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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메멘토 모리》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영어지만,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이 좀 이상하기도 하고, 다른 어떤 뜻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명이 사라진 앙상한 해골은 부·명예·지식·쾌락 등 인간이 살아가면서 갈망했던 모든 것이 한갓 덧없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절감하게 해 준다.”고 한 저자의 말에서 죽음에 대한 어떤 철학을 담은 말 같기는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저자 김열규 선생은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와 민속학과를 전공하고 한국학도 연구했다. 1991년 낙향해 2013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년에 살았던 자란만(紫蘭灣)이 보이는 곳은 처가 동네기도 하고 한때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서 나도 잘 아는 곳이다.
세상을 살다간 수많은 도덕군자, 성인, 선배들, 어른들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죽음을 한마디로 정리하진 못한 것 같은데 이 책은 죽음에 대해 가장 한국적 서사로 한글로 쓰여진 단 한 권 ‘죽음에 대한 총체적 모노그래프’라고 2021년 「사무사책방」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고 소개했다. “… 죽음 때문에 우리들은 삶에 달라붙어야 한다. 죽음으로 해서 잃어질 삶이라면, 아니 결정적으로 잃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한사코 그 삶에 마음을 붙여야 하고, 사랑을 붙여야하는 것이다. 그 죽음 때문에 오히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기껏해야 삶의 끄트머리에 따라다니는 종착역 정도로 우리는 인식한다. 죽음에 대해 저항하려는 무의식이 발로 시킨 본능적 사고 때문이다.”고 한 저자의 말에도 공감이 간다.
삶이란 한번 뿐이기에 중요성, 중대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삶의 일회성은 삶의 허무나 삶의 포기를 종용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다. 삶 속에 보이지 않게 간직되어 있던 죽음이 어느 날 문득 다 갖추어진 모습으로 삶 전체를 뒤집어 보이는 것뿐이다. 버림받고,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죽음에 ‘한발 비켜서서’의미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의 가치를 되새겨 보아야 하고 삶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신라의 수도 경주의 금관총·서봉총·천마총 등에서는 금관이 나왔다. 모두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들이다. 그 금관의 형태가 나뭇잎이냐, 사슴뿔이냐 하는 논란이 있지만 아마도 두 가지 다를 표현한 것인 듯 보인다. 가을에 잎이 지는 푸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재생해 나온다. 사슴뿔은 사슴 머리에 난 푸나무로 자르면 자르는대로 다시 돋아나는 나무를 닮았다. 금관에 푸른 녹각이 달려 있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녹각은 신라 시대 사람들의 끝없는 영생(永生), 화생(化生)에 대한 갈망이 묻어 있는 물증이다. 사람들은 죽음보다 삶, 죽어서는 영생을 믿었다.
우리가 죽음을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다른 생물이나 동물의 경우 죽음은 곧 소멸로 그 이상 아무것도 얘기할 게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인간의 죽음이란 것은 단단히, 똑똑히 강조되어야 한다. 인간의 죽음, 생물만이 누리는 유일한 죽음에 관한 얘기가 여기서 비롯된다. 다른 생물은 죽지 않는다. 없어질 뿐이다. 잘해야 생명이 사라지는 것뿐이다. 더 이상 무엇이 되지 못한다. 인간만 ‘오직 죽음을 죽는다.’
인간은 죽음을 생물학적인 사실에서 자유롭게 풀어놓은 유일한 존재다. 인간에겐 인간 스스로 생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이 필요했고, 죽음이 갖는 지상에서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것이고, 가치 그 자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생명체 성장과 소멸의 당연한 과정의 일부로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설혹 그 과정에 끼어들어 있다고 해도 죽음은 그 자체로서 값을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왕국이다.
