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많은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전통 종교인 유교와 불교 등을 숭상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유교도 불교도 1500여년 전에 전래된 역시 외국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4000 년이 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더 많은 기간을 차지한 종교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외래 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민족의 삶을 구석구석 좌우했던 것은 다음아닌 '신교(神敎) 의 신앙이었습니다. 신교는 우주의 최고 주재자 하나님을 삼신상제라 부르면서 신앙했습니다 이는 무리민족이 우주의 주재신을 하느님으로 신앙했던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을 쓰신 한국의 전통 종교를 신교라고 주장하는 분의 글과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서민호 교수님의 홍수전설 그리고 중국역사와 한자라고 하는 글을 이곳에 올립니다.
두 분의 글을 주의깊게 읽어 보시게 되면 두 글이 모두 창조주 하나님을 기록한 성경에서 유래 되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길지만 관심을 가지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상제님을 신앙하는 고유신앙 신교神敎가 있었다
환국시대로부터 따지면 올해가 9202년, 배달국시대부터 5901년, 단군 조선시대로부터 4336년이다. 지금부터는 우리 민족의 본래 신앙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민족은 과연 어떤 신앙을 갖고 있었는가’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민족의 삶을 구석구석 좌우했던 것은 다름 아닌 ‘신교(神敎)’-이신설교(以神設敎)의 준말-신앙이었다. 그렇다면 신교란 과연 어떤 신앙인가’
신교는 우주의 최고 통치자 서양에서 얘기하는 하느님 아버지이신 ‘옥황 상제님’을 신앙했습니다
신교는 우주의 최고 주재자 ‘하느님’을 ‘삼신상제(三神上帝)’라 부르며 신앙했습니다. 이는 우리민족이 우주의 주재신(主宰神)’하느님’을 신앙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요즈음 ‘하느님’하면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전유물인 듯이 인식되고 있지만 기독교나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이 불과 2백여 년 밖에는 안됐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전 수천년의 역사동안 우리 민족은 우주의 주재자 하느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단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훨씬 이전, 우리 민족은 역사의 시작과 함께 우주의 최고 통치자 하느님을 바르게 인식했으며, 그 하느님을 받드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제(上帝)신앙’이며 하느님께 제사(祭祀)를 올리는 ‘천제(天祭)의식’입니다. (단군성조께서 상제님께 제사를 올리던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사진 참조)
우선 ‘상제’란 언어의 올바른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상제의 상(上)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는 ‘천상(天上)의, 천상에 계신’이라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더 이상 높은 분이 없다는 ‘지존무상(至尊無上)’의 의미입니다.
제(帝)자는 지금은 보통’임금 제’라고 알고 있지만, 이 글자의 본래 의미는 ‘하느님 제’자였다.
따라서 상제(上帝)란 ‘천상에 계신 하느님, 우주에서 가장 높으신 하느님’이라는 의미로서 우주 삼계를 통치하시는 최고신 ‘통치자 하느님’을 가리킨다.
유, 불, 선,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이전 수 천년동안 우리 조상들은 마음속에 우주의 최고 통치자 상제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상제님을 경배하며 삶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은 하느님을 신앙하며 살았던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 상제님을 ‘삼신상제(三神上帝)’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삼신상제란 무슨 의미인가’
삼신(三神)의 ‘삼(三)’이란 글자에 이끌려 우주를 통치하는 최고 하느님이 인격적으로 서로 다른 세 분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주를 통치하는 최고 절대자는 오직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그 한 분 상제님을 삼신상제라고 부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기에는 우리 민족이 우주를 인식한 심오한 철학의 세계관이 담겨있습니다.
이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삼수(三數)의 우주원리’입니다. 한 분의 상제님이 다스리는 이 우주가 공간적으로 천(天), 지(地), 인(人)의 삼계(三界)로 되어있으며, 그 상제님은 ‘조화(造化)-창조의 역할’, ‘교화(敎化)-가르침의 역할’, ‘치화(治化)-다스림의 역할’, 이렇게 3가지의 역할을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다시 묶어서 얘기하면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입니다. 이 신교의 삼신일체 사상은 불교의 ‘삼신불사상-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기독교의 ‘삼위일체사상-성부, 성자, 성신’, 유교의 ‘삼극사상-무극, 태극, 황극’, 도교의 ‘삼청사상-옥청, 상청, 태청’을 낳게 하였습니다.
