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894
6월20일[연중 제1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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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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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OENuhXi1E-E
[서울대교구 정수용 이냐시오(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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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재미있게 살 때의 일입니다. 자유롭게 외출 외박을 못 나가던 아이들이었는데, 주간 생활 태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신부 수사들과 동반 외출이 가능했습니다.
저는 주일 점심 식사를 끝내고 나면 습관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아이들 서너 명과 길을 나서곤 했습니다. 너무 많이 데려가면 집단 이탈 가능성이 많은지라, 딱 서너 명만 데리고 나갔습니다.
외출 나가기 전날부터 제 머릿속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아이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것인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어딜까? 영화관? 피시방? 오락실? 노래방? 간식으로는 뭘 사줄까? 피자? 통닭? 아이스크림?
대여섯 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머릿속에 좋은 추억의 사진 한 장 남겨줄 수 있을까? 그렇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비슷한 마음이겠지요.0
보십시오. 세상 부족한 저희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좋을 것을 주기 위해 그토록 애를 쓰는데, 선하신 주님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틈만 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시고,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따라서 너무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고 졸라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련히 생각하고 계시고,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텐데, 그분의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굳게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좋습니다.’ 하면서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기도할 때도 너무 지향에 목숨 걸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니, ‘당신 뜻에 맡깁니다!’하고 외치며 남은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저는 요즘 묵주기도 때 특별한 지향을 두지 않고 바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시간에, 좋으신 어머니 성모님과 함께 좋으신 아들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의 여정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바칩니다.
좋은 시간, 좋은 분들과 산책하는 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의무감에서 숙제처럼 바치지 않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아주 아름다운 기도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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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vSwLPzfbN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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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나를 하늘로 오르게 하는 엘리야의 불마차>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알려주시며 이방인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계속 알릴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오늘 독서도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은 성령을 의미하고 성령은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엘리야가 성령의 불 회오리바람에 들어 올려져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이 지상에서 하늘에 오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땅에 붙들어 매고 심지어 지하까지 끌어내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저와 함께 지내던 루카 보좌 신부가 자신이 처음 가위에 눌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가위에 눌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경험을 말하는데 자신은 그런 경험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가위에 눌릴 수 있을까를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잠들기 전에 가위에 눌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잠자면 가위에 눌린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바로 돌아와서 그날 가위에 눌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잤더니 진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숨도 쉴 수가 없었고 당연히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희미한 두 사람이 옆에서 말하는 게 들렸습니다.
“쟤, 지금 안 자!” 두려운 나머지 발버둥을 쳤고 간신히 깨어났는데 자신이 자기 목을 조르고 있었었습니다. 사실 가위에 눌리고 싶다는 마음은 친구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세상 것과 하나가 되고 싶은 자아의 욕구는 정말 땅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놓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과 하나가 되고 갚은 운명을 맞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가 사고 나서 죽은 곳에서 자신도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여 같은 운명으로 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 희망을 하늘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썩어 없어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하늘로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이 지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그 뜻을 죽이는 게 불입니다. 나무에 불이 붙이면 그 안의 진액이 먼저 빠져나오듯 성령이 오시면 자아의 욕구가 죽습니다.
엘리야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자아를 상징하는 소를 살라버리고 그 밑의 물을 말려버린 것과 같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합니다.
그런데 그 불 회오리바람 가운데 불마차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주님의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정수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 자녀가 가져야 하는 하느님 뜻이 다 들어있습니다. 내가 이 지상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일곱 개만 원하게 될 때 우리는 천사의 도움으로 하늘에 오르게 됩니다. 엘리야가 불 회오리바람과 불 마차를 타고 하늘로 오른 방법이 이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기도의 뜻을 음미하며 바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그 뜻에 하나로 젖어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차라고 생각하고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저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고 호흡을 50번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주님의 기도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 걸립니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하려고 호흡에 숫자를 세면 더 좋습니다. 숨을 끝까지 다 내쉬면 코로 저절로 공기가 배에 차게 됩니다.
