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니그로 리그 이야기
2003.9.22.월요일
딴지 야구부
메이저리그 30개 전구단에 걸쳐 영구결번으로 지정된 번호가 있다. 1947년 다저스 소속으로 데뷔하며 메이저리그의
인종장벽을 허문 주인공,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이 달았던 42번이 바로 그것이다(결번지정 당시 마침 42번을
달고 있던 모 본, 마리아노 리베라 등의 선수들은 예외로 인정받았지만, 그들이 은퇴하고 나면 이제 메이저리그에서
42번으로 기억될 선수는 재키 로빈슨 단 한명뿐일 것이다). 또한 로빈슨은 사상 최고의 2루수 가운데 한사람으로 인
정받을 만큼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처럼 위대한 로빈슨도 빅리그에 올라오기 전에 활약하던 리그에서는 '2류선수' 취급을 받았다는 사실. 그
리그는 다름아닌 '니그로 리그(Negro League)'... 당시 메이저리그를 넘볼 수 없었던 흑인들이 독자적으로 차린
리그였다. 1920년 창설된 이래 로빈슨의 빅리그 진출을 계기로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까지 약 30여년간, 니그로 리
그는 흑인선수들을 위한 최고의 무대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로빈슨처럼 이곳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들 대부분이 훌륭한 활약상을 보였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흑인 명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에서 대활약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니그로 리그의 수준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흥행을
위해 기획된 빅리그팀과의 수차례에 걸친 시범경기에서, 이들은 빅리그팀과 거의 대등한 기량을 과시했다고 전해진다(뿐인가, 1932년에는
'로열 자이언트'라는 흑인야구단-아마도 Brooklyn Royal Giants를 지칭하는 듯하다-이 내한경기를 가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에 쿠퍼스타운 명예의 전당에서도 니그로 리그 올타임 베스트9에 해당하는 9명의 선수들(그 선정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을 70년대에 받아들인 이래, 1995년에서 2001년까지 매년 한명꼴의 니그로리거들을 헌액시킨 바 있다. 단지 피부색
때문에 빗장을 꽁꽁 걸어잠글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니그로 리그도 미국 야구역사의 일부'라는 명분하에 명예의 전당에 그들의 이름을
'모시고' 앉았는 꼴이 치사빤스스럽긴 하지만, 늦게나마 그들의 업적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려는 움직임은 충분히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팬들의 기억속에서 니그로 리그의 존재감은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듯하다. 그 옛날 새첼 페이지(Satchel Paige), 조시 깁슨(Josh
Gibson) 등의 수퍼스타들이 활동할 무대를 제공해 주었고, 이후 로빈슨, 윌리 메이스(Willie Mays), 행크 아론(Hank Aaron) 등의 대선수들
을 배출해내는 토양이 되었던 니그로 리그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전설로 남겨져가고 있다. 오늘날의 MLB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전설의 리그이지만,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낮은 리그… 본지는 그런 니그로 리그의 역사와, 그곳에서 배출된 최고의 수퍼스타들
에 대해 극히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니그로 리그 각팀의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 미국
에선 이런 것도 아직 만들어서 파는 모양이다.
- 미국내 흑인야구/니그로 리그의 약사(略史)
비운의 주인공 플리트 워커
흔히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는 재키 로빈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884년 플리트 워커(Moses
Fleetwood Walker)라는 흑인포수가 Toledo Blue Stockings라는 팀 소속으로 42게임에 출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로 로빈슨은 어디까지나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인 셈이다.
워커의 선수생활이 길지 못했던 이유는, 당시 야구계 최고의 스타이자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캡 앤슨(Cap
Anson)이 "검둥이가 소속된 팀과는 같이 경기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년뒤 앤슨은 아
예 "어떤 메이저리그 팀도 흑인과 계약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할 것을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
며 흑인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것이 바로 참으로 시바스러운 메이저리그 인종
차별의 첫걸음이자, 미국내에서 '흑인야구'가 독립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인 1885년에는 매우 의미있는 사건이 발생하니, 흑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프로야구 클럽인 큐반 자이언
츠(Cuban Ginats)가 창단된 것이다. 큐반 자이언츠는 1887년과 1888년 유색인종 챔피언(colored champion)에 올랐으며, 1887년에는 신시
내티와 인디애나폴리스 등의 빅리그 팀들과 시범경기를 벌여 승리를 거두는 등 강한 전력을 과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수많은 흑인 야구
클럽들이 미국내 곳곳에서 속속 생겨났으나, 대부분 독립적으로 투어를 돌거나 해당지역의 리그에 참가하는 등의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최초의 흑인 프로야구팀 큐반 자이언츠(1887년)
1887년 최초의 미국내 유색인종 리그였던 National Colored Baseball League가 8개팀으로 조직되었지만, 관중이 워낙 없어 겨우 2주만에
문을 닫아야 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1896년에 치러진 큐반 자이언츠와 페이지 펜스 자이언츠(Page Fence Giants)간의 라이벌전이 더욱 인
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총 15차전으로 치러진 이 시리즈에서는 페이지 펜스 자이언츠가 10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다.
