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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 허물어야 할 적개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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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허물어야 할 적개심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현 정권이 잘못하는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외교를 잘못하고 북한과의 관계에서 잘못합니다.
평화를 지향하지 않고 대결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뿐 아닙니다.
미국과 일본 편에 서려고 나머지는 적으로 만들고,
주님께서 그토록 허무시려는 적개심을 조장합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러시아, 이스라엘-팔레스티나뿐 아니라
우리 한반도의 평화도 위협을 받는 형국이 되었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려면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마저도 그렇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 관계와 우리 공동체는 그리스도 때문에 평화롭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 안에서 적개심을 허물었습니까?
우리 안에서 갈등이 있을 때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가르침을 생각하며 갈등을 해소하려 합니까?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안 계시고 적개심만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적개심과 주님과의 관계,
적개심과 행복과의 관계를 오늘 생각해봅니다.
우리 안에서 적개심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님으로 안 계시고,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적개심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개심이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자기를 불행에 빠트린 원수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 아니 모든 사람에게 적개심이 있습니다.
근자에 아무에게나 칼부림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예입니다.
적개심은 복수심이나 앙심과 마찬가지로 주머니 속의 비수 같은 것입니다.
적개심이나 복수심이나 앙심은 그것을 가지고 있을 때
주머니 속의 비수처럼 남을 찌르기 전에 나를 계속 찌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적개심이나 분노 같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발산할 것이 아니라
즉시 내 안에 있는 불행을 들여다보고, 신앙인인 우리는
내 안에 주님께서 안 계셔 적개심이 있음을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며 주님이시라면
내 안의 적개심을 허무시는 우리의 평화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들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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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저는 조카가 많습니다. 갓난아이 때부터 봐왔던 이 조카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서 저도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 조카들이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자라면서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는 호칭을 씁니다. 그 순간 ‘나도 늙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을 봅니다. 아직 검은 머리가 훨씬 많지만, 흰 머리카락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또 얼굴의 주름도 많아지고, 깊어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외모만 봐도 분명 늙었습니다. 하지만 이 나이 듦의 결정적 표지가 있다고 하더군요. 삶에서 설렘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날의 설렘이 생각납니다. 신학교 입학할 때의 설렘, 사제가 되었을 때의 설렘, 인사이동 되어 새 부임지에 갔을 때의 설렘. 그런데 이제 그 설렘을 잘 느끼지 못하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설렘 대신 커진 것이 있다면 걱정이 아닐까요?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설레십니까? 사실 25년째 묵상 글을 쓰면서 매번 새로움을 느낍니다. 똑같은 복음 말씀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지금 상황에 따라 새로워집니다. 세상 것에 대한 설렘은 사라지고 있는데, 주님 말씀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렙니다. 하긴 주님 나이에 비한다면, 지금 나는 ‘점’에 불과하니 설레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까요?
설렘을 느끼려면 더 알아야 하고, 더 자세히 봐야 했습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서 설렘을 사라지고 걱정만 늘어납니다.
젊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설렘을 갖기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더 자세히 보면서 보다 젊게 사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어떤 종이 충실한 종이라면서 주인에게 칭찬받겠습니까?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깨어 있는 이 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시려면 아직도 멀었다면서 다른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습니다. 주인이 띠를 매고 그 종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종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설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단, 당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당신을 자세히 보기 위해 시선을 마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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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의 행복은 긍정적 믿음,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닐까(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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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고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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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베드로의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
‘깨어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감지하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가 ‘깨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한결같은 모습이 중요합니다.