이렇게 세포 하나하나에 산소가 들어가듯이 내가 가벼워지고 하늘로 올라가 천국의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몇 번 바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나의 뜻을 불사르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머지는 덤으로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왜 불마차가 불일까?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더 이상 태울 게 없다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태우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사랑에 의해 태워질 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그런데 무엇으로 태울까? 바로 하늘로 끌어 올리려는 이의 ‘뜻’이다. 그 뜻이 나의 뜻을 죽일 때 하늘로 오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당신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왔음을 잊지 맙시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때에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그분의 기운을 북돋아 드렸다.”(루카 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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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음식에 맛을 내는 것을 ‘조미료(調味料)’라고 합니다. 조미료의 종류에는 설탕, 소금, 고춧가루, 식초, 간장, 된장, 고추장, 마늘, 후추, 기름이 있습니다. 미원, 다시다처럼 인공조미료도 있습니다. 캠핑가면 마법의 조미료를 가지고 다니는데 ‘라면스프’가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육수를 낼 때 필요한 복합 조미료를 팔기도 합니다. 음식은 재료가 싱싱해야 하지만, 조미료가 있어야 음식의 맛이 살아납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있었습니다. 강사들은 신앙생활에 중요한 덕목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심, 이상, 은총생활, 활동, 공부, 평신도, 은총생활의 장애, 은총안의 생활,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자칫 단조롭고, 지루할 것 같은 강의가 활력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은 음식에 맛을 내는 조미료와 같은 ‘체험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하면서 교재를 읽을 때는 강사도, 강의를 듣는 청중도 대면 대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담이 시작되면 강사의 눈빛도 빛나고, 청중도 귀를 쫑긋하며 듣게 됩니다. 교재의 내용이 음식의 재료라면, 강사의 체험담은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와 같기 때문입니다. 강사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청중은 체험담에 웃고, 체험담에 울고, 체험담에 박수칩니다.
구약의 예언자 중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어떤 예언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그분들이 체험했던 이야기는 기억합니다. 바알의 예언자들과 싸워서 통쾌하게 이겼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던 아합 왕에게 하느님의 심판을 전했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자 홍해 바다가 갈라진 것처럼 엘리야가 옷을 강물에 내리치니 요르단 강의 갈라졌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신 것처럼, 엘리야도 엘리사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였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것처럼 엘리야가 아주 작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과부와 그 아들이 가뭄이 멈출 때까지 먹을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에게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갔고, 그의 나병이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의 자질, 예언의 종류, 예언의 효과는 잘 모르지만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보였던 표징은 알고 있습니다.
2023년 7월에 실종자를 수색하던 과정에서 숨진 해병대의 군인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사건의 진실을 엄정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해병대의 수사단은 사건의 전모를 조사했고, 바뀐 법령에 따라 조사한 자료를 경찰에 이첩하려했습니다. 그렇게 이첩이 되었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끝이 났을 겁니다. 작년 8월에 경찰에 이첩이 되었다면 지금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첩이 되었던 조사 자료는 회수되었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던 계획도 취소되었습니다. 사건을 조사했던 해병대의 수사단장은 항명죄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났지만 그 사건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사단의 조사 이첩을 막으려는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자료를 회수하며 다시 이첩하는 과정에서 혐의의 대상에 있던 사람들이 빠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누군가의 외압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특검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고,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대통령은 특검법의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앞으로 이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역사에 기록될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등대와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기억하였고,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조직, 제도,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잘못한 이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또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기 전에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 나가듯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역경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고, 유혹에 빠지지 말며, 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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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6,7-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 이는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 안에 세워지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의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듯이, 죄인들이 회개하여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마침내 행사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나날이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거룩한 신성에 참여한다. 이 양식은 하루에 충분한 만큼만 주어지며 내일을 위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이 청원은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이렇게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약속이 담겨있다. 그것을 소홀히 할 때 앞서 한 모든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거부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하신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끌려가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악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세 가지 청원은 영원한 삶과 관련된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되기를 바라는 뒤의 네 가지 청원은 현세의 삶과 관련한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잘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삶으로 이 기도를 살아야 한다. 이 주님의 기도를 삶으로 노력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좋은 방법으로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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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원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굳이 청하지 않아도 그것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분께 청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청원 기도를 드릴 수 있고, 또 드려야 합니다. 청원 기도는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며, 청원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청원에 대하여 응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분과 나는 이 기도로써 어떤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응답받지 못하는 청원 기도는 없습니다.
