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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일본의 날조된 역사를 본다-일본 천황은 백제 후손
▲ 이을혈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과 중국이 우리역사를 폄하하며 공세적으로 나오고 있음에도 우리는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형세다.
왜 이렇게 무사안일에 빠져있는 우리들이 됐는지 참으로 실망스럽다.
동북공정과 관련한 최근의 한 사건이 우선 그렇다. 잘못을 지적해야 할 ‘동북아역사재단’이 오히려 경기도교육청이 제작한 ‘동북아 평화를 꿈꾸며’ 자료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연구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나 학자도 하물며 언론까지 나서서 역사왜곡을 하는 외국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데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
지난 9월 18일 중앙일간지 J신문 사설은 단군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서술했다.
이는 국내 고대사학계의 일치된 의견이 아니다.
아울러 간도를 우리 땅으로 기술한데 대해서는 “중국과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있다. 한·중·일 3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점을 고려해야 한다.
동북공정의 왜곡을 문제 삼는 우리가 오히려 이 자료집으로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황당하고 무지한 주장을 해 그저 유구무언이다.
이미 전편의 원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단군은 47대에 걸쳐 실존했던 왕국이며, 단군은 실재했던 우리의 조상이다. 간도 또한 엄연한 우리 땅이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위대한 선조의 역사에 대한 모독을 이대로 두는 것은 우리의 수치요 조상에 대한 말 할 수 없는 불충이면서 불효를 저지르는 큰 대죄다. 오늘날 날이 갈수록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발해가 지방정권으로 위축돼 가고 있다.
나아가 만리장성이 평양까지라고 하는 주장과 한사군의 영역을 제멋대로 넓게 표시하는 것 등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역사왜곡이고 날조다. 이를 보면서도 침묵만 하는 우리 학계나 언론계를 보고 있으면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이는 일제가 의도한 우리역사의 무지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의 찬란한 역사가 훼손되고 일본의 터무니없는 역사왜곡으로 한국역사가 기자조선부터 기술되고 단군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조용하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살아 있지 않고 죽어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지 우리의 정신세계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 자손만대의 창대한 번영을 위해서라도 역사는 바로 찾아 올바르게 세워져야 한다. 최태영 선생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무정책, 무관심을 한탄했다.
최 선생은 고대사 특히 단군에 관한 연구를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매진하면서 “역사를 잃으면 다 잃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고군분투하며 연구했었다. 오늘은 최 선생이 노구를 이끌고 단군연구에 관한 연구 자료수집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외국 특히 일본에 가서 답사하고 연구해 온 것들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귀중한 고대사 자료가 되는, 국내외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 신황기·神皇紀)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최태영 선생이 역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 우리 고대사 복원을 위해 평생을 바친 최태영 선생은 강단파인 학노(學奴)들의 김부식 ‘삼국사기’를 금과옥조로 내세운데 대해 우리나라 역사를 망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하고 있다.
선생은 ‘삼국사기’는 김부식이가 당시 반대파의 북진 논리를 막기 위해 한국사 전반부 2000년을 싹둑 잘라낸 역사서이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선생이 고대사를 연구하게 된 동기였다. 김부식은 자료를 당에서 가져와 중국의 시각에서 삼국사기를 편집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참고로 했던 이전의 수많은 역사서들을 모두 대궐 안 깊숙이 수장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역사를 팔아먹은 자나 진배없기에 그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다. 김부식이 저지른 죄과는 천추에 후환을 씻을 수 없는 죄과가 되고 있다.
이 같이 잘못된 고대사를 바로 잡을 학자는 신채호, 정인보, 손진태, 안재홍, 최동, 장도빈 같은 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국사가 이 지경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6.25 전쟁으로 이들 석학들은 납치되거나 타계했기에 우리의 고대사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최태영 선생은 한탄했다.
그래서 선생은 자신이라도 이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문과 일본 고문(古文)에 소양이 있음을 믿고 사재를 털어 가며 한국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게 됐다. 선생은 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국내 학자들의 저서도 섭렵했다.
먼저 정인보(鄭寅普)선생의 저서부터 다시 탐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 3대 수재(정인보 이광수 최남선)로 이름난 정인보 선생은 역사서에서 “단군은 중국 요(堯)와 같은 시절에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새롭게 주장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단군은 신도 아니고 곰의 아들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닌 우리 조상 할아버지와 똑 같은 사람이다”고 했다. 이는 최태영 선생이 어렸을 때 배운 것과 같은 것이었다. 선생은 한국사의 출발은 정인보가 옳다고 하면서 더욱 고대사 연구에 몰두하게 된 사연을 말했다.
