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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沙旅行
이곳에서는 馬王堆漢墓陳列(마왕퇴한묘진열)이란 곳을 구경하였는데,
우리나라에도 마왕퇴귀부인이란 책자로 소개가 되었다고 한다.
마왕퇴한묘는 장사의 동쪽 오성비에 있는 무덤으로
호남성박물관에 전시된 미이라가 발견된 현장이다.
1972∼1974년에 걸쳐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각각 전한의 장사국 재상이었던
대후리창(大候利倉)과 그의 부인, 아들의 묘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1972년에 발견된 대후부인의 시신은 보존상태가 완벽하여 1천여 년이 지났는데도
근육에 탄력성이 있고 관절을 움직일 수 있어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미이라가 보존 상태가 좋았던 이유는 마와 견직물로 시신을 싸고,
산소와 수분으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해 숯과 회점토로 밀봉한 관에 안치하였기 때문 이다.
우리들은 박물관에서 미이라와 출토된 관등을 구경하였는데 미이라의 오장육부를 담아 놓았는데
기분은 그리 좋지 못하다. 하지만 2000년 전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무덤의 보존법은
경탄을 금치 못하겠다. 장사에서 저녁에 시내구경을 나갔다.
평지에 새워진 이곳은 바람이 무척이나 강하여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패스트푸드에서 통닭을 시켜 놓고 슈퍼로 가서 술을 몇 병 골라서
호텔로 돌아와 즐겁게 한잔을 기울이며 호남성에서의 관광을 마무리 지었다.
昆明旅行
다음날 아침에 호남성을 뒤로하고 운남성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공항으로 향하였다.
비행기 티켓을 받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좌석번호가 보이지 않는다.
무심결에 흘려버리고 탑승을 알리는 소리에 탑승구를 지나 공항버스를 타고
비행기 근처에 도착하였는데 버스가 서자마자 갑자기 승객들이 뛰기 시작하였다.
왜 그러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다.
이곳 서북항공은 좌석이 지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 라나
왠지 어릴적 추억이 생각나서 미소가 머금어진다.
우리가 여행할 운남성의 도시들은 곤명, 대리, 여강이다.
비행기는 그 첫번째 목적지인 운남성의 성도 곤명을 향해 출발하였다.
곤명은 운남성의 성도로써 해발 1,894m의 운귀고원(雲貴高原)에 위치해 있어,
사계절 온난한 기후조건으로 늘 봄 날씨 같다 하여 춘성(春城) 이라고도 불리며,
사시사철 꽃이 끊이지 않고 피어 꽃의 도시라고도 일컫는다.
곤명은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소수민족의 문화가 다양하며,
오랜 역사와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많은 유물과 유적, 명승지가 보존되어 있다.
곤명에 도착하여 우리가 찾은 곳은 잠자는 미인산으로 불리는 서산(西山)이었다.
리프터를 타고 용문으로 향하였다. 이곳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용문(龍門)은
절벽을 깎아 만든 곳으로 길을 따라가면서, 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는 경치는
정말 마음을 탁 트이게 하였다. 용문은 1840년부터 1853년까지 13년에 걸쳐 만들어졌는데
석공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용문을 관광하면 반드시 만지고 내려와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등용문 위에 있는 구슬,
집무전 앞에 있는 거북과 뱀, 입구에 있는 재신이다.
이것은 아들, 장수, 재물을 불러 온다고 하니 어찌 그냥 지나치리요.
끝끝내 만지고 내려와야징 흐흐흐 .
용문을 내려와 대관루(大觀樓)로 향하였다.
대관루는 청나라 강희21년(1682년)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강희29년에 이르러 통월정, 등벽당, 그리고 가장 장관인 '대관루(大觀樓)'가 만들어졌다.
185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6년에 운남성주 왕지웬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되며 비단으로 만든 각양각색의 연들이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반겨주었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와서 여장을 풀고 나니 슬슬 술도 고파지고
아까운 청춘을 불사러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거리의 카페에서 맥주를 시켜놓고 이국의 밤경치를 즐기다가 문득 이곳의 젊은이들은
어떻게 여흥을 즐길까하는 궁금함에 나이트 클럽을 구경만 했는데
(중국어를 잘 못하니 바디랭기지로 입구를 뚫고) 담배연기만 실껏 맡고 돌아서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 곤명을 대표하는 관광지인 석림(石林)을 향해 출발하였다.