청원 기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는 청원 기도로 하느님께 바람을 아룁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바람을 들으시고, 당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청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다른 것들이 천천히 떠오릅니다. 그것과 함께 나의 청원이 정말 옳고 합당한지 돌아보게 되고, 내가 청하여야 할 올바른 것을 알게 됩니다. 청원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나의 뜻을 고집하는 기도에서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로 서서히 바뀌게 됩니다. 나의 뜻을 포기하고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때 은은하게 솟아오르는 기쁨도 함께 느낍니다. 주님의 청원에 내가 응답하면서 주님 사업의 협력자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청원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의 한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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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는 이미 주신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7-15)
1)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를 우리보다 먼저 알고 계시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또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먼저 준비하시고, 그것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보충설명과 같은 말씀이 마르코복음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께서 먼저 알고 계시고, 먼저 주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이 있는데, ‘기도’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우리 쪽에서 잘 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그러니 더 간절하게, 정성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것을 안 받겠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따라서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우리가 애쓰는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변화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한 번 결정하신 일을 취소하거나 번복하는 일이 없으신 분입니다. 2) 구약성경에, 인간의 간절한 기도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이야기가 가끔 나오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전지전능에 관한 문제는 아니고, 인간의 눈으로 본 인간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좋은 예가 요나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 옷을 입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3-5.10)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큰 도시에서 요나가 하룻길만 걸은 다음에 하느님 말씀을 선포한 것은, 하느님 말씀을 충실하게 ‘그대로’ 선포한 것이 아니라, ‘대충’ 선포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분명히 하느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선포하라고 시키셨을 텐데, 요나는 멸망만 선포하고 회개는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바라신 것은 그 도시의 멸망이 아니라 회개였습니다.(요나 4,11) 사람들이 회개한 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들이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꾼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과 회개와 기도로 사람들이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에 회개로 응답한 것입니다.>
3)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것을 우리가 잘 받으려고 바치는 기도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는 일과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일과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은,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 일들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일들에 우리도 참여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의 경우도 같습니다. 이미 주신 양식을 잘 받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인데, 잘 받는 방법은 그 양식을 ‘우리’가(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는 것이고, 주님의 기도는 그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용서의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먼저 용서의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그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서 이웃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유혹과 악에 대한 기도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도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유혹과 악을 물리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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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님]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몸소 바치셨고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이는 산상 설교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며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는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바치셨던 이 기도를 바칠 때, 우리는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이시며, ‘하늘에 계신’ 그분께서는 초월적이시고 전지전능하시면서 당신 자녀인 우리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아버지!” 하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습니다. 든든한 아빠, 아버지 하느님께서 굳건히 우리를 받쳐 주고 계시기에 우리는 세상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 앞부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기도 뒷부분은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매일의 양식을 청하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며, 세상 유혹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하느님의 손길을 간청합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자녀인 우리가 나누는 친밀한 대화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천천히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며 우리를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주님의 품 안에 머물러 봅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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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 가르쳐주시며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경계하십니다.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도 마음을 다해 내 삶으로 ‘주님의 기도’를 써내려갔으면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6,9-10)라고 시작합니다. 