요즘은 가정방문을 하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본당신부를 할 때 가끔 예고 없는 방문을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말입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집 정리를 잘해 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그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물론, 집 정리가 잘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마음이 맑은 것도 아닙니다만 열심히 활동하는 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 정리를 하지 못해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의 세력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깨어있어 행복한 오늘입니다. 항상 깨어서 안밖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종은 그 신분상 겸손할 수밖에 없고 순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는 참으로 겸손하고 순종적이면서 바로 이웃에겐 그토록 교만하고 억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우리는 위선자입니다." 깨어있는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깨어, 기다리던 주인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서둘러 그분을 뵈러 가면 어떨지요? 오늘은 청주교구 사제 전체 회의가 있습니다. 모든 사제가 주님 앞에 깨어있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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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폭력과 전쟁을 일삼은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제자들은 두려움과 근심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근심과 두려움을 간직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미사 중에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기 전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평화의 감실이 되어야 합니다. 평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유대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도(道)라고 항상 말하는 도(道)는 없다.” 현상과 본질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이 하나라고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부분을 보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면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남한과 북한이 둘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였습니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으로 분단의 벽을 높이 쌓고 있지만 언젠가는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어야 하는 한민족입니다. 과학자들은 ‘미토콘트리아’를 분석하면서 인류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피부색은 달라도, 사는 곳은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결국 우리는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양자역학은 노자의 도덕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격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에는 파동과 입자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미시 세계에서는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물질이 있어서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질이 생기는 겁니다. 우주는 에너지와 기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별과 구별이 아니라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위격으로는 구별되지만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는 항상 같은 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우리가 하나였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서는 ‘도라고 항상 말하는 도는 없다.’라는 말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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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오늘 ‘깨어 있음’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도 그렇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잠들어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즉, ‘한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냐! 깨어서 기도하여라.’라고 하신 말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음’은 무엇일까요? 잠들지 않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있음’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 그 소리를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주인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에 집중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소리에 집중합니다. 주님의 소리에도 집중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리는 주님의 소리를 들으려 하는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더 많고 더 시끄러운 소리로 주님의 소리를 덮어버립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전부터 시작됐던 주님의 소리를 세상의 소리를 따라다니느라 못 듣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마음을 비워보세요. 마음에서 들리는 여러 가지 소리, 예를 들면 미움과 분노, 시기와 질투, 욕심 등을 내려놓아보세요.
그리고 다시 들어보세요. 마음 안에서 잔잔하게 들려왔던 주님의 소리를 말입니다.
정신없이 세상을 따라 달려왔던 우리 삶을 향해 소리치는 그 작고 강한 소리를 들어보세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음’은 그 작은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라 걷는 삶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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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쿱
아이스크림 한 덩이를 표현하는 말로 많이 쓰이는 것이 바로
‘한 스쿱’입니다.
아이스크림 두 덩이면 두 스쿱이라고 표현합니다.
무더운 여름 어느날 여행 중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섰습니다. 컵에 담긴 아이스크림이 먹음직스러웠습니다.
‘아이스크림 주세요.’라고 말하니
‘몇 스쿱 드릴까요?’라고 묻습니다.
한 스쿱은 적은 것 같아서….
‘두 스쿱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제 손에 주어진 아이스크림은 컵에 담긴 주먹만한 두 덩이의 아이스크림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두 숟가락 정도의 양이었는데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원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가끔 하늘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줍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겠지만 즐기세요. .
그런 일은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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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깨어 있어라!
<깨어 있음의 예찬禮讚, 깨어 있음의 축복祝福>
자식 자랑은 팔불출에 속한다는데 저는 제자들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판단이나 비난보다 자랑이 백배는 나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깨어 길이 기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올해도 맛있는 햅살 드시구 건강하게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세요. 제자들 10명이 쌀 140kg, 10kg 14부대 보냅니다.”
47년전 13세 초등학교 6학년때 제 나이 29살 때 제자들이, 지금은 60세 환갑을 맞이한 제자들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쌀 선물을 보내기 10년째입니다. 그래서 깨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따뜻한 미담을 나누면서 시작하는 강론입니다. 오늘 10명의 제자들 가정을 위해 생미사봉헌합니다.
지금도 수년전에 집무실 게시판에 붙여 놓은 “늘 깨어 있어라!”는 글귀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붓펜으로 이 글귀를 써드렸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요즘 널리 보급되고 있는 향심기도를 비롯한 온갖 비움기도나 명상기도가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 역시 “깨어 있어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제자들에게 내리는 주님의 권고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발목까지 늘어지는 겉옷 자락을 올려 띠로 묶은 것은, 즉시 일할 수 있게 준비를 갖춘 모습이자 이스라엘인들이 파스카 축제를 지닐 때 취하는 여행자의 자세요 메시아를 기다리는 몸가짐입니다. 한마디로 늘 준비되어 기다리는 깨어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관상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자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일치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진리입니다.
깨어 있음은 화해입니다.
깨어 있음은 치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영원입니다.
깨어 있음은 만남입니다.
깨어 있음은 환대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리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깨달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체험입니다.
