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존 러스킨(1819-1901)
빅토리아 시대의 예술비평가로 미술을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거쳐 수필과 비평글을 남겼다.
<근대 화가론> 1부 (1843년)로 인하여 처음으로 큰 주목을 받았는데, 이 수필에서 그는 예술가의 주된 역할이 “자연에 대한 진실”이라고 논하였다. 1850년대부터 러스킨은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라파엘 전파를 옹호했다.
러스킨은 런던 남쪽의 캄버웰 마을 근처 헌 힐 28 (1912년 철거)에서 1823년까지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태리를 위시하여 유럽의 여러 곳으로 많은 여행을 했다.
1836년 옥스퍼드에 입학, 1843년에 학업을 마친다.
판화 등 미술가로 활동했다.
자연의 우아한 모습들을 묘사하겠다던 라파엘 전파의 '자연주의' – "오직 자연만을 그리는 것" –이라는 헌신 선언은 러스킨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러스킨의 결혼은 부인 에피가 밀레이와 결혼함으로 무너졌다. 이 일로 에피는 세간에 추문을 일으켰다.(에피는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친정인 스코틀랜드로 가서 별거 상태였다.)
근대 화가론 1-4부가 있다.
1880년대 후반 러스킨의 건강은 계속하여 멈추지 않고 쇠퇴하였다. 점차 그는 유럽으로 여행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유미주의와 인상주의의 태동과 군림은 러스킨을 당대 예술 세계에서 멀어졌다. 예술의 사회 통합에 관한 그의 사상은 당대 조류를 지배하기 시작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강령과 대조되었다. 다윈을 반대한 보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러스킨의 영향은 전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레프 톨스토이는 러스킨을 두고 “영국과 우리 세대뿐 만 아니라, 전 세계와 모든 시대의 가장 뛰어난 이 중 하나”라고 표현했으며, 러스킨의 사상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보여주고, 그를 엄청 인용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러스킨에 감탄한 것을 넘어, 그의 작품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러스킨은 프루스트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 “프루스트의 예언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후에 간디, 톨스토이, 버나드 쇼 등은 러스킨을 두고 ‘당대 최고의 사회개혁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9. 매튜 아놀드(1822 –1888)
시인이면서 비평가이다.
그는 "시는 근본에 있어서 인생의 비평"이라 생각하여 시를 최고의 문학이라 하였으나 문학 이외에 교육, 정치, 종교도 대상으로 당시의 물질주의와 영국인의 지방적 속물근성을 비판하고 고전적 정신에 의한 교양주의를 추진, 그리스와 헤브라이 정신의 조화를 역설하였다.
매튜 아놀드는 교양론을 펼쳤다.
매슈 아널드는 '교양'(culture)이란 "인간 사고와 표현의 정수"이며, "이성과 신의 의지가 널리 퍼지도록"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매슈 아널드의 교양 개념은 1950년까지 문화적 명제를 확립하였다.
매슈 아널드는 엘리트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어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아널드는 대중들의 현대 사회에 대한 부적응이 '대중문화'로 나타나고 그 성격은 곧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매슈 아널드는 교양의 사회적 기능은 파괴적/분열적 존재를 계도하는 것으로, 곧 천민을 계도하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아널드는 궁극적인 교양이란 '부르주아 문화'를 부흥하여 '대중문화'를 제거하는 것으로, 노동계급에게는 종속과 복종의 감각을 되살려주고, '부르주아 문화'를 부흥하여 중산층을 세련되고 관대한 계급으로 교육하여 노동계급의 귀감의 대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매슈 아널드의 교양론은 문화적 복종을 강조한 사회질서유지를 지향하는 '엘리트주의'적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아놀드는 인생을 위한 문학을 주장한 근대 문학비평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10. 유미주의(唯美主義)
탐미주의(耽美主義), 탐미파(耽美派)와 동의(同義)로, 19세기 중반, 합리주의나 기계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서 미학적 기준은 도덕성·실용성·쾌락 등에 얽매이지 않는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19세기말 유럽에서는, 예술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신조 아래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이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유미주의는 예술지상주의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실용주의적 사회철학과 산업시대의 추악성 및 속물근성에 대한 반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내용의 미보다도 형식적 미의 완전(完全)을 중시했다. 와일드, 포, 보들레르 등이 대표자이다.