인간에게 목숨이 있는 동안은 생물학적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것에 매여 있지 않고는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다. 생물의 사슬을 깨기 위해 인간에게 죽음은 절대적인 당위고 필연이다. 애써서 얻어낸 수확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의해 인간은 비로소 생물학을 넘어선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생물학적인 사실만으로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정신의 형이상학과 영혼의 종교학에 짙게 물든 빛과 더불어 우리를 찾아온다. 정신과 영혼의 자기 증명을 위해 죽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법한 것이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명료하게 정신과 영혼 앞에 나가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그것이 삶의 최종적인 여행 목적지였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자유의 징후가 될 수 있다. 죽음의 필연성은 종국적인 해방의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라고 한 ‘마르쿠제’의 말은 그래서 음미해 봄직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에 기댄 피아론적인 명제가 아니다.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순간에 자기 죽음을 갖는 존재가 아니다. 아니 숨이 지는 순간의 죽음은 이미 자기 죽음이 아니다. 남의 죽음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임종이라고 하는 죽음이 자기 죽음이 아님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의식, 인간의 자의식, 저 바깥으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먼 암묵의 어느 우주공간으로 유성처럼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인간 의식으로 잡히지 않는 것을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의식과 주먹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두 개의 큰 도구다.
인간은 목숨이 지는 그 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미 죽음을 갖는다. 인간은 죽음과 따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죽음을 미래의 어느 모르는 시점에 두고 그 시점에 도달하기까지 죽음과 무관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인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죽음을 갖는다. 살아가면서 죽고 죽으면서 살아가는 게 다름 아닌 인간적 삶의 양상이다. 그것은 무척 개성 있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삶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죽음만이 있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한 누군가의 말은 매우 그럴듯하다. 죽음과 성애(性愛), 타나토스와 에로스를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둘은 서로 얽혀서 상호 기생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마찬가지로 아주 그럴듯하다.
이상 책 본문에서 인용한 것들이다. 형이상학이라거나 인문학적 혹은 문학적 경구警句들이 많아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다감하게 다가오는 느낌도 있다. ‘메멘토 모리! 삶을 다그치듯 죽음을 잊지 말자’고 하고 10년 전에 떠난 저자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죽음과 죽은 이를 대할 때 정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에는 따돌림을 하고 억지 같은 잡아떼기를 한다. 고개를 저으며 지워버리려거나 최소한 멀어져 있기 마련인 그 무엇으로 죽음을 대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결국 나의 죽음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생목숨 속에 길을 잘못 들어선 미아로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맞게 된다. 생소한 죽음, 낯선 죽음을 죽을 때 삶이며 목숨은 오죽이나 생소한 것일까? 정작 갖고 싶어 하는 죽음은 없다. 그나마 영원한 혹은 무기한 유예가 보장된 걸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괴테는 「에크만과의 대화」에서 엄청난 신념을 토로한 적이 있다.
“사람이 죽음에 다다라 제 자신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아무도 못 할 일이 남아 있노라고 확신한다면, 그때 죽음을 보고서 물러가라고 하라. 그러면 죽음도 물러가리라.”
이런 신념을 나중에 현실화한 그는 나이 81세에 다량의 피를 쏟고도 『파우스트』2부를 쓰기까지의 말미를 실제로 얻어낼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신념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삶이 지닌 가치에 대한 ‘짝’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인도 브라만교 성전인 『우파니사드』에는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브라만이 되묻는다.
“너희가 입은 옷이 낡아 헤어지면 너희는 어찌해야 옳으냐”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죠”
“그럴진대, 너희의 영혼이 입은 옷이 너희의 육체라고 친다면, 그 육체 옷이 누더기가 되었을 때 너희 영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견줄만한 이 유도심문에서 브라만은 이미 대답의 물꼬를 터놓고 있다. 육신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만 영혼은 그것을 까마득히 벗어나 있다. 죽음이 거울에서 비껴 나가듯이 헌옷을 벗어던지는 일과 같다면 필경 죽음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삶은 오직 한 번뿐이기에 중요하고 중대성을 확보해야 한다. 릴케는 말했다. ‘오직 한 번만의 내 몫이 아니었다면, 삶은 얼마나 보잘것없을 뻔했겠느냐고’삶이 일회성이라는 것은 삶의 절대적 긍정을 위한 유일한 전제요 근거라고 다짐한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짝이다. 삶 다음에 오는 것이 죽음이 아니다. 삶의 끝자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동이 숙제를 미루는 것과 같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내일모레로 미루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개론으로라도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자화상은 어떤 것일까? 죽음은 철저한 삶의 말살이자 허무감의 원천이며 공포감의 근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 떨면서 짙게 한숨짓는다. 그러나 죽음은 이미 살아있는 맥박 속에 깃들어 있다. 죽음이 삶의 끝에 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죽음은 목숨이 잉태하는 순간부터 그 목숨과 함께 비롯된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삶만큼 다양한 죽음을 겪어 왔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간직해왔다. ‘삶이 가꾼 죽음’을 간직해 온 것이다.
