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나..
내가 1960년대부터 77년대 초까지 살았던 집 바로 뒷편 도로이다.
아버지의 집에서 걸으면 불과 몇 분 안에 갈 수 있는 곳.
아버지의 집은 오래 전에 넘어갔고,
지금은 내가 소유한 땅의 바로 뒷편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다.
1982년 아버지는 폐암인데도 지방법원에서 토지 소유권에서 승소했다.
땅을 서로 맞바꾸기로 약속했다.
상대방은 도로변의 땅을 차지하고는 차액이 나는 땅값을 주지 않았다.
어음수표로만 주고.
아버지 돌아가신 뒤인 1982년 상대방이 고등법원에 제소했다.
나는 서울에서 살기에 대전 변호사가 아닌 서울 변호사로 교체했더니만 말도 안 되는 판결로 패소.
내가 대법원에 다시 제소했으나 대법원에서도 최종 패소.
1차 재판 때 살아계신 아버지 편으로 증언했던 증인이 아버지 돌아가신 뒤 나한테 돈을 요구했다.
자기 말에 따라서 재판의 승패가 판가름이 난다고 말했다.
그 당시 나는 공직자이기에 무슨 돈이 있으랴.
땅 등기등본에 나온 소유 일자, 분활등기의 몇 필지에 대한 숫자를 보태고 빼면 되기에.
그런데 나는 두 차례나 패소했다.
나는 배웠다.
민사재판에서는 어떤 변호사, 판사들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도 안 되는 저급자들이라고.
초등학교 2학년 수준도 안 되는 셈도 못하는 사기꾼들이라고.
보태기 빼기 하면 땅의 면적이 나오는데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위증자의 말만 따랐다.
나는 그 위증자를 형사고소하여 6개월 징역살이를 시켰으나 땅은 끝내 빼았겼다.
상대방은 돈 많은 이북사람.
나는 서울에서 사는 공무원, 돈 없는 사람.
사기꾼인 위증자는 여러 차례나 부동산 위증으로 돈을 받았다고 한다.
나한테 걸려서 징역을 살았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민사인 경우에는 어떤 변호사, 판사인 너희들은 끼리 끼리이지. 똑 같은 것들이지.
그 당시 그 좁은 대전 시내에서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법조인들이었지.
어떤 변호사, 고등법원의 어떤 판사, 대법원의 어떤 판사들은 지금도 나한테는 개XX들이다.
돈 앞에서는 그 어떤 짓도 하는 게 법조인인가? 전부는 아니고 어떤 법조인이다.
으능정이 거리의 도로에 접한 땅은 상대방한테 넘겨주고 나는 뒷골목의 땅이나 차지했다.
내 소유의 땅과 합산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는 뜻으로써 화를 참아야 한다. 지금도...
땅값 차액은 전혀 받지 못했다.
그 자도 죽었고.
내가 1977년 말에 대전을 떠났으니 2019년 2월인 지금에는 벌써 42년 째이다.
내가 차지한 골목 땅은 자꾸만 죽는다. 대전시내 원도심지역은 계속 노후화되어 간다.
아버지 생시의 공시지가보다도 현재에는 무려 1/3이나 떨어졌다.
으능정이 바로 은행동 65번지 일대이기에 나는 바로 그곳에서 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다.
일제시대부터 살았던 할아버지,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수십 년째이고, 손자이자 아들인 나는 지금에는 중노인이다.
정말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패소한 뒤에 화가 나서 나는 대전 은행동에 내려가지 않는다.
지금 어떻게 그곳이 변화되었는지도 모른다.
땅이야 누가 훔쳐가지 못할 터.
내가 은행동 중교통에서 대전여중 쪽 이층집(일본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가 1960년이니 벌써 59년 전이다.
대전 은행동에서 초중고를 다녔고...
으능정이 거리.
공주갑부 김갑순의 땅이 있는 지역이다.
현재의 대전역에서 목척교, 중교통, 선화동 일대의 수십 만 평의 땅을 가진 땅부자였고 친일파였다.
경부선 철도를 놓을 당시에 한밭 자기 땅 부근에 옛 도청을 유치하려고 자기 땅을 내놓았다.
하나의 예이다. 내 할버지, 아버지가 살았던 이층집은 일본집. 은행동 이 일대가 전부 김갑순네 땅.
내 할아버지, 아버지도 김갑순네 땅을 샀다.
김갑순 씨가 죽은 뒤 그의 자식들(이복형제) 간에 재산싸움으로 땅을 먼저 팔아서 갖는 자가 장땡이었다.
이복형제간의 싸움으로 그 많던 땅은 다 사라지고, 그의 이름도 사라졌다.
공주갑부 김갑순과 내 할아버지는 인맥은 있었을 것 같다.
모두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하나의 문학글에서는 어떤 사람한테는 많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숨겨진 옛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글감 하나를 얻었다.
오늘은 만 4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삿날이다.
제사 준비를 해야겠다.
3월 초순 경에 서해안 시골집에 다녀와야겠다.
어머니가 다섯 살이던가, 일곱 살이던가, 아버지(나한테는 외할아버지) 등에 엎혀서 이사 온 집에서 어머니는 평생을 살았다. 섣달그믐이 생일인 어머니는 2015년 설 쇤 뒤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
서해안을 내려다보는 산에 합장 무덤으로 남은 어머니와 아버지.
갯바람 넘어오는 산골마을 산말랭이에서 서해바다를 내려다보아야겠다.
솔바람 솔소리도 듣고. 이제는 아름들이 소나무가 너무나도 크고, 울창해서 시야를 가린다. 서해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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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보탤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