1920년, 역시 흑인팀인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Chicago American Giants)의 감독 겸 구단주였던 루브 포스터(Andrew 'Rube' Foster)가
8개의 흑인클럽을 규합해 니그로 내셔널리그(Negro National League; NNL)를 만들기에 이른다. 이는 명백히 1887년의 실패한 리그에서 착
안해 만든 것이었지만, 초창기 NNL의 흥행은 흑인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 1923년 또다른 흑인리그인
Eastern Colored League(ECL)가 창설되고, 1924년에는 이 두 리그의 우승팀끼리 최초의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열며 발전의 정점에 다다르
게 되었다. 첫 니그로 월드시리즈의 우승팀은 NNL의 캔자스시티 모낙스(Kansas City Mornachs)였다.
1924년 역사적인 첫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치른 두 팀,
Kansas City Mornachs(위)와 Hilldale Dasies
그러나 1928년 시즌 도중 ECL이 돌연 해산하며 양대리그 체제는 파탄이 났다. 게다가 1929년 대공황과 1930년 루브 포스터 사망 등의 악재
가 겹치자 NNL도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해야 했다. 결국 1931 시즌을 끝으로 NNL이 파산하고, 1932년 한해동안은 마이너급 리그였던
Negro Southern League(NSL)가 '졸지에' 유일한 니그로 리그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수난기를 맞게 된다. 앞서 언급한 '흑인 야구단의 내한
경기'가 열렸던 것도 바로 이즈음 되겠다.
다행히도 1933년 새로운 NNL이 출범하고, 니그로 리그 최초의 올스타전도 열리며 부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1937년 니그로 아메리
칸리그(Negro American League; NAL)가 창설되며 니그로 리그는 다시금 안정된 양대리그 체제에 접어들게 된다(이 체제는 1949년 NNL이
NAL로 흡수되기까지 지속되었다). 30년대는 니그로 리그의 황금기라 할 수 있었는데, 특히 30년대 초반을 풍미한 피츠버그 크로포즈
(Pittsburgh Crawfords)와 1937~1945년 NNL 9연패의 금자탑을 쌓은 홈스테드 그레이스(Homestead Grays)는 단연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
였으며, 그외 다른 팀들에서도 수퍼스타들이 속속 출현하며 리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던 피츠버그 크로포즈(위)와 홈스테드 그레이스
니그로 리그는 나날이 융성해 갔지만, 정작 선수들의 전반적인 수준은 그다지 고르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누구누구의 시즌타율
이 4할, 심지어는 5할을 넘었다는 등의 호랑이 담배먹는 이야기들이 아직까지도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니그
로 리그에는 이렇다할 기록관리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관리상태가 매우 허술하다. 많은 니그로 리그 스타들의 기록이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탓이 크다. 무엇보다도, 여전히 흑인들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던 미국사회의 전반적인 여건은 니그로 리그의 숨통을 지
속적으로 조이고 있었다.
최초의 흑인 아메리칸리거
래리 도비
1946년, 모낙스 소속이던 재키 로빈슨이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고 이듬해 메이저리그 신인왕을 차지하며 인종
의 벽을 허물자 니그로 리그의 위상은 한껏 높아졌다. 그러나 이후 래리 도비(Larry Dorby)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와 계약하며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흑인선수로 기록되고, 그외 수많은 스타들이 속속 빅리그에 진출하자 아이러니
컬하게도 니그로 리그의 기반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흑인선수들은 능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빅리그에 진출
할 수 있었고, 흑인야구팬들도 더이상 니그로 리그만 바라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존재가
치가 극도로 드높아진 바로 그 순간부터 니그로 리그의 종말은 필연이 된 셈이다.