곤명에서 남동쪽으로 89km쯤 떨어진 석림은 국가중점명승지의 하나로서 대석림, 소석림,
내고(乃古)석림, 장호(長湖), 비룡(飛龍)폭포, 월호(月湖), 종유동, 선녀호, 기풍동(奇風洞) 등
8개 풍경구가 있다.
해발 1760미터이며 연평균 기온이 15.6도로써 사철이 봄날 같고 풍경이 수려한 관광의 명소이다.
지질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2억7천만년전의 석림 지역은 망망대해의 밑바닥이었다.
순수한 석회암으로 된 지층은 바닷물이 빠지면서 서서히 육지로 나타나
현재와 같이 해발 1760미터로 융기 되었다.
많은 비와 뜨거운 태양광선으로 인하여 석회암 속의 바닷물 성분과 탄산성분이 용해되기 시작하면서,
오랜 세월동안의 풍화작용을 거쳤고, 마침내 현재의 기기묘묘한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석림은 고원에 형성된 전형적인 카르스트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석림은 이족 자치현안에 있으며 이족의 한 갈래인 샤니족이 석림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관광 도중에 샤니족 전통의상을 입은 아가씨들과 사진을 찍어 보는 것도 석림관광이 주는 즐거움이다.
사자정(獅子亭)이나 망봉정(望峰亭)에 오르면 석림 전체를 조망하기에 알맞은데
석림은 말그대로 돌의 숲 이라 할 수 있다.
대석림과 소석림을 돌아보는데 전체 7km 정도의 코스로써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전동차를 이용하여 대석림을 구경하였는데 샤니족 아가씨의 안내를 받았다.
샤니족아가씨는 모자를 쓰고 있는데 양쪽으로 삼각모양의 뾰족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남자들이여 조심하라 이것을 만지면 그 여자를 책임져야 하니까.
소석림은 대석림을 구경한 후 망봉정으로 오르고 내려가는 코스다.
그 마지막에 석림이란 큰 글자가 새겨진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석림 관광의 마지막이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들은 곤명에서 마지막 여행지인 구향동굴(九香洞窟)로 향했다.
구향동굴은 구향을 보지 않고서는 운남에 왔다고 할 수 없다고 하리만큼 아름다운 곳으로
곤명에서 남동쪽 90km 지점에 있으며 석림과는 20km를 사이에 두고 있다.
구향명승지는 신전(神田), 자웅폭(雌雄瀑), 혼협(魂峽), 웅사대청(雄獅大廳), 신녀궁(神女宮),
이가채(彛家寨), 지하도림석(地下倒林石), 취협(翠峽), 여유(旅游)삭도 등
9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구향동굴에 도착하니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곳이 구향동굴의 시작을 알리는 취협이다.
취협은 길이가 600m 정도이고, 왕복하는데 약 20분이 소요된다.
취협을 구경하고 원래 길로 되돌아와 혼협으로 들어간다.
협곡의 높이는 100m에 이르고 폭이 제일 좁은 곳은 20m가 채 안된다.
혼협을 통과하면 웅사대청에 이르게 되는데 웅사대청은 세계에서 유일한
지하 자연대청으로서 면적이 15,000평방미터에 이른다.
雄獅大廳이란 이름은 동굴 앞의 종유석이 마치 숫사자 같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웅사대청을 나와 석판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종유석으로 가득한 신녀궁을 만나고
웅사대청 남쪽에서 층계를 따라 내려가면 높이가 30m나 되는 자웅폭포를 만난다.
폭포대 앞으로 나가면 바로 구향에서 제일 독특한 풍경인 신전이다.
신전이라고 하면 누구나 궁전 같은 건축물모양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말에 속지 마시라" 한자로 쓰면 神田 즉 신의 밭이란 뜻이다.
모양이 마치 산악지형에서 층계를 이룬 밭과 같고 제일 큰 것의 면적은 100평방m인데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종유석 기관이다.
구향동굴을 나오니 리프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처음 온 곳으로 돌아가라나 에고에고 .
구향에서 호텔로 돌아온 우리들은 저녁을 먹고 나니 모두들 다른 배가 고픈가보다.
번뜩이는 눈빛이 오고 가고 하더니
어느새 로비 앞에 모여 있는 주당들 술이 우리를 부른다 Lets Go Go Go
여기에서 뒤는 생략 스스로 생각 하시라 찾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大理旅行
곤명에서 관광을 마치고 운남항공을 이용하여 대리로 이동하였다.
