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서초 촛불집회를 했습니다.
지난 7월 8일, 강남서초 지역 서울시교육감 선대본은 강남역거리에서 촛불집회를 했습니다.
당일 모인 인원은 150명 정도, 개인과 단체-함께하는 교육시민모임, 전교조 강남지회, 진보신당, 민노당, 강남 아고라 모임 등 이었습니다. 전날 강남 서초 지역선대본모임에서 결정했는데 결과적으로 서로를 확인하고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성공적인 첫 발자욱을 내딛었습니다.
강남역 6번 출구 파리 크라상 제과점 앞에서 저녁7시부터 9시까지 이어진 집회는 손팻말과 촛불 들고 강남대로 횡단보도 건너기, 교보사거리에서 강남역 사거리가지 두 줄로 촛불 행진, (100여명이 두 줄로 서니 그래도 제법 줄이 길더군요) 즉석발언, ‘미친 소 미친 교육 냉큼 그만 두시오’라고 쓰인 부채 나누어주기, 오후 8시 30분경 주경복 서울시교육감 예비후보가 참석하여 명함 등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모인 분들은 후보님 명함을 받아들고 후보님에게 ‘힘내라’고 격려의 말을 나누었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무더워서 인지 시민들에게 부채가 무척 인기였습니다.
강남서초 지역 선대본은 앞으로 7월 30일, 교육감선거 때 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강남서초 촛불집회를 할 것입니다. 강남 촛불집회는 강남 아고라인들은 7월 1일 4명으로 시작해서 현재 매일 만나 촛불집회를 해왔는데 점점 시민들의 반응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합니다. 강남 아고라인들은 이렇게 촛불을 들고 강남역을 거쳐 테헤란로 삼성동까지 행진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나도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어디서나 그렇겠지만 강남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기때문입니다.
어제 만난 강남아고라인들은 예상치 못할 만큼 많은 분들이 결합에 대해 일부는 당황, 한편으로는 연대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직장인분들, 카페지기를 포함해 여러 분들이 7월 17일 공식 선거 운동 날부터 열심히 선거운동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앞으로 운동진영은 기존의 운동권과 새로운 운동주체들이 결합해 훨씬 풍부해질 것 같습니다.
교육감 선거운동도 그러할 것입니다.
김정(2008.7.9)
신반포중 박영민선생님과 주경복서울시교육감예비후보와 함께, 강남역 파리크라상앞
이번 촛불집회에 나온 구호중 가장 아름다운 구호-"누운 풀 처럼 낮추시오"
세상이 이렇게만 될수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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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청앞에 만들어진 꼬뮨
(참세상 블로그 펌)
지난 7월 5일 집회는 제가 지금까지 참석한 촛불집회 중 최악의 집회였습니다. 대중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낮부터 비가 오는 데도 사람들은 모이기 시작했고, 저녁 7시가 넘어서면서 끝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6월 10일 이후 다시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두 시간 여 동안 집회가 진행됐고, 축소된 코스의 행진이 진행됐고, 다시 시청 앞에서 문화제가 진행됐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경찰의 저지선은 광화문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까지 내려와 있었지만 경찰과의 대치를 애써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시위대 내부에서 매우 활발했습니다. 곳곳에서 비폭력 평화를 외치면서 시위대를 훈계하려 했고, 심지어 어느 단체는 ‘폭력투쟁으로 시민들이 참여가 떨어진다’는 식의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종교계와 YMCA 같은 보수적 시민단체들은 평화감시단을 구성해서 시위대를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그렇게 통제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정이 되기 전에 밀물처럼 빠져나가버렸습니다. 투쟁도 없었고 축제도 없었습니다. 그냥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통제된 행진과 집회만이 있었습니다.
7월 5일 이후 벌어지는 상황도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이명박의 태도는 점점 강경해지고 있는데, 대책위는 ‘촛불 피로도’를 얘기하면서 주중에는 집회를 주최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시청 앞 광장은 경찰에 봉쇄됐고 참가 동력은 급속히 떨어졌습니다.
일요일과 월요일 이런 상황을 집에서 지켜보면서 화요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촛불집회를 나가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단 한 명이 아쉬울 때 옆에 그 한 명이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 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8일 오후에 집회를 나가기 전에 인터넷을 살펴보니 집회가 여의도 MBC 앞에서 언론노조 주최로 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시청으로 갈까? 여의도로 갈까?
시청은 경찰이 봉쇄하고 있고, 대책위도 포기한 곳인데 집회가 가능할까?
이런 상황에서 시청으로 간들 사람이 제대로 모일까?