깨어 있음은 살아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은 아름다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새로움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경청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 있음은 온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깨어 있음의 은혜들입니다. 말그대로 깨어 있음 예찬입니다. 깨어 있음의 관상입니다. 깨어 있음의 중심에 바로 주님이 계십니다. 깨어 있음의 영성은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모든 문제는 깨어 있지 못함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해 외로움이요 쓸쓸함입니다. 깨어 있지 못해 쉽게 유혹에 떨어집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은 영성생활의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깨어 있음은 인생 허무나 무지의 대한 답임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깨어 있는 이들이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있는 참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깨어 있음의 성소에 불림 받고 있습니다. 깨어 있지 못할 때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도 악마도 야수도 폐인도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아닌 어느 피조물이 깨어 있을 수 있겠는지요!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이어지는 깨달음의 진리들입니다. 모두가 “깨”자 돌림입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은 얼마 못갑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사랑하는 주님을 일편단심 그리워 기다릴 때 비로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래서 깨어 있음의 영적훈련을 통한 깨어 있음을 습관화가 절실합니다. 제가 평생 지도해온 명상기도도 이에 근거합니다. 일정한 성구를 호흡에 맞춰 되뇌이며 마음을 모으는 기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끊임없는 깨어 있음의 수행이자 훈련이요 깨어 있음의 습관화입니다. 깨어 준비하여 기다리며 기도할 수 있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다음 ‘주인’은 ‘주님’으로 바꿔 읽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깨어 있음의 행복을 능가할 수 있는 그런 깨끗한 행복은 없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주님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섬기러 오시는 겸손한 사랑의 주님을 모시는 행복을 우리는 날마다 깨어 있다 미사전례를 통해 체험하지 않습니까!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확연히 감지되는 바 바오로 사도의 깨어 있음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았던 각자(覺者) 바오로 사도의 깊은 영적 체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하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바오로에게 계시된 풍요한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깨어 있는, 깨달은 자들의 교회론은 얼마나 깊고 풍요롭고 아름다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그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깨어 있는 자들의 역동적 유기체의 교회공동체요, 끊임없이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인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신자들의 깨어 있는 삶을 위한 영성훈련을 통한 습관화는 얼마나 중요한지 요! 우리 수도자들이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거행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가 참 좋은 깨어 있는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깨어 있음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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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설렘으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8)
그때
몰라도
그곳
몰라도
나를
섬기러
임께서
오신다니
그때
어디든
그곳
어디든
임을
모시러
나는
설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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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루카 12,35)
절제와 선행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절제와 관련된 것이지요. 등불을 밝힘은 선한 행실로 빛을 내는 것이니, 정의와 연관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러 주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주님께서 오시면, 욕심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우리에게 합당한 상을 주시어, 온갖 악의 시련에서 벗어나 완전하고 영원한 평화 속에서 지고한 선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게 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여러분은 영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라틴어 멘스(mens)는 마음 – 내지 영 - 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오로 사도께서 에페소 4장 23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영혼의 존재와 더불어 특정한 기능을 영혼의 가장 높은 지체로 만드셨는데, 그것을 일컬어 영이나 마음이라 부른다. 학자들은 이 기능을 일컬어 영적인 형상을 담거나 형태를 띤 이미지 - 관념 - 를 담는 그릇 내지는 성소라고 부릅니다. 이 기능은 영혼과 하느님 사이의 닮은 것이 자리하는 터전입니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신적인 존재 전부를 세 위격의 특정에 따라서 아들과 성령에게 주시되, 자신의 신성을 쏟아 부으십니다. 다른 한편으로, 영혼은 이를 기억하고 있다가 보배로운 이미지들을 영혼의 또 다른 기능들 속으로 쏟아 붓습니다. 영혼은 이 기능을 동원하여 무언가 - 그것이 천사의 이미지든 아니면 자신의 이미지든 간에 - 를 보지만, 거기에는 부족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영혼은 자신이(신성의 반대면에 있는) 하느님이라도 된다는 듯이, 혹은 하느님이 그렇게 상상될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혹은 세 위 격이라도 된다는 듯이 하느님을 보지만, 거기에도 부족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영혼이 자신의 모든 이미지를 여의고, 단일한 하나를 볼 때, 영혼의 존재가 순수한 하나의 단일성 외에 아무것도 품지 않을 때, 영혼의 순수한 존재는 자기 속에서 쉬면서 순수하고 형상이 없는 하느님의 단일성을 수동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65)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오늘 당신을 흠숭합니다. 당신은 저의 하느님 · 주님 · 메시아 · 구세주이십니다. 저에게 사랑을 일깨워 주시는 작은 아기로서 함께 계시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아이, 가정이 있는 모든 사람, 버림받은 이들, 술버릇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 ,아프거나 고통에 시달려 성탄의 기쁨을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봉헌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하게 하소서. 또한 아이들의 얼굴에 기쁨이 활짝 피어나게 하소서.
