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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는 위서(僞書) 논란이 있지 않냐”고 묻자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수백 년 전에 쓰여진 책에 수메르를 뜻하는 ‘수밀이국(須密爾國)’이란 말이 왜 나옵니까? 그때는 수메르라는 문명이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그는 격앙된 표정을 짓고 “동이족 문명이 수메르에 있다고 대만학자 쉬량즈(徐亮之)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안 믿으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영어학자 우에노 가게토미(上野景福·1910~1996)는 수메르에서 사용한 설형문자는 태호 복희의 팔괘부호와 흡사하다고 했으며, 쉬량즈도 저서 ‘중국전사화(中國前史話)’에서 태음력은 동이족 영웅 태호(太昊)에서 비롯돼 소호(少昊)가 계승, 역정관(歷正官)을 두어 크게 발달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전부터 규원사화(揆園史話), 태백일사(太白逸史) 같은 책의 내용도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 공부를 했더니 굉장히 신났다”고 말했다.
국내 도서관은 물론, 터키 앙카라 대학과 아나돌루 히사르 박물관을 돌면서 유물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138100029&ctcd=C09
1. 글 머리에
요즘 인터넷에 들어가면 우리의 자존심을 한껏 추켜 세워주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내용인즉은 한글학자 한갑수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서 입교하였을 때 당시 같은 입교생인 서량지(徐亮之)라는 대만 학자가 한갑수 선생을 찾아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고 하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보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은폐하여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이 학자적 양심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 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고 한다.
필자도 그런 내용의 말을 직접 한갑수 선생으로부터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다. 필자가 1986년도에 총무처에서 실시하는 사무관특별승진임용시험에 합격, 과천에 있는 중앙공무원연수원에서 8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외래 초빙강사이신 한갑수 선생으로부터 그런 내용의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무심한 세월 어언간 24년 전의 오래된 일이라서 그런지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를 않고 훤칠한 키에 미남이신 한갑수 선생께서 서량지(徐亮之) 교수와 나눴다는 대화를 영어로 직접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그분의 영어 발음이 아주 유창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글학자가가 영어를 엄청 잘 하시는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2. 서량지(徐亮之)는 어떤 사람인가
각설하고 중국인 서량지(徐亮之)에 대한 자료을 입수해 보려고 아무리 인터넷에 들어가 보아야 나오지를 않고 대륙에서 만든 《중국역대인명대사전(中國歷代人名大辭典)》등 각종 인명사전을 다 훓어 보아도 그 이름이 올려 있지 않으니 도대체 그분에 대한 자료를 찾을 길이 없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위 인명사전의 일러두기를 자세히 읽어 보았더니 인명수록 대상을 고대로부터 하한을 신해혁명(1911)까지로 한 인상 1907년생인 서량지에 관해서는 그 책에 수록되기는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궁즉통이라 평소 필자가 좋아하는 ssreader.com에 들어가 서량지(徐亮之, xu liang zhi)를 허실삼아 입력해 보았다. 놀랍게도 거기서 서량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는데 그 출처인 "문사자료(文史資料)"가 어떤 문헌에 들어 있는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문사자료는 1990년 12월에 일종의 향토지라 할 수 있는 《진현풍물(進賢風物)》이란 소책자에 수록된 것이었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진현(進賢)은 서량의 고향이었다.) 아마 서량지에 관해 국내에서 어디에서도 얻기 귀중한 자료일 것이라 확신하면서 우리말로 번역하여 보았다. 아울러 국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서량지가 언급한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얼마 안 있으면 택스트가 손에 들어 올 예정이므르 시간이 나는대로 그 진위 여부를 낱낱이 원문과 함께 소개해 볼 생각이다.