한국인은 사람이 죽으면 곡(哭)을 한다. 눈물이 나고 울음소리를 내는 겉보기는 울음과 곡이 큰 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에서 얻어진 결론이다. 울음은 생리고 곡은 문화다. 멀리서 들어도 곡성은 금방 구별된다. 그만큼 특징적이고 일정한 양식을 갖기 때문이다. ‘애고, 애고 …’하는 그 울음은 3박자 느린 장단을 타고 있다. 이렇듯 죽음은 문화의 양식에 관여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문화화하기까지 한다. 삶과 구별되는 징표로써 죽음에 부여하는 것이 곡이고 죽음은 삶과 연관되어 있으되 삶과는 확연히 갈라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에 엄청난 과정법을 사용한다. ‘목이 말라 죽겠다. 배가 고파 죽겠다’는 것은 원뜻이 그런대로 살려진 과장법이긴 하지만 ‘잠이 와 죽겠다’거나 ‘보고 싶어 죽겠다’고 하면 원뜻과는 거리가 멀다. ‘못견디겠다’는 과장법이겠으나 ‘좋아 죽겠다. 이뻐 죽겠다’는 것은 원뜻이 아예 사라졌을 뿐 아니라 은유적 의미도 빛을 잃고 그저 호들갑에 불과하다. 사람의 목숨에 관련되어 직설적으로 쓰이는 죽음이란 낱말은 기피하면서, 사람 목숨과 관련 없는 사물이나 현상에 관련해서는 심하게 과용하고 또 남용한다.
‘저승’은 이승이 아닌 다른 세상, 우리가 죽어서 가는 세상을 말하지만 죽음의 땅이란 뜻으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이승의 땅 밑 무덤 속에 꾸며진 저승을 생각하게 되나, 이승에서 가는 길은 틔어져 있을 뿐, 이승으로 되돌아오는 길은 애초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머나먼 저 너머의 땅이다. 한국인의 죽음은 이승에서의 숨이 끊어지고 넋이 땅 밑 저승으로, 또는 저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한국인이 ‘죽음’에 대해 내리는 정의다.
죽음과 삶을 대비시키는 말로 ‘생야일편 부운기 사야일편 부운멸(生也一片 浮雲起 死也一片 浮雲滅),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인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진 것이다’고 하는 말 만큼 간단명료한 비유를 찾기 힘들다. 하지만 이 대구對句로는 자신의 생사 앞에서 담연자약(澹然自若)할 수 있는 마음의 경지를, 깊은 잠과 크나큰 안식을, 또는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관념의 세계와 현실의 죽음 앞에서는 그런 위안마저 한 조각 구름처럼 이지러지고 만다. 죽음에 메여진 사슬은 질기고 강해 상상의 지옥, 사신(死神)의 얼굴, 테스마스크의 이지러진 표정과 뭉크의 그림이 일깨우는 것들의 화신처럼 늘 위협적이고 공포스럽다.
