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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그 무엇인가 희망을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군인들은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은 하루속히 퇴원할 날을 기다립니다. 결혼적령기에 든 청년들은 결혼을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의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힘든 현실 가운데서 기다리며 살아가는 두 노인이 나옵니다. 그들은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였습니다. 이 두 분은 매우 나이가 많았습니다. 보통 나이가 드신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별로 기다리는 것이 없습니다. 기다리더라도 자식들 오는 날을 기다립니다. 손자를 데리고 오려나? 이번 명절에 오려나? 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은 보통 사람들의 기다림과 달리 더 차원높고 고상한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우리성도님들은 어떤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통하여 어떤 분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하시는가를 잘 배우셔서 주님의 위로를 받는 성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째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는 임합니다. 25절 말씀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성경에는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그 앞에 어떤 지위나 직책을 소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왕 헤롯, 세리 레위, 제사장 사가랴. 백부장 고넬료. 그러나 시므온 앞에는 아무런 칭호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를 볼 때에 시므온은 특별한 사회적 명성이나 종교적 직분이 없는 평신도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영적이고 경건하였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세상 것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지금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를 받아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이후 지난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지 오래 되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경제적으로 가난하였고, 병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는 도대체 소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힘든 현실을 바라보며 탄식을 하였습니다.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을 욕하고 비난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잘 먹고 잘 살고자 허리띠 졸라매고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 시므온도 나이 많은 할아버지로서 힘도 없고 지위도 없고 무슨 기다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하루 하루 몸 건강하게 잘 지내다가 하나님 부르시면 가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이런 시대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를 부정적으로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 민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 그 날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주님께서 그 민족과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위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그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면 그 위로가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시면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이스라엘의 위로, 다시 말해 모든 인생들의 진정한 위로란 바로 주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탄생하신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지금 힘든 이 이스라엘의 처지를 누가 위로해 주고 치료해주고 회복시켜 줄 수 있습니까?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해 줍니까? 유대총독 빌라도가 해 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들도 모두 위로가 필요한 죄인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과 민족과 세계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슬픔과 질고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사 53장). 그 분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2:20).
많은 사람들은 "누가 내 인생을 위로해 준단 말인가?" "누가 나의 이 아프고 힘든 현실을 알고 이해해 주며 위로해 준단 말인가? 아무도 몰라. 난 혼자야 난 외로워." 그래서 친구를 찾고 애인을 찾고 술을 찾습니다. 그것으로도 안되면 강아지나 고양이를 통해서라도 위로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근본적으로 나를 위로해 주고, 내 인생을 회복시켜 주고, 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얼마전에 모 인기 영화배우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 옆에 진정으로 마음을 털어놓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참된 친구들이 있었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그러나 장례식장에 찾아온 동료들은 많았지만 살아 있을 때에 그녀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줄 만한 참된 친구는 없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외로운 존재들이요, 위로가 필요한 고독한 존재들입니다.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대로, 못 사는 사람은 못 사는 사람대로. 인기를 누리며 사는 스타면 스타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들 나름대로 다 외롭고 고독하고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섯 번이나 남자들을 사겼어도 외로웠던 사마리아 여인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세리로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예수님을 보고자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던 삭개오도 그 이름을 불러 주시며 그 외로운 내면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서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여인도 예수님께서 정죄치 않으시고 새 삶을 출발하도록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그 인생을 찾아가시면 그 어떤 인생도 위로 받고, 회복되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에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술집에서 외간 남자에게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아니면 강아지를 바라보며 위로받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주의 위로를 기다려야 합니다. 내 인생과 이 민족을 위로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데일리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조그만 그림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에는 썰물 때에 모리톱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배 한 척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노는 모래 위에 내 팽개쳐져 있고 배는 무척이나 낡은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처량하게 쓸모없이 내 버려져 있는 것 같은 패선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그림 밑에 쓰여져 있는 한 문장의 글 이였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오고야 만다"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온다"고 씌여 있었습니다. 지금은 썰물이 되어서 물이 다 빠져 나가서 이 배가 쓸모없이 모래톱 위에 버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밀물의 때가 되고, 그 때가 되면 그 밀물은 이 배를 물위에 띄을 것이다. 