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 에세이 -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약 30회 정도 계속 됩니다
쌍둥이
나는 한국전쟁이 끝난 5년후인 1958년 7월 28일(음력) 전남 장성군 서삼면 송현리 해평이라는 시골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 뒤로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논들이 펼쳐졌다. 그 너머로 강이 있고 강을 따라 호남선 기차가 오고갔다. 기차는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다.
아버지는 최백준(崔伯埈), 어머니는 배양순(裵良順)이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기도 하고 면 서기 일도 하셨다. 아버지는 시골마을에서는 물론, 집안에서도 지식 있는 분으로 대우를 받았다. 해방 전 서울에서 상업학교를 다니시기도 했다. 당시 마을에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나는 마을 사람들과 친인척들이 마을과 집안의 대소사를 아버지와 상의하는 것을 많이 보며 자랐다.
어머니는 자애로운 분이었다. 몸은 약하셨지만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자식들을 기르고 아버지에게는 순종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은 광주 광산구로 편입된 광산군 비아면 수문리라는 곳에서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수무니댁’으로 불렸다. 어렸을 적 외가집을 자주 갔는데 그곳은 빨간 황토밭에 수박, 참외, 무, 배추, 고구마, 감자를 많이 심었다. 내 고향 장성은 주로 논농사를 위주로 했는데 외가집은 밭농사도 함께 했다. 외가집은 참외와 수박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위로 딸 셋을 낳았다. 아버지는 장손이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장손 집에 시집와서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으니 다른 여자를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으로서는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 어머니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집안에 경사가 생겼다. 쌍둥이 남자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5분 먼저 형이 나왔고, 이어서 내가 나왔다. 당시는 어머니 뱃속에 쌍둥이가 들어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지금은 초음파로 아들인지 딸인지까지 아는 세상이지만, 당시로서는 배속에 쌍둥이가 들어있어도 몰랐다. 먼저 나온 형을 수습하고 있는데 또 하나가 꿈틀거리며 나오더란다. 그게 나였다. 급히 옷가지들을 추가로 준비하고 읍내에 가서 분유를 사오고 했단다. 아버지는 5분 정도 늦게 내가 나왔다고 하고, 어머니는 10분 정도 내가 늦게 나왔다고 한다. 어머니는 출산의 고통에 계셨을 테니 아버지 말이 맞을 것 같다. 아무튼 나는 ‘5분형’을 둔 차남으로 태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집 마당의 감나무 정기를 받아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우리집 마당 오른편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 위쪽에 아름드리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였다. 참 신기한 나무였다. 그 감나무는 항상 우물을 그늘로 덮어주었다. 어렸을 때 등을 한쪽 나무에 대고 팔과 발은 앞쪽 나무를 누르며 나무를 오르며 놀곤 했다. 그런데 그 감나무에 어떤 정기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외가집에도 쌍둥이들이 많았다. 외삼촌도 쌍둥이가 있고, 친하게 지낸 외사촌 형도 쌍둥이고, 그 외사촌 형이 낳은 아이들도 쌍둥이가 있다. 유전적 요인이 있는 것 같다. 쌍둥이는 모계 유전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을은 경사가 났다. 백일에는 시루떡을 2개나 하고 고기를 삶아 온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제 다른 여자를 들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쌍둥이를 낳은 후 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더 두었다. 모두 3남 4녀 7남매였다. 당시에는 8남매, 9남매도 수두룩했다.
내가 태어난 해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자라면서 부모님들로부터 한국전쟁 때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산속으로 피난을 가던 일, 누구 아들이 군대 가서 죽은 일, 누구는 빽을 써서 군대에서 빠진 일 등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당시만 해도 한국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출생신고에도 지혜를 발휘했다. 또 전쟁이 나고 군대를 같이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형은 태어난 해(1958년)으로 신고하고, 나는 한해 늦은 1959년생으로 신고했다. 물론 생월 생일은 같다.
형과 나는 일란성 쌍둥이였다. 아기 때 사진을 보면 나도 내가 누군지 분간을 못하는 사진이 있다. 기저귀를 차고 우물가에서 찍은 가족 사진이 있는데 아버지가 안고 있는 아이가 형이고,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가 나일 것으로 추정한다. 어떤 사진은 앞 가슴에 달고 있는 이름표를 보고 알아보는 경우도 있다. 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되면서 얼굴이 달라졌지만, 대부분의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은 잘 분간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오는 순간 확연히 구분되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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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 쌍둥이 형은 광주에 있는 무등중학교를 다니고, 나는 숭의중학교를 다녔다.
쌍둥이에게 먹일 젖이 부족했다. 그래서 장손인 형에게는 어머니 젓을 먹이고, 나는 분유를 물에 타 숯불에 데워 먹였다고 한다. 시골마을에서 분유를 먹이는 일은 돈도 들고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형은 입맛이 까탈스러워 분유를 먹지 못하고 엄마 젖만 먹었단다. 나는 분유도 잘 먹고 젖도 잘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외가집에서 나이 많은 누님이 와서 개구쟁이 쌍둥이를 키우는 것을 도왔다. 위로 여자아이 셋에다 남자 쌍둥이 아이를 기르는 것이 엄마 힘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주로 나를 업어 키운 그 외사촌 누나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지만 그때 쌍둥이 업고 키우는 일을 생각하면 한없이 즐거워하신다. 한때는 나를 업고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포대기에 업혀있던 내가 빠져나와 우물로 빠져 급히 우물 속으로 들어가 건져낸 적도 있다고 했다. 어린애가 우물에 둥둥 떠있었단다. 우물은 바가지를 손으로 들고 허리를 구부리면 물을 기를 수 있는 정도였다. 만약 깊은 우물이었다면 큰일 날뻔 했다.
쌍둥이로 자라면서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일이 많다. 어른이 될수록 얼굴은 달라지는데 가까운 친척들도, 친구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어머니는 쌍둥이 형제에게 항상 똑같은 옷을 입혔다. 쌍둥이로 살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한이 없다. 쌍둥이 형 아이들이 내가 아빠인줄 알고 무릎위에 앉아 있다가 진짜 아빠가 나타나자 왕 하고 울던 일, 장모님이 사위를 혼동하던 일, 내가 알지 못하는 형의 상사들이 나를 본 후 인사성이 없다고 형을 나무랜 일, 열차 안에서 만난 형 친구를 내 동창인줄 알고 밤새워 이야기하던 일 등등...
나와 형은 쌍둥이지만 인생행로는 달랐다. 중학교만 다르고 초등학교, 고등학교는 같은 곳을 졸업했다. 그러나 형은 고등학교 졸업후 은행에 취업을 하고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사주팔자를 믿지 않는다. 5분 차이 쌍둥이면 사주가 같으니 팔자가 같아야 하는데, 인생 행로가 전혀 다르다. 나는 두 차례나 감옥에도 갔다 오고 삶에 굴곡이 많았다. 형은 은행원을 거쳐 금융감독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차남인 나와 달리 장남인 형은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했다. 제사, 집안 어른들과의 관계, 가족들을 챙기는 일 등. 형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운동권 생활을 할 때 용돈을 챙겨주는 등 나를 도왔다. 인생 행로는 달랐지만 나를 이해해주고 내가 하는 일을 격려해주었다. 형은 생각이 깊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 노력한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형제나 친구가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나에게 형은 그런 존재다. 나는 5분차 형을 존경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