[이 쪽을 포함하여 모두 5쪽 분량인데, 출처확인이 가능한 향토지 《진현풍물(進賢風物)》제13집 목록까지 스캔하여 파일로 만들어 올렸다]
서량지(徐亮之) - - 중국 근대 저명한 문화예술가
여소(黎蘇) 씀
봉오선생 번역
서량지(徐亮之)의 원래의 이름은 서용(徐熔)으로, 1907년 진현현(進賢縣) 민화진(民和鎭)에서 태어났다.출생하였다. 원적은 영수현(永水縣)으로, 부친 서길보(徐吉甫)가 변호사로 종사했기 때문에 그뒤에는 진현(進賢)으로 이거하였다. 서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소년 시절에는 문학 · 음악 · 회화를 좋아했으며, 특히 서법(書法: 서도)에 뛰어났다. 항상 혼자 있을 때마다 책이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고, 침식을 잃을 정도로 전심전력을 다하였다. 1923년 강서성 남창시 제일사범에 시험을 쳐서 들어가 문학을 전공하였는데 그는 재기와 사상이 민첩한데다 말을 받아 넘기는 것을 잘하여 동교의 교사와 학생들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학창시절에 일찍이 중국공산당 조직에 들어갔다. 그뒤 부친이 병사하자 중도에 학업을 고만두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 11월, 북벌군이 강서를 점령하자, 진현(進縣)에는 국공합작의 국민당임시현당부(國民黨臨時縣黨部)가 성립되어, 서용은 방정일(方正一) 등과 함께 당조직위에 파견되어 현임시당지부의 지부위원으서 북벌군의 현장(縣長)인 팽간(彭侃)이 조직한 농공운동(農工運動)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장개석이 반혁명의 4.12정변을 발동하자, 그는 단신으로 성성(省城)으로 가서 일단 바람을 피했다가 개조된 국민당 성정부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처형하기로 되었다. 당시 성정부 기요비서 겸 배심원인 나천소(羅天素)가 그의 인재를 애석하게 여겨 전면에 나서 구명운동을 폈다. 더욱이 서용 자신도 극력 억울함을 호소하여 가까스로 출옥할 수 있었다. 경생(梗生)으로 개명하고, 상해로 도망, 글을 팔아 생활하거나 서화로서 생계를 꾸려가다가, 나중에 진현(進縣) 동향 사람인 오경승(吳景升)의 소개로, 비로소 각 신문사에 투고를 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소학생문단일사(小學生文壇逸事)》·《소학생서법(小學生書法)》·《수사학교정(修辭學敎程)》등 저작초고를 써서 광익서국(廣益書局)을 통해 출판발행하였는데, 그 영향이 비교적 커서, 진성(陳誠)의 눈에 들어, 상해 강서중학교(江西中學校)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당시 국민당 군정차장인 장정번(張定璠)이 상해를 가던 도중 광서(廣西)에 들러 서경생이 문재가 뛰어난데도 겨우 일개 중학교 교원으로 있다는 말을 알고서 감탄해서 말하기를, "닭잡는 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랴!"라고 하였다. 장정번이 광서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이종인(李宗仁) 장군에게 천거를 하였는데 때마침 이종인도 광서군(廣西軍)에서도 인재를 널리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라고 하면서 당장 사람을 보내 서경생을 상해에서 광서로 데려 오도록 하여, 성정부 비서 겸 국립광서대학 중문과 교수라는 중책을 맡겼다. 재임기간 중 서경생은 뛰어난 재능이 넘쳐, 이종인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고, 선후해서 광서혁명동지회 비서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국민혁명군 제4집단군사령부 참의 · 광서건설연구회 비서실 주임 등의 직을 역임했다.
광서 계림에 있을 때, 계림여자사범학교 조상금(趙湘琴) 여사와 더불어 취미가 서로 맞아 사귀었는데, 조여사는 미인도(美人圖)와 화조화(花鳥花)를 잘 그렸고 나중에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이때 장개석이 계계(桂系: 국민당내 가장 실력을 갖춘 계림지방 군사세력, 필자주)와 의견이 극도로 대립되자, 이종인은 호남성으로 서경생을 보내서 호남성 정부주석 하건(河健)을 설득, 계계(桂系)와 가까이 지낼 것을 권하도록 하였다. 하건(河健)은 그러마 하고 구두로 승낙을 한 뒤, 그 이튼날 이종인에게 답신을 하는 한편 은밀히 이런 사실을 장개석에게 전보로 보고, 사람을 보내어 악양(岳陽)에서 서경생을 체포토록 하였다. 서경생은 하건의 사람 됨됨이가 간사함을 깊이 알고, 그날밤으로 계림(桂林)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뒤 이종인(李宗仁)은 외지로 나와서 국민당 제5전구사령으로 임명되었고, 서경생은 그를 따라 서주(徐州)로 가서 제5전구사령부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다. 몇달 뒤, 이종인은 안휘성정부 주석을 겸임하였고, 서경생은 그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얼마 있다가 국민당정부에서 경제부(經濟部)를 만들자, 이종인은 또 서경생을 경제부 비서로 추천하였다. 이때, 서경생은 경제부의 보존문서를 이용하여 《중외합변매광업사화(中外合辨煤鑛業史話)》를 써서, 상무인서관을 통해서 출판했다.
항일전쟁이 끝난 뒤 서경생은 외지로 나가 경제부자원위원회 전문전원으로 임명되었고, 천진 남개대학(南開大學) 연구원으로 초빙받았다.
1949년 1월에, 장개석이 형세가 자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짐짓 총통직을 사퇴하였다. 이종인은 부총통(副總統)의 신분으로 국민당정부의 직권을 대행하자, 서경생은 총통부(總統府)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전국이 해방된 뒤, 서경생은 부인 조상금(趙湘琴)과 더불어 홍콩에서 타향사리를 하면서 홍콩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문예활동에 종사하였고, 서량지(徐亮之)라는 필명으로 자주 홍콩의 중국어 신문에 글을 쓴다거나 책을 써서 자기의 견해를 밝혀 자못 이름이 났다. 그가 홍콩에 있을 때, 일찍이 여러 차례 아세아주작가회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1964년 12월 만곡(曼谷)에서 거행하는 아시아주작가회의에 참석하는 김에 부인 조여사를 데리고 만곡(曼谷)의 서씨종친회 신축건물낙성식 성대한 연회(徐氏宗親會新廈落成盛會)에도 참석하였는데 서량지 및 부인 조상금의 서화작품들 모두가 동 회에서 편집한 서씨화보(徐氏畵譜)에 선입되어 출판되었다. 그리고 부부서화전 명의로 여러 차례 홍콩 · 마카오 및 동남아 각국에서 전람회를 열어 태국국왕 및 황후의 접견과 여러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삼았다.
