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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위험한 역사 인식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뉴라이트Newright란 라이트right에 뉴new를 첨가한 것이다. 여기서 라이트란 전통적인 수구세력이며, ‘뉴’라는 것은 라이프라는 수프에 새로 첨가된 양념들이다. 이 새로운 양념들은 안병직과 이영훈이 이끄는 이른바 낙성대연구실 그룹으로 대표되는 경제사연구자들과 과거 좌파진영에서 전향해 우파로 돌아선 학생운동 출신가들 그리고 기독교계에서 김진홍목사류 등을 들 수 있다. 낙성대연구실이 계량경제사라는 방법론에 기초해 나름의 실증에 기초해 한국 근현대사를 재해석하고(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과 대한민국성공사), 전향한 학생운동출신가들의 북한 비판으로 대한민국의 비교 우위를 확정하고, 종교집단이 여기에 도덕성과 영생을 보장하는 3종 양념이 전통 수구세력의 국물에 더해진 것이 뉴라이트이다. 물론 세력적으로는 전통적인 수구라이트와 뉴라이트 사이에는 출신 성분이나 색깔 차이는 있고 내부에서 갈등을 빚기도 하고, 때로 뉴라이트는 실증적 엄밀성과 이론적 우위에 입각해서 좌익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겠다고 떠들고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 철저한 반공주의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찬양하고 독재정권을 미화하며 한미일 삼각동맹에 기초 해 북한을 고립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대항적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2008년 3월 한국 뉴라이트 계열인 교과서포럼의 이른바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의 출간과 이명박 정부의 검인정 근현대사 교과서(특히 금성출판사 간)에 대한 수정 압박을 배경으로 뉴라이트의 역사관이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교과서포럼측은 ‘현행 검인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좌경화’되었으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실패한 역사’로 규정하여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의도적으로 훼손·폄하한다고 비난했다.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는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20세기 세계사의 모범국가=성공국가’라는 결과론 관점에서 근현대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은 20세기 한국사는 ‘대한민국의 발전사’라는 축선에서 새롭게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핵심은 , 북한은 실패한 국가이며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의 역사’와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수호할 것을 교과서를 통해 국민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입장을 항목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일제 식민통치 당국은 조선인을 경제적으로 수탈한 바가 없으며 자본주의 관계에 의해 정상적으로 통치했다. 제국주의의 수탈과 억압은 과장되었거나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 일제(또는 조선총독부)는 각종 근대 제도의 도입과 철도, 항만 등 인프라스트럭처의 확충, 토지조사사업 등 근대적 소유관계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전개, 1930년대의 공업화와 근대 교육기관의 확대에 따른 인적 인프라스트럭처 구축, 관료기구는 물론 각종 근대적 기구 참여를 통한 조선인들의 근대적 능력 배양 등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문명화)시켰다.
· 일제의 근대화 시책은 해방 후 한국 고도경제성장의 역사적 동력이 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결단을 내림으로써 대한민국의 발전의 근본 초석을 닦았고 박정희대통령은 조국근대화 혁명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선진자본주의 국가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
· 산업화 없이 민주화는 가능하지 않다. 산업화 시기 이른바 민주화운동으로 자처한 좌익 세력들의 발호는 산업화의 걸림돌이 되었다.
· 한국의 경제발전은 국제 협력관계를 잘 활용한 덕분이다. 앞으로도 한미일 공조에 입각한 국제협력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 대한민국 정통성을 수호하고 대한민국이 북한을 흡수 통일해야 한다.
