도로 날으는 우주선에서
그는 초상화 속의 영원한 얼굴로
안드로메다의 별들의 풍경을
물컵에 빨대를 넣고 비누방울로 불어댄다
비누방울들이 자신의 등에 무지개를 얹고
안에는 아득한 방을 차리고
펑펑펑 쏟아져 내린다
밤하늘 가득히 내리는 저건
눈인가 별인가 꽃송이인가
땅에 떨어져서는 동동동 구르며
투명한 속을 보이며 잦아든다
아인슈타인은 말한다
저 많은 은하의 별들에서도
상대성원리는 있고 이미 그것을 발견한
수천명의 아인슈타인을 만났다고
하지만 땅에 잦아들면서 저의 방을 꾸리는
시에는 수천명의 아인슈타인은 없다고
그는 내게로 시를 보낸다
하여 나는 아인슈타인의 시를 쓴다
자미성
세상에 보이지 않는 별이 있어서
우리들의 운명을 움직이고 있단다
그 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면
이리저리 난 길들과 방들 비어 있거나
겹쳐진 가득한 모음과 자음이 보이리
모음은 팔 벌려 자음을 안고 자음은 달아나며
하수도로 굴러떨어져 끌어올려 달라 소리를 친다
그들이 울리는 소리가 보이지 않는 별을 울리고
보이는 것을 동경하는 이들은 귀기울이리
하여 세상으로 내려오는 빛이 있으리
보이지 않게 보이는 가는 빛 그들 중에 누구는
아무도 없는 새벽 거리를 내려와 쓸기도 하리
자음을 모음 옆에 놓아주고는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하리
그의 그림자가 내 몸 속을 지나간다 빛이 되어
튀어나와서 그대 나의 얼굴로 거울 속에 가득히
번지는 불길 환상이어라 내 안에 누군가 있다
누구냐 그는 시방 달아나고 있으니 동구밖 길로
누가 가는가 그 길을 따라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보라,
때의 타는 점들이 점점이 날아오른다
너는 다시 너의 별로 돌아가 내 가는 먼길을
내려다보며 나 자는 밤에는 노래를 불러주겠지
나는 이따금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며
내 아지랑이가 보이지 않는 별에 가서 이르기를 빈다
길 끝에 이르러 나는 너를 다시 만나리라
그대여 잔을 들어라 건배나 하자
아아 나는 너를 가득히 채워서 마시리
샛 별
그 아침에 별 하나 남아 있었다
내가 야간 작업을 마치고
으스스 몸을 떨며
그 시린 문가에 기대어 서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긴긴 겨울 밤 잠 깨어 기계는 욍욍 저 혼자 돌아가고
나는 기계를 보며 끄덕이다가 으스스 몸이 떨리고
문득 사람은 다 어디 가고 기계만 살아 있는 것일까 아아
내게 죽음이 왔다 갔다는 것을 안 것처럼
스치는 서글픔처럼
기계는 여전히 저 혼자 돌아가고 고요하고 고요한데
물건들은 펄쩍펄쩍 튀어나오며 저희들끼리 와글거리는데
문득 새벽빛이 물 발바닥을 내밀며 내 얼굴을 씻었을 때
조반장이 내 등을 치며 수고했어 가 쉬어 했을 때
으스스 몸을 떨며 그 시린 문가에 서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그 아침에 별 하나 남아 있었다
그래 상철아 그 별 너 가져라
제 2 부 만화경
국가적 손해
글을 아껴서 쓰십시오
김서린 대중탕 한쪽 벽에
빨간 아크릴 글자가
눈을 꿈뻑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찔끔해서 다시 눈여겨본다
물을 아껴서 쓰십시오
개눈에는 뭣만 보인다더니
나는 문득 수도꼭지를 잠근다
물을 아껴서 쓰십시오
물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지만
김서린 저 편에서 준엄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
빌어먹을 꽉 쏟아지고만 싶은데
흥청흥청 나를 써버렸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국가적 낭비라나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다가 쏟아지란다
시인 여러분
나를 아껴서 써 주십시오
만화경
아이와 색종이를 오리면서
도화지에 붙이며 그림을 만들면서
그림 뒤로 사라져버리는 색종이의 뒷면을 생각했다
울긋불긋 빛나는 이 세상도
색종이의 뒷면 같은 무엇이 받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뒷면이 사라지면 그림은 남을 수 있을까
거대한 이 도시는
뒷면에서 뼈를 세운 노동이 팔 뻗쳐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이만큼의 생활도
보이지 않는 이들이 떠받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문에서 종이가 없어지면 글자들은 어떻게 떠오르나
우리의 육신이 사라지면 영혼이 그런 빛깔로 떠오르나
잘라서 남는 종이들은 왜 쓰레기로 버리면서
우리들의 삶의 어느 부분도 이렇게 버려지는 게 아닐까
버려지지 않고 뒤에서 떠받들지 않고 사는 세상은 없을까
문득 궁리하다가 색종이를 잘게잘게 잘랐다
아이가 동그란 눈으로 아빠 무어야 한다
유리를 몇 개 주워다 만화경을 만들었다
이제야 비로소 안팎이 없고
버려지지 않는 천변만화의 세상이 이루어졌다
아이가 좋아서 깡총깡총거린다
국화빵틀 속에서
세상이 생겨났을 때
나까지는 생기지 않고
잘 흘러가더니
지금 내가 누운 방은 무엇이냐
나를 바라보는 저 어둠은?
이편 저편을 건너 뛰어 있는
수많은 별들은 다 누구의 것이냐
거기다
무슨 한방울씩의 운명을
짜놓고 돌리는
뜨거워오는 이 바닥은 무엇이냐
누군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
온몸에 달라 붙어
한몸을 이루는 이 뜨거운 수작은?
아이고 아이고 뜨거라
그래 돌아눕자 그대와 나
등짝이 다 타불것네
우리 서로 안고나 돌자
오메 씨원한 것
이럴라고 세상이 너를 보내뿌렀나
이제 우리는 무엇이 되어 남으랴
유령의 집
아무도 없는데 가스불이
번쩍
파아란 눈을 뜬다
이윽고 국이 끓고
밥통에 김이 모락모락난다
갑자기 티브이가 켜지고
예쁜 아가씨가 튀어나와
온몸을 흔들며 노래한다
비디오 테이프가 스르륵스르륵
그 계집애를 먹어치운다
집에 있던 유령이 깜짝 놀라
장농 뒤에 숨어서
숨을 죽이고 내다본다
따르릉!
유령이 얼떨결에 달려가 손을 뻗는데
덜컥 수화기가 일어난다
밥 다 해 놓았니?