기도의 출발과 목표는 오직 하느님이시며, 기도의 목적도 삶의 목적도 오직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6,11) 하고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에게서 인간에게로 눈길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배고픔과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에 대한 체험에서 나온 기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양식은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6,12-13)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늘 갈등과 분열을 겪으며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을 읽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죄로 기우는 연약한 육의 경향을 지니고 감각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늘 맞닥뜨려야 하는 유혹이야말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갈라놓는 강력한 실재임을 간파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자신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용서를 청하고,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는 결코 낭만적인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겪는 배고픔과 갈등, 죄와 유혹과 같은 실존적인 상황을 담고 있는 삶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이 겪고 있는 삶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살고 있는 우리가 풀어가야 할 삶의 실마리를 하느님에게서 찾으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연약한 우리는 때로는 기쁘고 삶의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고통을 겪을 때도 있으며, 유혹에 걸려넘어져 영혼의 어둠 한복판에서 서성이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달려가기를 망설입니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답을 주는 인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처절하고 절망적이라 해도 그것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 한복판에서도 하느님의 손을 놓지 않고 그분을 바라볼 때 그분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삶의 고통과 육신의 병고 때문에 비참해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은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저버릴 때이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릴 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주님의 기도는 ‘기다림의 기도’요 ‘희망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다하여 진실하게 ‘아빠’를 부르며,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굳건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희망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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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 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드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 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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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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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6,8~9)
기도할 줄 모르는 당신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삶과 진리는 너무도 가까이 있고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주님의 기도를 사는 데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 생활의 기본이며 바탕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의 3가지 기원, 즉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그리고 아버지의 뜻과 후반부의 4가지 청원, 즉 양식, 용서, 유혹 그리고 악에 관한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전반부와 후반부의 상호 대칭 관계를 통해 그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 악에서 구하소서. 』 ;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악에서 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악에서 구원되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빛나게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 곧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유혹받기 마련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가 필요한 때입니다. 내 삶의 관심과 중심을 아버지의 나라, 하느님 나라의 가치에 둘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 용서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녀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며, 이를 살아갈 때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아멘』 ; 아버지의 자녀답게 용서하고 세상에서 하느님 뜻을 살아갈 때, 천상적 삶과 지상적 삶이 하나로 묶이며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육신적인 양식과 영적 음식을 베풀어 주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보살펴 주실 것을 믿고 ‘아멘’하면서 맡기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심은, 당신의 기도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시고 공유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방법만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사랑과 신뢰의 언어를 당신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꿈, 희망 그리고 이상을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뢰, 우정 그리고 사랑의 일로써 기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끊임없이 사랑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당신을 부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성숙한 사랑의 교류와 태도를 함께 나누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아빠로서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우리의 죄와 한계, 약함을 없애시려는 이상과 꿈을 가지신 예수와의 친교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평화, 용서, 화해와 정의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인간 영혼이 신적 지위로 격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 영혼은 성령에 의해서 변형됩니다. ‘Abba’를 향해 기도하는 것은 아빠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대신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 즉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죄의 용서 그리고 유혹에서 보호를 보증해 주고 충족시켜 주실 것입니다. 일상의 걱정과 근심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 딸로서 자기 자신을 체험할 때 없어집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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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시절로 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등학교 이전이 좋을까요? 아니면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초등학교 때가 좋을까요? 성소에 대해 갈등했던 중고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또 사제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신학생 시절은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나의 과거를 쪼개어 보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는 결론을 짓게 됩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예전에 비해 지금 부족한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나이가 드니 운동 능력도 떨어졌고,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책을 보기 힘들 정도로 시력도 좋지 않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하늘 나라에 가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과거의 시간으로 굳이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나이 들어 할 수 없는 것도 많아졌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할 수 없어.’라며 슬퍼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바라보며 ‘아직도 할 수 있어’라며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너무나 많은 것을 주신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이유는 참 많습니다. 감사할 것이 많아질수록 더 기쁘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대화를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십니까? 감사의 말, 인정과 지지의 말, 기쁨의 말, 긍정적인 말 등을 하는 사람과의 대화가 편하지 않습니까? 만약 계속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부탁만 한다면, 남에 대한 험담과 갈등을 일으키는 말만 한다면, 듣기 싫은 부정적인 말만 하면 어떨까요? 이런 사람과의 만남 자체를 피하고만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는 기도를 통해 어떤 대화를 하십니까?