니그로 월드시리즈는 1948년을 끝으로 더이상 열리지 않았다. 50년대에도 니그로 리그는 근근히 지속되었지만, 팬
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진 채 문자 그대로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고 있었다. 1956년 이후 불과 4개팀으로 운영되
어야 했던 니그로 리그는, 마침내 1961년 시즌을 끝으로 완전히 문을 닫고 말았다. 너무도 많은 추억을 그라운드에
부려 놓은 채.
로빈슨을 메이저리그 무대로 픽업한 당시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오른쪽). 왼쪽은 당연히 로빈슨
- 니그로 리그의 대표적인 스타들
루브 포스터 (Andrew 'Rube' Foster)
'감독' 루브 포스터. 어째 백인천
이랑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포스터는 원래 명투수이기도 했지만(1902년에는 44연승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선
수로서의 경력보다는 1920년부터 수행한 니그로 리그의 커미셔너 역할로 더욱 유명하다. 흑인야구에 대한 자부
심이 남달랐던 그는 메이저리그에 필적하는 수준의 흑인야구 리그를 만들고 싶어했고, 결국 1920년 NNL을 창설
하며 그 꿈을 이뤘다.
당시 그는 니그로 리그의 커미셔너이자, 시카고 아메리칸 자이언츠의 감독 겸 구단주이기도 했다. 그가 1910년부
터 이끌었던 아메리칸 자이언츠는 흑인야구역사상 최고의 팀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포스터
는 투수출신답지 않게 빠르고 공격적인 스타일의 야구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니그로 리그 초창기 흥행성공의 원
동력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메리칸 자이언츠는 1920~1922시즌 NNL을 제패하며 니그
로 리그 초창기의 최강팀으로 군림했다.
커미셔너답게 점잖게 차려입은
포스터
한편 커미셔너로서의 포스터는 '현명한 독재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팀간 전력균
형을 맞추기 위해 스타들을 약팀으로 보내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팀에는 자금을 융통
하는 등의 중대사안들을 대부분 독단적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니그로 리그 창설과 발
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그에게 감히 토를 달 사람은 당시로선 아무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오지랖이 지나치게 넓었던 탓일까. 1926년경부터 그는 정신건강상의 심각한 문제를 안게 된다. 1929년 대
공황의 여파로 NNL이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겪게 되었으나, 포스터는 이를 병석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듬해 이 거구의 텍사스인은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그 이듬해, 포스터가 세운 오리지널 NNL은
파산하였다.
오늘날 '흑인야구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포스터의 공로는 1981년 명예의 전당 헌액을 계기로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한가지 유감스러운 사실은, 니그로 리그 감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은 아직까지 포스터뿐이라
는 것이다.
새첼 페이지 (Leroy 'Satchel' Paige)
니그로 리그 최고의 투수로 현재까지 기억되고 있는 새첼은 만화주인공으로 써먹기에 딱 좋은 캐릭터를 지닌 인물이다. 행크 아론, 어니 뱅
크스 등 많은 스타를 배출해낸 앨라배마주 모바일(Mobile)에서 태어난 새첼은 고교졸업후 모바일 지역의 세미프로팀에서 데뷔했는데, 그의
강속구와 컨트롤이 다른 팀에 소문이 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27년 NNL에 진출한 새첼은 얼마 후 니그로 리그를 완전히 평정하게 된다. 피츠버그 크로포즈 소속이던 1932년과 1933년에는 각각 32승 7
패와 31승 4패의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로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드물었던 4만달러의 연봉을 받았다고도 전해진다. 1934년 시즌이 끝나고
나서는 빅리그 선수들과의 시범경기를 벌였는데, 여기서 새첼은 디지 딘(Dizzy Dean)과 6차례 맞대결을 벌여 4승을 따냈다. 1942년 캔자스
시티 모낙스에서는 당대의 최강팀 홈스테드 그레이스를 맞아 니그로 월드시리즈에서 혼자 3승을 거두는 대활약을 보이며 팀의 우승을 견
인하였다. 그가 20여년간의 니그로 리그 생활에 걸쳐 작성한 노히트게임만도 55경기에 달한다.