악마는 공포스러우나 허무하지 않고, 전쟁은 무서워도 허무감 자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굶주림과 고문이 겁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경험을 허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죽음은 공포이면서 허무다. 죽음은 유일무이하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것이다. 시신의 경직, 피부에 번지는 사반(死斑)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한다. 정을 뗄만한 공포감을 그 시신이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시신의 부식을 목격할 때의 공포감에 비길 수는 없다. 부식하는 시신도 그렇지만, 백골의 공포감은 사뭇 충격적이다. ‘위험’경고판에 백골을 그려 놓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부모가 돌아가면 선산에 묻고 자식을 여의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토록 비통한 게 요절한 죽음이다. 그런데도 처녀·총각이 죽으면 죽음을 학대하다시피 했다. 또 아기 무덤은 땅에 묻힌 작은 옹기뿐이다. 아기와 처녀·총각의 죽음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서럽고 애달픈 죽음이다. 피지 못한 꽃이 폭풍우에 떨어진 것과 같다. 어둡고 습한 땅, 응달진 그늘, 구렁텅이에 그들의 시신을 가둔 까닭은 물어보나마나다. 장례는 따뜻하게, 무덤은 꽃 봉우리처럼 흔히 보는 무덤을 만들어 길게 잠들게 해야 하는데도 거꾸로 그들을 꽁꽁 묶고, 엎어 누이고, 짓누르고 가두어버린다. 그들의 죽음을 무서워한 어른들의 짓이다. 왜 그랬을까?
귀신을 무섭다고 하지만, 죽은 이는 실질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들보다 어떤 물리력도 행사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귀신 자체가 무섭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서움은 산 사람 마음속에 있을 뿐, 마음속 무서움을 애처로운 넋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아기와 처녀·총각의 죽음이 짓고 있을 그 무서움의 표정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것인 것이다.
‘북망산이 멀다더니
문전 앞이 거기로다’
라는 상두노래가 있다. ‘공수래공수거’같이 허무를 표출한 말이다. 죽음은 부정(不淨)으로 얼룩져 있는데, 그만큼 더러우면서 위험하다는 것일 것이다. 허무하고 부정하고 공포스럽기도 한 죽음, 부정하고 위험하니까 무서워하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우리는 남의 죽음 앞에서 떨어지려 하고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죽음을 유명(幽冥)이라고 한 것처럼, 이승과 저승을 유택(幽宅)과 명택(明宅)으로 구분한 것에서 보여주듯이 둘은 서로 대극적인, 또는 대조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삶의 방위가 동남쪽이라면 죽음의 방위는 당연히 서북쪽에 잡혔다. 가령 불교의 서방정토나 기독교에서 죽음의 세계를 서쪽에 배정한 것만 봐도 그렇고, 중국의 북망산천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 조상인 신라인들은 죽음의 방위를 삶의 방위와 굳이 가르지 않았다. 경희대 박물관장 황용훈 교수가 경주에서 조사한 고분에 따르면 8개의 묘곽이 대체로 동남쪽을 향해 있음을 발견했다. 머리를 동남쪽에 두고 다리를 서북쪽에 두었다는 것인데, 이는 신라인들이 살아서 ‘해바라기’를 했듯이 죽어서도 해바라기를 했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역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은 넋이 육신을 떠나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이의 넋은 귀신이 되고 귀신이란 죽은 사람의 넋을 말한다. 산 사람은 결코 귀신이 될 수 없다. 귀신이 되는 죽은 이의 넋은 육신을 떠나서는 어떻게 된다고 믿었을까? 원칙적으로 저승에 간다고 믿었다. 저승이란 귀신들의 세계다. 하지만 이것은 원칙일 뿐으로, 저승으로 못 가는 넋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생과 사도 아닌 유도 명도 아닌 중간자인 떠돌이 넋, 객귀들은 삶의 변두리와 죽음의 변두리 두 어름에 어정쩡 하게 걸려 있다. 이승의 문제를 남긴 넋은 저승으로 못 가게 된다고 믿었다. 죽음 자체가 문제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 불에 타 죽은 사람, 싸움터에서 죽은 사람, 객지에서 죽은 사람의 넋이 대표적 객귀들이다.