예
수화기가 덜꺽 주저앉으며
유령을 깔아버렸다
용 꿈
용을 보았다 입에서 불을 뿜어대고 퍼렇게 번쩍이는 두 눈, 들판의 나무
와 집들은 꺼멓게 그슬려 있었다 세상에 종말이 온 것일까 나는 표류하
는 배에 실려 쓸쓸했고 천둥과 번개 속에 흠뻑 젖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아내는 용꿈은 좋은 꿈이라고 좋아했다 나는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번쩍번쩍 불을 뿜어대는 용이라니 그 푸르른 비늘들이 부르르 떨리며 폭
탄이 되어 떨어지고 아 내가 잠시 보고 온 그 세상은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했던가 나는 커텐을 열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당의 나무들이 는개
에 젖고 있었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고요한 봄날의 아침인가 그러나 나
는 용의 눈 안에 빨려들어가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 아침을 먹고 전철을
타고 회사엘 나가고 하루의 일을 한다는 것이 부질없이만 느껴졌다 나는
용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꼬리를 길게 늘이며 어디론가 날아가고만 싶었
다
표류하는 배 하나 떠나가고 있음이여
걸리버의 소인국으로 배는 떠나는 것인가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설 때 아내가
복권 꼭 사세요 했다
카메라
지하철 모니터에 내가 어른거린다
백화점 티브이 속에서도 두리번거린다
히죽거리며 나를 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은행에서 관공서, 길거리에서
집요한 눈으로 나를 고누고 있는 카메라를
나는 가방 속에 총과 탄약을 가득 든 갱일까
불온문서나 삐라를 뿌리는 불순분자일까
하늘에서도 카메라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나를 찍어댄다
길바닥에 담배꽁초를 내던지다가
임금인상 결단투쟁 외치는 이들을 지나치다가
회사비밀을 어디에다 내다버릴까 궁리하다가
주간지에서 벗은 여자를 보고 낄낄거리다가
하늘의 모니터에서 흘끔거리는 나를 본다
잠을 자다가 문득 깨어나는 한밤중에도
스르르스르르 필림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별들의 뿌리에 칭칭 감기인 내 꿈들의 허연 뼈가
바람이 켜는 노래를 따라 덜거덕거리며 일어나 앉아
새벽까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읽거나
에리히 얀츠를 읽으며 그 태풍이 불붙는 가슴으로
들어와 박히는 카메라를 본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짙푸른 하늘과 떠오르는 해를 지워본다
눈 감은 어둠 속 저 깊고 깊은 속으로
세포와 별들과 쿼크와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내가 보인다
나는 감독도 시나리오도 없는 이 헤어날 길 없는 영화의 주인공
한 장면도 커트 않고 상영될 아름다운 영상을 그려본다
그때
내 서른 세개의 해가 일제히 떠올라 샤타를 눌러댄다
나는 문을 박차고 지글거리는 광야로 나선다
누군가 백마를 타고 달려가고 있었다
두꺼비
두꺼비가 뱀에게 잡혀 먹힘으로서
뱀 속으로 들어가 제 집을 이루고
등이 터지며 알을 낳아
제 새끼를 키우는 것을
TV에서 보고 나는 무릎을 쳤다
나는 그걸 찍은 사람들이 TV속에 들어가
저희 새끼들을 키우고
TV가 거대한 집이 되는 것을 본다
그들이 죽은 후에도
새끼들은 자라고 무엇인가 될 것이다
실리콘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도 누군가를 잡아먹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내 속에서 누군가의 새끼가
자라며 나를 죽게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친구에게 돈을 대주었고
그의 발명 특허를 가로채서 돈을 벌었다
또 나는 누군가에게 잡아먹힌 기억도 있다
나는 등이 터질 것 같은 분노와 독기를 품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의 새끼를 위한 일이었을까
세상은 둥글게 서로를 물고 굴러가는 데 있고
내 어버이 또한 하늘에 있지 아니하다
나는 누가 어느 속으로 들어와 낳은 새끼
어딘가로 기어들어가 새끼를 낳는 두꺼비
아니면 한 마리 뱀일 뿐!
지금 TV가 입을 벌리고 있다
나는 그 속으로 하루종일 빨려 들어간다
나는 땀이 흐르고 등이 터지고 있다
내 새끼들이 그 속을 마당처럼 뛰놀고 있다
새끼들 오 이쁜 내 새끼
나는 낄낄거리며
나는 두꺼비가 되어 혼자 펄쩍 뛰어 본다
세상의 여러 겹 사이에서 그 그림자가 어린다
낄낄길거리며 펄쩍거리며
소라를 들으며
점
하나 시작되어 기둥을 세우며
맴돌아 올라
끝없는 층계를 쌓아올렸다
하늘까지 가 닿을 듯이 충만해 오는 몸으로
쌓아 올랐다
그러나 하늘은 항시 바다 위에 있었지
소라는 다 살아서야 해변으로 밀려나오고
껍질 속에 한 점의 살도 남지 않고서야
해변을 거니는 소년의 피리가 되네
소년의 가슴으로부터 토해 낸 바람이
뒤틀린 소라의 골방을 스쳐
크나 큰 소리로 퍼져 나가네
소라를 들으며 우리는 깨닫네
온 껍질은 파도 소리 바다 울음으로 설레이고
채워졌을 때보다 더 큰소리로
흩어진 자들을 불러모은다는 것을
아아 나 아직
한 점도 못 이룬 날에
시 간
그가 오는 것이 보인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붕대를 풀어 던지자
얼굴이 없고 몸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 붕대를 밟고
그 자락 끝까지 가라고 한다
죠스의 샤갈
톱니바퀴 사이로 내 몸이 빨려 들어갈 때 나는 웃었다 처음에는 잠바
자락이 휘감기더니 팔꿈치가 으지직 으지직 나를 끌고 들어갔다 멈추
어라 멈춰 나는 기계를 쳐다보고 소리쳤다 설마하니 니가 나를 삼키겠
느냐 나는 한쪽 팔에 힘을 주고 버티었다 그러나 팔이 들어가고 어깨
가 으스러지며 뿌드등뿌드등 소리가 났다 이건 누가 지르는 소리일까
내 한쪽이 으스러지면서 피가 튀어 올랐다 아득하게 기계가 멈추어 섰
고 나는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무수한 상어들이 나를 물고
놓지 않았다 이빨 사이로 나는 오렌지처럼 터지고 으깨어져 흐르고 있
었고 흐르는 피를 피하며 사람들이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른다 사람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가위로 옷을 자르고 기계를 거꾸로 돌리며 나를
뽑아 내려 한다 그때 나는 보았다 밑으로 떨어지는 내 피의 선명한 빛
이 파아란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것을 내 찢어진 옷들이 내려가서 덮
