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리 공부하다보니 계수나무를 생각하며
이것저것을 그기에 관계된것을 수필형식으로나마 기록해본다....
계수나무 하면 우리같은 세대를 격은 신분들은 우선
반달 노래가 생각날것이다..
노래를 만든계기는 1920년중반 한반도 조선어린이들이 부를노래가 없었다고 한다.
꿈과 희망을주기위해서 라는데 .. 그럼 한반도에 아주 유명한 나무인 소나무나 전나무 등
자생하는 것으로 소재로 만들어야 할것인데... 계수나무 의 자생지는 바로
중국어로는 구이린이라고 불리는 이 곳

이 바로 계림 지역이 계수나무 원산지이다... 어찌 위치가 한반도의 전주와 비슷한거 같다.
중국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경을 베트남과 밀접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국경이 인접한 곳에 화산구가 있는데 그 곳이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수도인 북경에서는 상해와 곤명, 광저우를 바로 연결하는 직행 열차가 운행 중이네요.
북경에서 그 열차로 30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 하노이 까지 가 아마도 안남도호부 가 설치된 지역이기도 하다,
이 안남도호부는 중국사서에 사이가 있었는데 남쪽을 남만 서쪽을 서융 몽고지역인 북쪽을
북적 동쪽을 동이 라고 불리웠다.
두산 지식백과
윤극영
[ 尹克榮 ]
출생-사망 | 1903.9.6 ~ 1988.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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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1917), 경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를 졸업하였다(1920).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경성법전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하고, 일본의 ‘도쿄음악학교’로 유학을 가서 작곡과 성악을 공부하였다. 도쿄 유학 시절에 홍난파, 방정환 등을 만나 교유하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소파 방정환을 만나 우리 민족 어린이들이 일본 노래만 불러 장래가 어둡고 불쌍하다는 말을 듣고 민족 어린이들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였다. 1923년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색동회>를 조직하고 ‘어린이’(‘작은이’보다 어린이가 좋다고 판단)라는 용어를 정식 사용하고 어린이 날을 제정하였다. (색동회 발기인 : 방정환, 윤극영, 진장섭, 조재호, 손진태, 정병기, 정순철)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에서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당시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확산되자 귀국하였다.
부친의 도움으로 자택에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음악공부방을 만들어 음악 공부를 계속하면서 어린이들을 모아 음악을 가르쳤다. 이들을 모아 ‘다알리아회(합창단)'를 조직하여(1924. 8) 음악을 확산시켰다. 1924년 어린이들이 설날에 일본 음악을 듣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설날>을 작사 작곡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 할 수 있는 <반달>을 작사 작곡하여(1924. 9) 확산시킨 결과 큰 호응을 받아 빠른 속도로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한국 노래를 탄압하던 일본인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윤석중이 지은 <고드름>에 곡을 붙였다. 다알리아회에서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아동 창가극을 공연하여(1925. 3) 크게 성공하여 여러 곳에서 초청하여 공연을 하였다.
1925년 간도로 넘어가 동흥중학에서 교사 활동을 처음 시작하였다(1926). 거기에서도 작곡 활동은 계속하여 윤석중이 지은 동시 <우산셋이 나란히>에 곡을 붙였다. <고기잡이>는 직접 작사 작곡하였다. 광명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오래하였다. 1935년에 서울로 돌아와 잠시 있다가, 1936년에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 생활하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반달> 노래가 일본 방송국에서 애창되고 있음을 알고 도쿄중앙방송국을 찾아가 처음으로 저작료를 받아 생활하였다. 레코드사의 도움으로 무랑루주에서 가수 겸 제작자 역할을 하여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다시 만주 간도를 거쳐 하얼빈으로 가서 평소 희망하던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하얼빌 예술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기가 되어 일본인의 강요로 오족협화회에 들어가 탄압을 받다가, 일본 패전후 다시 공산당의 탄압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귀국하였다(1946). 1947년에 노래동무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졸업가>를 작곡하였다. 동시와 동요를 계속 창작하고 희곡 등에도 관심을 가져 문학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제1회 소파상 수상(1956),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추대되었다(1963). <색동회>를 부활시켜(1969) 제4대 회장을 역임하였고(1973~74),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다(1976). 이상과 꿈속에서 정치적 혼란기에 유랑과 방랑의 생활을 많이 하였으면서도, 조국을 잃은 어린이들의 꿈을 위해 끊임없이 동요 동시를 창작하여 어린이 문화활동에 평생을 바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극영 [尹克榮] (두산백과)
위의 두산백과 내용을 음미 해보면 조금 의아스러운 내용이 나오길레 지적해보자 한다.,
우리가 알기론 일제 치하에 조선말을 지우고 일본어를 가르치기위해 언어탄압이 대단했다고 알고있다.