선생은 서울 법대와 대학원에서 법학과목과 함께 국사과목도 자원해서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학(韓國學)과 본격적으로 관련을 맺은 결과가 됐다. 그는 대학에서 법철학을 연구하면서 우리조상들의 사상을 공부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한국학 특히 국사에 주목을 하게 됐다.
선생은 고령임에도 1985년 ‘한국학연구원’ 모임을 만들어 역사 강의와 토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2년 남짓 지속된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도 소개하고 있다. 김우현 목사, 윤태림 전 숙대 총장, 송지영 KBS 이사장, 유승국 전 정신문화 연구원장, 김재원 전 국립 박물관장, 손보기 교수, 윤내현 교수, 김주현 교수, 박진근 전 광신상고 교장, 김성호 백제 연구가, 김선기 전 문교부 차관, 문승연 이대강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선생은 1988년 ‘한국 상고사’를 발표한다. 여기에는 해방 후 강단파의 거두인 이병도 박사도 그동안 주장해왔던 학설을 바꾼 내용이 있다. 이병도는 최태영 선생의 의견과 같이해 기존의 잘못된 단군을 “단군은 실재 인물이다”는 논지를 발표했다. 그래서 최태영, 이병도 공저의 ‘한국 상고사’가 나오게 됐다. ‘한국 상고사’에는 단군이 실재했던 임금임을 밝히고 있음이 물론이다. 이러한 연구가 되기까지는 최태영 선생의 충정어린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 神皇紀)의 확인 최태영 선생은 ‘한국 상고사’를 발간한 그해 눈을 외국에 돌렸다. 그는 일본에 간 우리의 유민이 1200년간 일본 후지 산 아래 지하 서고에서 보관돼 온 비서(秘書)중의 비서인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 신황기·神皇紀)를 1988년 4월 도쿄대학(東京大學)에 연구실을 갖고 오랜 연구생활을 하고 있던 이병창 박사로부터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이 박사는 당시 최 선생에게 “일본 연구자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한번 와서 실제로 만나보고 실지답사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최 선생에게 한 것이었다. 이는 한국사학계에 행운이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88년 최태영 선생과 19세나 나이 차이가 있지만 절친한 김주현(金周賢) 박사와 이병창 박사의 주선으로 일본 야마나시 현(山梨縣) 후지시(富士市) 후지산(富士山) 아래 산기슭 대밭 지하금고 안에 미야시다(宮下) 가문의 보물인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를 볼 수 있었다. 이 보물은 일본 궁궐에서도 알 수 없던 책으로 당주(當主)가 1890년경 1200년간 침묵을 깨고 미와 요시히로(三輪義熙)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나온 보물 중의 보물인 책이다. 미와 요시히로(三輪義熙)는 ‘미야시타 문서’의 최초 연구자가 된다.
그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나와 공증인(公證人)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 문서를 접하고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느낌을 갖고 공증인 직업도 내팽개쳤다. 이후 30년간 ‘미야시타 문서’를 연구해 1921년 ‘신황기’(神皇紀)로 출판하기에 이른다. 이 문서는 가야계(伽倻系) 한국인으로 7세기 일본의 실제 통치자였던 소가(蘇我)가 썼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던 때라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중국인 서복(徐福)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미야시타 문서’(신황기·神皇紀)는 내용이 신작(神的)인 것은 없고 매우 합리적이며 대륙(한국)의 일과 일본의 일을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다. 바로 백제인(百濟人)이 일본에 와서 일본인들을 깨우쳐 문화를 전하고 이어서 천황(天皇)이 됐다는 내용을 쓴 책이다. 몇 대부터 몇 대까지가 백제 인이 즉위한 일본왕인지 시대가 분명하게 쓰여져 있다. 이에 비해 ‘상기’(上記)는 막연한 기록이어서 “단군의 73대 손이 진무(神武) 일왕이 됐다”고 쓰여 있다. 당시 일본 신문은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뒤집는 진짜 역사서가 나왔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 했다. 당시 한국을 침략하고 조선총독부 부총독이었던 사이토(齊藤) 내무대신이 이 책을 보고 감동해 후지문고(富士文庫) 고문이 됐다. 하지만 일본 국수주의(國粹主義) 파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로 인해 연구는 더 지속되지 못하고 1200년을 내려온 문서를 복원한 ‘신황기’(神皇紀)는 군부에 의해 거짓위서(僞書)로 몰렸다. 그러나 전후 1980년에 와서 이 책은 다시 아고 기요히코(吾鄕 淸彦), 가시마 노보루(鹿島 昇), 나카쿠라(中倉) 등의 노력으로 재간됐다. 