0 예수님, 당신의 오심으로 어린이와 부모 마음에 기쁨과 행복올 일깨워 주시어 평화가 모든 가정을 다스리게 하소서!(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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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루카 12,35)
젊은 날 사뮈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1952년 쓴 작품으로 1969년 노벨문학상 작품)를 산울림 소극장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장면들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그런데 젊은 날 이 연극을 보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도대체 누구이며, 도대체 고도가 누구이기에 그토록 가엾은 두 남자인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는 허무와 고통, 부조리 속에서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렸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 연극을 보신 분이나 책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고도는 누구이며, 왜 기다림 속에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연극을 미국에서 초연할 당시 연출자였던 ‘알랭 슈냐이더’는 ‘베게트’에게 질문했답니다. “고도는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그러자 베게트가 대답하기를 “내가 그것을 알았다면 작품 속에 썼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인생은 길며 그것도 아주 깁니다. 이 긴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삶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기다림이며, 이로써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삶의 혼돈과 부조리, 무질서 속에서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지 그리고 왜 기다려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 희망 없이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정말 무료하고 불쾌하고 허무하게 느껴지며 너무나 힘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허리에 따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오실 주인은 “사람의 아들”(21,36참조)이시며, 기다리는 사람은 인간 존재 곧 그리스도인인 우리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에게 오실 분은 예수님이시며, 기다리는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에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21,36참조)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단지 막연히 알 수 없는 존재를 기다리는 실존이 아닙니다. 다만 그 시간과 그날을 알지 못할 뿐, 우리는 누구를 기다려야 하고 왜 기다려야 하며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 가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길고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무료하고 불쾌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으로 깨어 준비한 채 기다려야 합니다.
시장 보러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정말 엄마를 곧 다시 만난다는 기쁨으로 넘쳐났었던 기억이 저에게는 생생합니다. 이렇듯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은 만남을 앞당겨 상상하면서 기쁨과 환희, 행복과 사랑으로 넘쳐나는 기다림의 마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준비와 기다림은 손등과 손바닥과의 관계라고 봅니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어 두는 것이고, 기다림은 늦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다림의 목적에 부합하고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 기다리는 분이 언제 오시든 아무런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으리라 봅니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했다, 낭패를 본 일이 있었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 복음에서 언급한 것처럼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12,35) 그래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마치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빗대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되기도 합니다. (마태24,43-51;마르13,34-36)
비록 잠시뿐이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여러 이유로 만나지 못했다가 다시 만났을 때의 기쁨과 행복은 충분히 기다림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보답이듯이, 하물며 주인을 깨어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주님(=주인)께서 이런 우리의 충실함과 그 노고를 잘 알아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영광이 없으리라 봅니다. 복음에 의하면, 이런 우리의 주님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의 성실함을 주님께서는 인정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곧 “주님께서 띠를 매고 저희를 식탁에 앉게 한 다음에 시중을 들 것이다.”(12,37)라고 말씀하시니 이 얼마나 큰 영광이며 축복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 이렇게 길고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주님의 오심을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 온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천상에서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 이를 알면서도 이렇게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저 자신부터가 때론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온전히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면 살지 않았기에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복음을 다시금 새롭게 들으면서, 길고 긴 인생을 무료하고 불쾌하게, 허무하게 보내지 않고 의미와 보람으로 채우기 위해서 영적으로 이 기다림의 신비를 살아가는 게 우리 인생임을 다시 자각하고, ‘늘 깨어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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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등불 켜 두고 허리에는 띠를 /
박윤식 [big-llight] 241021 20:23 ㅣNo.176955
소나무는 비옥하지 않은 비탈에서도 잘 산단다. 무엇보다 뿌리가 강한 탓이라나. 우리 중에서도 ‘소나무 같은’ 이들이 돌아보면 쾌나 있다.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바르게 살려는 이들일 게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삶이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건강한 뿌리가 만들어지니까. 세상은 변덕이 심해 삶은 언제나 공평하지 않으리라. 한결같은 믿음으로 산다는 건 그만큼 어렵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위로하신단다. 소나무처럼 ‘푸른 꿈’을 안고서 살아가자.
‘그때에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라.” 면서 이르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예수님은 ‘주인이 밤중이든 새벽에 오든’ 마냥 잘 지내라신다. 종말을 염두에 둔 게다. 하지만 종말로만 가는 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평소의 삶 그 자체가 정말 종말적이어야 할 게다. 그것 자체가 삶의 결과일 뿐이니까. 훌륭하게 산 이가 허망한 끝을 맞이할 리가. 평소 믿음에 열심이었던 이는 구원뿐이리라. 그러니 미래는 주님께만 맡기고, 인내로 깨어 있는 삶을 살자.
사실 액면 그대로 종일 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결코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그야말로 어울리는 게 깨어 있는 삶이니까. 언젠가 해야 할 것이면 ‘지금’ 해야 할 게고, 하지 않을 건 ‘지금’ 하지 말아야 하리라. 그게 현재와 어울리는 삶이요, 여기서 깨어있는 진정한 삶이다. 여기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하자. 몸은 성당인데 마음은 바깥이라면 문제이다. 기도하는 곳에는 기도만 일터에서는 일에만 전념하자. 중요한 건 지금 그리고 이곳이다.