이름까지 개명 화 하여 황국신민 이 되기를 강요 했다고 알고있는 현 식민지 상황에서
우리말로된 노래를 한곳도 아닌 여러개를 작곡하여 어린이에게 노래를 가르쳐 전국에 동요가 퍼졌다고 한다,
그 노래가 일본방송국에 소개되어 저작료 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 우리가 알고있는 탄압은
어느정도인지 헷갈릴정도다,.. 위의 내용이 틀린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것이고 우리가 선배들한데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사실이 틀리수도 있을것이다..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았을것이다 ,
대단히 심각하게 탄압을했다면 민중이 들고일어나고 여기저기 이 땅에서 독립운동하였을것이고
그 역사적 항거 기록이 수두룩하게 남았을것인데 실제는 모두 중국땅에서 항일운동사가 전해지고
그 현장 자료도 모두가 중국에 적을두고있다... 는 것은 이 한반도에서는 생각만큼 심하게
일제가 탄압을 하지않았다는 논리가 증명되는것이다.
소수만 중국을 대륙조선사를 연구하는 이들만 이 위의 글 내용을 당연시 할뿐이다.
내역시도 중국조선을 이좁은 한반도에 옮기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여기로이주하여 정착도 하기전에
탄압은 오히려 그 대작업에 걸림돌이 될뿐이기 때문이다.
제 아는 지인이 한반도 전주가 고향인 사람이 중국 계림을 방문하며 쓴 기행문이 있서 여기 중국 전주와 관계된
부분이라 잠깐 일부분만 소개 해보기한다.
호객하는 한 아주머니가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계림에서 양삭까지 배를 타고 가야 해.”
“그런 소리 마쇼. 다 알고 왔어.”
“아니야, 정말이야. 당신이 모르는 거야. 꼭 배를 타고 가야해.”
“아니, 이 아줌마가 정말로! 내가 내 길을 가겠다는 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가까스로 호객꾼들을 떨치고 터미널에 도착하자, 마침 아침 7시 첫차가 대기하고 있다. 요금은 17위안이다. 17위안 가운데 2위안은 보험료다. 계림버스터미널은 낡았다. 특히 화장실은 발을 조심스럽게 디뎌야 할 정도로 지저분하다.
버스를 올라타는 데 바로 옆 버스 창문에 내 고향, 전주(全州)의 지명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다.

계림에서 멀지 않는 전주로 가는 버스다. ‘전주’라는 두 글자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다. 몇 년 전 전주의 모 방송국에서 중국 ‘전주’를 특별 방문하여 취재한 적이 있다. 중국의 전주 근처에 ‘백제(百濟)’라는 마을이 있고, 심지어는 ‘금산사(金山寺)’라는 사찰도 있다고 한다. 한국의 금산사는 전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대찰이 아닌가. 지명이 이렇게 똑같다 보니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송국에서 특별 취재반을 구성하여 중국의 전주를 방문한 것이다.
‘혹시 후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와 전주를 그리워하여 같은 지명을 쓴 게 아닐까?’
지금도 한국의 일부 전주 사람들은 이런 의문을 품고 있지만, 학술적으로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걸로 안다. 어쨌든 무벽과 나는 마치 고향 가는 기분에 들뜬 것처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계림 시내는 계수나무 천지다. 타원형으로 생긴 우아한 나무다. 잎이 작고 귀여우며 작은 도토리만한 노란 열매가 길가에 널려있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도로 양편에 희한하게 생긴 올망졸망한 산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그리 높지도 크지도 않는 삼각형 형태 또는 타원형 모양의 산들이 평지에 들쑥날쑥 올라와 있다. 어떤 것은 영락없이 내 고장, 진안 마이산이다. 계림의 산세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마이산 수 천여 개가 연이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암마이산과 숫마이산, 두 봉우리로만 이루어진 마이산을 한국의 절경 가운데 하나로 꼽는 데 시비를 걸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계림은 이런 마이산이 수 천여 개가 나란히 있으니 더 이상 무슨 필설의 힘이 필요할까. 그래서 자고로 중국에는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풍광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중국 제일의 산수의 극적인 표현인 ‘갑(甲)’ 자는 역시 계림에 양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림지역에서 가까운 양삭

흥평에서의 유람선 투어가 계림 여행의 백미다. 중국 돈 20위안짜리 지폐 뒷면의 멋진 그림이 바로 흥평 이강의 풍경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마의산 이 아닌가 ....
중국의 전주라는 곳에서 백제 가 있고 전주에 금산사 가 저기 중국 전주에도 금산사 가 있다고 하는데 어디 이뿐인가..
중국 지역지명이 최근에 변경된것은 찾기 힘들지만 옛이름 그대로 사용하는곳은 쉽게 찾을수가 있다.
중국의 역사적 모든 지명이 한반도로 수평이동한 느낌이든다...