1965년에, 이종인 선생인 본국으로 귀국 정착하자, 서경생은 당시 홍콩의 험악한 형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귀국하여 이종인 선생이 거행한 중외기자초대회에 참석하고, 그들 두 사람은 조국으로 돌아가게 된 기분을 마음껏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국무원(國務院)이 초청하는 10월 1일의 국경일의 성대한 행사에도 참석하였다. 그뒤, 또 홍콩기자단을 따라 조국 각지를 참관 · 방문하였으며, 조국해방 후의 천지개벽과 같은 거대한 변화를 목도하고 감개가 참으로 많아 무척 기뻐하였다.
서경생은 홍콩으로 돌아온 뒤 얼마 안 있다가 병마가 몸에 달라붙어 불행하게도 1966년 9월 12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59세였다.
서경생은 조국의 문화공작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 임종시에 재삼재사 부인 조상금 여사에게 부탁하기를 고국으로 돌아가 정착하려면 장서들을 잘 보존하였다가 귀국한 뒤 인민정부에 바치도록 하라고 하였다.
1982년 7월에, 조상금 여자는 귀국하여 광주 계림 고향에서 정착, 고인의 부탁받은 대로 2천여 권의 귀중한 장서를 계림시문사관(桂林市文史館)에게 기증을 함으로써 서경생의 숙원을 실현하고, 조상금 여자도 계림시 정부위원을 맡았다. 1984년 5월 진현 옛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둘러보았다.
서량지 선생의 일생 동안의 저술은 다음과 같이 매우 많았다.
(1)《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2)《양재잡필(亮齋雜筆)》 (3)《중한관계사화(中韓關係史話)》 (4)《화본신편(話本新篇)》 (5)《장량과 제갈량(張良與諸葛亮)》 (6)《중국인물신전(中國人物新傳)》 (7) 중외합변매철광업사화(中外合辨煤鐵鑛業史話)》 (8)《무한일기(無恨日記)》 (9)《양재일기(亮齋日記)》 (10)《양제제화시(亮齋題畵詩)》 (11)《양재시존시종(亮齋詩存詩宗)》 (12)《석멸력(釋蔑歷)》 (13)《여정암(女貞庵)》 (14)《금차기(金釵記)》 (15)《채문희(蔡文姬)》 (16)《이개정귀고고총잔(已改定歸考古叢殘)》 (17)《중국문학계의 연변(中國文學界義之演變)》 (18)《황제자손화(黃帝子孫話)》 (19) 《중국신화(中國神話)》 (20)《중국문학사강의강요(中國文學史講義綱要)》 (21) 《타림분지의 역사가치(塔里木盆地的歷史價値)》 (22) 《관중(管仲)》(共七篇) (23)《정성우순(情聖虞舜)》 (24)《복희문제(伏羲問題)》 (25) 《범려신전(范蠡新傳)》 (26)《양재문존(亮齋文存)》 (27)《문사만담(文史漫談)》(上 · 下兩冊) (28)《서득씨와 동해명당고(徐得氏與東海名堂考)》 (29)《복희와 여와(伏羲和女媧)》 (30)《복희와 여와(伏羲和女媧)》(續) (31)《초슬고략(楚瑟考略)》 (32)《신화중의 황제(神話中的黃帝)》 (33)《조창(照蒼)》 (34)《서경생청첩(徐梗生請帖)》(35) 《개민기상과 개국문장(開民氣象與開國文章)》 (36)《내가 듣기로 일개 문화는 건강한 운동을 필요로 한다(我聞需要一個文化的康健運動了)》 (37)《서왕모(西王母) - 중국신화지전(中國神話之前)》 (38)《생민시와 모권사회(生民詩與母權社會)》 (39)《자서(自序)》 (40)《관광과 재관광 약론(略論觀光與再觀光)》 (41)《안자춘추주석(晏子春秋注釋)》 (42)《신건 및 기타(信件及其他)》
이상은 《진현풍물(進賢風物)》 문사자료에 나온 자료를 필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한편, 인터넷에서 찾아낸 서량지와 관련된 또 다른 자료는 서경생(徐梗生, xu geng sheng)이란 이름으로 강서 데이터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상술한 《진현풍물(進賢風物)》 문사자료와 대동소이하다. 참고로 다음과 같이 전제한다.