그런데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팽개쳐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걸 시도 때도 없이 뒤로만 미룬다. 분명한 것은 지난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건 미리 만날 수 없다. 그렇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그러니 그분 보시기에 늘 좋은 모습으로, 오늘 지금을 멋지게 살자. 그분께서는 은총으로 거저 베푸시는 분이시니까.
우리는 지상에서 천상을 향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알 수 없는 그 수명은, 당신 부르심에 응답 시까지는 손수 주신 준비 기간일 게다. 오직 단 한 번의 최후의 심판을 위해 오실 그분을 철저하게 신뢰하면서, 허리에 확실히 띠를 두르고 등불 켠 채 깨어 기다리는 삶을 열심히 살아가자. 어쩜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다.
지금은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보듯이 모든 것이 분명하리라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때는 하느님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최고의 행복이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라면, 종말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게다. 예수님께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런 행복을 기다리기 때문에. 밤새 허리에 띠 매고 등불 켜 놓고 그분 기다린 이에게 내릴 주인의 은총이다. 이것은 평생 만남을 준비한 삶으로 그날만 기다려 온 믿는 이들에게 손수 주실 ‘하느님 선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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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우리의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와 십자가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희생양은 필요한가?』(부제: 성경에 나타난 폭력과 구원)라는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읽은 지 오래되어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그 출발점은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폭력성을 분출시킬 대상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흔히는 어떤 약함이 있고 자신을 함부로 하여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 희생양이 됩니다.
구약에서는 제사 때에 바치는 양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은 타자를, 나의 밖에 있는 무엇을 그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소 희생양이 되시고, 그래서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 이 사슬을 끊으십니다.
밖에서 희생양을 찾으시지 않고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몸으로 받으시어 멈추게 하십니다.
이 정도가 제가 기억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잔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평화가 이루어졌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부질없는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셨을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다른 방법들을 다 써 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언자들도 죽이고 그들의 말을 없애 버리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에페 2,1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가 되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우리 안에서 희생양을 찾고 미움을 쏟아 내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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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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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주인을 맞이하려고 기다리는 종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아무리 늦게 오더라도
그 주인을 맞이하고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종의 임무라고
복음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을 기다린 종에게
주인이 식사 시중을 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종의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은
사람의 아들, 즉 예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은
우리를 말합니다.
당신이 다가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를
당신께서 섬기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마땅히 하느님을 섬겨야 하지만
당신을 맞이하는 이들을
당신께서 몸소
종의 모습으로 주인을 대하듯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기다리는 이들의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기다립니다.
기다려야 하는 의무가 있어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기에
기다립니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은 의무로서
주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연한 일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주인처럼 섬겨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꾸준히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기다리면서
희망 속에서 기쁨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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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평화로운 세상 건설을 위한 순교자로서 삶의 주인공,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평화의 사도 성(聖)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1920-2005, 재위 1978-2005)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은 발길 닿는 곳 마다 목소리를 높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평화! 평화!”를 외쳤습니다. 전쟁은 가장 무거운 죄임을 천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들을 직접 찾아가 화해와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행된 전쟁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평생토록 ‘전쟁과의 전쟁’을 주도하셨던 그분의 평화와 관련된 메시지를 요약해보니 오늘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길 내용이더군요.
“나는 전쟁과 폭력을 직접 겪어본 사람으로서 선언합니다.
폭력은 악입니다.
폭력은 결코 건설의 도구가 아닙니다.
폭력만이 문제의 해결의 열쇠라는 외침을 절대 수용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인간의 품위에 맞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폭력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무릎을 꿇고 호소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애원합니다.
길을 바꾸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폭력의 샛길을 멀리 하십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부 드립니다.
평화의 길로 돌아오십시오!
자비로우신 주님께 청합니다.
극단의 야만에까지 떨어진 우리 인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과 한국 교회의 인연은 각별합니다.
그분은 순교자들의 땅이자 분단국가, ‘전쟁 발생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되는 한국을 각별히 마음에 두셨습니다.
당신도 어린 시절 나치 독일과 소련 치하에서 큰 고통을 겪으셨기에 분단된 한국의 아픔을 당신의 고통처럼 느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한국을 사랑하셨던지 교황 재위 시절 두 차례나 방한하셨습니다.