그리고 위에 설명에 안남도호부를 애기를 하였는데 희안하게도
지식백과에 안남도호부가 두곳이나 된다 , 그러나 그 위치는 다 한곳을
말하는데 웃겨도 너무웃긴다....한국의 안남도호부와 중국의 안남도호부 이걸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한국의 반도역사관 을 가진 사람에게 묻고싶다... ?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역사 > 고려시대사
고려시대의 지방행정기구. [내용] 시기에 따라 소재지의 변동이 있다. 고려 태조가 936년(태조 19)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전주(全州)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
중국의 안남도호부
안남도호부 [安南都護府]
두산백과 행정구역 및 옛지명 > 외국행정구역 및 옛지명
중국 당(唐)나라 때 변경(邊境)을 통치하기 위하여 두었던 6도호부. 그 소재지는 현재의 베트남 하노이 지방이며, 소관지역은 통킹에서 베트남 북부에 걸친 평야지대의 주현(州縣)을 통치하였으며... 더보기 위도상 같은곳을 말하는데 타이틀만 두개 로분류 했다고 봐야 한다....
첫댓글 윗 두 개의 안남도호부 어느 학파들이 거짓말을 하는것인가 ?
훈민정음에 나오는 나랏말싸미 중국에 달아 .... 이부분 에 대해 반도역사계는 왜 말을 못하는가 ?
세종대왕이 중국(중국대륙의 중앙지역) 황제가 사는곳이라고 언해본에분명히 적혀있는데 그것이 위조인가요 ?? 훈민정음이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중국황제가 세종이면 이 한반도에 우리 세종은 어디갔는가요 ?
결론은 당나라가 바로 고려 라는 증거아닌가 ?
안남도호부 지역중 최대상황일때 표시인거 같은데 지역은 시대적 배경에따라 확대또는 축소가 되었을것이다.
확신한 지역은 하남성 과 그 밑에 베트남 상부지역은 확실하며 ...정약용이가 유배지 가 사서에는 월남 즉 하노이지역을 말한다.. 그지역에 아직도 정약용의 저서가 산재해있고 정약용과 관련된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고 전하며 ... 호치민 시절에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광팬이라고 할정도이다라고 소문이 자자 하다.,
하긴 그 목민심서 주내용이 모든땅은 국가가 수매하여 백성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자는 즉 사회주의 이론이니그럴만도 하다.
지도상에 고구려 라고 글자가 바로 백두대간 임 ......... 한반도에 나오는 조그만줄기가 백두대간이라고 하는데 대간이라는 용어는 그렇게 작은곳을 말하는게 아니다. 저 지도상 麗려 위치상 아마도 오늘의음산 즉 백두산 이며 장백산이다.
그리고 저기 음산에가면 반드시 광개토대왕 경계비가 있을것이다. 찾아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백두대간 위쪽이 바로 북부여 이며 ... 그 쪽대부분이 여진족 이고 근현대에 와서는 청나라 지역이다 ....
@은하철도99콘 정확한 위치와 설명 잘읽었습니다
이런 증거가 속속 들어나도 반도강단 사학자
들은 계속 부인할까요
이건 증거가 아닌데도 증거는 안내놓고 엉뚱한것만 내놓네요. 도쿄에 코리아타운이 있는데 그럼 일본은 한국영토이네요. 당나라와 고려는 시대도 다른데. 그리고 전에 중국 손문이 조선인이 한말에대한 대꾸는 없네요
훈민정음에나오는 중국은 어디를 말하며 그 중국이라 곳에 대통령은 누구였던가요 ?
@은하철도99콘 중국 명나라 중국은 선출직인 대통령이 업구요 주석이라고 하지요
@철이와미애 철이님 ㅎ 훈민정음에 나오는 중국이라는 글자가 중국명나라 를 말한다 로 해석하시는모양이군요 ?
님 논거에 대입해봅시다 ....
세종대왕이 우리말이 서로 달라서 중국명나라 까지 전달되니 중국명나라가 이해가 불가하니 말이 잘통하기위해서 한글을 반포한다 로 해야 하나요 ? 아니면 기존역사학에서는 중국명나라가 상위국으로 배웠지요 ... 한글은 명나라가 예전에 사용하니 우리도 명나라를 따라서 한글을 배우자 이겁니까 ? 이게 지금 말이되는 논리인가요 ?
상위국을 위해 상위나라를 배우려면 명나라가 사용하는 중국어를 배워야 맞는말인데 압뒤가 전혀 맞지가 않는군요 ,,,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한번 해석해보세요 ....
당연히 말이 다르니 새로운 우리문자가 필요하지요 어려운 한문을 쓰니 일반백성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훈민정음에 나오니깐요. 중국과 조선은 다른나라라는게 정확히 입증됩니다 명나라는 한글을 알필요가 없구요 조선이 불편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억지논리좀 그만하세요 중국에서 한글을 왜쓰냐구요 답답합니다. 주장을 하려면 근거좀 내놓으세요. 그리고 손문이 중조선인이라고 한거에 대해선 역시 아무말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