"徐梗生 (1907—1966) 进贤县人,祖籍永修。其父徐吉甫始移居进贤,以律师为业。1923年,考入南昌第一师范学校,攻读文学,才思敏捷,且娴于辞令。因父亲病故而退学回县。1926年11月,北伐军占领江西。进贤成立国共合作的国民党临时县党部,他为负责人之一,组织农民协会,开展工农运动。“四一二”反革命政变后,被国民党省政府拘捕。出狱后逃亡上海,以撰稿卖文谋生。所撰《小学生文坛逸事》《小学生书法》《修辞学教程》等教科书,经广益书局出版,影响较大,被聘为上海江西中学教员。后经人向李宗仁推荐,为李所器重。先后担任广西革命同志会秘书部副主任、国民革命军第四集团军司令部参议以及广西建设研究会秘书室主任。抗战爆发后,李宗仁出任第五战区司令长官,他随至徐州,任五战区司令部长官参议。数月后,李兼任安徽省政府主席,他任秘书。后被李宗仁荐他任经济部秘书。他利用经济部档案,撰《中外合办煤矿业史话》,由商务印书馆出版。抗战胜利后,任资源委员会专门委员。1949年1月,李宗仁代行国民党政府总统职务,他被委任为总统府秘书。新中国成立后,与夫人赵湘琴女士寄居香港,在大学任教。1965年,李宗仁归国,他来京参加李宗仁举行的中外记者招待会,欢叙回归祖国之情,出席国庆观礼。次年7月返港后不久去世。"
어떤 사람의 인물 됨됨이를 알려면 그의 일생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필자가 ssreader.com의 문사자료(文史資料)를 통해 서량지와 관련된 프로필을 알기 전까지 그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그와 같은 기초적인 자료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방금 소개한 자료를 통해서 서량지(徐亮之)는 본명이 아니라 원래의 이름은 서용(徐熔)이었고,사범학교에 다닐 때 공산당조직에 가입한 일로 해서 나중에 국공합작 과정에서 하마트면 국민당정부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직전에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주위 사람들의 구명운동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다시 태어났다는 뜻으로 서경생(徐梗生)이라 개명하고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신문사에 잡문을 기고하다가 고위직에 있는 국민당 정부 인사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운명이 뒤바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국민당정부가 대륙에서 대만으로 쫒겨갈 때까지 이종인 등의 천거로 고위직을 역임하다가 대만으로 쫓겨 갈 때 홍콩으로 피신, 그곳에서 문필활동을 펼치면서 필명을 서량지(徐亮之)라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그에 대한 무지로 대만학자라고 하였는데 그는 대만에서 활동한 바 전혀 없이 홍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중국문학 등을 강의하면서 기고와 저술활동을 한 것으로 밝혀 졌다. 그의 저서 가운데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가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저서 목록 가운데 《중한관계사연구(中韓關係史硏究)》란 책도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 역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서경생, 즉 서량지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등 40여 건의 저술을 남길 정도로 문사방면에 많은 자취를 남겼음에도 대만이나 대륙에서 그의 행적을 더듬을 수 있는 자료를 많이 남기지 않았던 것은 그가 일생동안 보여준 사상편력과 장개석의 국민당정부가 중국내전에서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에 패해 결국 대만으로 쫒겨 갈 때 당시 장개석을 대신해서 총통업무를 대행했던 이종인의 비서로 있었던 그가 대만으로 뒤쪽아 가서 장개석과 합류하지 않고 홍콩으로 일단 피신했다가 이종인은 미국으로 가 버렸고, 그는 마지막까지 홍콩에 남았던 그들의 처신과도 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양쪽으로부터 이도 저도 아닌 회색분자로 낙인이 찍혔던 것은 아닐까. 필자는 이종인 부총통의 인터넷 자료를 통해 이종인은 장개석 정부에 의해 1955년도에 부총통에서 정식해임되었다는 기록을 읽었다. 장개석은 그가 대만으로 돌아 올 것이라 굳게 믿고 부총통의 자리를 오래동안 비워두었던 것이다. 이종인은 결국 중공의 유력 인사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여 결국 본토로 귀국하였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전술한 서경생의 일생에서도 소개했지만 서경생은 바로 이종인의 본토 귀국에 즈음하여 홍콩지역의 비난여론을 무릎쓰고 그도 귀국하여 이종인의 영주귀국을 축하하였다는 기록을 읽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한갑수 선생에 의해 밝혀진 서량지의 미공군지휘참모대학 입교사실이다.
[인터넷으로 확인한 미공군대학 공군지휘참모대학(ACSC) 홈페이지]
한편 한글학회이사장까지 역임하다가 6년전에 돌아가신 한갑수 선생(1913~2004)의 인터넷 자료를 검색한 바, 그 분이 미공군대학지휘참모대학(Air University Air Command and Staff College)에 들어간 것은 1954년으로 되어 있다. 지금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바 그런 대학이 있는데 어떻게 하여 한국의 한갑수 선생과 국민당출신으로 홍콩에 우거하고 있던 서량지 선생이 미공군의 지휘참모과정의 군사교육을 받게 되었는지 그 내막은 모르겠으나 어떻든 서량지 선생의 출생연도가 1907년생이니 연령 관계를 따져보면 서 선생이 한 선생보다 6살 위인 셈이요, 서 선생이 미공군대참모지휘대학에 입교한 것은 그의 나이 47세요, 한 선생은 41세 적 일이다.