삼신상제님 신앙은 한민족이 몰락하며 역사를 잃어버리고 외래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삼신’은 자손을 태워주는’삼신할머니’라는 의미 정도로 축소되었고, ‘상제’는 도교에서 수용되어 ‘옥황상제’가 되었습니다.
신교는 인간을 포함한 천지자연은 하나의 생명이라는 동양의 우주관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비록 외래종교를 받아 들였으나 그렇다고 본래의 신교 신앙을 완전히 저버리고 이질적인 것만을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도의 불교나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 신교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적인 불교와 기독교로 변했으며,
하나 예를 들어보면 오늘날 사찰에 가면 칠성각(七星閣)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칠성각은 인도와 중국의 불교에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한국적인 것으로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한 부분입니다.
한편 사찰에 석가불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대웅전 말도 인도와 중국의 불교에는 없는 것입니다. 대웅전은 환웅전을 본뜬 것으로 환웅전이란 배달국 시대 18대 환웅 천황을 모셨던 전각을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어떤 외래종교가 들어와도 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였는데 이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어찌하여 한민족의 종교심성은 모든 외래종교를 수용할 수 있었을까’ 이는 신교가 유, 불, 선, 기독교 등의 종교를 낳은 모체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신교를 제1의 뿌리 종교라고 한다면 유, 불, 선, 기독교는 제2의 줄기종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역사에 있어 외래종교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수입으로부터입니다.
통일신라이후 불교는 서서히 한민족의 혼 속에 뿌리를 내려갔습니다.
고려왕조에 들어서 불교는 국교가 되었고, 이로써 신교 신앙은 더욱 위축되게 되었으며
고려 다음의 조선왕조는 공자를 숭상하는 유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고려왕조 5백년과 조선왕조 5백년 도합 1천년 동안 외래 종교를 국교로 하면서 민족의 본래 신앙인 신교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렇지만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 이래 수 천년동안 지속되어온 신교 신앙의 자취는 여전히 민중의 삶 속에 뿌리 깊이 남아있었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하여도 어촌에서는 풍어제(豊漁祭)를 지냈으며 마을에서는 성황당(城隍堂)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화의 거센 바람 속에 농경사회가 몰락하고, 도시화가 급진전되며, 서양 과학 물질문명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제 신교 신앙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다. 무엇보다 ‘상제’라는 어휘는 아주 이질적인 언어가 되었고, 각종 신명을 모시던 공동체의 제사의식은 철저히 미신시 되면서 사라졌습니다. 다만 돌아가신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의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홍수전설
이 전설에 의하면 모든 중국인들은 대홍수를 극복함으로써 이름을 떨친 옛 선조 '누와' 의 자손이라고 한다. 누와가 성경의 노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상형문자인 한자에서도 노아 홍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배 선(船) 자는 아래와 같이 배 주(舟)와 여덟(八) 명의 사람(口)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는 방주에 8명이 탔음을 나타내고 있다.【그림2-12 참조】 또한 홍수 홍(洪) 자는 노아의 8식구(八)가 함께 손잡고(共) 치뤄낸 물난리, 계집 여(女) 자는 첫 번째(一) 사람(人)의 갈비뼈 하나를 빼내서( ) 만든 사람, 금할 금(禁) 자는 하나님(示)께서 두 나무(林)에 대해 명하신 것, 탐할 람( ) 자는 두 나무(林)를 바라보는 여자(女)의 마음, 지을 조(造) 자는 흙(土)에 생기( )를 불어넣으니 사람(口)이 되어 걸어다님(造), 서녁 서(西) 자는 최초의(一) 사람(人)이 살던 동산(口)있던 방향 (에덴동산이나 아라랏산은 중국사람들에게는 서쪽이었음), 올 래(來) 자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나무(木)사이에 숨어있던 두 사람(人人)이 나옴...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31)
또한 미국의 인디언들은 무려 58개의 대홍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디언들이 많이 살았던 미시간 지방 일대에서는 오래된 석판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석판 중 5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석판이 있는데 첫 부분에는 일그러진 태양아래 한 노인이 경배하는 모습이 보이며, 둘째 부분은 큰비가 내리고 있으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세 번째 부분은 물위에 떠 있는 큰배가 보이고 40 주야를 나타내는 네모진 40칸이 좌우에 있으며, 나뭇잎을 물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있다. 넷째 부분은 둥근 태양과 함께 큰배에서 동물들이 쌍쌍이 내려오고, 네 사람의 남자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보이고, 마지막 부분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징인 무지개를 볼 수 있다. 궁창 위의 물로 인한 빛의 산란으로 태양이 일그러져 보이다가, 궁창 위의 물이 사라짐으로써 둥근 태양이 보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이 석판은 노아의 홍수를 매우 정확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인류학자 프레이져(1854~1941)는 북·중·남아메리카의 130개 인디오 종족중 대홍수를 주제로 한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는 종족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고대 멕시코의 티마르포포카 그림문서에는 '하늘이 땅에 다가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산도 물 속으로 숨었다. 바위가 땅위에 모든 것을 뒤덮고, 테트존트리(구멍이 많이 난 용암)가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끓어오르고 붉은 산이 춤추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과테말라에 사는 인디오인 키체족의 포플부흐 라는 고서에는 '대홍수가 일어났다.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다.