그때에 이 낡은 배도 반드시 쓸모있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바로 밀물의 때를 기다리는 이 낡은 배 한 척처럼 어떤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승리의 날을 늘 기다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썰물의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옵니다. 조용히 주의 위로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에게 주님의 은혜와 은총, 위로의 밀물이 몰려 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은 끝났어. 소망이 없어. 누구도 자살했다는데 나도 자살해야겠어." 이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찾아오시면, 그분의 사랑이 밀물처럼 몰려와서 내 인생의 배를 다시 물 위에 띄워놓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슬퍼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조용히 주님의 위로가 밀물처럼 임할 것을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은혜가 반드시 옵니다. 좀 더 기다립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다리면 반드시 주님의 위로와 은혜가 밀물처럼 올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시기를 당해서 쫓겨 다녀야만 했습니다.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나는 사심없이 충성을 다했는데 왜 왕은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인가?" 사울이 밉고, 세상이 원망스럽고, 하나님도 섭섭했을 것입니다. 이때 보통 사람 같으면 기다리지 못하고 쿠테타를 모의하거나 성급하게 사울 왕 암살을 계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주님의 위로가 그의 마음속에 임하였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비록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사랑과 보호로 위로해 주심으로 부족함이 없었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까지 높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반드시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술집도 가지마시고 사람만나 위로를 구하지 마시고 점쟁이한테 찾아가 위로를 얻으려고 하지마시고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의 위로를 기다린 시므온과 안나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들도 주의 위로를 기다릴 때에 반드시 주님께서 내 인생을 찾아 오셔서 나를 어루만지시고, 회복시키시고, 축복하실 줄을 믿습니다. 그러면 시몬은 주님의 위로를 어떤 자세로 기다렸습니까? 그는 경건하게 살면서 기다렸습니다. 25절을 보면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시대가 아무리 문란하고 막가는 시대라 할지라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시대풍조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시므온은 세상과 구별된 생활, 즉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경건한 삶이란 영어성경에 devout로서 주님께 드려진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즉 시므온은 자기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위로를 기다린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누워서 안일하게 시간만 보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위로와 축복이 임할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시므온이 의롭고 경건하게 자신의 그릇을 준비했을 때에 성령께서 그 위에 계셨다고 하였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들어왔을 때에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밝히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렇게나 살지 아니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애를 쓰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어주십니다. 아무리 되는 것이 없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고자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성령의 감화 감동을 주셔서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어렵다고 시대를 탓하고 환경을 탓하며 술로 게임으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며 인생을 아무렇게나 삽니다. 그러면서 막연히 어떻게 되겠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다리는 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위로의 성령님께서 내게 임재하셔서 내 갈길을 보여 주시고, 내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시도록, 죄를 멀리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예배드리는 자에게 주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36,37절을 보시면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 사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는 남편과 결혼해서 7년 같이 살다 사별하고 줄곧 혼자 살다보니 어느덧 84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안나가 어떻게 살아 왔습니까?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며 주의 위로를 기다려 왔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조금 기다리다가 응답이 없고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기도를 쉽니다. 더 이상 금식도 하지 않습니다. "금식해도 안될 것은 안되는가 보다, 기도해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가 보다" 하며 자신도 모르게 포기합니다. 그러나 안나는 혼자된 이후 줄곧 성전을 지키며 주의 위로를 기다리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안나는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로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이 백성을 구원해 주시도록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회복되도록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다음세대의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깨어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기다렸을 때에 마침내 메시야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주님의 위로를 체험하였을 때에 무엇을 하였을까요? 28절 말씀을 보시면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시므온은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시므온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나아가서는 만민을 구원하시고, 어두운 이방 땅을 비추실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반면에 안나 할머니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38절을 보면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안나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말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 이들은 모두 주님의 위로를 체험했을 때에 단지 자기들만 위로 받고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위로가 자기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 온 세상 만민들을 향한 위로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 위로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들은 억지로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격에 벅차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외쳤습니다. 그들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었습니다. 구원의 주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으니 한없이 감격스럽고 기쁨에 찼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이빨이 다 빠진 입으로 사람들에게 가서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이제 시므온과 같이 안나와 같이 주님을 찬송하고 이 어두운 세상에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전파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랑의 교회도 기다리던 주님의 위로를 받았으니 이제는 위로의 주님을 감격적으로 전파하므로 실의에 빠진 많은 자들이 위로를 받고 회복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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