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그리는 무늬를 마침내 죠스가 입을 벌리고
나는 아래로 뚝 떨어졌다 나는 살았구나 하고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톱니바퀴의 이빨에 걸린 내 한쪽
이 선명하게 내 위로 떨어져내리며 나를 덮쳤다 붉고 검고 그리고 파
아랗다
걸어간다
걸어간다 나무들 사람들 빛과 기둥들
팔 다리를 움직이며 모두들 하나같이
잎새를 피우고, 때로 떨구고 다시 피우며 걸어간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모두들 하나같이
가고 있는 걸 본다 멈추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마즌켠 건물들이 불빛들 바람이 몸을 섞으며
걷는 것이 환상적으로 보인다
수백 장의 창유리들과 창틀과 가구와 문짝들이
나무였다가 모래였다가 먼지이거나 바위로
몸을 바꾸며 걸어간다 너르디너른
시공을 세워 두고 때로 시간 쪽으로만
때로 공간 쪽으로만 몰려서 접시처럼 쌓여
있다 그렇게 쌓여만 있다가 있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들이 걸어간다 걸어간다
글쎄 어디로 갔다가 어디에 있다가
누가 손을 내밀며 걸어나온다 누군가
무엇인가가 되어 세상 모든 것들은 걸어간다
제자리로 제자리 걸음을 하며
화 두
―無
그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으며 보이지 않는 전쟁을 이야기하며 산다
우리네 목은 보이지 않는 손이 움켜쥐고 있어요 그는 학생들에게 그
손에서 벗어나는 불을 이야기한다 날마다 불은 일어나고 소방수는 생
명을 구해 내고 장미가 불붙는 정원에서 그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만난
다 당신은 전국 방방곡곡에 꽃으로 피어 있지만 당신 자신은 지금 왜
내 앞에 있는지 알아요 당신의 불을 끄고 싶은 거지 저기 흐르는 강을
바라다보아요 밀밭 사이로 산들바람이 물결치는 걸 소방수는 저렇게
한가로우면서도 불을 끄고 있다우
당신은 나의 불을 꺼야만 할 것 같구려 불로서 불을 끄구려 그는 책
속에 삽화처럼 그녀가 자기의 생에 걸리는 걸 느낀다 보이지 않는 나
무가 자라고 무수한 가지가 뻗어나 잎을 띄운다 달력에 그 여배우를
걸어 놓고 그는 매일처럼 그녀를 본다 저 꽃들은 조금 있으면 시들 것
이다
시간이 탱탱한 줄을 울리며 저의 터널을 파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래 내 몸으로 그 어두운 터널을 파고 들어가는구나 너도 나도 온몸으
로 뿌리가 되어 뻗어 내려가는 것이라오 그는 사루비아가 불붙는 정원
에서 여배우에게 말한다 불로서 불을 끄면 남는 것은 재 뿐이라오 재
는 나무를 키우지
그는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불길을 올려다본다 우리는 단지 뿌리로
서 이 땅 끝나는 곳까지 터널을 뚫으리라 그 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
들리고 그는 물을 찾아 뻗어내려간다 그는 땅에 엎드려 그 샘에서 마
음껏 물을 마셨다 어느 날 그는 넘어지는 나무에 깔려 으깨어졌다
황 달
―두꺼비 2
애보다 배가 커지면서 배보다 배꼽이 커지면서 전체가 뒤집히기 시작
했다 바깥이 안으로 말려들면서 한가운데에 있는 것들이 퍼져나가 저
를 품었다 계란후라이는 노른자위가 터져서 온통 노랗게 변하고 대출
이자가 집값보다 많아지고 청구서며 내용 증명 공시 송달이 우편함을
넘치고 노오란 은행잎이 거리를 뒤덮은 이 가을
어떻게 두꺼비는 배만 커지고 더욱 배가 부풀어오른다 아 누군가 몽둥
이로 배를 두들겨댄다 이대로는 못 살아요 못 살아 터져 버려라 터져
버려 모두들 모여서 두꺼비를 몽둥이로 두들겨 대고 있었다 그러자 배
꼽이 터지면서 오장육부가 터져나오고 그는 그걸 덜러덩거리며 돌아다
닌다 피를 뚝뚝 흘리며 낄낄거리며 지점장님 긴급대월 좀 한 장만 해
주시죠 해주시죠 이 새끼야 이 오장육부 좀 꿰매어 넣게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두꺼비는 두꺼비를 세 마리나 해치웠다
그러자 두꺼비들은 그 두꺼비를 삼키고
웩웩거리며 노란 똥물을
은행 위에다 쏟아 버렸다
제천
언덕을 오르다가
별들이 전봇줄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을의 노란 불빛들이 전봇줄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걔들이 거기서 줄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멀티포엠
나는 꿈꾼다 시가 벌떡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
을 자기의 무대로 끌고 들어가서 한바탕 굿을 벌리는 멀티 포엠*을
VOD**에 국화 옆에서를 누르면 소쩍새가 국화꽃 한송이를 만들며 우
는 영상을 보여주고 천둥과 번개도 국화꽃을 만들며 몸부림쳐 우는 것
을 보여준다 누님은 고즈넉이 앉아 있다
창문 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거세지만 우리의 방은 동그랗게 견고하
다 시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안에 있는 아아 가상 현실보다 깊
고 빛나는 은유 현실 상징 현실이 둥둥 울린다 멀티 포엠 시가 둥둥
울리는 멀티 포엠 산에서 우는 적은 새가 우는 데로 우리를 데리고 가
는 멀티 포엠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과 배우를 만들어야 하고 우
주의 영상을 그래픽해야 한다 보리피리 불며 술익는 마을을 지나가는
나그네를 만든다 아지랑이는 피어오르고 멀티 포엠이 풍악을 울리며
내게로 온다 기차가 터널로부터 햇빛 속으로 나왔다 멀리 자미성이 보
이고 봉황이 날고 용이 푸르른 불을 뿜으며 나를 제 등에 태운다 용의
몸에 실린 방 한 칸이여 아아 까마득한 나락이여 밀실이여 광장이여
나 죽은 후에도 시를 울리는 장비들을 움직이며 나의 뇌파수는 살아서
영원히 시를 살으리
그 방에는 원자로가 있어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 속을 살아 표준화된
장비와 (12cm의 CD와 디지탈 영혼들) 저작 도구들 우주 어디에서나 그
것을 쓸 줄 아는 살아 있는 인간들 아니 그 누가 없어도 그 신호들만
있어서 나의 처소에 신호를 보낸다면 항시 나의 정리된 상상과 은유의
우주를 만날 수 있으리 투명한 창이며 화두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
의 별을 나는 읊으리 오오 영혼이여 기계여 암호여 나는 죽어서도 시
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너에게 신호를 보낸다
*MULTI-POEM
**VOD:양방향 케이블로 전송되는 주문 비디오
완벽한 순간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 여름 마지막 지하철이 쿵쿵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들리고 인생이란