미와 구니미쓰(三輪 邦光)는 1980년 ‘신황기’의 ‘복간에 임하여’라는 글에서 이 문서를 30년간 연구한 파란만장한 삶을 가졌던 부친 미와 요시히로(三輪 義熙)와 신황기(神皇紀)의 내력을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그 내용이 매우 진지하다. 그래서 ‘신황기 복간사’(復刊辭, 일본의 歷史と現代 1980년 여름호)의 내용을 요약 그대로 소개한다. “아버지는 연구심과 정신을 이 한 가지 일에 집중했다. 처음 이 문서를 읽었을 때 경천동지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여러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상가야(上伽倻) 왕조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미야시타 문서’(宮下文書)에 비하면‘고사기’나 ‘일본서기’는 허구일 뿐, 사서(史書)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람 눈에 띄지 아니했던 이 비서는 아버지와 미야시타 집과의 외양간에서 아버지는 그 문서의 해독을 시작 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버지의 평생사업은 정해졌다. 이 문서를 정리해 세계에 자랑할 일본의 역사를 남기고 세상을 묻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결심은 순수한 애국적 지성(至誠)에 의한 것이다. 그 후 30년에 걸쳐 연구한 결과 1921년 신황기(神皇紀)라는 이름의 책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는 유지와 연구가들을 모아서 1922년 재단법인 후지문고를 창립해 이사장이 됐고 당시의 내무장관 사이토가 수석고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발간은 ‘고사기’나 ‘일본서기’를 일본사의 바이블로 맹신하고 국민을 속이고 사학을 가장하고 있던 학노(學奴)들을 극도로 자극한 것이 됐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생하는 교직과 신직(神職)의 학노들은 실직하게 될까봐 맹렬한 반론을 일으켜 “신황기는 일본 국사를 파괴하는 위서(僞書)”라고 몰아서 말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의 군부(軍部)는 허구의 신국사상을 만들어 무모한 침략전쟁으로 일본국민을 몰고 가고 있었다. 군인들은 신황기에 나와 있듯 일본왕가가 한국에서 이주(移住)했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정하려 들 능력도 없었다. 이 때문에 군부는 학노들을 지지한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 당시 군의 명령은 사람의 일생을 지배하는 것이어서 아버지는 침략전쟁에 눌려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황기에 위서(僞書)라고 낙인을 찍는 것은 진리에 대한 테러이지만 학노와 군은 그런 일을 실행했다” “재단법인 후지문고도 탄압되어 활동정지명령을 받고 동지들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결과를 서고에 잠재워두고 묵묵히 헤어졌다. 그리고 대지진이 서류를 불태웠다. 진실의 등불은 이렇게 꺼져버렸다. 아버지는 당신이 연구한 사거가 장사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신황기에 반대하는 난폭자들은 수천 년의 조국을 지켜온 조국의 파멸을 향하여 전쟁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한사람으로는 이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신황기를 다시 출간해 아버지가 발견한 진실을 세상에 호소하려 하고 있다. 과거 일본민족의 파멸을 위사(僞史)에 의하여 생겼음으로 일본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하여 미래를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이 상가야 왕조사인 신황기의 복간에 임하여 어려운 시기에도 신황기를 몸에 간직해온 친족과 현내(縣內)의 유지와 미야시다 가(宮下 家)의 당주(當主) 이하 여러분과 아버지 별세 후 30년에 걸쳐 그 연구를 계속한 분들의 협력에 감사를 표한다” <1980년 3월 28일>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도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하여 미래를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일본 학자나 사료 보관자와 연구가들마저 바른 역사로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역사를 버리고 진실을 교훈으로 해 미래를 구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 학자들이라는 학노(學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희망조차 없다. 언제까지 일본의 총독부가 왜곡하고 조작한 허황된 허구의 유령을 따르려 하는가. 우리역사의 너무나 비참한 현주소를 보며 최태영 선생이 안타까워했던 그 모습과 그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보이고 들리는 듯 기억이 새롭다.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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