억울한 죽음, 원통한 죽음의 대표적 사례는 작품 속에서 잘 나타난다. “마을에서는 그 물귀신을 끔찍이도 믿었다. 원래 물귀신은 앉은뱅이 귀신이어서 바다를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했지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그 말에 아랑곳없이 다른 귀신을 찾아 온통 바다 밑을 헤매고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바다에 빠져 죽는 일이 한 곳에서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생겨났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괴상한 일은 진짜로 마을에서는 거의 매년 한 사람씩 바다귀신이 되어가는 것이었다.” - 이청준의 「석화촌」에서 -
죽음을 부정으로 본 것은 하나의 전통이었다. 부고는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고, 심지어 한반도 북부지방 일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을 태워서 없애버렸다고 한다. 아기 죽음과 처녀·총각 등 미성년자 죽음은 철저히 억압했는데 이는 살아남은 자들의 공포심 때문으로 그 죽음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삶이 미완이었던 만큼 ‘모자라는 죽음’으로 간주했고, 그들의 여한 때문에 공포로움을 우려했다. 그들은 제대로 된 무덤을 만들지도 못했고, 관에 넣지도 않고 가마니나 거죽에 둘둘 말아 지게에 지고 가 묻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얼굴이 땅을 보게 하는 엎어서 묻기를 했고, 그러고도 모자라 봉분도 쌓지 않고 흙묻이 위에 큰바위를 덮기도 하여 철저하게 세상을 보지 말고 세상에 나다니지도 말라는 억압했다. 공포와 부정으로 죽음을 애써 이화異化하고, 퇴화退化시킨 것이다.
죽음의 기호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갈 길을 간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갈 길을 못 간 죽음이다. 전자를 호상好喪, 후자를 악상惡喪이라고 하는데 호상은 수를 누릴 만큼 누리고 부귀영화와 후손복을 누리고 독한 병을 앓지 않아 편히 잠드는 듯이 제집에서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임종하는 것이지만, 악상은 그렇지 못한 죽음이라 원령(怨靈)이 생기고 넋은 이승을 떠도는 무서운 살(煞)이 되고 죽음에 공포를 낳았다. 무당의 주된 사회적 기능이 위령과 살아 있는 자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양자 사이에 화해를 가져와 원령이 방황을 끝내고 저승으로 가게 동기 지워 주는 일에 관여한다고 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날 거의 누구 할 것 없이 장례는 ‘삼일장’이 보편화되어 있다. 장례 절차인 임종, 고복, 성복, 소렴과 대렴, 우제, 곡, 출상, 소상, 대상, 상복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소실되었거나 흔들린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편의나 간략함에 떠밀려버렸다. ‘죽은 이를 위한 상례는 없고 살아 있는 자를 위한 상례가 있을 뿐이다.’상복도 검은 양복 위에 팔에 끼운 상장으로 국한되어 친족간 복의 구별이 없어 누가 상주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여막(廬幕)이나 빈소(殯所)는 아예 언급할 게 못 되고 장례 절차 대부분은 직업인 사람들에 의해 대행되고 무덤도 봉분이 아닌 장방형으로 서구화 되고, 봉분을 감싼 둘레는 이젠 없다. 모든 것이 72시간 안에 끝난다. 상례의 상징적인 의미 또한 박탈된 지 오래다.
죽음조차 상품화되고 있다. 공사 수주受注와 마찬가지로 상례나 장례가 모두 수주가 개입된 공사로 변했다. 죽음이란 상징성은 상거래의 교환가치 속에 묻히고 만 것이다. 장의 풍속과 장례는 가고 편리성만 있을 뿐이다. 전에는 병원에 있던 환자도 임종이 가까우면 집으로 모시고 남자는 사랑채, 여자는 안채에 들였다. 한두 세대 전만 해도 환자가 병원에서 숨지게 두지 않았다. 바깥에서 숨지면 객사라고 해서 죽은 이가 객귀가 되어 이승을 떠돌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객사는 한국인에게 금기 중 금기였다. 이제 상례가 ‘짐치우기’같아지고 있는데, 이런 죽음의 구박과 소외는 산 자의 자기 구박이고, 자기 압제가 아닐 수 없다. 적어도 죽음이 경건하지 못하면 삶은 더 이상 경건하거나 혹은 그런 계기를 잃는 일이 되고 만다.