어떤 사람들은 지붕으로 기어올라갔지만 집이 무너져 땅으로 떨어졌다. 또 그들은 나무에 매달렸지만 나무는 그들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또 다른 사람들은 동굴 속에 피난처를 찾았다. 그러나 동굴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버렸다. 이리하여 인류는 멸망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아마존강의 인디오 전설에는 '어느 날 천지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무서운 소리가 났다. 만물이 암흑 속에 잠긴 뒤에 큰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만물을 휩쓸어 버렸고, 온 세계가 물에 잠겨 버렸다.' 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바벨론 설화에서 온 설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홍수 이야기는 이렇게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바벨탑 사건이나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한 사건은 전 세계에 설화로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은 이 사건들은 국지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며, 노아의 홍수만이 전 세계적인 사건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 한반도에도 과거 우리 조상이 이주해 살기 전에 사람들이 살았으나, 그 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가 오랜 후에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노아 홍수 이전에 한반도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나 홍수 때문에 다 죽어버려 노아의 후손이 중앙 아시아로부터 바이칼 지방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오기까지 한반도에는 아무도 살지를 않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896년 9월 3일 미국 미시간 주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홍수가 시작하여 온 땅이 물에 잠기자 높은 데로 올라가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장면을 주시하자.
중국 역사와 한자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초의 중국의 시대를 전설(傳說)시대라고 합니다. 전설시대 다섯 왕은 황제, 전욱, 제곡, 요(堯), 순(舜)임금 다섯 왕이 있었고, 그 다음 왕조가 처음 시작된 것이 하(夏)나라인데, B.C. 2200년경에 세워져 500년 간 지속되다가 두 번째 나라인 은(殷)나라, 즉 상(商)나라로 바뀌었습니다.
은(殷)나라 시대의 많은 문명이 은허(殷墟), 즉 은(殷)나라 폐허(廢墟)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夏)나라 시대의 것은 발견된 것이 없고, 글자는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으로부터 3700여년 전에 중국인들이 기록해 놓은 갑골문자(甲骨文字), 청동기(靑銅器)문자가 가장 오래된 한자(漢字)입니다. 하(夏)나라, 그전에 순(舜)임금 시대에 이미 한자(漢字)가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200년 전에 한자가 처음 만들어졌다고 보는데, 놀라운 사실은 순(舜)임금 시대는 세계사(世界史)적으로 보면, 불과 수십 년 전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벨탑 사건이 터진 때입니다. 중국 최초의 전설적인 요(堯), 순(舜) 임금시대는 바벨탑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바벨탑 사건이나 그 이전 노아 홍수 사건, 창세기 사건에 대해 생생하게 들었거나, 직접 체험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순(舜)임금은, 하늘의 임금, 즉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공자(孔子)의 '서경(書經)'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 최초의 제사(祭祀)에 대한 기록인데, 순(舜)임금 시대에 이미 제사를 드렸고, 그 때부터 상제(上帝)에게 드리는 제사가 400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습니다.
순(舜)임금 때부터 드려오던 중국인 최고의 제사(祭祀), 즉 상제(上帝)에게 드리던 제사는 여름에는 북쪽 끝에서 드리고,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끝에서 드려서 국경제사(國境祭祀)라고 하는데, 요(堯), 순(舜) 시대부터 시작한 그 국경제사(國境祭祀)때 상제(上帝)에게 드리던 제사문(祭祀文)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된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을 한번 보실까요?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사옵니다. 다섯 행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습니다. 거룩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사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사옵니다."