의미가 있는 걸까 누군가 뇌까리는데 나는 마즌켠의 여자를 흘끔거리
며 나의 상상으로 그녀의 곁에서 잠자는 고양이를 꿈꾼다 고양이는 혓
바닥으로 그녀의 다리를 핥고 있고 나는 졸면서 그녀의 고양이가 되는
꿈을 꾼다
나는 로깡뗑의 일기를 읽으며 부우빌 시가를 걷는다 가로등 밑에서 백
인 여자와 흑인이 끼들거리며 지나가는 게 보인다 독학자는 G열을 읽
기 시작했다 나는 라열을 미친 듯이 찾았고 그 책들을 읽었고 그러자
머리 속이 개운하고 하품이 났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서 들고
그래 오늘 하루 도서관에서 무엇을 하였던가 생각해 본다
로깡뗑은 부우빌 시가를 거닐었고 그녀를 만났고 고양이를 보았다 그
런데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한 시간 후에 고양이를 찾아 일어
나리라 며칠 전부터 그녀는 12시 반에 자리를 뜬다 나는 도서관을 나
선다 그리고 문 밖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어둠이 내 속으로 들어와 더
욱 캄캄하다 눈이 부시게 그녀는 나를 지나쳐 가고 나는 그녀를 뒤따
른다 어두운 숲길에 이르러 그녀의 옷소매를 잡는다
당신이 읽은 책은 발해사였죠 댁이 어디시죠 여자는 대답 대신 겁먹은
얼굴로 나를 본다 대조영은 말갈족이었나요 아닌데요 그러면 퉁구스족
이었나 나는 로깡뗑을 읽었어요 괜찮으시다면 제 차로 모셔다 드리죠
그녀는 마구 달린다 나도 마구 달린다 그러나 숲은 너무나 깊었고 잔
디는 너무나 부드러웠고 이빨은 부딪쳐 덜그럭거렸다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받아안았고 어둠은 깊고 길었다 고양이가 나무 나무사이마다 마
구 뛰어다녔다
나는 가장 완벽한 순간이 영원처럼 왔다는 것을 느꼈다
돈바다
사람들 사이에 돈이 있다
나는 그 돈에게로 가고 싶다
공장으로 노가다로 외국으로 나가 보아도
보이지 않는 돈 그러나 넘치는 물결
거리마다 돈이 끓어 넘치고 빵빵거리고
부글거리며 철썩거리는 소리 들린다
파도는 백화점 쇼윈도우에서 철썩거리고
15층 30층 아파트로도 내 키를 넘치며
물 먹이고 엿먹이고 돈바다는 섬들을 넘친다
저 파도는 이제 머리 위에서 햇살과 함께 노닐고
거리를 메우는 자동차도 젊은 아가씨의 꽃빛 입술도
우리 사장의 번쩍거리는 마빡도 그 아래서 반짝거린다
나는 월급봉투를 털어서 구명조끼를 사 입고
끝이 안 보이는 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다
저기 빌딩으로 서 있는 무수한 섬들 비로소 보이고
집채만한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유조선이며 군함들 호화 여객선들
밤새워 불을 밝혀 들고 띵가당 거리고
그 짜디 짠 파도를 먹고 마시며 취해 팔자걸음으로 간다
아 나는 조그만 돛배라도 돛단배라도 타고
이 푸르딩딩한 돈바다 건너서 다른 땅을 밟고 싶다
제 3 부 너와 나
속 빛
그대 내 속에 들어와 떠나지 않네
꽃 속에도 들어가 웃고 흐르는 물 속 하늘 속 빛되어
이 세상 어디라도 까르르 까르르 석류는 터지네
바람 불어오는 그대 흔들려도 나는 촛불 들고 가네
그대 촛불되어 타오르고 밤되어 나를 지키네
나는 조용히 그대 속에 앉아
새벽되어 다시 열리는 그대 바라보네
너
너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너는 오리라
비안개 숲 푸르른 빗방울들 뚝뚝 듣는 속에서
콸콸 구르는 물소리로 부르는 너의 이름
온 계곡의 물이 되어 나를 덮치고
아아 나는 한개 말뚝이 되어
그 물의 힘 다 이겨내며 버티어 서서
등이 휘는데
온몸에 감기인 너 부르는 소리
온몸이 멍멍하여 너를 꿈꾸다
차라리 네가 되어 서는데
멀리 바다로까지 간 너 부르는 물소리
다시 하늘에서부터 휘감기어 와
온 천지에서 나 부르는 소리!
나는 무엇에 기대어 저 소리를 들어야 하나
여전히 비안개는 숲 속을 두드리고
이 푸르른 빛방울 속에서 나 부르는 소리
콸콸콸 넘치는 저 물 속에서 내 안에서
다시금 너 부르는 소리 네가 외치는 소리
아 너는 어디에 있기에 이다지 불러오는가
그러나 나는 믿는다 내 안을 넘치는 물로서
너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너는 오리라
신 발
신발도 짝이 있다는데……
마루에 걸터앉아서 신발을 내려다보다
지금 세상 어딘가를 돌고 있을 나의 한 짝을 생각해 본다
신발도 이렇게 짝을 이루고 나란히 댓돌 위에 놓여 있는데
너는 어디쯤에서 나를 향해 굽이치고 있는가
멀리 들판 너머에서 네가 다른 한발에 신겨져
먼저 앞서 나아가고 있는 게 보이는 듯하다
나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가 뛰고 있는 것을 느낀다
우리를 신고 엄청난 힘으로 누르며 내달리고 있는 그
높은 곳에서부터 나를 누르며 뒤축을 닳게 하고
그러나 한번도 너와 나를 하나로 만나게 해 준 적이 없는
그는 지금 어디를 분주히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그의 땀방울이 떨어지는 듯하고
숨결이 바람되어 떨어지는 듯하건만
앞서거니 뒤서는 짝의 모습도 보이지 않으니
너와 나를 누가 신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으랴
우리를 신고 가는 그가 어느 곳에 도착하여
얌전히 어느 집 문간에 우리를 벗어 놓을 때까지
서로를 스치기만 할 뿐 만날 수는 없으리라
그때 신발을 벗는 그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도 되리
너와 나를 가즈런히 놓아주는
여자의 집
안개로 저를 풀어 버린 저 들녘
한가운데 그 여자의 집이 불을 밝혀 들고 있으리
조금씩 안개를 베어 물면서 다가서면
길을 따라 흐르는 개울이 있고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나 있는 두 갈래의 길
나는 문득 수도 없이 다녔던 그 길들이 낯설다
어느 길로 가든 희미한 불빛이 번져 오는 창이 보이고
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으리
그러나 나는 오늘 길이 아닌 곳으로 가고 싶다
그윽한 안개가 내 속을 흐르는 동안
나는 논이며 밭이며 시궁창을 헤매어
쓰러지고 자빠지면서 일어나 가리라
가시에 찔리어 피를 뚝뚝 흘리며
그러나 안개를 타고 가볍게 흐르면서
길 없는 길을 만들며 나아가리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가지 않은 길들을 바라다보며
내가 가지 않은 길은 없다고
그녀의 집 앞에서 외치어 보고 싶다
한 발을 들여놓자 끝없는 나락이
또 한 발을 잡아당길지라도
오늘은 세상 모든 길을 지나서
너에게 이르고 싶은 것이다
너와 나 사이의 빈 집
너는 빈 집 같다
한번도 사람이 살아본 적이 없는
이제 막 허공 중에 세워진 아파트의 방 한 칸
나는 거기에 도배를 하고
아름다운 가구를 들이고 싶다
벽에는 가득히 수족관을 세우고
바다를 띄우리라
베란다에는 망원경을 놓아
날마다 별들을 불러도 보리라
어느 먼 별에선듯