시청 주변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그냥 두리번 거리다가 오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청에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시청은 촛불집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그 시청에서 촛불이 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사람들이 시청으로 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어제 같은 경우 저녁 7시가 넘으면 시청광장으로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고 해서 좀 일찍 출발했습니다.
저녁 6시 40분쯤 시청에 도착해보니 이미 시청 주변은 전경버스로 둘러싸여있었습니다.
다행히 사람들의 출입은 막지 않았지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주변에서 서성거리거나 바닥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 ‘촛불교회’라는 현수막과 함께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촛불집회를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을 하고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저녁 7시가 되자 교회 관계자 한 분이 마이크를 잡더니 ‘오늘 집회는 여의도 MBC 앞에서 합니다’라고 얘기를 하고 현수막을 철거해버렸습니다.
너무 황당한 나는 다가가서 ‘시청에서 촛불을 드는 것은 상징성이 있습니다. 단, 5분만이라도 촛불을 들다가 여의도로 갔으면 합니다’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시청에서 촛불을 들자는 제안이 있습니다. 촛불은 여러분의 자발적 의지로 진해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촛불을 드실 분들은 드셔도 됩니다’라고 얘기하고는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정말 황당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은 여전히 듬성듬성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10여 분쯤 지나니까 경찰마저 철수해버렸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나 혼자라도 촛불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근처 편의점에 가서 양초를 사고, 오는 길에 길가에 버려진 종이컵을 주워서 왔습니다.
그 사이에 대여섯 분이 촛불을 들고 작은 무리를 지어 앉아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촛불집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나이 칠십은 넘어 보이는 분이 자발적으로 사회를 보기 시작했고, 듬성듬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이면서 대오는 금새 50여 명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어린 축에 속할 정도로 의외로 나이가 드신 분들이 많았고, 꾀죄죄한 몰골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6월 22일 아침, 폭우 속의 투쟁을 마지막까지 남아서 지키고 대책위로 항의하러 갔을 때도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때는 젊은 사람들도 좀 있었는데, 이날은 젊은 20대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만 달랐습니다.
사회를 보시는 분은 과거에 야당활동 경험이 있는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 나이가 있어서 목소리가 작았지만 사람들은 그 얘기를 경청했습니다. 사회 보시는 분이 너무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바람에 자유발언 시간에는 선 듯 나서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좀처럼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하지 않는 저도 이번 촛불집회에서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가서 화나고 속상했던 얘기와 촛불을 시청 앞에서 이어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분이 한 시간 정도 진행을 하시고 집회를 마치려고 하면서 빠지자 사람들은 집회를 마치지 않고 계속 나와서 발언들을 이어갔습니다. 사회자가 없자 오히려 사람들은 더 많은 발언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절박함과 분노를 얘기했습니다. 거친 표현과 서툰 진행방식에 상관없이 토론은 진지했습니다. 폭력과 비폭력에 대한 문제, 투쟁에서 종교단체들의 역할에 대한 문제들이 토론됐습니다.
전반적으로 폭력의 정당성과 종교단체들이 투쟁을 물타기 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보다는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비폭력 주장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집회를 진행하다보니 고등학생들도 참여하기 시작하는 등 집회 참여자는 200명 가까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자 없이 진행하는 자유토론은 때로 중구난방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서로의 얘기를 경청하는 속에서 지지박수와 야유와 제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나이 많은 남성들이 발언을 많이 하면서 학생과 여성들의 발언이 적기는 했지만, 지도부도 없는 가운데 무지랭이들이 벌이는 토론은 그렇게 차분하면서도 때로는 격렬하게 진행됐습니다.
토론이 다소 길어지면서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한 사람이 토론을 그만하고 시청 주변을 행진하자고 제안을 했고, 사람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촛불을 준비해온 사람이 적어서 촛불은 많지 않았지만 두 시간 동안 자발적인 집회와 토론을 이어온 사람들은 시청 광장을 돌면서 ‘이명박은 물라나라’는 구호를 힘차게 외쳤습니다.
이날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지금까지 참여한 촛불집회 중에서 가장 즐거운 발걸음이었습니다.
이제 이 투쟁이 내 투쟁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면서 그 절박함과 당당함을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절박함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서 같이 느껴질 때의 그 동질감이 ‘투쟁 속의 동지’였습니다.
동지들 속에서는 입장이 다르더라도 기본 신뢰가 생기고, 토론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참여한 집회 중에 가장 작은 이날 집회는 나에게 그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대책위도 포기하고 경찰들도 무시해 버린 그곳에서 그렇게 꼬뮨이 만들어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