인터넷에는 실제로 이 학교에 입학하여 받은 교육과정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있다. 이 대학교에 입교할 수 있는 자격요건은 진급을 앞둔 37세 이하의 소령급 현역 장교들이었으며 장성이 되려면 이 학교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외국 유학생들도 많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두분들은 군인 출신도 아니었고 나이도 그 자격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이 왜 이 학교에 입교해서 교육을 받았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한갑수 선생의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일제 때 고창고보를 나와 일본중앙대학에 유학하여 음악을 전공, 해방 후 서울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음악을 전공한 분이 굳이 역사에는 문외한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떻든 묘한 인연으로 이분들은 같은 시기에 미국의 공군대지휘참모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던 모양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세가 훨씬 많은 서 선생이 한 선생에게 무슨 사죄하는 의미로다 큰절을 올렸다는데 그게 선뜻 믿기지 않는다. 우리에게 큰절은 웃어른들이나 조상님 제사를 모실 때 드리는 예절로서 중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커토우(磕頭, ketou) 인사법 비슷한 것으로, 이는 우리 나라와 같이 온돌 문화에서나 가능한 인사법이다. 중국 사람들의 사합원(四合院)이라는 주거개념은 우리나라 처럼 온돌 문화가 아니라서 온돌에서 먹고자고 생활하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의 교육기관이었다면 당연히 숙소 등에는 온돌같은 공간이 없고 따라서 그런 공간에서 우리나라식으로 큰절을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런 주장 자체가 넌센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의 이규태 선생에 의하면 절이라는 말 자체가 발을 절거나 허리를 절하여 몸음 낮춘다는 데서 비롯되었고 있다. 우리나라는 절에 대한 법도를 컴퓨터로 분류할 만큼 복잡했던 그야말로 예의지국이었다. 나보다 20세 위로 아버지뻘 되는 사람을 존자(存者), 10세 위로 형님뻘 되는 사람을 장자(長者), 나보다 나이가 약간 많거나 적은 사람을 적자(敵者), 10세 아래를 소자(小者), 20세 아래를 유자(幼者)라 했다. 그리하여 존자가 먼길을 떠날 때 찾아가 절하는 것을 사(辭), 먼길에서 돌아왔을 찾아가 뵙는 것을 견(見), 경사가 있으면 찾아가 절하는 것을 하(賀), 호의를 베풀었을 때 찾차가 절하는 것을 사(謝)라 하여 네 가지 인사가 의무화되었다고 하였다.(이규태, 《눈물의 한국학》, 기린원, 262쪽 참조)
절하는 법으로 말하면 《주례(周禮) · 춘관(春官) · 종백(宗伯)》제3편에 "변구배(辨九拜)"라는 조목이 있는데 첫째가 계수(稽首)요, 둘째가 돈수(頓首)요, 세째가 공수(空首)요, 네째가 진동(振動)이요, 다섯째가 길배(吉拜)요, 여섯째가 흉배(凶拜)요, 일곱째가 기배(奇拜)요, 여덟째가 포배(褒拜)요, 아홉째가 숙배(肅拜)라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예를 행하는 것을 아주 중시했고, 거기에도 일정한 척도가 있었으니, 바로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유교 문화권의 인사예절에 관한 규범이다.
이 9가지는 모두 근본적으로 배례로서 동작이 상대적으로 좀 크다. 계수(稽首)는 배례 중에서 가장 높은 맨위 등급인바, 사용하는 경우는 주로 관리계층 및 그 활동범위로서, 특히 신하가 제왕을 배견(拜見)할 때 반드시 이 예를 행한다. 계수례를 행할 때는 먼저 절을 하고 나서 무릎을 굽히며, 그런 다음 양 손을 포개어 땅에다 대고, 머리를 구부려 손 앞에 땅에 접촉한 후 잠깐 동안 머물렀다가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예절의 동작은 아주 크나 상대적으로 느리다.