순수한 심미적 경험은 그 실재성이나 유용성 혹은 도덕성과 같은 외적인 목적과 관계없이 심미적 대상을 사심 없이 관조하는 것이며, 자율성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 철학에서 유래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목표로 하여 예술 속에서 교훈성을 제거하고 형식적 미학을 중시함으로, 유미주의는 궁극적으로 순수예술을 지향하게 된다.
인생관으로서의 유미주의는 도덕적 금제(禁制)에서 벗어나고, 특히 영국에서는 16, 17세기의 청교도의 엄정주의(嚴正主義) 도덕을 반대하면서 인생을 미적으로 관조하고 즐기려고 하는 에피큐리어니즘(epicureanism)의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를 관조적 유미주의(contemplative aesteticism)라고 일컫는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초탈, 인생으로부터의 은둔, 영국 빅토리아시대에 특히 현저하였던 자기교양(self-culture) 등으로 나아가게 된다.
19세기 미국의 포우(E. A. Poe)와 프랑스의 보들레르(Baudelaire), 영국의 페이터(W. h. Pater)와 라파엘 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 와일드(O. Wilde) 등에서 유미주의는 크게 발전하였다.
11. 월터 페이터(1839-1894)
런던 이스트엔드에 있는 스테프니에서 태어난 월터 페이터는 옥스퍼드 대를 졸업하고, 평생 옥스퍼드 대 교수로 지내면서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
학생시절 페이터는 존 러스킨의 <현대 화가>를 읽었으며, 이는 곧 일생에 걸쳐 예술 연구에 끌리도록 해주었으며 유려한 산문에 대한 취미를 갖게 해주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대변자로서 《문예부흥》을 저술하여 미적 인상의 강렬하고 풍부한 경험을 유일의 목적으로 하는 허무주의적 심미주의를 역설하였다. 저서로는 《쾌락주의자 마리우스》와 《사상적 초상》 등이 있다.(쾌락주의자 마리우스는 이양하가 ‘페이터 산문’이라는 제목으로 무리 말로 번역하였다.)
**쾌락주의자 마리우스
12.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아일랜드의 시인이고, 극작가이다. 유일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와일드는 1854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웨스트랜드 로 21가에서 앵글로계 아일랜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시로서, 교양이 깊었고, 무료 진료소를 운영한 박애주의이다.
어머니 제인 프랜시스카 엘지는 성공한 작가이며, '스페란차'로 알려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였다.
에이스킬렌에 있는 포토라 왕립 학교에 1864년에서 1871년까지 재학하였으며, 포르타를 졸업한 후, 와일드는 1871년부터 1874년까지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고전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1874년부터 1878년까지 옥스퍼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공부에는 무척 게을렀으나 고전학에서는 발군의 성적을 나타냈다.
와일드의 재능이 발휘된 것은 경묘한 희극의 분야, 즉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시시한 여자>(1893), <이상적(理想的) 남편>(1895) 등으로, 그 정점을 차지하는 것이 <진지함의 중요성>(1895)이다. 시극 <살로메>는 영국에서 상연이 금지되었으며 1894년에 사라 베르나르에 의해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와일드는 퀸즈베리 사건이라는 유명한 재판으로 인해 극적인 몰락을 겪게 되고, '막중한 풍기문란'으로 감옥에 수감된다. 이 용어가 영국 법정에서 '비역죄(Buggery Act 1533)'에까지 이르지 않은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1895년에 와일드는 동성애 사건으로 2년간의 노동 금고형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그 후 파리에 나왔으나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도 파탄나며 뇌수막염에 걸려 1900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도리언 그레이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