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카 대왕의 연인을 기린 산치대탑<제3일,불기2547년 1월 일요일>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현장으로 되돌아 보고
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일까?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보고 듣고 느낌으로 직관할 수 있을까?
추위를 느끼면서
보팔역에 03:10 새벽에 도착했다.
20분 거리의 아쇼카 호텔에 도착했다.
당초 4인 1실의 방을 예약 했다는데
방이 없다니
너무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고,
새벽에 잠시 쉴 곳조차 없다는 것이
인도에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하니
할 말 조차 막히고 말았다.
06:30산치를 향해 버스는 출발했다.
새벽의 찬공기는
난방 시설없는 버스의 내부를
더욱 쌀쌀하게
냉기가 감돌았고,
비포장에 울퉁붍퉁 튀어나온 길바닥은
차속의 일행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더니
차츰 익숙 해지면서
체증이 내려 앉는다고 고통을 이겨내는 것 같았다
흔들리고 어지러운 차속에서도 현지 가이드의
간간한 풍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법사님의 불교미술에서
아름다운 조형물에 관한 강의가 있었다.
08:20
산치대탑 입구에 당도했다.
안개 낀 둔석에 아련히 모습을
내미는데.
우뚝 솟아 내려다 보고 있는 탑을
바라보며 비탈진 길따라 오르다 보니
어느새 운무(雲霧)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음의 창을 열고 눈과 귀가
되어 바라본 대탑!!!
감탄의 소리와 함께
미미한 중생을 압도함 아찔하게
눈앞을 가렸다.
그다지 높지도 않은 넓은 언덕의 주변에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위엄과 존엄의 상징앞에 간단한
예배를 올렸다.
산치의 대탑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1818년 영국 지병대의
'테일러'장군이었으며,
1912년 영궁의 '죤 마샬경'에 의해
발굴작업이 시작되면서
이 스투파의 기다부(基壇剖)
를 제외하고는 거의 허물어진 상태였으나
두차례의 복원 작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얻었다고 하며
스투파(stupa)란'흙을 쌓아 올린 것'이라느 뜻의
산스크리트어로 솔탑파(率塔婆)로 음역하며,
스투파는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묻고
그 위에 돌이나 흙으로 쌓아 올려
만든 무덤으로, 그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예배의 대상이나 공덕을
쌓는 종교적 행위의 하나로 바뀌어 갔다.
일행이 찾은 곳이 제1스투파로 산치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이며
상징 조형물이다.
높이가 16m, 지름이 37m로
산치대탑이라 불린다.
1번대탑에서 북동쪽으로 45m쯤 걸으면
제3스투파가 있다.
높이가 15m, 지름이 8m의 아담한 탑으로,
이 탑에서 부처님의 큰 제자 두분인
'사리푸트라'와 '모드갈랴야나'의
유공이 1851년에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지금은 유골을 모시기 위해 스리랑카 스님들이
탑 옆에 자그마한 사원을 세웠다.
산치 언덕에서 서쪽으로500m 밖에 제 2스투파가 있다.
높이가 7m정도의 소규모 탑으로
부처니의 10대 제자중'아난다'의
유골을 모신 탑이라는 전설이 있으나
분명치 못하고,
각양각색의 동물과 꽃, 사람의 형상이 어우러진
원형 돌을 새김에서는 옛 인도인들의 생명력과
상상력이 그대로 묻어 있다고 한다
.
제 2,3탑을 직접 보지 못함이 아쉬웠다.
탑의 조형적인 아름다움과 웅장한 규모에 있어
세계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산치대탑!!!
나지막한 언덕 위에 거대한 반구를 연상이나 하듯
마치 바라때를 엎어 놓은 듯
둥그스럼 했다.
원주형(原註型)의 전형적인 인도 스투파로
걷은 벽돌로 쌓아 올렸고
원형의 기단 위에는 반주형의 탑신을 놓았으며
그 위에는 평두(平頭)라 불리는
난간 모양의 사작형 울타리를 담장처럼
둘려 있었고, 맨 꼭대기에는
우산 모야의 덮개인 산개(傘蓋)와 산간(傘竿)을
세워 놓았다 그리고 기단과 탑신이
접하는 중력에는 빙 돌게
길이 나 있으니 둘게에는
난간으로 통로를 돌며
참배객들이 돌면서 예배를 볼 수 있게
배려를 하였고 난간은
이중의 돌벽으로 다듬었다.
기단부 아래에는 돌고 만든
울타리와 동서남북4개의 문이 인상적이었다.