돈수(頓首)는 계수례에 비하여 간단하여, 지위의 서로 같은 자들 사이에 많이 행해지는데, 이것도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는 것이지만 머리를 땅에 대는 시간이 좀 짧아서 땅에 대자마자 일어나는 것이다. 돈(頓)은 곧 시간이 짧다는 말이다. 공수(空首)는 군주의 신하에 대한 답례로서, 그 동작은 계수 · 돈수와 거의 비슷하나, 머리는 전혀 땅에 닿지를 않고 손에 닿은 뒤에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우므로, 공수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배수(拜手)라고도 한다. 진동(振動)은 두 손을 맞대어 가슴 높이까지 올리면서 몸을 앞으로 향하여 구부리는데 이런 종류의 예는 땅에 무릎을 꿇지 않거니와, 동작도 그다지 크지 않아 관공서 마당이라든가 길에서 서로 만났을 때 많이 사용된다. 길배(吉拜)는 제사 등을 지내면서 사용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는 것(跪拜)으로 그 동작은 돈수와 서로 비슷하다. 흉배(凶拜)는 먼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한 뒤 몸을 일으킨 다음에 다시 배례를 하는 것으로 주로 상례와 장례 예절에서 행해진다. 기배(奇拜)와 같은 예절에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는데 하나는 먼저 무릎 한쪽을 구부리고 다른 하나의 무릎의 슬개부위 땅에 닿게 한다거나 혹은 손에 절(節) · 극(戟: 미늘창)을 잡고 신체는 절(節) · 극(戟)에 의지해서 예를 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계수 · 돈수 · 배를 한꺼번에 진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포배(褒拜)는 두 번 절한다는 뜻이다. 이상은 상무인서관에서 펴낸 《중국고대의 예의제도》의 설명에 따른 것이다.(주유소, 《중국고대의 예의제도(中國古代的禮儀制度)》, 상무인서관, 133~134쪽 참조) 마지막으로 숙배(肅拜)는 조선시대 서울을 떠나 임지로 향발 전에 임금님에게 아뢰는 사은숙배(辭恩肅拜)를 연상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다. 이 절은 항상 여자들이 하는 절이라고 하며, 예를 행할 때, 무릎을 굽혀 땅에 꿇어 앉아 두 손을 먼저 땅에 대고 나서 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머리를 살며시 움추려서 손위에 올려 놓는 것이라고 하였다.(신사요 외, 《중국풍속대사전(中國風俗大辭典)》, 중국화평출판사, 488쪽 참조) 단옥재의 《석배(釋拜)》에 의하면 부녀자들이 하는 절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예절문화가 중국에서부터 기원하여 주변의 나라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예절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발전 변화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 중에서 여자들이 행하는 숙배의 내용에 관심을 가지고 내자에게 궁금한 것을 확인시켜 보았다. 우리나라 예절에서 여자들이 큰절을 할 때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절을 하는 것이냐고 묻자, 큰절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모에게만 하는 절이며 먼저 두 손을 머리에 대고 앉아서 머리를 굽혀서 하는 절이지만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큰절을 올리던 기억이 떠 오른다. 일단 웃어른은 아랫묵 등 상석에 좌정을 시켜 일정한 공간을 확보한 다음 큰절을 올렸다. 객지에 떠나 있다가 오랜만에 귀가할 때 혹시 밖에서 만났다고 하더라도 일단 방안으로 모셔서 의레껏 큰절을 올렸다. 우리 민족은 예절을 아는 민족이다. 아무에게나 큰절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무에게나 큰절을 받지도 않았다. 필자의 외당숙으로 구학문을 하셔서 지금부터 10연년 전에 작고하셨는데 외출하실 때는 반드시 갓쓰고 도포입고 다니셨다. 언제인가 필자가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조카뻘되는 필자에게 맞절을 하시는데 다만 방향을 정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 45도 가량 비켜서 맞절을 받으셨던 기억이 난다. 필자가 상상컨대 한갑수 선생과 서량지 선생이 서로 절을 하는 경우였더라면 우리식으로는 아마 맞절을 했을 것이다.
서 선생은 1966년에 59세 나이로 돌아가셨고, 한 선생은 2004년에 9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으니 그분들이 한 선생 말마따나 문제의 발언이 오고가고 큰절까지 받았다는 사실의 진위 여부를 따져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큰절을 하려면 우리나라와 같이 방안에서 신발을 벗고 바로 그곳에서 기와침식을 하는 문화에서만 가능하다. 우리와 중국인들은 소위 좌식이 다르다. 옛날 은나라는 동이에서 나온 나라로서 않는 방법이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席地而坐). 석지이좌(席地而坐)는 중국 전통의 문화에서 생긴 생활방식으로 곧 은나라 사람의 생활방식이다. 은나라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활방식이 생기게 된 것은 그들은 바로 바닷가에 살았던 씨족으로서 선상(船上)의 생활하면서 고기잡이 생활을 하는 데서 습관이 된 것이다. 은인의 좌식은 쪼그려 앉는다거나 무릎을 구부리고 앉는 등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대개 귀족의 좌식이요, 후자는 보통사람들의 좌식이라고 하였다.(서량지,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화정서국, 318쪽 참조)
필자가 어렸을 때는 오늘날과 방바닥이 비닐장판이라든가 종이를 바른 것이 아니라, 생활이 좀 넉넉한 농촌에 살던 사람들은 자리를 짤 수 있는 재료를 생산할 수 있는 왕골이라는 식물을 기르는 왕골밭(미나리밭과 겸용)이 따로 있어 이것을 베어 겉껍질을 여러 쪽으로 쪼개어 말려 두었다가 자리를 짜는 원료로 하여 직접 자리를 짜서 방바닥에 깔았다. 방바닥은 흙으로 바르고 그 위에 몇 닢의 자리를 깔아 그 위에서 생활했다. 그렇지 못한 집에서는 대나무 껍질로 만든 자리를 깔고 거기서 생활했다. 그런데 중국은 어떤가. 평상시 호상(胡床)이라는 의자에서 생활을 하면서 잠은 침대에서 자는 것이 우리와 같이 방바닥에서 먹고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방바닥에서 해야하는 큰절 문화에는 익숙치 않다.