너는 생각이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다본다
거기서 나는 너와 함께 살고 싶다
오라
벽에게
마음이 담을 쌓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오래고 오래도록 창문마저 동여맨다
하여 홀로 먼 우주를 걷느냐
발길에 채이는 별들은 다 어쩌고
물결치는 파도는 다 어쩌고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느냐
죽었느냐 살았느냐 무엇이 보이느냐
똑똑 흘러드는 소리 자욱하고
아아 우물 속으로 달이 뜬다
담 너머로 별들이 자욱하고
나는 너와
너 사이의 소리를 듣는다
자전거
나는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나만이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시가를 벗어나 들판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몇몇 마을이 지나고
이제 사물들은 그들의 이름에서 해방이 되어
또한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가다가 배고프면 밥을 사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언덕에 이르면 내려서 걷고 진창길에선 매고 걷는다
나는 노을보다 앞서가고 어둠보다 멀리 본다
이제는 그들의 세상에 돌아가지 않으련다
통장에는 기천 만원이 있으니 이자만으로도
평생 이렇게 전국을 책처럼 펼칠 수 있으리
세상에 이토록 자유로운 혼이 어디 있을까
달빛 아래 슬리핑백에 누워 자전거 그림자를 올려다본다
두고 온 사람들 웃음소리 들리나 돌아가지 않으리
내게는 내달을 두 개의 바퀴가 있고 가야 할 길이 있네
길 위에 풀어 논 어느 도시에 이르러
마음 맞는 이가 있다면
한 달쯤은 동행을 하여도 좋으리 세상의 끝 어딘가에는
마음에 드는 고장이 하나 남아 있으리
오오 그리운 이여 함께 가사이다
양 평
양평에나 갈까
아니 평양에
거기 눈빛 고운 아이를 찾아
시나 읊어 주고
낚시나 할까
구름 그림자가 물로 들어서
싱싱한 물고기로 튀어 오르고
아버지가 물가 저편에서
하하하 웃으시는 웃음이
쩔렁거리며
흔들려 오는
물 많은 동네
란蘭이는 이미 시집가고 없지만
피난 온 아버지와 의형제 맺고
우리를 서로 맺어주기로 했다는
그 애 아버지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어머니가 해주시는 채나물밥
소주 한 잔 걸치는 매운탕이 좋아서
마음이 적적할 때면
버스를 타고 가보는 또 다른 고향
제일 추운 곳이면 어떠냐
평양에나 갈까
아니 양평에
물 그림자는 하늘로 올라서
아버지 얼굴이 되고
뚝뚝 듣는 그이를
내가 듣으리
심야편지深夜便紙
매일의 일기를 적어서 편지로 띄우리
그대의 주소는 몰라도 된다 PC통신에 편지를 올리면
세상 어디쯤에서 그대는 그걸 읽고 느끼리
어제는 차를 몰고 광능내를 갔었네
나무 사이사이마다 그대의 다정한 숨결이
아직도 남아 바람으로 일고 우리의 시작이
저 키 큰 나무 아래서 걸어오고 있었네
그들은 낙엽 속으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보이지 않았네
그리고 그들은 나오지 않았어 아 그게 언제였드라
누군가에게서 편지가 온다
10년이나 전에 입술을 덜덜 떨며
나도 그곳에 있었어요 비가 내리고 무척이나 추웠었죠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의 추억은 너무도 깊어
쓰디 쓴 맛이 나는 것 같소
이따금 사랑방에서 만나 대화를 나눕시다
또 누군가에게서 편지가 온다
시시껄렁한 이야기 좀 그만두라
예전에 그런 연애 안해 본 놈 있으면 나오라구 그래 알간
나는 사랑방을 드나들면서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껄렁한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그대는 오지 않으리란 것을
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고 나는 편지를 쓰고 또 쓰며 차츰
절실한 것이 무엇이란 것을 알아 가네
이제 너에게로 가는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하고 얼마나 깊은 강을 건너야 하나
이제 와서 피어오르는 안타까운 아지랑이는 다 무엇인가
그날 한계령 언덕에서 우리는 보았다
한 물방울이 동과 서로 나뉘어져 가는 것을
졸졸졸 흐르는 물 구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바다가 등을 돌리며 운명을 달리하여
눕는 것을
그후 우리는 다른 바다를 살지만
사랑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안다
나는 오로지 너를 사랑하고 너를 기다리고 너를 추억한다
나는 다시 밤마다 일기를 적고 시를 적어 너에게 보낸다
머리 속에서 불꽃은 피어 타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마침내 그대에게서 편지가 온다
당신의 편지를 처음부터 다 보았어요
당신은 항상 저를 넘쳤었죠
지금도 그러하리란 걸 나는 알아요
우리는 서로 다른 바다를 살고 있는 걸요 왜 기억나시죠
한계령에서 갈라진 한 물방울 말이에요
우리는 연어처럼 그리로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거죠
언젠가 다른 세상이 오면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연어의 산란기는 아직도 멀었나봐요
심야편지 深夜便紙2
창밖에 일렁이는 저 나무는 종일을 저렇게
춤을 춘다 나도 누군가 들여다보면 종일을 그러하리
나는 종일을 하릴없이 벼게를 베고 누워서
나무만 본다 하늘은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고
비오는 소리는 고즈넉한데 젖어서 춤추는 나무가 그립다
마주 바라보면서도 나무도 내가 그리워 춤추며 온다
그래 나도 비를 맞으며 나무처럼 서 있으리 일어나리라
나는 비안개 밖으로 키를 세우고 나무되어 서 있으리
나무와 함께 있거나 나무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저 나무들은 떼를 지어 지나가리라 나를 꿈꾸며
길길이 머리를 풀고 나를 일렁이며 지나가리라
뿌리를 더욱 깊이 박으며 새들이 둥지 속으로 내려오고
이제 어둠이 밀물져 오고 창밖에 나무는 보이지 않고
어둠은 어둠인 체로 무수한 소리를 내는구나
머리를 풀어 늘어뜨린 채 나무야 너는 어디 서 있냐
누군가 창문을 열고 소리친다
네 뿌리를 베고 누워서도 나무야 나는 네가 그립다
솜공장에서
물 흐르듯이 솜이 나간다
이불만큼의 폭으로
길이 깔리듯이 솜이 나간다
이부자리 강
이부자리 길
그대들 누워 자라고
자면서 길을 가고 헤엄치라고
나는 밤새워 길을 풀어내고
강물을 흘려보내노니
이 둥둥 떠다니는 먼지들
내 몸 속을 들락거리는
먼지를 따라
나도 그대들의 잠 속으로
길의 강 강의 길에 얹혀
이부자리 속으로 들고 싶다
내 몸을 가득 채우는 솜이여
너 어디쯤에 있는가
아 창밖으로 먼동이 튼다
잎 새
꽃이여 우리들은 잎이다
잎 잎이다
