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작가 린위탕(林語堂)이 1976년 3월 26일 81세로 사망했다. 린위탕 하면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임어당이라면 무릎을 칠 사람들 많겠다. 요즘 세대야 '생활의 발견'에 홍상수 영화를 떠올리겠지만, 1960~70년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은 한국의 웬만한 집 책꽂이에 한 권씩 꽂혀 있던 책이다.
중국 푸젠성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상하이 성요한대를 나와 1919년 미국 하버드대, 그리고 독일 라이프치히대로 유학해 언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3년 귀국해 베이징대 영문학 교수가 됐고 1935년 영어로 쓴 중국문명론 <내 나라 내 조국>으로 호평받은 뒤, 다시 미국으로 가 근대 중국의 고민을 담은 소설 <북경호일(北京好日)>과 속편 <폭풍 속의 나뭇잎>을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1966년 대만으로 가서 정착했고, 영어와 중국어로 40여종의 책을 썼다. 1968, 70년에는 방한하기도 했다.
린위탕의 이력을 다소 길게 쓴 것은 그가 스스로 '서정철학(抒情哲學)'이라 부른 <생활의 발견>의 배경을 보기 위해서다. <생활의 발견>은 그가 1937년 영어로 출간한 일종의 인생론이다.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 이력에서 보듯 중국 출신의 근대인을 자처했던 코스모폴리탄 린위탕은 이 책에서 공ㆍ맹과 노ㆍ장 등 중국의 전통과 생활을 소개하고 동ㆍ서양의 문화를 비교하면서, 인생을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특유의 해학적ㆍ풍자적인 문체로 풀어보인다. 가정과 성, 술과 담배 등 소소한 일상생활부터 독서와 교양, 예술과 종교 이야기까지 그가 말하는 요체는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노네, 이내 몸은 반 부처에 반은 노자"라는 표현에 있다.
즉 중용의 삶인데, 근래의 '느림의 철학'과도 통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래도 세상이 달라진 모양이다. 구구절절 좋은 말씀인데도 21세기에 다시 읽어보는 <생활의 발견>은 어째 너무 여유롭고 한가하신 말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린위탕[ 林語堂 ]
1895. 10. 10 중국 푸젠 성[福建省] 룽시[龍溪]~1976. 3. 26 홍콩.
중국어와 영어로 다양한 작품을 많이 쓴 중국의 작가.
1930년대에 사회 풍자를 주로 다루고, 서구식 저널리즘을 전문으로 하는 중국어 잡지를 여러 권 창간했다.
중국 그리스도교 장로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린위탕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20대 초반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버리고 영어교수가 되었다. 1919년에 그는 미국과 유럽으로 가서 하버드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진보된 학문을 공부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계속 교편을 잡으면서 여러 영어잡지의 편집자로 일하는 한편 중국어 문학잡지에 수필을 기고했다. 중국에서 린위탕의 작가 생활이 절정에 도달한 것은 그가 〈논어 論語〉(반월간)라는 잡지를 창간한 1932년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중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유형의 서구식 풍자잡지였다. 이 반월간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곧 2개의 출판물을 더 선보였다.
1935년에 린위탕은 수많은 영문저서 가운데 첫번째인 〈내 나라 내 민족 My Country and My People〉을 출판했다. 출판 즉시 대성공을 거둔 이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오랫동안 중국에 대한 권위있는 교과서로 간주되었다. 이듬해 대중적 요구에 부응하는 역사 이야기와 소설을 쓰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가, 빠른 속도로 책을 써냈다. 이 시기에 출판된 저서로는 〈북경호일(北京好日) Moment in Peking〉(1937)·〈생활의 발견 The Importance of Living〉(1940)·〈폭풍 속의 나뭇잎 A Leaf in the Strome〉(1941)·〈중국과 인도의 지혜 The Wisdom of China and India〉(1942) 등이 있다.