3.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 인터넷 주문 경위
그 분의 저서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더니 국회도서관 장서목록에 홍콩 아주출판사(亞洲出版社)에서 민국 45년(1956)에 출판된 장서 한 권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 웹서핑을 통해 대만 화정서국에서 1979. 5.경 출판된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번에 대만 화정서국(華正書局)을 통해 이 책을 구해서 필자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초판은 민국 43년(1955) 4월 23일자로 되어 있고, 재판의 자서에 의하면 작성 날자가 민국 44년(1956) 9월 18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책은 초판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구입한 책은 민국 68년(1979) 5월 판으로 되어 있다.
한편, 초판의 자서 말미에 "徐亮之序於亮齋"라고 썼는바, 이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서량지가 개명인 서경생에서 서량지란 필명으로 쓰게 된 것을 확인해 줌과 동시에 그가 지은 책 이름 가운데는 "亮齋"가 들어 가는 것이 여럿 확인되는데 이는 서량지의 서재의 약자를 뜻하는 것임을 할 수 있다.
(화정서국 홈피의 모습)
(통신구매 서식인데 소정의 기재사항을 써 넣고 엔터를 치면 특수문자 사용으로 인해 전송 불가능이라는 에러 메시지가 뜬다)
통신구매를 하기 위해 소정의 기재사항을 써 넣고 입력을 다 마쳤으나 대만과 중국의 문자코드가 서로 달라서인지 특수문자가 들어갔기 때문에 전송이 불가능하다면서 자꾸 에러가 나서 본사로 직접 주문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수없이 인테넷을 뒤져 전에 대만 문해출판사에서 출간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를 구한 바 있는 서울 명동에 주소를 두고 있는 중화서국이란 국내 중국서적 취급 전문점에 회원등록을 하고 주문을 의뢰하였더니 거의 20여 일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라, 직접 중화서국 주문 담당자와 통화를 하였더니, 자기들 나름대로 알아보았더니 대만에서 절판되어 주문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를 않는가.
예서 그만둘 필자가 아니다. 다시 인터넷에서 찾아낸 대만 화정서국(華正書局) 사이트로 들어가 동사 이멜을 알아내 그 주소로 이메일을 보낸지 2일만에 이메일로 회신 내용이 도착했다. 내용인즉은 이 책은 구할 수 있는데 출판된지 오래되어 책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책값은 원래 대만돈으로 200위안(元)인데 20퍼센트 할인하여 160위안이며, 항공편을 이용하면 제비용 합하여 558위안, 미화 18달라, 선박을 이용할 경우에는 제비용 합하여 319위안 미화 10달라를 그들이 지정한 대만거랭 은행개좌에 입금시켜 주면, 입금사실을 확인, 항공편 이용의 경우 7~10일 내, 배편 이용의 경우 40~40일 내에 배송이 된다고 하면서 필자의 정확한 성명, 주소 및 전화번호 등을 물어왔다. 나의 서툰 중국어 작문 실력으로 겨우 하고 싶은 말만 했는데 대뜸 나의 이름을 한글로 해서 회신이 왔다. 만 이틀이 못되어서이다.
장진근,您好。
《中國史前史話)由於出版年限久遠,書況有些不佳;書籍定價為200元,8折優侍,售價為新臺幣160元整,有關郵資部分則詳列其下,您可自由選擇以何種方式寄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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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正書局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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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외환은행에 가서 미화로 환전하여 계좌입금하는 일만 남았다. 중국에 주문한 경우 1주일 이내에 국제우편으로 책이 도착하였다. 대만과의 직접 거래는 처음인데 그 결과가 어떨 것인지 기대된다.