그 이전에 줄기이고 뿌리이고 낙엽이다
그 이전에 땅이고 물이고 불이다
마그마이고
세상의 숨이고
피어나는 머나 먼 별이다
별은 언덕 높은 곳에 홀로 있지 않고
바다는 낮은 곳에만 있지 않다
물이 아무리 흘러도
가 다다르는 곳
별빛이 가 닿아 찌르는
그 가장 깊은 곳
한 뼘 가웃한 잠자리 날개의 설레임 속
저기 저 설레이는 잎새들을 보아라
꽃이여 잎 잎이여
어느 곳에 있거나
종일을 저렇게 흐르고 있구나
누구에게나 이르러 있는
바람타는 잎새여
피어나는 공기여
내가 저 버스를 타고
내가 저 버스를 타고
밤섬에 소풍을 다녀오는 동안
나는 집에 남아서 수학공부를 하였으면 좋겠다
모짜르트를 들으며 내가 잠을 자는 동안
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서
어린 왕자의 먼 별
몇 군데 노닐다 왔으면 좋겠다
먼 별의 장미 한송이를 들고 와서
밤섬에서 따온 듯이
너에게 꽂아주었으면 좋겠다
너에게 가기 위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이 건물이 나무가 되어
뿌리 끝에 별을 주렁주렁 달고
빛나고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먼 별을 다녀오는 동안
가지 끝에는
무수한 잎새들 서걱이고
뿌리인 별들이 빨아올린 열매가 뚝뚝 듣는데
거기 우리의 집이 있고 잠자는 너를 비추는
별들이 있어서
거기에 내려가 살면 좋겠다
내가 꿈꾸는 나라
―내가 꿈꾸는 나라
그게 무언지도 모르고 사람들은
떠들고 마시고 풍선을 띄워올리는데
그해 여름
나는 동해 바다에 빠져서 둥근 해를 건져올리며
내가 꿈꾸는 나라가 도래했음을 알았다
거듭 화투패를 돌리며 상대방을 곁눈질하며
그 소읍 스텐드 빠에서 미친 사랑의 노래를 불러재끼면서
참으로 오랫동안 삶이 이토록 전율하는 사소한 것들로 가득차서
기나긴 강물을 이루고 흘러가는 물방울이고 모래인 것을
그리하여 그 몸들이 해로 떠오르는 것을
아직은 그게 무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나라
내가 꿈꾸는 나라
돌아오는 봉고차 안에서 다시 화투패를 돌리며
붉은 해가 나를 따라 서족으로 흘러옴을 보았다
가다가 굴러떨어져 강물에 잠길지라도
―내가 꿈꾸는 나라
사랑할 때는 잠도 빛나고
사랑할 때는
어둠 속에 누워도
가볍다 몸이
보송보송하고
날아오를 것 같은
세상이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 빛나며
반짝이는 하늘이
가볍게 열린다
별을 가득 안고 있는
깨어 있는 잠 깊이
깊이 안겨드는 꿈
가볍다 사랑할 때는
잠이 온통 꿈으로
날아올라 하늘로
별로 빛난다
가볍게
가볍게
날아다닌다
깃털처럼
내 영혼
뻐꾹새
일요일
공장도 쉬는데
안개비 맞으며 정씨네 모를 내주고
허리가 끊어질 듯 하지만
뒷집 아주머니 손자 돌이라
자전거 타고 면내에 나가서 반지 하나 사들고 가서
동네 사람들과 거나하게 마시고
돌아와 누워 혼곤한 피로를 느끼며
오락가락하는 빗소리 들으며
TV를 보는데
문득 저 새 우는 소리
뻐꾹뻐꾹 뻐꾹새 우는 소리
문득 고개를 내밀고 추억의 뻐국시계가 운다
쇼 프로가 왁자하게 시작되는데
TV를 끄게 하는 저 소리
느닷없이 깨어 있는 나를 깨우는 소리
이 봄 깊은 낮 세시에
나를 부르는 저 태엽 풀리는 새 소리
30년 전 저 뻐꾹새 소리따라
나는 비를 맞으며 돌집을 지나
양계장 지나 목장도 지나
미친 선사가 살았다는 움막도 지나
방죽 가래실* 언덕을 넘어
내 뻐꾹새 시계를 찾아서 간다
뻐꾹뻐꾹
저 숲 속에서 오래도 참고 살았구나
고개를 내밀고 나올 것 같다
30년 동안 그 집 벽에 걸려 있다가
이제야 머리를 풀고 우는 새
나무나무마다 그 집을 이루고
한 점 박히는 너 있는 허공
거기는 블랙홀보다 어둡고 깊으리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너
나는 마침내 길을 잃고 돌아오는 길마저 잃고
하염없이 빨려들어간다
네 소리에 귀를 기울여도
뻐꾸뻐국 안 들리는 소리
산 너머로 구름이 가고 마침내 네가 또 울고
자꾸만 멀리서 울고
나는그래도 너를 찾아서 자꾸 안으로 안으로
숲 속을 간다
*충북 음성군 삼성면에 있는 작은 마을.
문 위에 놓아둔 열쇠
문 위에 열쇠를 놓아두네
쉬고 싶은 이들은 쉬어가라고
그러나 아무나는 말고 나를 알고
열쇠를 찾을 수 있는 이들만 애용하시게
누구나 밥을 먹고 자고 갈 수 있네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어질러 놓지만 않는다면
술을 마셔도 좋고 비디오를 보고 연애를 해도 좋네
시인 가수들 처음 보는 이들도 오네
방마다 토론하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하고 춤을 추네
그러나 35평 아파트가 너무 비좁지는 않게스리
이웃에서 쫓겨나지도 않게스리 애용하시게
내가 남해의 어느 우체국에서 엽서를 부치면
그들 중 누구라도 답장을 보내주네
한달 후에 내가 돌아와도 변한 것은 없네
방이 필요한 젊은 남녀들은 놀다 가시게
우린 한두 달 쉬다가 다시 떠나려네
다만 열쇠는 제자리에 놓아두시게
제 4 부 투명 연구
투명한 물
―茶山에게
나는 엄청난 것을 보았다
세상이 뿌리를 내리고
물 속으로 무한 속으로 흘러내린 것이
뼈 속까지 실핏줄까지 까발려서
물 속으로 터져내리는 것이 보이는 물
다 삭아서 더는 보일 것이 없는 물
그래도 물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 아가리가 보이고
보이지 않는 아가리에 이르러
다시 보이던 아가리가 다시 안 보이는 것을 보았다
안녕! 모래를 몇 줌 쥐어 던지면
텀벙거리는 안개 몇 올이 피어오르며
실오라기를 자아내고 몇몇 베틀을 짜는 여인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물 속에서
옷이 짜여지고 내게 옷이 입혀지고
나는 무수한 봉토를 내리는 군주가 된다
그래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이면 어떠랴
안개 속으로 안개 속으로 꼬리를 흔들며 사라지는
모래 한 알이여
바다에서 꼬리를 틀며 오르는 아가리여!
너는 참으로 엄청 엄청
엄청 나다
투명한 날개
날개가 있지
너의 어깨 위에는
접혀진 커다란 날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너도 모르는
한 번도 펼쳐 본 적이 없는 날개
하지만 너는 느끼지
날개 속을 날으는 어떤 신비한 힘을
바람이 감기이고 별이 감기이는
그러나 바람이 아닌 것
세상의 것이 아닌 것들이
가득히 흐르며 펼쳐지리란 것을
보아라
세상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날개는 하늘마저 감싸며 자라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거기에 들면서 너를 느끼며 날개가 되는 걸
너도 모르는데 우리들이 날고 싶은걸 그리고 날개 치는 걸
저기 저기 발 밑으로 우리들이 가고 있는 걸 내려다보아라
깃털을 날리며 구름되어 흐르는 사랑스런 그대여
먼먼 정신이여! 사랑이여!
투명한 몸
땅으로부터 오는 빛으로 그림자가 하늘로 오르고
하늘로부터 오는 빛으로 그림자가 땅으로 깃드는데
앞으로 나아갈수록 해와 달은 가깝고
너무도 눈부시어 두 눈이 먼다
오오 너무도 눈부신 어둠이여!