1984년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된 103위 순교자 시성식은 로마 밖에서 실시된 최초의 시성식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세계성체 대회 참석차 방한하셨는데, 당시 주제는 한반도 평화를 염두에 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분단으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을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메시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평화와 정의 속에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이 나라의 비극적 분단을 가슴아파합니다.
분단된 대한민국의 고난은 분열된 이 세계의 상징입니다.”
2011년 5월 1일 바티칸 광장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시복 미사를 주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강론이 아직도 귀에 생생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어떤 분이신지 감동 깊게 묘사하셨습니다.
“저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1982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저를 로마에 부르셨습니다.
저는 23년 동안 그분 바로 옆에서, 매일 그분을 뵈면서, 그분의 인격을 더욱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은 언제나 저를 감동시켰고 든든히 세워주셨습니다.
그분은 복잡다단한 직무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만남 속으로 빨려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의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하나 그분의 모든 것을 벗기셨지만, 그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처럼, 바위로 남아 계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6년 5개월이란 긴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총 104회, 129개국을 방문하셔서 역사상 가장 여행을 많이 하신 세계 지도자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지구를 서른 바퀴 도는 것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분께서 그토록 기록적인 순례를 거듭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라진 이 세상에 보다 많은 다리를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다리는 다름 아닌 평화의 다리, 반전(反戰)의 다리, 사랑의 다리, 화해의 다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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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있고, 우리의 등불을 밝히고 허리에 띠를 띠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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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깨어있게 하시는 이유와 깨어있는 방법
스페인 베니돔에 건설 중인 47층 높이 고층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계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밝혀졌다고 스페인 매체 에코노미아가 보도했습니다.
처음에는 20층 높이의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시작했지만, 개발자가 욕심을 부려 47층 269개의 방으로 변경해 공사를 계속했습니다.
최초의 설계에서는 20층 건물에 적절한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더 높은 건물로 바꾸며 엘리베이터를 추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갑자기 변경된 계획으로 인해 비용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결국 이 건물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는 사임했으며, 재정적인 문제로 부실 자신이 되어버린 이 빌딩에 대한 권한은 2012년 갈릭시아에서 스페인 배드뱅크로 넘어갔습니다.
설령 건축디자이너가 잘못 설계했다고 하더라도 투자한 사람들이나 승인하고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건축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 이상하다고 여겼을 텐데 왜 수많은 사람이 설계를 보고 거의 다 짓고 나서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돈과 명예라는 욕망에 사로잡히면 눈이 멉니다. 욕망이 우리 영적 감각을 잠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엔 주인이 돌아올 때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문을 열어주는 하인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인이 주인이 돌아오기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주인이 매우 무섭거나, 혹은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이 무섭다고 여겨질 때는 주인이 나가 있을 때 주인이 없을 때 하지 못하던 것들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할 때는 일상이 더 개인의 욕망에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은 개인적인 욕망에 눈이 멀면 엘리베이터가 없이 고층 빌딩을 지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이웃에 대한 사랑의 부족으로 나타납니다.
성모님은 술도 드시지 않으셨겠지만,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술이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습니다.
욕망은 타인은 신경 쓰지 않게 만듭니다.
인간의 욕망은 왜 강해지는 것일까요? 두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두 원숭이를 서로 격리해 우리 안에 넣어놓습니다.
실험자 한 사람이 한 원숭이에게 자그마한 돌을 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손을 펴고 있으면 그 원숭이가 돌을 다시 사람에게 줍니다.
돌을 받은 사람은 돌 대신 오이를 원숭이에게 줍니다.
원숭이는 매우 만족한 듯이 오이를 먹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원숭이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이 대신 포도 한 알을 줍니다. 원숭이는 포도를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옆에 오이를 먹은 원숭이가 이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시 사람은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고 돌려받습니다.
아마도 이 원숭이는 자신에게도 포도를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원숭이에게 또 맹맹한 오이 조각을 줍니다.
이 원숭이는 약간 시큰둥합니다.
그러나 어쨌건 오이를 먹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조약돌을 주고받고는 포도를 줍니다.
또 처음 원숭이에게 똑같이 하고 오이를 주었더니 그 원숭이가 오이를 먹지 않고 실험자에게
집어던집니다.
실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의 원숭이에게 똑같이 포도를 줍니다.
그런 다음 처음 원숭이에게 조약돌을 주었더니 이번엔 조약돌을 사람 얼굴로 던져 버립니다.
옆의 원숭이에게도 위협을 가합니다.
주인도 싫고 옆의 원숭이도 밉습니다.
