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백네 번째 이야기, 잠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틀리지 않은 말로 바르게 지적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는 불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고 계신 겟세마네의 시험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시험이었다. 그분은 지금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고 싶은 유혹 받고 있었다. 인류는 죄를 지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선언 앞에 죄인들로 하여 그들의 죄 짐을 지도록 선언하면 그만이었다. 환영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저들로 저들의 책임을 지도록 그냥 놔두면 될 일이었다. 인류로 범죄의 결과를 당하도록 두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결백한 사람으로 서는 것은 그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온 우주에 그 누구도 그런 그분의 선택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은 고통받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기도하도록 명하신 제자들에게 그분은 위로를 기대하고 제자들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저들의 선생님은 지금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다. 만일 그들이 주님과 함께 깨어서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위안을 얻었을까? 비록 그들이 주님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지라도 그분은 기쁘게 고난의 쓴 잔을 기울여 마시지 않았을까?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탓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하셨다.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신 주님은 더 격심한 고통 가운데서 기도하셨다. 온 우주에 홀로 서서 악의 세력을 대항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세상의 운명이 그분이 이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다. 최종적으로 이렇게 기도하신 후에 그분은 일어서셨다. 그러나 너무나 격심한 투쟁에 아무것도 입에 대시지 않은 주님은 기진맥진해진 채로 땅바닥에 쓰러지셨다.
“이와 같은 결정을 하신 후 잠시 일어나시던 몸은 죽은 듯이 땅에 쓰러졌다. 졸도하신 주님의 머리 위에 그들의 손을 부드럽게 대어, 숱한 일반 인생들보다도 더 상하신 그분의 이마를 씻어드려야 할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구주께서 홀로 포도즙 틀을 밟으셨는데 그분과 함께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소망, 693)
세상의 선과 악의 싸움은 더욱 맹렬해지는데 깨어서 기도해야 할 파수꾼들은 어디 있는가? 입으로는 죽는 데까지 가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이들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순간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건만 우리의 교회들과 가정들은 깊은 잠에 취한 제자들처럼 영적 무기력에 휩싸여서 졸고 있지 않는가?
만일 우리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오신다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이제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온다. 우리는 무엇을 결심해야 할까?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전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더욱 깨어서 기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나게 하소서.
주님과 함께 날마다 기도로 연결되어
이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처럼 이기도 또 싸워 이기는 주의 제자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팟캐스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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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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