대리는 중국 무협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남조국과 대리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이번에 방영된 적이 있는 황제의 딸에서도 등장하는 지명이다.
각설하고 이곳은 약 4500년전 바이(白)족, 이족의 조상들이 자리잡고 '얼하이' 문화를 만들었었다.
13세기 몽골에게 망하기 전까지 약 3백년간 대리국(大理國)의 수도였던 이곳은
운남(云南)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옛 중국의 '남방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지역으로서 문물이 발달하여 '문헌의 도시'라는 별명도 있다.
대리는 해발 2,086미터 고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특유의 온난한 기후때문에 예로부터 벼농사가 성행하였다.
대리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삼탑사라고 불리우는 숭성사(崇聖寺)였다.
그동안 좋은 날씨에 즐겁게 여행하는 것을 시기하는지
날씨가 비가 왔다가 햇빛이 났다가 하는 바람에 옷을 입은채 비에 젖었다가 햇볕에 말렸다가를 반복했다.
이 삼탑사는 중앙에 있는 주탑에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어서 유명한데 사람이 오를수는없다.
이삼탑은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아 유명한데 중앙탑을 향하여 양쪽탑이 기울어져있다.
두번째로 방문한 곳은 이해인데 마치 귀 모양을 하고 있다고 붙여진 호수이다.
점심을 먹어러 간 곳은 백족식당 이었다.
이곳에서 중국의 재래화장실 중에 하나를 만났는데 화장실 안은 문이 없다.
칸막이도 앉으면 머리가 칸막이보다 높으니 옆에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용변을 볼수 있다.
나와 같이 이곳에서 흔적을 남긴 두분은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참고로 이곳은 그래도 좋은 시설이다. 칸막이가 없이 구멍만 있는 곳도 있으니
여행하시는 분들 한번쯤 체험해보는 것도 추억이 될 것이라고 강력히 힘차게 추천한다 흐흐흐흐
다음으로 간 곳은 대리고성이다. 이곳은 이해(耳海)의 동쪽, 창산(蒼山)의 서쪽에 인접해있다.
명(明)나라 초에 지방행정 중심지였고, 남방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물품의 집산지였다.
옛날의 성은 몇 차례의 전쟁 중에 무너져 버렸다.
태화성(太和城)은 남조(南詔)왕이 통일한 후 건축한 궁궐인데,
중심건물은 금강성(金剛城)으로 일명 '자금성(紫金城)'으로 불리 운다.
북쪽에는 대리성(大厘城)이 있고, 남북의 끝에는 용수성(龍首城)과 용미성(龍尾城)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남북의 성루(城樓)와 성벽의 일부분만이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창산을 오르기 위해 리프터를 타고 중턱에 위치한 중화사(中和寺)로 향했다.
중화사는 구경할 것은 없지만 이화원의 회랑처럼 그림이 그려진 회랑이 조그마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버스로 여강을 향해 출발하였다.
가면서 백족민속촌(白族民俗村)을 방문하였는데 이곳은 백족의 결혼풍습에 관하여 공연하고 있었다.
공연장에서는 삼도차를 대접하는데 세가지의 차가 맛이 다르다.
마지막에 주는 차는 아주 달다. 백족은 백의 민족이라고 부르는데 음식이나 모습,
생활환경이 우리나라와 유사하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예전에 우리민족의 일부가 이곳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하는 설도 있다.
백족의 아가씨들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대리를 상징하고있다.
창산의 눈(雪), 이해의 달(月), 하관의 바람(風), 상관의 꽃(花)으로 표현되는 장식을 하고 있는데
특히 바람을 나타내는 수슬은 절대로 건드리지 마시라.
왜냐고 물어신다면 역시 이곳에서도 수슬을 잡아 당기면 "넌 내꺼야 내가 책임진다" 라는 뜻이라나
그런데 잡아 당기고 싶은 충동이 여러분은 생길 것이다. 왜냐고
백족의 아가씨들은 상당히 미녀가 많다. 정말로 아직 총각이라면 도전해 보시라.
저녁에 드디어 여강에 도착하였다. 긴긴밤을 어떻게 지새웠을까.
걱정마시라 우리에겐 넘치는 정열과 사랑하는 술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하루는 져물어 가고 있었다.
麗江旅行
드디어 운남성에서 마지막 여행의 날이 찾아왔다. 여강은 해발2400m의 고원지대이다.
이곳은 지진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서쪽에는 해발 5,596미터의 옥룡설산(玉龍雪山)이 있다.