위의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과 기독교인이 믿는 경전인 성경(聖經) 창세기(創世記) 1장의 내용과 비교해 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리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1절-27절) 상제(上帝)를 창조(創造)의 신(神)으로 묘사함으로서,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의 내용과 창세기(創世記)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쪽은 또 다른 국경제사문(國境祭祀文) 입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기독교 이외에는 이런 기도문이 없습니다. 제사문이라는 것이 결국 신(神)에게 드리는 기도문(祈禱文)인데, 바벨탑 사건이후 하나님을 기억하던 백성들이 동방으로 이주해온 후 하나님을 기억하며 드렸던 기도문으로 생각됩니다. 진시황(秦始皇)이 진(秦)나라를 세우던 B.C. 200년경까지 중국인은 2000여년 동안이나 유일신(唯一神)이요, 창조(創造)의 신(神)인 상제(上帝)하나님을 잘 믿어왔습니다. 상제(上帝)는 중국식 발음으로, '샹따이(혹은 샹띠)'인데 유대인이 부르는 하나님의 칭호(稱號) 중에서 '산(山)에 있는 하나님'을 '엘 샤따이'라고 부릅니다. 샤따이, 샹따이, 발음이 거의 같지요. 바벨탑 사건이후 혀가 꼬부라져 '샤따이'가 샹따이로 변한 것 같습니다.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믿던 샤따이 하나님을 최초의 중국사람들이 그대로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벨론과의 무역으로 막강한 부(富)를 축적하고 사병(私兵)을 길렀던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여정'이 진시황(秦始皇)으로 즉위하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유일신(唯一神), 즉 상제(上帝)하나님을 없애야 진시황이 중앙집권 통치하기가 쉽다고 해서 엄청난 문화 종교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과거부터 상제(上帝)하나님을 잘 믿어오던 중국인들, 특히 학자(學者)들이 가만히 있지 않아서 굉장한 반대를 하자, 진시황은 가차없는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입니다. 과거에서부터 내려왔던, 모든 책을 불태워 버렸는데 그 책들 중에는 상제(上帝)하나님에 관한 기록, 바벨탑의 기록, 창세기의 기록이 많이 있었을 것인데, 그 책들을 태워 버리고, 그래도 살아있던 학자들이 계속 저항을 하자 생매장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닙니다. 신앙적 차원으로 볼 때는 유일신(唯一神)을 잘 믿던 중국이 바벨론적인 바알적인 신앙으로 완전히 떠나버린 사건입니다. 그러고도 여기저기서 유일신 사상이 들어올까 봐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아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여러 정보, 즉, "민주화 하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하는 소리들을 차단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국민들을 강제노동 시킴으로써 반역을 일으킬 소지를 없애고,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목적도 있지만, 실제로는 종교적-정치적 목적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입니다.
진시황(秦始皇)은 자기가 신(神)인 것처럼 살았고, 살려고 노력했지만, 중국인의 마음에 유일신(唯一神) 상제(上帝)사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회유책으로 상제(上帝) 신(神)도 인정하면서, 동서남북(東西南北) 각각에 더 중요한 신(神)이 있고 또 그 위에 태을신(太乙神)이 있고...... 라고 하면서 희석(稀釋)작전으로 들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말살(抹殺)정책을 폈지만, 2000여년 동안이나 믿어오던 신앙이 없어지지 않자, 상제(上帝) 신(神)을 격하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동서남북의 신과 태을신(太乙神) 등 여러 신을 만들어서 거기에 더 매력을 느끼도록 국가에서 주도를 해 버리자, 세월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중국 사람들은 여러 잡신(雜神)들 중에 하나가 샹따이(上帝) 신(神)인 것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진시황의 작전이 성공하였던 것입니다. 진시황 자신은 어마어마한 진시황릉을 만들고 수많은 장수들의 토용(土俑)을 만들고 죽었지만, 진시황 당대로 끝나버리고 다른 나라로 바뀌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진시황의 정책 이외에도 중국인의 종교심을 많이 변질되게 만든 사상 중 하나가 B.C. 500년경에 시작된 노자(老子)와 장자(長子) 를 중심으로 한 도교사상(道敎思想), 즉 Taoism입니다. 그리고 B.C. 500년경에 공자(孔子)가 태어나고 공자(孔子)의 유학(儒學)사상도 시작되고, 멀리 인도에서는 부처, 석가모니도 이 때쯤에 태어났습니다.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는 진시황때 이미 300여년 유행하였고, 불교(佛敎)는 오랫동안 들어오지 못하다가 한(漢)나라 초, B.C. 100년경에 중국에 들어 왔습니다. 가장 늦게 들어온 사상이 불교(佛敎)입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모든 종교적 기록을 다 불태운 줄 알았으나, 그 후 세월이 흘러 공자(孔子)의 허물어진 집을 수리하다가 벽 속에 숨겨둔 공자(孔子)의 기록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왼쪽 그림과 같이 대나무에 글씨를 써서 여러 개를 엮은 것이지요. 책(冊)字가 이래서 생겨난 것입니다.