빈말만 되풀이하면서 진정한 대화를 만들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이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주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면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참 기쁨의 시간을 할 수 있는 것들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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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간절한 믿음의 기도>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고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바람을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하오나 제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시는 것임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믿고 바라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며, 믿고 사랑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성 보니벤뚜라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묵상할 때 감각적으로 무엇을 느껴야만 제대로 기도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감각적인 느낌 없이 기도하는 편이 하느님께 더 큰 봉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감각 없이 기도를 지속함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자기를 낮출 줄 알게 되고 겸손하게 되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중에 감각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면 그런 감각이 자칫하면 그 사람을 부풀게 만들고 자기가 성덕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처럼 느낀 나머지 교만해지고 게을러져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사랑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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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바람>
마태오 6,7-15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바람>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온유와 자비와 평화로
나의 이름을
거룩히 드려내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나의 나라를
곱게 피우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눔과 섬김과 살림으로
나의 뜻을
정성껏 이루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주린 탐욕이 아니라
맛난 밥이 되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날선 단죄가 아니라
너른 용서가 되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검은 유혹이 아니라
바른 길이 되려무나
땅에 있는
나의 자녀들아
나날이 서로에게
거친 악이 아니라
살가운 선이 되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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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기도>
“한결같이, 끊임없이 기도하라”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뿐 아니라 기도에도 우리는 영원히 초보자일뿐입니다. 기도는 기분이 감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위하여, 영혼이 살기위하여,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의지적으로, 의식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심신의 건강에, 영육의 건강에 우선적 수행이 기도입니다. 기도야말로 하느님 마련하신 최고의 명약입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숨쉬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두발로 서서 기도하라고 직립인간이요, 눈들면 하늘입니다. 그래서 하늘보고 땅보고, 기도하고 일하고가 순서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대로 살고 사는대로 기도합니다. 심신의 건강에, 영육의 건강에 우선적 수행이 기도입니다. 나중에 남는 얼굴도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주님은 천국입장시 우리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기도한 얼굴인지 주님을 닮은 얼굴인지 그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을 보니 결정적으로 취약함이 눈에 띕니다. 기도가 빠졌습니다.
“일을 하듯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듯 일을 하라. 이것이 자신의 분야에서 대가가 되는 길이다.”<다산>
기도가 빠졌습니다. 일을 하듯 기도를 하고 기도를 하듯 일을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는 “기도하라, 일하라, 공부하라”입니다. 여기에 “운동하라, 걸어라”를 더하면 완벽합니다.
“장인은 작업장에 있음으로써 일을 이루고, 군자는 배움으로써 도를 이룬다.”<논어>
여기에 하나를 더해야 완벽합니다. “성인은 기도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아 참사람이 된다”고 말입니다. 사람만이 기도합니다. 사람만의 특권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복된 운명의 복된 존재들인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여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사람의 성인이요, 하느님 없이 막살면 광야인생여정중 악마도, 폐인도, 괴물도 될 수 있습니다.
어제 수요일 삼종기도후 바티칸 광장의 수많은 신자들 앞에서 교황님은 시편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였던 시편은 모든 계절에 할 수 있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교향곡(symphony of prayer)’ 같은 시편이요 시편을 노래할 때, 하느님은 성인들의 공동체인 웅대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가 우리와 동반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기도의 일상화, 기도의 생활화, 기도의 습관화에 기도의 교과서인 시편집에 따라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의 수행은 없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밖에 답이, 길이 없습니다. 성서나 교회의 성인들은 모두가 기도의 대가였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기도에 있어선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합니다. 기도에는 신비가, 일에는 전문가, 공부에는 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포부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와 일, 그리고 공부와 사랑의 봉사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인데 도대체 죄를 지으며, 무절제하게 유투버나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낭비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주인공, 엘리야와 엘리사, 그 스승에 그 제자요 무엇보다 둘은 기도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엘리야가 (하느님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일 때, 엘리사는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엘리사는 일생동안 어떤 통치자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기도를 통해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가된 엘리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고맙게도 우리 역시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주님의 전사로 살 수 있는 기도에 관한 참 좋은 가르침을 주시니 바로 주님의 기도요 그에 앞서 필수적 지침을 주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
그래서 때로는 침묵이 좋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깨어 주님을 향해 살아가는 삶자체도 기도가 됩니다. 참으로 다양한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이 다 아시는데 무슨 기도냐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하면서 환상이나 허영의 걷히면서, 무지의 너울이 걷히면서,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본질적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또렷이 드러나는 참나의 모습입니다. 성 베네딕도의 말씀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의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의 간청이 들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 모든 이가 모여있을 때 기도는 짧게 할 것이다.”(성규20,3-5ㄱ)
기도뿐 아니라, 우리의 말이나 글도 사제의 강론도 짧고 순수해야 좋습니다. 바로 오늘 주님은 당신의 기도, 주님의 기도를 통해 기도의 전범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의 기도의 노하우를 공개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단순한, 본질적 삶이 압축되어 있는 보물같은 기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인간의 본질적 필요 모두를 담고 있는 기도요,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기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입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인 하느님이요 인류는 하느님의 한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인류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서로간은 형제자매가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세 청원이 앞에 나옵니다. 늘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아버지 아닌 어떤 세상 돈이나 우상도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향한 세 청원에 이어 지상천국을 살 수 있는 네가지 본질적 필수 사항의 청원입니다. “일용할 양식, 잘못을 용서받음, 유혹에 빠지지 않음, 악에서의 구출” 등 네가지입니다. 주님은 이어 용서 받기에 앞서 이웃을 먼저 용서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일방적 청원만으로는 무책임합니다. 청원에 따른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협력이 함께 가야 합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용서하기 위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악에서 구함 받기 위해 우리의 최선의 노력 또한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의 삶”을 살라는 것이요,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입니다.