죽음이란 삶이 그러하듯이 현실이지 상상도 피안도 아니다. 한국인에게 죽음은 마땅히 돌아갈 곳으로 돌아감(歸)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귀신(鬼神)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속신은 제사에서는 지켜지고 있다. 죽음을 단절이나 격리로써 겪고 난 다음에는 인간의 영은 귀신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귀천과 편입은 같은 뜻이다. 죽음은 하늘로 향해 열리게 되고 아울러 삶 또한 하늘을 향해 열려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오늘날 죽음과 대체되거나 교환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징성도 없다. 시신 외에는 어떤 객관적 지시물도 없다. 모든 것이 종결되고 나면, 아니 소실 되고 나면 남는 것은 무無다. 우리는 그런 죽음을 죽어가고 있다. 죽음이 없는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을 외면한 채, 죽음이란 없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죽음 앞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다. 머리만을 틀어박고 죽음 뒤에 숨으려 하는 것과 같다. 눈만 감고 죽음은 없노라고, 남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과정이 죽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파리로 와서는 죽어가고 있다”고 릴케가 말테의 입을 빌려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은 단순한 죽음에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존재다.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는 것은 삶이 재편(再編)되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적어도 죽음의 정체가 드러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고, 죽음이 삶의 새로운 시작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종말인 죽음을 삶의 재편으로 전환하는 것은 불교식으로는 ‘불퇴전(不退轉)’의 용기라 할만하다. 전환은 의표를 찌르는 변화라야 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싫어한다. 그래서 우회법으로 ‘숨지다. 돌아가다. 저승가다. 타계하다. 서거하다. 승천하다’등 죽음에 대해 갖는 공포의 크기만큼 많은 우회를 낳는다. 말을 돌려 하는 만큼 죽음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신라 시대의 월명스님은 누이의 죽음이 두려워 ‘차마 두려워 먼저 가노라고 한마디, 말마저도 못다 하고 홀연히 가고 말다니’하며 한탄했다. 죽음이란 말조차 내지 못하고 홀연히 떠나간 것일까? 그러나 말없이 가버린 ‘말 없음’을 원망했던 것이니, 삶과 죽음이 실상은 하나의 길일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월명의 「제망매가」는 이렇게 읽혀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엾은 누이야 이승의 생사로는
기실 열반에의 길이기도 한데
너는 그것을 두려움으로만 대했었구나.
그래서 너는 이 오라비에게마저 말없이
떠나간 것이로구나.
한 문맥에 두 개의 대척으로 군형을 이루는 것. 그것이 바로 긴장이다. 시어나 시적 기교는 대립의 조화일 때 가장 본연적이라는 명제를 되새기게 한다. 한쪽만 보고 말없이 가버린 누이라서 오라비는 누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그지없이 가여웠던 것이다. 무명(無名)에 쌓여 맞은 누이의 죽음이 비탄스러웠다. 누이가 진상眞相을 보고 갔더라면 불제자인 오라비는 누이를 슬퍼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월명의 슬픔에는 오라비로서의 슬픔과 불승으로서의 슬픔이 겹쳐져 있다. 그런 이중의 슬픔이 또한 긴장미다. 그러나 결국 협화(協和)에 이르는 것이 이 시의 구조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여기저기 떨어지는 것.
우린들 다만 나뭇잎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 모르는 것.