공자는 산동성(山東城) 곡부(曲埠)의 동이족(東夷族) 출신 학자인데, 그의 저서(著書) '중용(中庸)'에서 제사(祭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많은 학문을 토대로 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의식들을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느니라." 결국 제사(祭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샹따이(上帝)'를 섬기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공자의 제자(弟子)중에 하나인 계로(중국말로는 치루)가 공자(孔子)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감히 죽음(死)에 대해서 여쭙고 싶습니다." 공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삶(生)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논할 수 있겠느뇨?"(孔子, 論語 11-11) 또 다른 제자가 물었습니다. "神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십시오." 라고 하자,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神에 대해서 논하겠느뇨?" 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孔子는 이처럼 겸손하고도 上帝하나님을 잘 섬기던 사람이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상제(上帝)하나님은 잊어버린 체, 공자를 신(神)처럼 받들고 이 유교사상 하나로 이조 500년 이후로 지금까지 많은 남녀노소를 괴롭히고 살아온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기독교를 믿지 않는 양반 집안에서는 아직도 유교사상으로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있지 않습니까? 진짜 공자(孔子)가 존중한 사상은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제사와, 조상(祖上)숭배와, 효(孝)의 진짜 근본이 무엇이냐?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시는 창조의 신(神) 상제(上帝)하나님을 그렇게 섬겨야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조상(祖上)만을 섬기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동안 큰 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이 평정되고 정리되면서 상제(上帝) 숭배사상은 다시 제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명(明)나라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회복하게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황제(皇帝)나 왕족(王族)이라는 특권층이 그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것을 악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른 쪽 사진은 중국의 황제가 살던 자금성(紫禁城) 한 중간에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祭壇)입니다. 하늘 천(天), 제단 단(壇)을 써서 천단(天壇)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천단(天壇)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우리나라는 더욱 더 상제(上帝)하나님을 잘 섬기던 나라였습니다. 고조선(古朝鮮)의 풍습이 상제(上帝)하나님을 섬기는 풍습이었고, 고구려(高句麗)의 국가 축제인 동맹(東盟)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부여(夫餘)의 영고(迎鼓)라든가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등... 우리 민족의 고유한 행사와 사상에는 전부 상제(上帝)하나님을 섬기던 사상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중국인의 종교적 배경으로 보나 역사적 배경으로 보나, 미궁에 빠졌던 갑골문자의 기원이 기독교 성경 창세기에 기록되어있는 인류 공통의 사건과 관련되어서 만들어졌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들이 나타나게 되었고, 연구분석 결과 수많은 갑골문자의 기원이 창세기의 사건에서 비롯되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저의 의견
위의 글을 보면 한국도 중국도 모두 심위일체이신 성경의 하나님과 일치되는 분을 신앙했던 것이 너무도 자명합니다.
정치와 사상의 변혁으로 인하여 종교가 많이 변질되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결론은 성경의 하나님을 신앙해야 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신앙한 우주와 만물의 통치자라는 하느님보다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천지 만물을 만드신 삼위일체인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그 분들의 궁극적 목적인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분 하나님중 한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죄를 해결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그 분이 오시기로 성경은 예언되어 있습니다.
우리 같은 뿌리를 가진 한국과 중국의 그 하나님의 뜻을 성경을 통해 배우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생활을 하도록 하십니다.
첫댓글 참고로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