이들의 일제강점기(식민지시기)에서 ‘대한민국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얼핏 하나의 학술적 주장으로 진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이 틀리거나 사실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거나 수용하기 어려우며, 그 배후의 인식이 대단히 위험하며 시대착오적이다. 이들의 주장은 이른바 이들의 ‘대안교과서’에 나오기 때문에 이것을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식민지시기와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눈
뉴라이트 교과서포럼의 '대안교과서 한국근현대사'(이하 ‘대안교과서’)는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체제”에 입각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국내외의 한국인들의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고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이 표현은 자신들의‘대안교과서’를 한국의 검인정 교과서로 통과시키기 위한 상투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이들의 식민지 역사 인식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먼저 '대안교과서' 관계자들은 현행 검인정 국사교과서가 지나치게 민족주의 관점에 서 있어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편견에 입각해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고 맹비난한다. 그 결과 현행 검인정 교과서가 민족 감정에 치우쳐 식민지시기 일본제국주의의 수탈이나 항일운동을 과장해서 서술했다고 주장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해야 한다는 실증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식민지기를 수탈사 또는 항일운동사 중심이 아니라-그것은 이미 많이 연구되었기에 특별히 자신들은 주목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얘기가지 하면서- 식민통치자들의 근대화 정책과 조선인들의 주체적 근대 적응으로 근대화의 역량이 구축된 시기임을 인정하는 시각에서 새롭게 서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식민지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으며, 일제 식민통치의 ‘의도하지 않은 효과’와 한국인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로 규정하고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다. 서술 내용 또한 항일운동이나 일본제국주의의 수탈보다는 그러한 근대화의 여러 양상을 상세하게 나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나아가 식민지시기 구축된 물적· 인적 인프라가 해방 후 고도성장의 역사적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항일운동은 과장되었다기보다 실제 사실보다 훨씬 덜 밝혀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또 교과서포럼의 주장대로 ‘민족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실 그대로’서술하자면--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을 미화할 필요가 없다면--악질 친일파들이 일제에 빌붙어 항일운동을 악랄하게 탄압한 사실과 해방 이후 특히 대한민국에서 이들이 어떻게 기득권을 계속 이어왔는지 마땅히 서술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항일운동을 탄압한 악랄한 행위에 가담한 자들의 죄행에 대해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이들을 은폐 또는 미화하고 있다.
사실 항일운동사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며, 항일운동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대안교과서’의 항일운동사 관련 서술을 보면 사실들을 이리 저리 나열하고 있으나, 기초적인 사실 오류는 물론 서술 방식이나 서술 체계 그리고 각각의 항일운동의 성격과 의의에 대한 평가 등은 차마‘교과서의 대안’이라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운동사에 관한 한 고치느니 새로 쓰는 게 낫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 이들은 현행 교과서는 일제가 식민지 민중에 대해 억압과 수탈을 자행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이 또한 민족적 편견에 입각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예컨대 ‘대안교과서’의 필자들은 일제가‘민사령(民事令)’을 통해 개인의 인격적 존엄과 자유로운 행위 그리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활동을 조선인에게도 전면적으로 보장했다고 주장한다. 일제 식민통치 당국의 공권력에 기초한 폭력적 수탈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순수하게 자본주의 경제교환관계 즉 시장의 논리에 입각한 교환을 통해 부의 이동이 있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또 일제는 식민지에 막대한 투자(개발 또는 근대화)를 했지만, 식민통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오히려 일제는 이익 대신 손해를 보았다는 놀라운 의견을 내놓았다.
한편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노력과(한국인의 우수성) 이러한 일제의 근대화 시책에 힘입어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으며, 일제의 정책에 잘 적응해 훗날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적 기초-근대화 역량 축적-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식민지시기를 대한민국이라는 우량아가 일제 식민지라는 뱃속에서 영양 공급을 잘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던‘대한민국의 임신기간’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일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시켰고 일제 강점기 구축된 인적 물적 인프라가 해방 후 특히 박정희정권시기 고도성장의 역사적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제강점기의 농업개발, 공업개발, 조선인 인적자본의 형성 등에서 일제 강점기 ‘개발’에 따른 외형적인 성장은 확인되지만 그 이면, 즉 경제개발의 과실이 일본인과 조선인 가운데 누구에게로 돌아갔는가를 분석해보면 실상은 “개발 없는 개발”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의 조선개발은 조선 땅위에서 이루어진 개발이었음에도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고, 한국인에게는 전혀 그 수혜가 돌아가지 않았다. 8·15 해방 전후 일제가 남긴 식민지 성장의 유산이란 것도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으며 이나마도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거의 소멸되어, 오늘날 한국 경제 성장이 일제의 개발의 성과에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지적했다. 교과서포럼은 일제식민지를 정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일제 강점기의 경제성장을 일면적으로 높이 평가하여 사실상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기본 관계마저 시야에서 사라졌다.
