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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묵상글 (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 우리는 모두 집사이고, 집사일 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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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0.23 05:03
- 우리는 모두 집사이고, 집사일 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인과 종의 관계 얘기인데
어제는 주인을 기다리다 맞이하는 종에게 주인이 시중드는 얘기입니다.
주인의 종들을 돌봐야 할 책임을 맡은 집사에 관한 얘기입니다.
오늘은
그러니까 둘 다 종은 종인데
어제의 종은 주인에게 시중받는 행복한 종의 얘기이고
오늘의 종은 주인께 선택받은 책임이 막중한 종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어제의 주인은 어머니같이 따듯한 주인인 데 반해
오늘의 주인은 아버지같이 책임을 추궁하는 엄한 주인입니다.
어제의 주인은 종에게 직접 밥을 차려주고 시중듭니다.
이때 종이 할 것은 나갔다가 급히 돌아와 밥을 차려줄
엄마를 아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듯 깨어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은 자기를 대신해서 종들의 밥을 차려주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때 이런 책임을 맡은 종이 해야 할 것은
주인이 돌아올 때를 오직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그러한 한가한 것이 아니라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맡겨진 자기 책임을 충실히 다해야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올 때도 깨어 기다려야 하지만
종들에게 약식을 나눠줘야 할 때도 챙겨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그러므로 주인과 종들 사이에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인 집사는
주인과 종들에게 이중으로 충실해야 합니다.
주인에게는 인격적 충성스러움이고 종들에게는 일적인 충실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종의 충실함뿐 아니라 슬기로움에 대해서도 봐야 합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 대한 충성과 맡겨진 일에 대한 충실뿐 아닙니다.
슬기로움도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주제랄까 꼬라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자기 꼬라지를 모르고 꼴값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꼬라지는 집사일 뿐이고 그러니까 여전히 종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마치 주인이나 된 듯 술이나 처먹고 종들을 부리면
그것은 꼴값하는 것이고 자기 꼬라지를 모르는 대단한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슬기로움은 겸손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양식을 제때 종들에게 먹인 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라고
주인이 칭찬할 때도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종일 뿐입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좋건 싫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종들이고 집사들입니다.
본당에서건 가정에서건 그리고 심지어 직장에서건 우리는 집사들입니다.
본당 신부라고 해서 본당의 왕이 아니고 주님 대신 양들을 먹여야 할 집사이듯
단체장이나 부모나 직장의 책임자들도 주님으로부터 책임이 맡겨진 집사들이고,
충실함과 슬기로움이 모두 요구되는 종들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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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아이돌 가수가 자기의 연습생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는 얼마나 해야 열심히 한 것인 줄 몰라서 계속 연습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코피가 나면, ‘아! 오늘 연습 좀 했나 보다.’ 싶었다고 말합니다. 텔레비전에서 멋지고 화려한 모습의 아이돌을 보지만,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열심히 해서 코피 나본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 코 후비다가, 또 친구가 던진 공에 맞아서 코피 난 것 외에는….
그러다 문득 들은 생각은 ‘그렇게 열심히 해야 살 수 있는 세상일까?’라는 것입니다. 아이돌 연습생들 숫자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코피를 쏟을 정도로 열심히 해도 데뷔하지 못하는 연습생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즉, 열심히 해도 결과를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번아웃 증후군(만성적 스트레스 증후군)이 나타난다고 하지요.