하나의 해가 달을 비추면 달은 또 하나의 해를 비추고
또 하나의 해는 또 하나의 달을 비추고
나는
흔들거리며 흔들거리며 중심을 잡는다
칼날 위에 선 듯 하늘과 땅이
이리저리 얽히고 부풀어오르고 높고 깊다
칼날 위에서 칼날 위로 춤사위를 옮기며
내가 빛을 뿌리는 그림자라고 느끼며 춤을 춘다
춤을 추리라 춤을 추리라
발끝에 차이는 별들을 칼날에 세우고
온 세상을 휘돌아 오르며
나의 몸을 흩뿌리며
얼핏얼핏
세상의 모든 빛이 눈 안으로 뿌려지는 것을 본다
그렇다면 저 해와 달들도 그것의 그림자!
얼핏 세상의 틈사이가 열리고 내 몸통이 열리고
아아 저 너머에서 또 다른 몸이 서 있었다
투명한 벽화
빛기둥!
하나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환하디 환하다
나는 수없이 서 있는 그들을 본다
전철 안에 수없이 많은 빛기둥들
차창으로 고대의 벽화처럼 흘러가는
빛의 나무 나무 나무들
바퀴 구르는 레일 밑으로 내려져 있는 그들의 뿌리
천정으로 뚫고 오르는 그들의 줄기며 잎새들
나는 전철 창에 얼굴을 묻고 흐르는 벽화를 본다
구석기 시대에서 솟아 온 아저씨와 31세기에서 내려온
아가씨와 빙하 속에서 기어나온 꼬마와 함께
구겨진 와이샤스 밟혀진 구두 땀내 나는 옷에서
뿜어내는 빛
그걸 다 땅 속에 끌어 들여서 뿜어내는 빛
마침내 원을 그리고 돌고 도는
수천 억 바퀴의 나선의 빛의 기둥!
무엇인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한다
커다란 폭음과 불꽃을 남기며 로겡이 되어
땅 속의 모든 것들을 모아 솟아오른다
머나 먼 우주를 향하여
거대한 빛기둥되어
투명한 나무
땅 끝에 내가 닿아 있는 뿌리로부터
물이 물밀어 올라온다 수천 길 솟아오르는 힘으로
나를 키우고
내 발을 지나 머리 끝을 지나
하늘에 투명한 물방울 잎새를 하나 둘 틔운다
걸어가거나 누워서 잠을 자다가도
나를 통하여 흐르는 투명한 물을 느낀다
몸을 둥글게 구부려 5천년 전 뿌리를 몇 가닥 만져보고
거문고 자리까지 뻗어 있는 잎새를 흔들어도 보지만
그 물은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어디로 가는가 알 수는 없다
저 깊고 깊은 땅 속 어딘가에서부터
저 하늘 끝까지에 이르는
물이 되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나는 그것의 통로일 뿐
텅 비인 나무일뿐!
투명한 터널
네가 지나 간 자리에
투명한 터널이 뚫리고 있었다
네가 내 앞을 지나 광화문 길을 가는데
네 몸 부피만큼 터널이 안개꽃보라치며
노랗게 타오르는 은행나무 사이로 이어져
한 마리 뱀이 되어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재빨리 터널은 투명하게 메워지고
다시 너의 향기로 가득해 진다
거기엔 바람도 불지 않는다
비도 내리지 않는다
나는 마구 달린다
마구 달려서 너를 붙잡는다
네가 나를 돌아다본다
아 환하디 환하다
투명한 바닥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걷다가……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행잎이 굴러가는 곳의 유리같은 바닥이
내 몸 안으로 굴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도블록과 은행잎과
나 사이에 있는 것들이 저 빌딩들과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들이
불을 밝혀 들고 너울거리며 일어나 회오리치며 불어와서
나를 하늘로…… 저 깊은 하늘로 날리는 것이었다
나는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만 있는데…… 그래
그래 나는 날고 있었다 빛을 타고 흐르며 그들 속에서
속으로 아아 무언가 더운 것으로 풀풀 날아서……
희디 흰 것이 되어
땅을 뒤덮고 있었다 그 위로 내가 사뿐히 내려서
누군가의 그림자를 덮고……그의 핏줄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 희디흰 눈이 되어 니코틴 더러운
가래침에 끼어서
어둡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그대의 가슴 깊은 곳
한줄기 물로…… 파도가 철썩이는 곳에 이른다
멀리 떠 있는 섬 하나 등대에 불이 보이고
우리는 바닥에 깔린 별로서 하늘에 내돋고 있었다
나는 그저 길바닥을 내려다보며 걷고만 있는데
투명한 창
물을 빨아들인 스폰지가 물이 되어
술을 빨아들인 내가 술이 되어
회사를 빨아들인 사채업자가 사장이 되어
땅을 빨아들인 나무가 다시 땅이 되어
나를 빨아들인 무지개가 내가 되어 하늘 아래 걸려서
그 투명한 유리를 통하여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여준다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듯 그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나는 너처럼 투명해지고 굴러다니고 싶어
스폰지가 물에게 말한다 나는 네 속에 숨어서
누군가를 왕창 적시고 싶어 물이 스폰지에게 말한다
너는 어제 왜 동대문에 들어가서 잠을 잤니
임마 그걸 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아냐
나는 술하고 싱갱이를 하고 있었고
사장이 된 사채업자는 장부를 수도 없이 들여다보더니
종업원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제 여러분과 나는 한 몸으로서 이 회사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아
나무는 제 잎으로 저의 뿌리를 덮고 다시 잎을 달고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그들이 피어 댄
담배 연기가 가물거리며 방안에 자욱하다
스폰지는 물이 되고 싶고 술은 내가 되고 싶고
나는 네가 되고 싶고 너는 내가 되고 싶다
투명한 방
내가 너의 집에 갔을 때 피던 거 있지
방안 가득 뽀얗게 피어나던 꽃 담배 연기 아지랑이
나는 그게 그리워서 물밑에서 물을 보듯 너를 보아
일렁이는 햇살 물결의 어른거림이 너에게서 오고
다함없는 노래가 언제 어디서나 울려오는 거 있지
네가 보고플 때면 나는 너에게로 가듯이 가라앉으며
물 밑에 있는 산과 골짜기를 돌아 해조의 음을 따라
굽이치는 물결로 거슬러 너의 방
향기를 찾아가서 가곤 했지
거기에 너는 항상 있었고 비발디와 아아 사계와 바람이
바람이 불고 있었지 나는 그것이 영원한 것인줄 알고
히히덕거리며 낄낄거리며 너의 향기에 취해 피어나면서
조금씩 빗겨 가는 빛이
노을 쪽으로 번지는 것을 보지 못했지
가는 비 내리고 비껴 가는 빛이 높은 하늘에서
무지개를 이룰 때에
이제 불붙는 어둠이 오고 너의 집은 어둠 속에 잠긴다
불을 켜야 하리 어두움에 불을 붙이고 태워야 하리
그러나 나는 그때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아아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별 하나, 불켜진 창을 본다
좋은 영화를 보고 오는 밤
좋은 영화를 보고 오는 밤
눈이 내리고 지바고는 지나치는 전차에서
그녀를 내다본다 나는 지하철에서 그녀를 보고
무슨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지나쳐 가고
돌아오는 길은 미끄러웠다 허방이 도처에 깔려서