인간도 이렇게 욕망이란 것이 하느님과 이웃들에 대한 원망이 되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마치 하느님께서 없는 것처럼 욕망에 물들지 않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욕망은 사람은 모기로 만들어서 자기만 생각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미워하게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습니다. 누가 모기와 함께 살고 싶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깨어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에게 주어진 은총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이도 먹지 못하는 다른 원숭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꿈에서 좋아했던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 데 정말 정성스럽게 아침밥을 해 주는 아내가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잔소리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다느니, 양말 좀 뒤집어 벗지 말라느니 갖은 잔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일하러 가는 것도 힘든데 아침부터 잔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 아내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 같아, 괜히 결혼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때 사제관이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렇게 감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제가 된 것에 대해 이전에는 그만큼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더욱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니까 조금 더 깨어있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의 불만을 욕망으로 채우려 하는 게 줄어들고 감사하는 분을 위해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깨어있기 위해서는 나에게 오이를 주는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세상의 욕망으로 이기적으로 되고 타인을 미워하는 삶에서
해방해줍니다.
사랑하면 그분이 올 것 같아 환청도 들릴 수 있습니다.
저도 샤워하다가 사랑하는 이의 전화인 줄 알고 물이 흐르는 채 전화기로 왔지만, 환청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기다리게 되고 기다리면 세상 욕망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내가 감사하려는 노력의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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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
원래 이 말씀은, 당신을 본받아서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은 지상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고, 하느님 나라에서도 사람들을
섬기시는 분” 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사람들을 섬기시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상입니다.
(예수님의 시중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받게 될 최고의 상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ㄱ.13).”
그때 제자들은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심판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에 받게 될 ‘벌’이 아니라, 그날 받게 될 ‘상’과 ‘복’을 더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심판 때에 벌을 안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하느님께서 주실 ‘상’과 ‘복’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릅니다.)
만일에 벌을 안 받는 것만을 바라면서(지옥에 가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죄를 안 짓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됩니다.
그런 신앙생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억지로 하는 강제노동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얻어 누리는 것을 희망하는 신앙생활은 기쁨이 가득한 생활이 됩니다.
그 신앙생활은 의무감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투덜거리는 생활이 아닌,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면서 기뻐하는 생활이고,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자기가 원해서(좋아서) 하는 생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미리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그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심판을 의식하면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는 것도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으로 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는 말씀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말은, 일을 할 때의 복장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띠를 맬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띠를 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고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은, 주인이 도착한 다음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등불을 켤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를, “‘어둠 속에’ 있지 말고, ‘빛 속에’ 있어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죄 속에서 살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하고, 신앙인답게 사는 것은 ‘그 때’가 닥친 다음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온다는 말은 특별한 의미가 없고,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주인이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늦게 올 것이라고 마음대로 예상하고서 방심하면 안 되고, 지금 곧 온다고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말은, 각 개인의 수명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복을(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인데, 지금은 불행한 상태에 있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희망과 기쁨과 사랑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상태도 복 받은 상태, 또는 행복한 상태입니다.
(만일에 벌을 주려고 오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종이라면, 그 종은 두려움 때문에 기다림 자체를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상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생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행복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행복하고 기쁜 생활입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뀐다는 뜻이 아니라, 주인이 종에게 ‘큰 행복’을 주려고 애쓴다는 뜻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본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었고,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루카 15,20-24).
아마도 아버지는 아들을 옆자리에 앉히고 이것저것 음식을 집어 주면서 마치 시중을 드는 것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고, 사랑하는 그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8-10).”
(예수님은 우리가 이쪽 세상에서나 저쪽 세상에서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나 거기서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시중을 들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원하셔서 하시는 일이고, 당신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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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35-38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한국과 중국, 일본에 걸쳐 폭넓게 자생하는 묘목 중에 “모죽(毛竹)”이라는 이름의 대나무가 있습니다. 이 대나무는 땅에 심어 놓아도 5년이 될 때까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5년이 지나면 작은 싹이 올라오고 그 후부터는 하루에 7-80cm씩 무섭게 성장하여 나중에는 키가 30미터가 넘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죽’의 모습을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워낙 빠른 속도로 큰 ‘덩치’로 자라다보니 줄기가 부러지거나, 혹여 뿌리가 약해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식물학자들이 그 나무의 뿌리를 조사해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모죽’의 뿌리가 나무 주변 십리 반경에 걸쳐 사방으로 넓고 깊게 뿌리를 내려 단단하게 기초를 다져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듯 답답하게만 여겨졌던 ‘5년’이라는 시간이, 모죽에게는 세상으로 나갈 날을 고대하며 땅 속 깊은 곳에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기다린 ‘인고’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물에 열을 가하면 ‘수증기’가 된다는 것은 과학시간에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섭씨 0도에서 99도에 이르기까지는 아무리 열을 가해도 물은 그냥 물일 뿐입니다. 그 어떤 물질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99도에서 1도가 올라 100도가 되는 순간 액체였던 물은 순식간에 질적 변화를 일으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인 ‘기체’가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온도인 섭씨 100도를 ‘기화점’이라고 부르지요.