린위탕은 1943년과 1954년에 잠시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이때마다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런 논쟁은 문학에 대한 그의 견해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공산당의 문학 비평가들은 대부분 순수 선전과 사회 교육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자기 표현으로서의 문학을 지지했다. 2번째 중국 여행이 실패로 끝난 뒤, 그는 미국에 남아서 중국 역사와 철학에 대해 더 많은 책을 썼다. 〈중국 명작 단편집 Famous Chinese Short Stories Retold〉(1952)을 비롯하여 그가 영어로 번역한 중국 문학의 걸작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이트 백과사전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이요, 중국인들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이다” 린위탕은 중국인의 유한자적 기질 찬미했으나 바쁜 미국인보다 더 바빠진 중국인 그를 통해 ‘노장의 천성’ 되찾고자 하는가
» 린위탕은 “중국인들은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깝다”며 중국인의 유한자적 자질을 찬미했다. 그림은 노자가 늙은 소를 타고 두루 돌아다니며 자연방임과 무위를 즐기는 모습.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⑦
한때 나는 린위탕(임어당)의 책을 보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적(閑適, leisure and comfortable), 성령(性靈, human spirit), 유머를 주장한 그의 사상이 너무 한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가 쓴 루쉰의 추도문을 읽게 되었는데, 그 후 나는 린위탕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 린위탕이 루쉰을? 그것은 루쉰을 문인이라기보다는 <수호지>에 나오는 노지심(魯智深)과 같은 전사(戰士)로 아주 생동감 있게 묘사한 독특한 추도문이었다. 루쉰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애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그 속에는 은은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루쉰과 나는 두 번 서로를 얻었고, 두 번 멀어졌다. 그 두 가지는 모두 저절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루쉰과 나 사이에 고하나 우열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줄곧 루쉰을 존경했다. 루쉰이 나를 알아봐 주었을 때 나는 서로 알게 된 사실을 기뻐했고, 루쉰이 나를 버렸을 때도 나는 후회는 없었다. 대체로 본 바가 서로 다르기도 했고 같기도 했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데 절대로 사사로운 감정은 없었다.”
바쁜일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라
린위탕은 1936년 8월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사실 궁지에 몰려 있었다. 국민당과 좌련(左聯)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더욱이 루쉰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영문으로 쓴 <내 나라 내 국민>이라는 책이 국외에서 반응이 좋았다. 펄 벅의 초청도 있고 국내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공포 등이 겹쳐 그는 미국행을 단행했다. 사실 “구망(求亡, 망국을 구하는 일)이 계몽을 압도하던” 시기에 그의 유머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다. 몇 달 뒤 루쉰은 죽었고 린위탕은 뉴욕에서 루쉰의 부음을 접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글을 보고 린위탕에 대해 ‘애정’이 생겼다. 그 후 서가에 오랫동안 외롭게 꽂혀 있던 <생활의 발견>(1937)을 발견했다. 책을 펴자 “사람이 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는 공자의 말과, “세상 사람들이 바쁘게 서두르는 일을 한가롭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세상 사람들이 한가하게 받아들이는 일에 바쁠 수 있다.”는 장조(張潮)의 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전에도 알고 있는 말이었건만 내가 변했는지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둘 다 변했는지 아주 새롭게 와 닿았다.
» 1919년에 결혼한 린위탕이 신방을 차렸던 집. 샤먼의 구랑위라는 작은 섬에 있다. 린은 여기 살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곳엔 지금도 그의 부인의 조카가 살고 있다.
공자의 이 말은 “길이란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차차 생긴 것이다”라는 루쉰의 말과 그다지 거리가 멀지 않게 느껴졌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진리를 ‘자유롭게’ 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공자에서부터 루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는 중국적 전통이 아닐까. 사실 마오의 대장정이라는 것도 국민당의 포위에 몰려 도망치다가 항일을 기치로 새롭게 만들어낸 길이 아니겠는가. 병불염사. 병법에서는 적을 속이는 것도 꺼려하지 않는 법. 규칙이 없다는 것이 유일한 규칙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별안간 뜬금없이 들었다.
또한 <유몽영(幽夢影)>이라는 책에 나오는 장조의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엔 바쁘고 정작 중요한 일에는 한가하다고 자주 비판받는 나를 위해 준비해둔 말처럼 들렸다. 사실 이 말은 린위탕이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으로 유명하고, 중국인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하면서 중국인의 “위대한 유한자(悠閑者)”적 기질을 찬미하고자 사용한 말이지만…. 정말 지금도 베이징의 골목이나 공원에 가보면 이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몽영>은 특히 요즘 같은 휴가철에 나무 그늘 같은 곳에 앉아서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해가면서 읽기 좋은 책이다. 몇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힐 수 있지만,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 “자신을 다스릴 때는 가을 기운처럼 해야 하고, 처세는 봄기운처럼 해야 한다.”, “젊은이는 노인의 식견을 가져야 하고 노인은 반드시 젊은이의 흉금을 가져야 한다.” 등등
‘유몽영’ 구절 휴가철에 곱씹을만
린위탕(1895-1976)은 푸젠성 룽시현(현 장저우)에서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에 아주 독특하게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교회에서 세운 학교에서 주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상하이의 성 요한대학 졸업 후 베이징 칭화학교(현 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나중에 서양에 중국문화를 알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한 그였지만 이 당시까지 그는 중국문화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다. 교사생활 동안 <홍루몽> 등을 아주 열심히 공부하면서 중국문화에 대한 기초를 비로소 다지게 된다. 당시 칭화대학에는 3년 동안 재직하면 학교에서 유학을 갈 수 있게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규정이 있었다. 보조금은 매월 40달러. 3년 후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마치고 다시 독일로 건너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 린위탕.