바람보다 더한 여래如來는 없다. 바람은 늘 본시 무일물의 진상 그대로 오고 또 간다. 불어 움직이고 움직여도 머물지 않기에 바람이다. 머물지 않음이 본성이란 말은 변화만이 바람의 항존(恒存)이고, 무상만이 바람의 상유(常有)임을 의미한다. 바람에 날아간 갈잎을 보고 이제 진여(眞如)에 접하는 것이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 무의 심연에 깊이 잠겨버린 것이기에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한 것에 이르러 월명은 제대로 봄을 보고 인식을 얻은 것이다. 이제는 허무도 받아들여져야 하고 무주주(無住住)의 경지가 열린 것이다.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나볼 내가
도 닦으며 기디리리.
「제망매가」의 마지막 연으로 마티찰은 아미타불의 법경, 무량광불이 다스리는 서방정토다. 그곳은 극락이고 열반의 진경이다. 지금 죽어 있는자가 다시 태어나면 거듭 도를 닦아 오직 미타찰에 귀일해야 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누이와 오라비가 재회하는 왕도가 있다면 거기에 드는 일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시적 상념을 두고 종교적으로 관상된 향가는 이 시 뿐이 아니다. 「원왕생가」도 그러하다. 시와 종교의 융합은 신라가 남겨놓은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니라 문화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도 역사란 말을 쓰기는 한다. 가령 지각의 역사, 지구의 역사, 우주의 역사란 말이 실제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그 역사란 것이 결정론적인 변화인데다 변화의 폭이 엄청나게 크다. 몇십, 몇백만 년을 예사로 넘나든다. 그렇지만 그것을 역사라고 한다해도 그것에는 주체가 없다.
일어난 변화, 일어날 변화가 확인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자연의 경우 역사라고 부르기보다 변화라고 부르는 게 옳다. 자연의 역사란 개념에는 또 다른 이의(異議)를 제기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시간이란 게 완전한 중성이다. 변화의 주체가 능동적인 행위로 참획하는 그런 시간 개념의 존립이 불가능하다. 역사란 아무래도 문화의 몫이지만, 죽음의 역사가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자연이 아닌 문화라는 것에 대해 말해주게 된다. 이른바 ‘가정의례준칙’에 묶인 오늘날 사람들이 조선조 말의 사람들이 누렸던 죽음과 같은 죽음을 누릴 수 없음은 사뭇 뻔한 일이다. 또한 주자가례에 묶인 조선시대 사람들의 죽음이 불법에 귀의한 고려인들의 죽음과 다르리란 것은 뻔한 일이다.
이같이 인간의 죽음은 생물학 테를 벗어나고 자연의 테를 벗어남으로써 인간다움을 지닌 죽음이 된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정신이나 영혼의 몫이 되고 문화의 몫이 되었다. 한국인은 조선조 말기를 거쳐 극히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죽은 이들도 가족구성원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로써 죽은 이는 가버린 가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족으로서 한 집안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 보이고 있는 살아 있는 사람끼리 교섭보다 더 긴밀한 것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죽은 이는 이제 가버린 사람, 사라져버린 사람이 되었다. 호적부에서 삭제될 때 살아 있는 가족들에게서 삭제된 것이다. ‘사망신고서’는 영원한 퇴거증명서로써 이 두 가지 죽음 사이에 커다란 문화체계의 차이가 있음을, 역사의 차이가 있음을, 그리고 죽음을 정신화하고 영혼화하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앞뒤 없이 많은 얘기들을 끌어왔다. 죽음이 민족의 문화라는 주장에는 코끝이 시끈해지고, 우리는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죽음의 길로 들어왔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님에도 꼽씹어 보게 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생각은 죽음에 부여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월명스님의 「제망매가」이야기와 무속 이야기 중 「바리데기」이야기 등은 모두 죽음에 의미를 부여한 것들이다. 어둡고 습하고, 검고 불가지(不可知)한 늪 같은 것에 빛을 들이대고, 복면을 벗기고, 그래서 그것이 삶에 무언가를 지녔을 것이라고 가늠하기도 하고 삶과 죽음의 담벽이 이쪽이나 저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삶 쪽을 돌아보며 한 얘기였다.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지었다는 김대성의 이야기는 마치 현실처럼 인식되는데 『삼국유사』에 실린 그의 이야기는 『삼국유사』권5 「대성효이세무모신문대(大城孝二世父母神文代)」에 실렸다. 모량리에는 가난한 여인이 대성이란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머리가 커서 정수리 부분이 성城처럼 넓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인은 살림살이가 어려웠으나 남의 일을 해서 논밭을 장만했다. 어느 해 대성은 보시 온 승려의 권고로 어머니로 하여금 논밭을 시주하게 하였다. 얼마 후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재상인 김문량의 집에 대성이란 아이가 깃들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이어 문량의 처에게 태기가 있고 아이가 태어났다. 손에 대성이란 이름이 쓰인 황금 간자가 쥐어져 있었으므로 대성이라 이름 짓고 모량리 살던 옛 어머니를 모셔다가 한집에서 살았다.