니그로 리그 시절의 무적투수 새첼
그의 활약이 워낙 인상적이다 보니, 확인할 길 없는 온갖 소문이 난무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이런
경기 저런경기 다 합쳐 무려 105경기에 등판했는데, 그중 그의 소속팀이 승리를 거둔 것이 104게임이
라는 확인 불능의 소문까지 돌았다(정말 경악스러운 것은, 이 소문이 아직까지도 꽤 신빙성있는 자료
들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소문까지 돌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당시 새첼
의 인기가 워낙 대단하다 보니 그가 소속된 팀은 그를 한 게임이라도 더 등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고,
성격 좋은 낙천가였던 새첼은 그 요구에 번번이 응했던 것이다.
게다가 오프시즌 중에도 쉬지 않고, 멕시코, 도미니카공화국, 베네수엘라 등지의 리그를 전전하며 부
수입을 챙겨댔으니 등판횟수는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터. 제대로 된 통계가 없어 그가 정확히
몇 경기에 등판했는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2500경기(!!!) 정도는 되리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물론 단일리그에서 세운 기록이 아님을 유념해둘 필요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기록의 무
식함이 퇴색되지는 않는다.
무시무시한 강속구에, 상상을 초월하는 연투… 자라나는 꿈나무 투수들에게는 정말이지 절대 권해주고 싶지 않은 활동양상이다. 이렇게 엄
청난 혹사를 당했다면 선수생명이 길지 못했기가 쉽겠지만 천만의 말씀. 그는 1948년 만 42세의 나이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하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는 빅리그 최고령 신인기록을 세우게 된다.
늘그막에 빅리거가 된 새첼
그의 빅리그 경력은 니그로 리그 시절 못지않게 놀랍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아무래도 볼의 스피드는 예전같지 않았
지만, 컨트롤은 여전히 핀포인트급이어서 불펜투수로 활용가치가 높았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소속이던 1951년,
45세가 된 그는 12승을 올리며 팬들을 감동시켰고, 이듬해에는 올스타에 선정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은퇴한지 12년
이 지난 1965년의 어느날, 그는 캔자스시티 어슬레틱스의 커튼콜을 받았다. 결국 59세의 새첼은 어슬레틱스 유니폼
을 입고 1게임에 등판, 3이닝을 투구하며 빅리그 최고령 출전기록을 세웠다. 이 징하게 길었던 선수생활의 추억을 새
첼은 [난 영원히 공을 던질 거야(Maybe I'll Pitch Forever)]란 제목의 자서전에 담았다.
조 디마지오(Joe DiMaggio)가 "내가 아는 가운데 최고의 강속구를 가진 투수"라며 탄복했고, 디지 딘이 "그와 내가
한팀이었다면, 우린 7월쯤에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확정해 놓고 월드시리즈 때까지 낚시나 다니면서 편히 놀 수 있었
을 것이다"라며 아쉬워했던 이 불가사의한 대투수는 1971년, 니그로리거 자격으로는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
었다. 그리고 평화로운 말년을 보내다 1982년 눈을 감았다.
조시 깁슨 (Josh Gibson)
새첼이 만화주인공이라면, 니그로 리그 최고의 타자이자 포수인 깁슨은 가장 중요한 조연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장수만세/인간승리의 표본인 낙천가 새첼에 비해, 과묵한 성실파였던 깁슨의 삶은 너무나도 강렬하고 비극적이었다(참고로 이 두사람은 30
년대 초반 피츠버그 크로포즈에서 배터리를 이루기도 했다). 물론 깁슨도 새첼 못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능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인물
임에는 틀림없다.
깁슨은 1930년(20년대 후반이라는 설도 있다) 홈스테드 그레이스에서 니그로 리그 캐리어를 시작했는데, 그 경위가 매우 황당하다. 사연인
즉슨, 어느날 경기도중 그레이스의 주전포수가 부상을 당해 게임에서 빠질 수밖에 없게 되자 인근 세미프로팀에서 황급히 공수되어 나머지
게임을 치른 땜빵포수가 바로 깁슨이었다는 것이다. 이 경기에서 깁슨은 주전포수 못지않은 기량을 과시했고, 곧바로 그레이스의 정식선수
가 될 수 있었다.