재미있는 일화 하나. 린위탕은 유학 시절 후스(胡適)로부터 두 번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한번은 미국유학 시절 아내의 수술 때문이고 다른 한번은 독일에 있을 때 매달 보내오던 칭화대학의 보조금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시 돈으로 모두 1500달러. 린위탕은 베이징 대학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한 후 바로 후스를 찾는다. 그러나 그때 마침 후스는 휴가를 내고 남쪽에서 요양 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린위탕은 이 돈을 평생 갚지 못한다. 나중에 후스 사후에 린위탕이 토로한 이야기다. 후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았고 사상적으로도 가까웠지만 귀국 후 의외로 루쉰이 이끌던 <어사>파에 가담한다. 이 잡지는 후스의 <현대평론>파와 당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글쓰기 연습을 하는 듯한 <현대평론>보다 진심을 토로하는 <어사>의 방일(放逸)한 논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베이징 여자사범대학 사건 때 린위탕은 루쉰과 함께 학생 편에 서서 교육계와 학교 당국에 맞서기도 하고 중국민권보장동맹회의 중요 멤버였던 ‘운동권’ 교수였다. 그들은 동료였지만 루쉰이 린위탕보다 14살이 많았다. 루쉰과 그의 동생 저우쭤런의 영향하에서 린위탕은 도가사상과 만나게 된다. 루쉰과 저우쭤런은 모두 도가와 도교가 중국문화와 중국인의 민족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 바가 있었다. “우리들(중국인)은 공부자의 팻말을 걸고 있지만 그러나 모두 장자의 사숙제자이다.” 루쉰의 말이다. <내 나라 내 국민>에서 린위탕은 “중국인들이 천성적으로 노장사상에 가까운 것이 교육을 통해 공자사상과 가까워지는 것보다 심하다.”라고 주장하였다.
루쉰 영향으로 도가 심취
미국으로 건너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출판한 <생활의 발견>(참고적으로 말하면 중국판 제목은 ‘生活的藝術’이다)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심미적인 눈으로 생활을 즐기라고 하는 도가의 주장이 중국인의 생활을 예술화시켰다고 설파했다. 또한 <홍루몽>의 체제를 모방한 <경화연운(京華煙雲>(1939)을 창작하는 등 미국에서 생활했던 30년 동안 왕성한 집필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40년대에 들어서 급격히 장제스의 국민당에 기울면서 공산당을 비판하기도 하고, 1966년에 타이완에 정착하는 등 대륙과는 거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대륙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연설과 여자의 치마는 짧을수록 좋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식 난방이 된 영국 스타일의 방에서 중국인 주방장을 고용하고 프랑스 여자 친구를 사귀며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다” 우리도 예전에 언젠가 듣고 함께 웃었던 ‘통 큰’ 유머가 계급투쟁에 몰두했던 중국에서 환영받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츰 그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다가 작년에는 관영 <중국중앙텔레비전(CCTV)>에서 이미 80년대 말에 타이완에서 드라마화되었던 <경화연운>을 다시 제작해서 대히트하는 등 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했다.