뉴라이트는 일제가 조선을 영구 지배를 위해 다른 어느 제국주의보다도 식민지에 근대문명을 이식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강변한다. 일제에 의해 초등교육의 기회가 널리 보급되었고, 근대 학술이나 문화 예술의 새로운 사조가 도입되었으며, 경성제국대학과 같은 최고교육기관이 설립되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조선인들에게는 초급교육의 기회만이 간신히 부여되었으며, 상급학교에로의 진학은 한줌도 안되는 일본인 학생의 몫이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는다. 식민지의 최고 학부인 경성제국대학 또한 조선인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방해하고, 지식청년들에게 제국의 이념을 주입하기 위해서 설립된 배경을 생략하였다. 게다가 경성제대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입학비율은 제한되어 언제나 일본인 학생들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였다. 1937년 이후 초등학교는 사실상 어린 조선인 학생들을 조기에 황국신민으로 만들어 전쟁의 총알받이로 끌고 가기 위한 조선인 징병제 계획과 맞물려 운영되었다. 단지 학교의 증설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교육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대안교과서’는 일제의 민족 차별과 폭력적 억압의 실상 대신 일제 식민통치의 근대적 효과와 그 성과에 주목하면서 사실상‘식민지근대화론’이나 ‘제국주의 시혜론’에 입각해 식민지시기를 서술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마저 미화하는 마당에 일제의 하수인인 친일파에 대해서 이들이 제대로 비판적 시각을 갖고 서술하기란 난망하다 하겠다. 오히려‘대안교과서’는 친일파들을 일제의 식민통치와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 잘 적응해 근대적 능력을 배양하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놓은 ‘근대화 선구자’로 둔갑시키고 있다.
실제로 ‘대안교과서’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해 친일행위를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의 조선인들의 실천 활동으로 해석할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 특히 지식인· 관료· 자본가 계층의 친일 행위를 근대화 역량의 축적과 건국 후 대한민국의 발전의 초석을 마련한 행위로 정당화하고 나아가, 이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눈부신 성장을 했다는 식으로 묘사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우량아의 DNA 핵심은 바로 이들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식민지 시기‘항일은 독립쟁취, 친일은 건국 역량준비’라는 기괴한 도식이 성립한다. 서로 적대 개념인 항일과 친일이 둘 다 국가 건설을 위한 ‘애국활동’이 된다. 아니 사실 이들은 근본적으로 ‘근대화· 경제성장=문명화’라는 시각에서 역사 사실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항일보다는 친일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
일제 식민지시기를 경제성장과 조선인 생활이 향상되었다는 보는 한, 이들의 입장에서 항일운동은 근대화의 걸림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제가 ‘문명화’에 쓸 비용을‘항일세력’이 괘씸하게도 소모했으니, 마땅히 이들은 항일운동을 비난해야 자신들의 입장에 충실한 것 아닐까?
참고로‘뉴라이트의 대부’라는 안병직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몇 년 전 국내 유력의 극우 일간지에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경제상 비용 손실만 초래하여) 산업화· 경제성장의 걸림돌’이라고 언급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논법이 일제식민지시기라고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결국 식민지시기를 ‘제국주의의 말발굽과 함께 실려 온 근대 문명의 학습기’로 규정하고 식민통치를 문명화의 계기로 서술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이나 ‘제국주의 시혜론’을 정당화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따르자면 제국주의와 식민지라는 근본 규정은 사라지고 만다. 민족해방운동 또한 별다른 의미가 없게 된다. 문명개화가 되고 있는데!
친일파의 행위 또한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의 조선인들의 실천 활동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만주국 명예총영사이자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조차 어려운 조건 속에서 조선인 산업을 육성한 공로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친일행각이 산업화와 건국의 준비활동이 되는 셈이다. 이 경우 항일운동은 사실상 ‘근대문명화’의 비용손실일 수밖에 없다. 조선총독부가 근대문명화에 쓸 예산을 ‘토벌’에 사용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일제에 적극 협력하고 전쟁 동원에 앞장선 친일파들과, 일제의 물자 수탈과 인력 수탈의 대상이 된 일반 조선인들 모두 일제의 침략 전쟁에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협력’했다는 식으로 서술해, 과거 친일파들의 단골 변명인 ‘전민족 친일공범론’을 옹호하고 있다. 이는 가해자인 친일파와 피해자인 조선민중을 일제에 대해 모두 협력했다는 식으로 같이 묶어버려 사실상 친일파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있다.
김구는 반국가사범?