우리의 삶에도 ‘기화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내는 ‘인고의 시간’은 때로 너무나 힘들고 답답하게만 느껴집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힘든 것도 참아가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데도, 겉으로 보기에 나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떄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나만 손해보고 사는 것 같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뿌린대로 갚아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깨어보내는 인고의 시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헛된 시간이 결코 아닙니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무르익었을 때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기 위하여, 구원의 시간이 언제 찾아오든지 즉시 ‘영혼의 기화점’에 도달할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으로 자신을 가열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차가운 물이 갑자기 끓을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가 평소에 하느님과는 상관없는 차가운 모습으로 살다가 갑자기 착한 일 몇 번 했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갈 수는 없는 법이지요. 언제든지 끓어오를 수 있도록, 구원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할 수 있도록, 늘 사랑으로 자신을 뜨겁게 가열하여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우연히’, ‘운 좋게’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고, 단순히 ‘운’에 기대어 주어지는 ‘복불복’도 아닙니다. 세상에 나갈 날을 기다리며 5년 동안 철저히 깨어 준비하는 ‘모죽’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큰 나무로 자랄 날을 기다리며 철저히 깨어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내 영혼이 하느님 사랑으로 뜨거워져 있어야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도 더 크고 완전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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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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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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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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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2.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슬픔 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삶
<2024.10.22> 아침을 여는 묵상 (애 3:19~39절)
❝슬픔 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삶❞
❚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겸손히 그분을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 슬픔을 이기는 삶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간절하게 소망하는 삶입니다(19~24절).
시인은 자신의 고난과 괴로움 그리고 쓰라림과 고통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19절,쉬운성경)합니다. 그리고 ‘이것을’(21절) 즉, ‘고초와 재난’(19절), ‘낙심’(20절)을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더니 오히려 그것이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심령이 낙심에 처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언약의 주인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현재의 절망 속에서 소망을 기대할 수 있는 근거로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혹독한 심판을 내리시는 중에도 백성을 모두 전멸하지 않고 남겨 두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22절). 이러한 인자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여 줍니다(23절).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의 배교와 불충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맺으신 약속을 친히 이행하심으로써 성실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성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상호 간에 갖는 신뢰의 기본이며,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교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내가 그를 바라리라...”(24절)고 고백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언약의 하나님으로 우리 자신의 도움을 삼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복된 까닭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영원히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으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고통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긍휼을 바라보는 삶이어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 자신들이 고난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늘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다시금 회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실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인자와 긍휼을 간절하게 소망하며 나아감으로 슬픔 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삶입니다(25~33절).
시인은 고통 중에도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고, 고난당하고 있는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실 구원을 기다리는 것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25~26절). 특히 시인은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는 메는 것이 좋다고 강조합니다(27절). 이는 희망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며, ‘멍에’는 자신이 감내해야 할 분량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 자신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수단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홀로 앉아서 조용히 있어야 하며, 겸손히 입을 땅에 대야 합니다. 왜냐하면 혹시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28~29절,쉬운성경). 심지어 고난의 때에 누군가 자기를 치면 인내하며 뺨을 돌려대라고 교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30~31절). 고난을 끝까지 감내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근심하게 하지만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아울러 인생들로 하여금 고생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32~3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아무 이유 없이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부한 사랑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통로가 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고난을 참고 견디는 자, 겸손히 그분을 기다리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아울러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겸손히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기다리는 자는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감당하기 힘든 현실에 직면해 있지만, 그 고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고난을 겪는 중이라면 원망과 불평을 죽이고 잠잠히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다림으로 슬픔 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정직하게 고백하는 삶입니다(34~39절).
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갇힌 자들이 발로 밟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세상의 불의와 억압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34~35절). 또한 재판을 굽게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방관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36절). 말씀으로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심판을 이루셨습니다. 이 세상의 재난이나 복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37~38절). 그렇기 때문에 인생들이 자신의 죄로 인해 심판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39절)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 압제 당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그냥 보고 계시지만은 않으시는 분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벌하시지만, 억울한 자의 처지를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말씀 그대로 행하시며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세상에서 풀 수 없는 모든 억울함을 나아가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에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도움이 되심을 고백하며 슬픔 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이전에 역사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확신하여 절대 절망을 절대 희망으로 바꾸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살아계셔서 매일 매 순간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베푸시는 인자와 긍휼 안에서 슬픔 중에 희망을 노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애 3:19~3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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