최근 중국을 다녀온 사람에게 소감을 물으니 한마디로 “중국은 공사중”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미국인들은 위대하게 바쁜 사람으로 유명하고, 중국인은 위대하게 게으른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했지만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서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은 미국인보다 훨씬 바쁘게 살고 있고, 또 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한가함을 노래한 그의 책들이 새롭게 환영받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신좌파’적인 루쉰과 자유주의적인 후스 사이에서 또 다른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지금까지 우리말 번역판 수십 종이 나왔던 <생활의 발견>으로 유명한 린위탕. 그는 소설가, 중국 고전 번역가, 산문가, 문예비평가, 언어학자, 문명비평가였다. ‘생활과 사상의 소박함이야말로 문명과 문화의 숭고하고도 건전한 이상’이라 말했던 그는, 중국 문화를 서양에 널리 알린 사람이면서도 당대 중국의 현실에는 눈감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동양은 직관적인 통찰로 현실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을 보이고, 서양은 분석적, 이론적 추리로 반응을 보인다. 동양은 그 철학에서 진실로 감정이 중요한 구실을 하지만, 서양에는 그런 철학이 거의 없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서양처럼 군사, 정치 등 어떤 여건에서도 좀처럼 통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중국의 도(道)는 서양의 진리 개념처럼 추상적,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가치가 되어 인생과 관계되는 진리다. 오늘날에는 동양사상의 비중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만큼이나 맑은 외모를 지닌 링위탕
1968년 6월 18~20일 서울 경희대학교와 워커힐에서 31개국 154명의 대학 총장 및 학자들이 참석한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의가 열렸다. 한국에서 열린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국제학술대회였기 때문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개막축사를 하는 등 큰 관심을 모았다.
린위탕은 대학 총장은 아니었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참석했다. 그는 6월 19일 서울시민회관 강연에서(‘전 인류 공동 유산의 추세’) 위와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대한뉴스 681호가 전하는 린위탕의 다음과 같은 강연 내용.
“비틀즈풍은 부잣집 자식들이 복에 겨워 누리는 폐풍에 불과한 것이며, 건설도상 국가의 젊은이들이 흉내 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비틀즈가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얼마나 큰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대한뉴스가 린위탕의 진의를 제대로 옮겼는지 여부를 일단 접어두고 보면). 또한 린위탕이 지녔던 일종의 문화보수주의적 태도,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그는 1970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37차 국제펜클럽대회에도 참석해 ‘동서문화의 유머’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린위탕은 복건성 평화(平和)현 남부 판자(坂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허러(和樂)였고 중학교 때 위린(玉霖), 대학 입학 후에는 위탕(玉堂), 1925년 이후 위탕(語堂)이라는 이름을 썼다. 아버지는 상인 출신의 목사였다. 소학교부터 기독교학교를 다니며 서양문화의 세례를 받았고, 자신의 집에 기거한 미국인 전도사의 영향을 받아 12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1912년 17살 때 상하이 세인트존스대학에 입학하여(1916년 졸업) 광범위한 독서에 탐닉했고, 칭화학교(칭화대학의 전신)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며 비로소 중국 전통 문화와 고전 지식을 집중적으로 쌓았다.
고향 마을 처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가 실명한 조부를 돌보느라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이별해야 했다. 대학 시절에도 여대생을 사랑했지만 린위탕의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여성 쪽 부모가 반대하여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의 권유로, 상하이 세인트메리학교를 졸업한 랴오추이펑과 1919년 유학을 떠나기 직전 결혼했다. 훗날 어느 서양인이 자유연애가 아니라 부모가 골라준 신부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부모를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에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나요?”
칭화학교에서 유학 보조금을 받아 하버드대학에서 비교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지만 보조금이 끊어져 곤란을 겪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독일 예나대학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라이프리치대학으로 옮겨 1923년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베이징대에서 비평과 언어학을 가르쳤고, 1925년에는 베이징사범대학 강사, 베이징여자사범대학 교수 및 교무처장이 됐다. 이 시절에 대한 회고다. “나도 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깃대와 벽돌을 들고 경찰들과 싸웠다. 경찰은 부랑아들을 고용하여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게 하여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때 나는 내 야구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1926년에 복건성 하문(厦門)대학 문과 주임교수로 옮겼지만 이듬해 1927년 3월 우한(武漢) 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비서로 초빙 받아 한 때나마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같은 해 9월 우한정부가 소멸한 이후 상하이로 옮겨 문필가 생활로 일관했다. 귀국 후 1920년대 말까지 그는 루쉰이 주도하여 1924년 창간된 주간지 <어사>(語絲)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 시절에 대한 회고다. “배워서 여유가 생기면 벼슬이나 하려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쓰는 이들이 싫었다. 우리는 매 개인이 모두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을 해야지 남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스타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리는 <어사>를 우리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와 말이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있는 공원으로 여겼다.”