해방 후 ‘대한민국사’ 서술은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교과서포럼은 ‘대한민국’은 좌익과 투쟁하면서 세운 반공국가이자 자본주의국가라는 점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있다. 반공과 자본주의가 대한민국 정통성의 요체인 한, 대한민국은 항일투쟁의 역사 속에서 정통성이 구해질 수 없다. 과거 극렬하게 친일을 했더라도 해방 후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반공애국투사이자 건국공로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일제식민통치의 근대화 성과를 계승ㅡ조선총독부의 법통성을 승계ㅡ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절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 20세기 한국사에서 최고의 의의가 있기 때문에 8월 15일을 ‘광복절’대신‘건국절’로 새로 제정할 것을 주장한다. 건국절 제정을 통해 반공과 자본주의시장경제 옹호를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또는 정통성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 이를 수호하는 날로 삼자는 것이다. 이 경우 우파항일운동의 지도자이자 임시정부의 수반이었던 김구조차 대한민국 건국-분단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국공로자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반국가사범이 되고 만다.
또 이 책은 독재자를 찬양하고 지배세력 또는 엘리트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한다. 해방 후 북한은 민주화와 산업화를 모두 실패한 반면, 대한민국은 반공주의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과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 “대단히 활발하고 우수하고 풍부한 기업가 능력” 과 엘리트의 활약으로 “20세기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세계사의 모범국가”라고 높이 평가했다.
특히 ‘대한민국사’를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중의 역사 대신 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탁월한 영도자와 엘리트 관료와 재벌에 의한 ‘눈부신 경제성장’의 역사로 재규정한다. 지도자-관료-엘리트지식인-기업인의 활약에 힘입은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대한 강조가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남쪽을 공산 위협으로부터 지켜내고 자유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국부(國父)’로, 박정희대통령은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발전시키고 바꾸어놓은 ‘근대화 혁명가’로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에 관해 역사개설서로는 민망할 정도로 많은 비중으로 서술하고 있다. ‘국가테러리즘의 주범’들을 국부와 근대화혁명가로 치켜세움으로써 이들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경제 성장의 걸림돌?
물론 교과서포럼은 한국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였다고 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성과도 일정하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민주화세력이 자신들이 찬양하는 이른바 산업화세력과 긴장관계에 있었음을 제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다. 민주화운동은 단편적이거나 심지어 부정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또 이들은 경제성장의 결과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민주주의가 제도화했다고 강조한다. 경제성장을 민주주의의 제도화의 근본 동력으로 평가하면서, 결국 산업화세력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는 기괴한 도식으로 이어진다. 반면 민주화운동은 보조적인 의미로 축소하고 있으며 심지어 부정적으로 서술한 부분도 있다. 몇 년 전 안병직 교수가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은 산업화·경제성장의 걸림돌’이라고 언급했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남북관계도 적대적 경쟁을 통한 남한중심의 흡수통일 방식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의 필자들은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기 접합하기 시작한 근대문명을 소중히 보존하고 발전시켰으며, 북한은 일제가 제정한 모든 법률과 기구를 폐기해버림으로써 곧 바로 문명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간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남한과 북한의 대결은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며, 이 대결에서 남한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흡수통일 하는 것만이 ‘북한해방’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화해와 공존, 그리고 남북의 장점을 딴 한 차원 높은 통일과정을 모색하는 대신 선과 악의 대결 속에서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있다.
북한에 대한 교과서 서술도 마땅히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행 교과서처럼 민족사라는 차원에서 해방 후 남북한 역사를 병렬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버리고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를 쓰자는 것이다. 즉 북한 역사는 민족사의 동등한 범주가 아니며 비정통적이고 불법적 국가이므로 배제해자는 것이다. 실제 이 책은 북한 역사를 일종의 외사(外史)인 보론으로 처리해 서술했다. 북한체제에 대한 서술은 과거의 반공교과서를 능가할만큼 적대적이고 대결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남북의 화해와 공존을 통한 상생 대신 체제의 대결을 통한 승자독식의 통일관을 가르치고 있다.