이야기는 불교 설화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영혼이 죽은 뒤에 다른 육신을 얻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이 원류다. 대성의 이야기가 비록 불교적이라 해도 그 불교적인 것을 수용하고 전승했던 신라사람들의 의식의 바닥에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있었던 셈이다.
현실로 돌아와 우리 주변에 누군가 불치의 암을 선고받은 사람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 보자. 절망과 분노가 일고 왜 내게 이런 병이 찾아왔는가 하고 원망할 것이다. 문제 작가 ‘달런 토마스’는 그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이렇게 외쳤다.
“저 부드러운 어둠 속에 조용히 들어가지는 마소서.
노령은 해질녘에 타올라서는 울부짖어야 할 것이오니
노하십시오. 빛이 죽어가는 것에 노발대발하소서.”
그는 육친의 목숨이 마치 촛불이 꺼지듯 하는 것을 보고 그런 무저항의 사그라짐에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일방적인 순종, 맹종은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소멸하는 죽음이 아니라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죽음을 아버지에게 당부한 것이다. 하지만 남의 죽음에는 끝없는 연민의 정을 주체하지 못하듯이 자신의 죽음에도 연민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몸부림도 악다구니도 아닌 처연한 심정으로 죽음을 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흔히 숙연해지고 엄숙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록 비종교인이거나 무신론자라 해도 문득 뜻하지 않게 ‘호모 엘리기우수스’(인간의 자리)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죽음과 대면하는 것을 신불(神佛)과 대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3월 25일 토요일 오전 책을 다 읽고 생각해 보니 10년 전에 돌아가신 김열규 선생의 생전 집필을 2021년 새로 출간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책 뒤에 있는 글 ‘흰 벽 앞에서’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쪽이 넘는 이 글은 김 교수의 큰딸이자, 한국예술 종합학교 영상원 교수이며 영화감독인 소영씨가 아버지와의 추억, 임종에 대해 쓴 것으로, 이것을 담기 위해 새로 편집 출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무렵 경상대 병실에서 아버지를 뵌 것이 마지막이었다. 세 번째 항암 치료 직후였다. 백발의 머리카락 몇 가닥. 그러나 아버지는 유쾌하셨다. 반드시 암을 이겨내시겠다는 결의도 결의지만, 위중한 병을 얻고 보니 여든이 넘은 삶에도 배울 것이 있다고 ‘내가 몇 년간 까불고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병중임에도 밝은 화색이 돌아 나는 별 노력 없이도 고승처럼 보이신다고 버릇없는 농담을 했고 아버지는 하하하 웃으셨다.”
나비가 꽃에 앉듯이 살아 있는 자가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말한다. “죽음이여 교만치 말라!”죽음에게 던지고 싶은 말 한마디 “죽음이여, 거들먹대지 말라!”죽음이 끝내 혐오스럽기만 하다면 삶 역시 혐오의 대상에서 아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쎄 아까도 말했지만 거기가 얼마나 좋으면 하고 많은 사람들 다들 가서는 안 돌아오느냐 그 말일세. 자네 거기서 돌아온 사람이 한 사람이라고 있단 소리 듣기나 했던가.”거기로 갈 날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