토라나(torana)라고 하는 이 탑의 문에는 양쪽 기둥을
연결하는 세개의 대들보가 삼층으로 가로 놓여 있어
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느낌을 가졌으며,
탑문과 들보 표면에 새겨진 여러가지 형상의
부조물에 나의 시선은 멈추고 말았다.
부조물은 부처님의 일대기와
전생 설화인 '자타카', 그리고 아쇼카 왕의
행적을 표현 했으며, 전생담을
형상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부처님이 전생에 행한 인욕행을
새긴 부조느 광대무변한
깨달음의 세계를 잘 보여 주었다.
대탑을 세울 기원전3세기 초반경에는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하는 행위를 금기(禁忌)로 여겼는데,
지고하신 깨달음의 상징을 형상화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를 불교 미술사에서 무불생 시대라고 한다.
부처님의 모습을 직접 묘사하지 못하고
고도의 상징과 은유로 표현했으니,
연꽃과 흰 코끼리는 부처님의 탄생을 보리수는
깨달음을, 법륜(法輪)은 출세간의 가르침을,
불적(佛寂)은 부처님의 임재(臨齋)를,
탑은 열반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북인도를 중심으로 인도 각처에
남아 있는 '아쇼카'의 돌 기둥은
불교성지의 소재지를 나타내며,
순례객들의 길잡이
구실도 해오고 있다.
대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사자상이
인도의 국장(國章)으로 채택된 것과
대탑3의 문위에는 불자(佛子)를 든
야오샤(野次)를 세웠다.
이 모두가 부처님의 형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발길을 돌리기에는 찡하게 울리는
가슴을 억누르기에 힘겨웠으나
하직의 예를 갖추고서야 걸음을
옮길 수 가 있었다.
마을이 있는 도로에 당도 했다.
늦은 아침시간10시가 넘었으나
안개낀 마을과 길, 그 길에서는
소떼들이 몰려 오고 있었다/
소몰이군 2-3명은 수십마리의
소들을 길 가운데로 멋대로 앞으로 내 닿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인도 사회의 풍물의 한 단면을
남기고자 모두가 사진 촬영에 바쁘게 움직인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에는 이발소도 많았고
이발소는 문도 없고 의자 1-2개 장식이니
소품이니 볼 수 없고 이발 도구 몊 개가 고작이었다.
신고 있는 신발이라는게
대부분 우리가 말하는 슬리퍼가 대부분이었다.
점심때가 늦은 시간에'하드'마을 (휴식마을)의
한 식당에 들렸다.
주로 화물 자동차의 기사들이 쉬면서 식사하는 곳이라고 하나
긴 의자 몇 개에 허수름한 탁자 몊개가 전부였다.
이곳에서 준비해간 컵라면과
호텔에서 제공된 빵으로 식사를 해야 했다.
언제 모였는지 수십명의 아이 어른들이 몰려 들었고
그 속에는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경찰까지 한데 어우러져 우리 일행과 사진 촬영도 했고
라이터 선물을하기도 하면서
웃으속의 한때르 보낼 수 있었다.
마을 있는 곳에는 힌두교의 기도처가 곳곳에 많았고
언제나 가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하며
기도후에는 이마에 붉은 점을 찍어 주었다.
'완타프'마을아라고 하는데 장날인지.
뭐 그리 사람이 많은지
그리고 길 자우에는 온갖 물건들이
올망졸망 늘어 놓고 손님을
손짓했고 사람들은 우왕좌왕 할뿐 차가 움직일 수 없게
겨우 통과를 해야 했다.
우리네[ 옛 시골 장터를 방불케 했으나 그래도
우리의 옛 장터는 정서적인 멋과 맛이 있었으나
이곳은 그런 향수와 향기를 볼 수 없었다.
긴 시간을 달렸으나 속력을 낼 수 없는 버스는
밤 9시경에 도착 예정이었으나 더 늦을것
같다고 하니 이곳의 도로 사정이
어려우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0시간 넘게 차를 타고 도착하니 밤 9시50분이었다.
홀리데이(HOLIDAY)호텔104호실에 들었다.
상현의 달빛은 참가운 밫으로 여행자의 마음을
녹여주지 못했고 방마져 냉기가 엄습하고 보니
"그래 정말 그런가 보다 하는 말들이 생각 나면서
몸의 온기를 찾았다.
여행3일째 밤에 처음오로 넞은 시간이지만 한 곳에
짧은 시간 이짐나 지난일 앞으로의 일들을 나누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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