외환은행전주지점을 통해 도서대금을 미화로 송금을 하러 갔던 필자는 은행 여직원의 뜻밖의 설명에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 화정서국에서 자기들이 거래하는 은행 계좌에 입금시켜 달라는 지급은행의 은행 이름이 영어로 된 것(Mega International Commercial Bank)을 보고 지레짐작으로 미국계은행으로 단정, 외환은행은 동 미국계은행과 상호 correspondent bank 관계가 없기 때문에 결국 제3국의 중계은행을 통해서 결제가 될 터이고 그럴 경우에는 송금이 지연될 수도 있고, 더구나 중계은행에서도 발생한 수수료를 송금한 돈에서 우선 충당해버려, 이럴 경우 비용 추가 발생 요인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다는 논리로 설명해 주었다. 필자는 이제사 국제 은행간 송금은 상호Corres관계가 없으면 중계은행을 통하여 송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책값으로 미화 18달라(한국돈 28,000원 상당)와 송금 수수료 1~2만원을 부담하면 그토록 갖고 싶어하던 서량지 교수의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란 희귀본의 입수가 거의 눈앞에 다가 왔는데 물거품이 될 처지에 이르렀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본바, Mega International Commercial Bank란 은행은 한문으로 兆豊國際商業銀行이요, 아마 그 지점이 화정서국의 거래은행인 Mega International Commercial Bank South Taipei Branch(兆豊國際商業銀南大北分行)으로 보여져 결국 미국계은행이 아니라 대만의 제도권 은행인데도 은행 여직원의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해 주문을 포기할 생각이다. 여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추가 수수료 부담 등을 감안해서 송금하던지 아니면 상대방을 수취인으로 해서 무슨 국제환 송금이 가능하다고 설명해 주었는데 아주 번잡스럽게 느껴졌다.
예전에 중국의 kongfz.com을 통해 길림문사출판사에서 펴낸 교감본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등을 주문하면서 도서 대금에 상당한 미화를 환전하여 송금해주었는데 상대측 서점에서 그들이 추심할 때 들어간 비용으로 우선 충당해버린 뒤 대금이 모자라니 추가로 돈을 더 보내라고 요구하므로 《삼국유사》의 구매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오늘 아침(6월 28일) 주거지 동내 우체국에 들러서 해외송금을 하려고 한다고 하니 취급 여직원이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서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신청인의 주소와 성명을 영어로 기재해야 하고 수취인의 성명 · 주소, 수취인거래은행 등을 전부 영어로 기재하여야 하므로 미리 대만 서점에서 이메일로 보내온 관련 기재사항을 보충 기재하여 주었는데 여직원이 컴퓨터로 신청서를 타이핑한 후 이를 프린트해서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면, 오타가 있는지 확인하여 주는 방법으로 잘못된 곳을 지적하여 두 번이나 같은 방법을 반복했는데도 송금이 완료된 뒤 집에 와서 신청서 부본을 재확인해 보았더니 수취인 주소의 스펠링에 오자가 있는 것을 발견되었다. 미화 18달라를 보내는 데 들어가는 수수료는 10,000원(전신료 7,000원 수수료 3,000)이었다. 국제환 송금업무는 신한은행에 위탁 처리된다고 하였다. 처음 은행에 갔을 때는 전에 외국 여행을 하고 남겨온 미화 18달라를 가지고 갔는데 해외송금은 고객이 가져간 돈으로 직접 송금하는 것이 아니라 송금 시점에서의 국제 외환시세에 따른 송금외화 USD의 한화금액 21,780원과 전신료 등 제비용 10,000원을 합계한 금 31,780원을 한화로 요청하므로 계산해 주었다. 해외송금신청 및 확인서 이면에는 한글약관과 영문약관이 따로따로 부동문자로 기재 되어 있었는데 취급 여직원은 이에 대해 전혀 고지를 해주지 않았다.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는 약관 제일 마지막 조항에 신청인은 우편료 · 전신료 기타 이 거래와 관련하여 우체국 또는 환거래은행이 부담하거나 지급한 비용을 우체국의 청구에 따라 곧 입금하여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종전에 중국에서 도서를 인터넷으로 구입한 후 그 대금은 서울에 있는 중국 공상은행지점을 통해서 송금했는데 수수료는 외화송금수수료 7,000원 및 해외전신수수료 8,000원 합계 15,000원으로 우체국보다는 약간 비싼 것으로 보여졌다.
앞으로 회원 제위께서 대만에 도서를 인터넷으로 구입한 뒤 대금 송금 같은 것이 필요할 때는 꼭 참고할 수 있도록 자세히 그 과정을 설명해 보았다.
책값을 미화로 송금한지 2일만에 송금한 책값을 잘 받았다면서 필자가 미리 알려 준 수취인 주소가 정확한지 재확인을 해서 가능한 한 빨리 알려 달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도착하였다. 7월 1일 국제항공우편으로 주문한 책을 우송해 주겠다고 하였다.
-----Original Message-----
From: "book-huacheng.service"<service@book-huacheng.com.tw>
To: "장진근"<ckchang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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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 10-06-30(수) 17:31:45
Subject: 華正書局請您確認地址
장진근<,您好。
本公司已收到您的書款了,再次請您確認收件地址,
您的地址:大韓民國 全羅北道 全州市 德津區 麟后1洞 牙中現代APT 106棟 803號
電話:
行動電話:
我們將於7月1日以國際航空方式寄出書籍,請先生儘快確認地址,謝謝您的惠顧。
華正書局敬上
2010. 7. 1
봉오선생
PS:
대만에서 항공우편으로 책을 보냈다는 이메일이 온 뒤 만 5일만에 책이 도착했다.
(출간된지 30년만에 다행히 출판사에 재고가 남아 있어 구한 희귀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