1920년대 린위탕은 언어학자이자 문예평론가로서의 면모가 강했지만, 30년대 이후부터는 산문가, 번역가로서 중국 문화를 서양에 소개하는 일에 주력했다. 1936년 8월 린위탕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을 무대로 전업 문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 이주에는 작가 펄 벅의 권유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린위탕은 이미 1935년에 미국에서 출간한 <내 나라 내 국민>으로 미국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고, 1937년에 내놓은 <생활의 예술>(영어 원제는 The Importance of Living. 우리나라에서는 <생활의 발견>)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서도 한 두 해에 걸쳐 벅역판이 새롭게 출간되는 <생활의 발견>. 94년 일신서적,95년 범우사,99년 문예출판사,06년 혜원 출간(왼쪽부터)
미국에서 린위탕은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는 글을 자주 기고했고 1940년과 1943년에 잠깐 귀국해 강연했지만, 중국 문예계에서의 영향력은 크지 못했다. 그는 <경화연운>(1939), <풍성학려>(1941), <당인가>(1948), <주문>(1953) 외의 많은 소설과 <소동파전>(1947), <노자의 지혜>(1948), <장자>(1957), <측천무후>(1957) 등 중국 문학, 사상, 고전 관련 책도 발표했다. 그가 낸 책은 중문, 영문을 합쳐 50여 권에 달한다.
1954년에는 싱가포르에 화교들이 세운 난양(南洋)대학 교장(총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학교 측과의 마찰로 반 년 만에 그만 두었다. 1967년 홍콩 종원(中文)대학 연구교수로 초빙되어 <당대한영사전> 편찬 책임을 맡아 1972년에 출간했고, 1975년 <경화연운>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린위탕은 3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고 집도 사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미국 국적을 취득하라 권했지만, 이곳은 내가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을 사지 않고 월세를 내며 살았다고 말해주었다.”
『중국은 실천을 중시하고 서양은 추리를 중시한다. 중국은 정을 중시하고 서양인은 논리를 중시한다. 중국철학은 천명을 따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임명안심(立命安心)을 중시하며, 서양인은 객관적인 이해와 해부를 중시한다. 서양은 분석을 중요하게 여기며 중국은 직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서양인은 지식추구에 중점을 두고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중국인은 도의 추구를 중시하여 행동의 도를 추구한다.』(<동서 사상의 차이> 중에서)
『중화 민족을 서양 국가와 비교해보면 진취성이 모자라고 보수적이며, 용감하고 의연한 정신이 모자란다. 반면 인내심이 매우 깊다. (…) 중국 문화는 정적인 문화고, 서양 문화는 동적인 문화다. 중국은 음(陰) 위주이고 서양은 양(陽) 위주다. 중국은 정(靜) 위주고 서양은 동(動) 위주다.』 (<중외의 국민성> 중에서)
많은 서양인들에게 린위탕은 중국과 서양을 비교하면서 특히 중국 문화의 특징을 입담 좋게 해설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가 펼친 중서(中西) 문화비교론의 핵심을 위의 인용에서 엿볼 수 있다.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중국과 서양의 문화적 특징을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단순하게 대비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물질의 서양과 정신의 중국,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서양과 보수적이고 정적인 중국이라는 통념적인 이분법이 자리 잡게 하는 데 린위탕의 역할이 컸다는 비판적 지적도 있으며, 그러한 이분법에 대해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린위탕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재치, 위트, 유머, 풍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여유로운 관조가 돋보이는 산문가이자 중국과 서양 문화의 가교 구실을 한 문명비평가. 중국의 복잡다난한 현실에서 사실상 도피하여 한가로운 글줄이나 희롱한 딜레탕트. 이러한 상반된 평가에는 모두 일리가 있다. 굴곡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 중국의 많은 학자, 작가, 사상가들에 비하면 린위탕은 분명 한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를 비교론적 시각에서 흥미롭게 논하고, 인생의 여유와 운치가 물씬 묻어나는 특유의 산문으로 하나의 경지를 이룬 문필가였다.
만년의 그는 타이완과 홍콩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타이베이 교외 양음산 기슭에 세낸 정원이 딸린 저택에서 은거하기를 좋아했다. 1971년 큰딸이 자살한 뒤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고 급격히 병약해졌다. 1974년 타이완 문화계가 열어 준 80세 생일 파티 이후 외부 생활을 사실상 마감하고 1976년 82세를 일기로 홍콩에서 세상을 떠나 양음산 기슭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