입을 벌리고 나는 안 빠지려고 헛손질을 하며
지나가는 마차를 불렀다 어디로 갈 것이냐
수많은 세기가 지나고 지나도록 변하는 것은 없으며
나로서 태어난 자들은 저 홀로 깊어 간다는 것일 뿐
나는 내리는 눈을 허허로이 입으로 받아 마시며
산성 눈이면 어쩌냐고 낄낄거리며 말이여
내일은 어느 고도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수세기의 햇볕이 여러 겹 겹친 뜨락에서
수세기의 그를 그들을 만나리라 만나리라
마부여 그대는 그 곳을 아는가 말이여 길이여
이토록 눈이 내리어 우리의 갈 길을 덮어도 가야만 하리
마차는 날듯이 달리고 달렸다 그래 나는 아침까지
밥을 먹다가도 나는 프라하에 있거나
붉은 수수밭을 달리고 있다
사물들은 다 나를 비껴 가는데 나는 왜
그들을 놓지 못할까
아 오늘은 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수박밭에서
수박이 자라는 것과 우주가 팽창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같은 현상인지도 모른다
수박은 자라면서 거대한 우주로 부풀고
씨앗들은 검게 타오르며 별이 되어 서로 멀어지고
아아 터질듯이 터질듯이 우주는 부풀어
무르익는 짙푸름을 밖으로 뿜고 있다
나는 천여 평의 밭에서 뒹굴며 자라는
수천 개의 수박통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수박통 안에서 무수히 자라나는 별들이여
밤이 오면 원두막에서 아이들과 수박을 먹으며
너희들 수박씨를 어둠 속으로 뱉어내면서
나는 밤하늘이 둥글게 자신의 몸을 키우고
터질 듯이 부풀어 무르익어 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무르익어서 짙푸름을 뿜어내면은
주인은 그 수박을 다른 이들에게 맛있는 열매로
내다 팔리라 이 세상은 그렇게 자라고 자랄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의 바깥에서는 누군가 쟁기를 들고
자신의 수박 밭을 일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도 나처럼 수박씨들이 저 안에서
돌고 있는지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리라
그리고 내년에는 개량종으로 두 배쯤 넓게 심으리라
마음먹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어떤 개인날
모진 비에 강한 바람이 겹쳐서
그의 창문이 날아갔다 언덕 쪽으로
무수한 유리의 파편이 흩어졌고
염소들도 발을 살펴 딛으며 풀을 뜯는다
마당을 찰랑이던 물도 이제는 빠지고
시뻘건 개흙을 맑은 물을 퍼서 씻어낸다
물로서 물의 때를 씻는 일이 신이 나는지
아낙들은 왁자스레 웃으며 펌프질을 한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유리를 사러 나가고
몇몇 바람이 그의 텅빈 창을 들락거리며
책장을 넘기고 그의 옷자락들을 흔들어 본다
언제나 이렇게 문이 열려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야 남의 사생활을 방해해서는 안돼
야 내가 왜 이 창문을 날려버렸는지 알기나 하니
심술이지 뭐, 뭐라고 바람은 시시덕거리다 나간다
그래 모른다 모를 것이다 바람은 그가 이내 오는 것을
그러나 그는 이내 오고 바람이 놀다 간 것을 모른다
그는 유리를 창틀에 맞추고 실리콘을 바른 뒤
끄떡없는지 퉁퉁 두드려보고 손을 마주 비비다
물가에 가서 씻은 뒤 다시 손에 풀물이 들면서
뒷마당에서 풀을 베면서 오후 내내를 보냈다
뜨 락
하늘의 선이 지나간다
머리 위에 또렷하게 깔리는 선
구름의 층이나 바람의 결
별자리의 움직임이 아닌
무소부재의 떠 있는 선
손을 내밀면
물방울 몇 개 또르르 굴러
그 넓고 먼 뜨락을 펼친다
아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곳
때로 나는 거기에 있다
가등의 방
지구상에 가등은 칠억칠천칠백만개이다
나는 가등이 가진 동그란 방을 보고 있다
지나가는 이들은 거기에 멈추어 서지 않는다
일이프로의 사람들만 그 아래 서서 가등의 방에 든다
그들은 책을 읽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거나
벤취에 앉아서 연인과 포옹을 하거나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리고 서 있다
차들은 모르는 별처럼 지나가고
차 속에서 보면 그들은 외계의 별 속에 서 있다
지켜줄 아무런 벽도 창도 없는 방에 그들은 있다
바람과 별과 시가 낙엽과 함께 발밑을 구르고
누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채
누군가는 방 속에 있고 누군가는 방 밖에 있다
그들의 집은 저기 어둠 속 어딘가에 있고
아직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아서 가지 못한다
벌써 누가 자기의 방에서 불을 켜고 있는가
저 집들 저 아파트들에서 닫힌 방이 까무룩하고
그 방은 멀리까지 퍼져나가지 못한다
서로를 지키는 방이 길 속에 있는데
왜 모두들 문을 닫고 웅크린 채 벽과 천정을 바라
불을 켜고 있는 것인지 바람만 스산하다
그대 거기서 무엇을 보느냐
나는 진종일 가등의 방에 서 있는 사람을 본다
그는 자기만의 방이 없어서 누군가를 기다리고만 있다
가등의 방에는 문이 없어서 누구나 드나들지만
그는 오지 않고 그는 기다리고만 있다
누가 가로수 길을 걸어서 오고 있는가
그는 고개를 빼들고 바라다본다
열린 방과 방을 건너서
칠억칠천칠백만개의 방이 겹쳐진 동그라미를
등에 지고 그가 걸어서 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너무도 눈부시어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제 우리를 해가 켜든 가등의 방에 서 있게 한다
해는 열린 세계의 별들의 거리에 우리를 내 놓은 것이다
이제 모든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오리라
나는 저 커다란 가등이 가진 동그란 방을 보고 있다
그래도 나는 낮에 가등을 켜놓을 수만 있다면
더 좋은 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아무렇게나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
제 땅에 내리는 뿌리를 누가 자르랴
잎 피우고 꽃 피우거라
아무리 바위가 굳어도 뿌리는 그 속을 헤집고 들어가
둥지를 튼다 잎을 피우고 줄기를
뻗어 벼랑 아래 물에 그 속에
한 나라를 펼친다
꽃그늘 환한 물 널리널리 번지는 불
타오르는 것들 숲을 이루고
토끼며 오소리 노루며 살쾡이 수리부엉이 날린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뿌리 밖으로 저를 뻗어서
다른 땅을 가기도 한다 뿌리 밑으로 잎새 밖으로
흐르는 것들을 올올이 빨아들이며
잎새에서 뿌리까지의 다른 나라를 연다
거대한 빛기둥 속빛 타오르고
그저 살아 있음만으로도 어디까지나 갈 수 있으니
살아 있는 날의 기쁨이여
뿌리여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서 살아라
썩은 놈은 빨아먹고 맑은 물은 꽃피우거라
아무렇게나 살아도 거기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