'The Black Babe Ruth'
이후 깁슨의 활약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다. 그는 1931년에만 무려 75개의 홈런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피츠버그 크로포즈 소속이던 1933년에는 137게임에서 55개의 홈런과 .461의 타율을, 또한 1943년에는 .521의 타율을
마크했다는 믿기 힘든 기록도 있다. 생애통산 홈런은 823개라는 설과 962개라는 설이 교차하며, 생애통산타율에 대
해서도 .347이라느니 .373이라느니 .391이라느니 설왕설래가 심하다. 한번은 깁슨이 양키스타디움의 좌측펜스를 넘
기는 장외홈런을 쳤는데, 대부분의 관중들이 그 홈런의 비거리에 대해 580피트는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니그로 리그의 기록체계가 워낙 부실하다 보니, 그 모든 얘기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면 이건 어떨까? 깁슨은 빅리그 팀들과의 시범경기에서 총 60타석에 .426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기록하였는데, 당시
그가 상대한 투수들은 디지 딘, 자니 밴더 미어(Johnny Vander Meer) 등 당대의 고수들로 꼽히던 인물들이었다. 빅
리그 역대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는 월터 존슨(Walter Johnson)은 그런 깁슨에 대해 "깁슨이 치는 공은 1마일이라도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최고의 포수이기도 하다. 빌 디키(Bill Dickey)조차도 그만큼 좋은 포수는 못된
다"는 극찬을 늘어놓기도 했다. 당시 깁슨에게는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Black Babe Ruth'라는 닉네임 외에, 특유의
강견에서 착안한 'Rifle Arm'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Rifle Arm'
무적의 홈런왕으로 군림하던 깁슨은, 1942년경부터 출장이 위태로울 만큼 건강에 심각한 문
제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1943년 어느날 병원에 옮겨진 깁슨은 그곳에서 뇌종양이라
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그는 수술보다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메이저리그)와의 입단협
상에 더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꽤 구체적으로 진행되던 이 협상은 그러나 메이저리그 사무국의 저지로 무산되고 말
았다. 병마로 인한 고통에 허탈감이 겹치자, 깁슨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과 약물에 의지하며 살았다.
끝끝내 수술을 거부한 채 선수생활을 지속했던 깁슨은 1947년 1월,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딱 모차르트
가 이 세상에 살았던 만큼만 지속된 재능이었다. 당시 재키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가 유력하던 시점이었다 보니
(실제로 3개월 후 로빈슨은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깁슨의 죽음은 이로 인한 홧병 탓이라는 설이 한동안 나돌기도 했
다.
사상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 꼽히지만, 그것조차도 '저평가'받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이 비운의 천재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1972년의 일이었다. 새첼이 헌액된 바로 다음해였다.
…지금까지, 그야말로 '전설'일 수밖에 없는 니그로 리그와 그 대표적인 스타들에 관한 이야기를 거칠게나마 훑어보았다. 아울러 니그로 리
그의 부실한 기록관리는 그들이 배출해낸 스타들을 메이저리그 스타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은 반면(이
래저래, 참으로 시바스러운 캡 앤슨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신비감을 부여하는 동전의 양면으로 작용함을 확인하기도 했다. 본지,
앞으로 또다른 '신비감 넘치는' 스타들에 대한 '신비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계기가 닿는대로 펼쳐보일 양이다. 고로 본 기사, 엄밀히 말해
여기가 끝이 아닌 셈이다. 비록 완전한 과거완료형이지만 여전히 기억해둘 가치는 충분한 니그로 리그의 전설, 기대하시라. 졸라.
딴지 야구부 우원
안전빵(comblind@ddanzi.com)
니그로리그 ALL-STAR VS 메이져리그 ALL-STAR때.
1:0인 9회말에 투아웃까지 잡아놓은 상태에서 1번타자타석이 시작되자 연속 고의사구 3개. 결국 4번인 베이브 루스를 끌어냄. 삼구삼진.
끝.
니그로리그 시절 자기팀 외야수들을 전부 내야로 불러들이고 공을 던짐.
역시 외야수들을 앉게 하고 공을 던졌다는 기록도 있음.
조 디마지오가 유명해진 계기는 올스타전에서 페이지의 공을 때려내 안타를 만들었기때문이라고 함. 신문에 커다랗게 실렸대나 뭐래나.
통상 2000승(....미친)은 가볍게 넘었을꺼라고 함.
슬라이더를 처음 만든것도 이작자라고...(다른녀석 아니던가?)
단, 슬라이더는 팔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만으로 거의 안 던짐.
.....솔직히 저도 믿기 힘든게 많이 있네요.
출처는 옛날 야구코리아에서 MLB명인이라는 분이 올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