그러니 날마다의 미사전례기도중 일용할 양식인 성체를 모시기전 온마음으로 정성껏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새삼 주님의 기도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며 거행되는 공동미사 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예수님, 성경, 미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기도가 실현되어 우리 모두 지상천국을,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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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기도를 잘하려면>
“너희는 기도할 때에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은 어제 말씀에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제 단식과 자선과 기도에 대해 가르침을 주시면서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만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에 있어서 빈말이란 어떤 것이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빈말을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빈말이라면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만나고 싶은 마음 하나도 없으면서 한번 만나자고 하는.
빈말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면 하느님께 어떻게 빈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진심인 사람은 이럴 수 없고,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말, 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관계부터 재정립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씨불여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진심으로 대하고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하는 분으로 재정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재정립해야 할 관계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 관계는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데 영광스럽게도 우리도 그런 관계를 맺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다니!
구약에서는 하느님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게 했는데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다니!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도 저는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게 해주셨으면 얼마나 더 좋을까 욕심도 내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
이것이 욕심이긴 하지만 제 생각에 이런 욕심은 괜찮을 것이고, 주님도 우리가 감히 이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하실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느님이 더 따듯하고 푸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아버지 나라가 오시고, 아버지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왜냐면 기도 특히 관상 기도는 말보다 만남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하면 말도 중요하고 말도 많이 나누겠지만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아무 말 없어도 좋고 그것이 많은 경우 더 좋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말하기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남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의 사랑에 잠기기 위해서 만나는 것일 겁니다.
그러므로 거듭 강조하지만 만나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기도가 명상이나 독백이 되지 않고, 그다음에 대화를 하든 청원을 하든 뭐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바꾸고, 오늘 강론은 이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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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6,9)
<주님의 기도!>
오늘 복음(마태6,7-15)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7-9)
이어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이자, '하느님께 드리는 청원기도의 완전한 모범'입니다.
기도를 할 때, 그리고 무엇인가를 청할 때, 먼저 하느님의 것들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기도를 바치고, 그 다음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것도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것을 청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욕심을 드러내지 말고 오늘 필요한 양식만 청하고, 내가 먼저 너를 용서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청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곰곰이 살펴보면, 너를 용서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바칠 수 없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본적인 정의'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대화'입니다. 하느님과 대화는 솔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유아적(幼兒的)인 대화, 곧 내게 필요한 것만을 청하는 그런 대화를 피해야 합니다. 먼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드리고, 다음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완전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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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rapX_oBAZ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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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세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향하는 것이
참된 기도입니다.
아버지를 뜨겁게
만납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찾습니다.
아버지께로
흘러가야할 우리의
모든 마음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통해
기도의 가족이
됩니다.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되어
만들어가는 삶의
모든 관계입니다.
아버지 사랑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용서와 양식을 얻습니다.
기도로 아버지
하느님을 점점
더욱 닮아갑니다.
사람의 시간은
기도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아버지로 시작하여
아버지께로 다시
들어 올려지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가장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을
기쁘게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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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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