우리가 찾은 곳은 왕이 살았다는 흑룡담공원(黑龍潭公園)이다.
이 공원에서는 무엇보다 호수 면에 드리워지는 옥룡설산의 자태와 맑은 물의 싱그러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데 청나라 때 건륭황제가 친필로 '玉泉龍神'이라 이름하였다 하여
'옥천(玉泉)'이라 불리운다. 정말 추천하고 싶은 아름다움이다.
호수 가운데에는 명나라 때 지어진 오봉루(五凰樓)라고 하는 건물이 있다.
높이가 20미터, 기둥이 32개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4면이 날고 있는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다. 공원 안에는 여강 동파(東巴)문화박물관이 있다.
여강 나시(納西)족의 독특한 동파문(東巴文)과 나시문화를 접할 수 있다.
흑룡담을 나와 찾아 간 곳은 백사촌의 백사벽화였다.
이곳에는 벽화는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으나 볼거리는 오히려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갖가지의 희한한 물건들과 골동품들이 있는데 골동품은 가짜가 많으니
조심해서 사실 것(실제로는 전부 가짜라고 보는 것이 많음) 백사촌을 뒤로 하고
감해자(甘海子)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이곳도 바다가 말라서 땅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바다부분이 융기하여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나무들이 크게 자라지 못하고 작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함부로 내리지 못하는데 희귀한 생태계의 보존을 위해서 라고 한다.
감해자를 지나면 백수하(白水河)에 도착하는데 야크라는 동물을 타고 사진을 찍을수 있다.
이곳에서 손을 씻어면 피부가 고와진다고 하니 꼭 발까지 담가보실 것.
백수하를 뒤로하고 해발 3205m의 운사평(雲梭平)으로 오르기 위해 리프터를 탔다.
이곳에서는 나시(納西)족의 아가씨들과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옷을 빌려 입을 수 있는데 중국돈으로 5위엔정도를 지불하여야 한다.
운사평을 뒤로하고 여강고성으로 향하였다.
여강 고성은 일명 대연전(大硏鎭)이라고도 불리운다.
송나라말 원나라 초인 1253년, 후비리에가 남쪽으로 쳐들어 와서 대리(大理)를 정벌할 무렵,
여강에 이르러서 병영을 세웠다. 명나라때에 이 성읍은 규모를 갖추었고,
무(木)씨 성을 가진 토사(土司)가 통치하였다. 고성의 중심에는 사방가(四方街)가 있다.
여기에 방사상으로 길이 나있는데 바닥이 모두 돌로 되어있다.
이 돌들은 모두 500년에서 700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다. 고성은 나무로 된 기와 건물이다.
3면이 방이고 한면이 벽인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 군락이 독특하다.
1997년 12월 4일 리쟝 고성은 [세계문화유산지구]로 지정되었다.
옥룡설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신선한 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고성 곳곳을 흐른다.
이 물줄기들로 인해 여강의 독특한 정경을 보여주는데 밤이 되면 운하를 따라 좌석이 놓이고
등불이 밝혀지며 그 곳에서 느껴지는 밤의 흥취는 말로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또한 사방가를 중심으로 늘어서 있는 상점에서 쇼핑하는 즐거움도 그만이다.
이곳에 가면 한국인이 운영하는 벚꽃마을(사쿠라)가 있는데
만약 여행을 하신다면 한번 가보시기를 배낭여행을 하는 사람을 위해 민박도 운영하는데
하루밤 주무시는데 중국돈으로 10위엔정도 받는다고 하니 너무나 저렴하다.
참고로 이곳에는 상호 때문에 오해를 많이 받는데 절대 오해하지 마시길 특히 당부드린다.
이곳은 유럽의 유명 여행잡지에 실려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데
이역만리에서 당당히 살아가고 있는 여주인에게(남편은 중국인)격려를…………….
여강에서 마지막을 벚꽃마을에서 한잔의 술과 한장의 사진 같은 밤경치와 함께 보내며
드디어 운남성여행의 종지부를 찍었다.
上海旅行
여강에서 운남항공을 타고 상해로 출발하였다.
비행기로 4시간을 날아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도착하여 제일 먼저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하였다.
상해임시청사는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3층짜리 벽돌집으로
1926년부터 1932년 직후까지 청사로 사용했던 곳이다.
비록 임시라고는 하지만 한 나라의 정부 청사로 생각하기에는 무척 초라한 모습이다.