국제 관계에 대해서도 지극히 외세의존적이며 몰주체적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이 한·미·일 동맹관계를 강력히 구축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국제적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일제 식민지라는 조건이 ‘외래 근대문명의 주체적 접합과정’으로 해석되듯이, 해방 후는 우방인 미국과 일본이 중심이 된 해양세력과 정치·경제·군사·에 걸쳐 긴밀한 협력관계를 전제로 대한민국의 도약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외세에 의존한 것마저 국제 정세에 대한 능동적 대체로 미화시키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도약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들은 역사의 진정한 주체를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별인간”이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얼핏 개인의 존엄성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개인을 모든 사회단체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국가에 귀일시킴으로서 개인은 국가와 연결 또는 대치된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유와 인권과 재산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권력이라는 놀라운 국가관을 제시한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부정하는 북한사회에 대비해 대한민국은 정의의 국가이며 수호의 대상인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자유를 본성으로 하는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하고 억압한 주체는 사실 국가였다. 국가에 관한 이론 해석은 내어두더라도 사실 차원에서 실로 국가테러리즘의 시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지난 60년의 대한민국 국가를 과연 이들처럼 “자유와 인권과 재산을 수호하는 정의로운 권력”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영훈 교수는 이 ‘위험한 교과서’를 “비로소 세계사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자랑스런 교과서”라고 자평했다. 교과서포럼측은 현행 검인정 역사교과서의 기준을 고치고 역사교과서 집필에 사회과학 전공자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기존의 ’좌경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자파 세력을 통해 압력을 가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쓴 책을 검인정에 통과시키려는 것이다. 이들이 지지하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교육부 장관이 이들의 주장을 전면 지지하고 재계가 적극 호응하면서 그러한 움직임은 더욱 고무되고 있다. ’건국절 논쟁‘과 ’교과서 수정‘ 압박을 통해 사실상 힘으로 자신의 낡은 세계를 미래의 학생들에게 주입하려 하는 것이다.
정통성이 결여할수록 정통성에 대한 집착이 커지듯이, 뉴라이트의 ‘위험한 교과서’는 친일-친미·반공·독재로 얼룩진 기득권 세력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반공주의·반북주의와 시장경제를 체제 이념으로 한 국가관의 확립과 애국주의의 고취라는 시각을 지닌 한, 그리고 ‘근대화신화’에 입각한 서술체제로서는 근현대사에서 항일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한 세력이나 해방 후 민주화, 평화통일운동은 자연히 폄하할 수밖에 없는 근본 한계가 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특정 계급의 독점을 성공으로 포장하는 ‘대한민국 성공백서’이며, 그 ‘성공’을 이끌어 온 지도자와 엘리트 관료와 재벌과 반공주의자에 대한 ‘헌정서’라고 할 수 있다. 또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국민을 중심에 둔 애국주의라는 낡은 이념으로 무장한, 결코 새롭지 않은 ‘뉴’라이트의 신앙고백서이다.
첫댓글 마음속으로 느낀점이 많은 글이기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퍼담아 왔습니다. 유족님들께 심려를 끼치지 않았나 걱정도 됩니다.
한번쯤 읽어보시고 음미 하시며 오늘에 살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스스로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돌바위님께서 올리신글을 잘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민족 내부의 모순을 잘들어내는 김한용선생께서 잘 엮어주신글입니다. 역사는 하나이지 결코 둘이어서는 않됩니다. 친일과 친미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의 한단면이고 그들이 비록 지금의 현상황에서 득세할지라도 영원할수는 없습니다.친일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우리민족의 역사가 바로 설수가 없습니다.지금 뉴라이트의 실체는 친일의 후손들이 대부분입니다.그리고 돌바위님께서 저를 한번 만나기를 청하셨는데 조만간 만나게 될것같습니다.감사합니다
미묘한 차이점이 이렇게 포장도 되고 말살도 되는군요
수구세력이 정당성을 주장하는것은 모순된점을 합리화 시켜야 영속적으로 지배적력을 갖기 위한 수단인것같네요
올바른 과거사가 재정립되지 않고 굴곡된 역사인식을 훈육한다면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 이라고 어린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저런 친일 역사학자로부터 우리의 왜곡된 역사를 잘못 배웠습니다.잘못배운것이 후회스러워요
이러한 논리적 대응은 시간과 정신적폐해만 낭비할 뿐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배했으며 한민족은 노예통치속에 고통을 받아왔다는 것, 아직도 이 나라는 총독부 노예통치를 지속하고 있으며 국민들은 1세기를 넘게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함이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