1층에 바로 회의실이 보이고 그 뒤로 주방이 있다.
2층에는 이승만, 박은식, 이동녕 등이 사용했던 집무실이 있고 3층에는 요인숙소와 전시관이 있다.
독립을 위해 피흘린 선배님들의 거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건물에 왠지 마음이 울적해진다.
선배님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묵념으로 추모하며 예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상해 중심부 남시구(南市區)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인 예원(藝院)을 보지 않으면
상해를 다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이곳은 원래 명나라의 관료였던 반윤단(潘允端)이
부모를 기쁘게 하기위해 지은 정원으로 1559년에 착공하여 완성까지 무려 18년이나 걸렸다.
면적은 약 2만㎢로, 북경의 정원이 광대한 것과는 달리 소규모이며,
소주(蘇州)의 4대 정원에 비길 만한 아기자기함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한정된 공간이 무한한 넓이를 가진 공원으로 느껴질 만큼 설계의 교묘함과 치밀한 배치도
뛰어나다. 이 정원에는 10개의 연못과 30개의 누각이 있으며,
이들을 연결하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가며 구경하면 이 정원의 독특한 멋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문에 곡식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기와건물인 삼수당(三穗堂)이 보이고,
삼수당 오른쪽 좁은 길을 따라 두 마리의 해태가 서 있는 문으로 돌아서면
조그만 연못과 함께 기암괴석과 동굴로 유명한 대가산(大假山)이 보인다.
삼수당 뒤편으로 돌아가면 점춘당(點春堂)이 있는데,
태평천국의 난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킨 '소도회(小刀會)'의 지휘본부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현재는 관련 문물이 전시되어 있다. 예원을 나오다 보면 구곡교가 보인다.
이곳은 다리가 아홉번 굽었다고 하여 구곡교라고 불리는데
솔직히 예원은 주변의 상가들이 더 멋있는 것 같다.
예원을 중심으로 상가들이 밀집하여 있는데
쇼핑의 즐거움과 고전적인 외관이 어우러져 우리를 유혹하였다.
상해에서 마지막 코스는 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외탄(外灘)이다.
외탄은 청나라말기에 서구열강들과 일본등의 영사관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이곳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등의 각국을 대표하는 건축양식으로 지어져
‘세계 건축 박물관’이라고 불린다. 지금은 은행,증권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외탄은 낮에보면 아무런 흥취가 나지 않는데 밤이 되면 건물은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건물을 비추며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모습을 하는데,
황포강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위치한 최근의 건축물들과 함께
옛날과 현재가 함께 존재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특히 동양최대의 동방명주탑은 외탄을 찾는 사람들의 사진 속에서 배경으로 애용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저녁에 황포강에서 유람선이 운행되는데
유람선을 타고 구경하는 기분도 상쾌하니 한번쯤은 타 보라고 권하고 싶다.
외탄에서 숙소로 돌아와 저녁에 상해의 밤거리를 구경하러 나갔다.
길을 따라 가다 보면 미용실이 많이 보이는데 이곳은 미용보다는 다른 용도로 애용되니 조심하시라.
길을 가다 슈퍼에서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하는 잔을 들고 건배를 하며 그 동안의 감상을 이야기하며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정리하였다.
아침에 공항을 향해 출발하는 버스 속에서 8박 9일간의 여정이 사진처럼 스쳐 지나간다.
공항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제각기 짐을 들고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유시간이 많아서 공항 여기저기를 구경하는데 공항면세점이란 곳이 바가지 씌우는 곳이다.
밖에서 15원하는 술의 가격은 80원, 4배나 비싸다. 심한 제품은 10~20배정도 더 비싸다.
혹시 중국여행을 하신다면 공항에서는 절대 물건을 사지 마실 것을 당부 드리고 싶다.
밖에서도 외국인이라서 물건을 비싸게 주고 사는데 그보다 더 비싼 곳이 공항면세점 이다.
어느덧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라고 안내방송이 나온다.
탑승구를 거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과 동시에 그 동안 즐거웠던 중국의 땅들이 멀어져 간다.
김포공항에 드디어 무사히 도착하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여행 동료들과 작별을 고하며 마산으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언제 보아도 정겨운 나의 조국의 모습에 어느새 푸근한 단꿈에 빠져들었다.
미비하고 문장이 맞지않는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준 분들에게 감사를 보내며
이만 여행기를 마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초희님. 글 보이세요? 이거 망원경이 있어야...
ㅠㅠ..................글씨가 넘 안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