노력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어떤 행사를 위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예행연습까지 하며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당일 엄청나게 비가 오면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노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이를 인정할 수 있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쓸데없는 것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안에서의 의미를 찾고 이를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 따르는 것 역시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닌, 과정 안에서의 의미를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주님 따르는 것 자체에서도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명심하여라.”라고 하시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을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이 준비는 무엇일까요? 코피 쏟을 때까지 일하면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사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시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채우고 있다면 주인이 오시는 날 큰 후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서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정말로 열심히 노력했다 하더라도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자주 죄에 빠지고 맙니다. 즉, 우리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또 곧바로 주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큰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 곁에 충만하게 내려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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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람을 사랑하는 것만큼 예술적인 것은 없다(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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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앞 장면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에 이어,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단지 잠들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깨어있으려면, 먼저 ‘대체 무엇이 맡겨졌고’, ‘무슨 일이 맡겨졌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먼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사실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곧 ‘나에게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양식은 이미 정해져 주어졌고, 그것을 때에 맞추어 소홀함이 없이 잘 챙겨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 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은 ‘슬기로움’으로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일입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저는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하오니,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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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 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맞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몽땅 차지했으니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아는 만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 집행과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직분은 그가 누릴 수 있는 영광이나 권리이기보다는 책임입니다. 저는 한 기관의 책임자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저는 철저히 ‘을’이었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카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고민입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저런 모양으로 잠시 관리하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12,40). 하느니의 자녀로 뽑힌 우리는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혹 이미 많이 받았는데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를 많이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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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파란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파랗게 보입니다. 빨간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빨갛게 보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진흙 속에서 피는 꽃을 볼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보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게 됩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초등학생 때는 중학생이 부러웠습니다. 그러면 더 많이 알고, 더 잘할 것 같았습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 고등학생 때는 대학생이 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사제 생활 33년을 했지만, 상황이 바뀐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였습니다. 과거의 굴레에 잡혀있으면,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린다면 현재는 늘 근심과 걱정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몸을 맡기고, 즐기면 언제나 마음은 햇살 가득한 날들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중세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보속으로 인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희생하셨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중세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관념의 세계를 따르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도 없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현대교회는 연대와 소통의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또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고백성사를 통해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민족, 사상의 벽을 넘어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자연과 생명과 연대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댕, 메튜 폭스, 토마스 베리, 토마스 쿤과 같은 분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을 넘어서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라틴어 격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Hodie mihi Cras tibi)” 우리가 언제 하느님의 품으로 갈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순교성인들은 행동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로 깨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순간에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순교성인들에게 지복직관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부모님께서도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였고, 늘 기도하였고, 항상 기쁘게 사셨습니다. 그러니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도록 해야겠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던 것처럼, 오늘 나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등불을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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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한 구절을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이 말씀을 선택할 것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신부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과 행실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모르는…. 그러니까 아프리카 오지 같은 곳 즉, 하느님을 알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천국에 가는 건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느님을 배우지도, 알 수도 없는 곳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이미 하느님은 우리 인간 안에 선함을 넣어놓으셨습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또한 하늘나라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하느님께서 각각의 사람들을 보고 그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늘 유념해야 하는 것은 위에 적어놓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 말씀을 들었고 그분이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용서했고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께 겸손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지도, 알 수도 없었던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큰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려온 말씀이 늘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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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
어느날 뉴스에서 이런 말이 들려왔습니다.
‘반려동물 시장은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점점 성장하여 10년 동안 00퍼센트의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성장세가 이어질 전망입니다.’
예전에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을 ‘가축’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축은 지금의 반려동물과 조금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가축은 그 쓰임이 주로 돈벌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동물을 키우고 팔아서 자녀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서 키우는 동물의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마음을 나누고 추억을 쌓고 외로움을 달래주는 가족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된 모든 것이 서로 함께 상생하는 것이 하늘에서 바라는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껴봅니다.
‘너와 나’ 뿐만 아닌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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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책임을 다하는 믿음의 정주(定住)
종신불퇴(終身不退)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이사12,3)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읽은 뉴스의 두 제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평화와 대화의 건설자’(a builder of peace and dialogue)였다.”
“시노드는 멕시코에서 살해된 ‘평화의 전사’(warrior of peace)인 사제를 위해 기도하다.”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요 사랑입니다. 모름지기 공동체 지도자는 평화와 대화의 건설자로, 또 평화의 전사로 책임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또 금정산의 범어사를 찾은 모 정치지도자에게 주지스님과 방장스님이 선물했다는 액자의 글귀가 마음에 와닿아 나눕니다.
“무구무애(無垢無碍,인생을 살면서 허물이 없으면 걸릴 것이 없다)”
“감인대(堪忍待,견디고 참고 기다리라)”
이 또한 책임을 다하는 자들이 마음에 담아야 할 교훈입니다. 어제는 매월 갖는 수도원을 사랑하는 예수성심자매회 회원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자매들입니다. 미사를 봉헌하고자 피정집을 향하는 순간 떠오른 말마디 “늘 깨어 있어라!” 강론에 추가했습니다. 어제 강론은 너무 강열해 제가 쓴 강론이지만 잊지 못합니다.
“깨어 있음은 개방입니다.”
참 중요한 말마디를 잊은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이요 벽이 아니라 문인 사람입니다. 주변에 환히 활짝 열려 있는 빛같은 사람이 진정 깨어 있는 자유로운 사람, 욕심없는 사람, 질투나 분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깨어 있을 때 죄도 짓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을 잊을 때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예수성심자매회가 설립된지도 거의 20년이 됩니다. 수도원이 곤경중에 있을 때 시작된 자매회요 이때부터 20년간 총무와 회장 책임을 다한 자매의 진솔한 고백을 잊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해 공동체를 추스르기에 많이많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40대 중반의 젊음이 이제 60대 후반의 할머니가 되고 있는 분입니다.
새삼 감동한 것이 자매님의 책임감입니다. 20여년간 참으로 성실히 책임을 다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했습니다. 추상적 믿음이나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 사랑이 감동을 주고 이런 책임을 다할 때 구원이라 믿습니다. 말없이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삶에 옛 어른의 말씀도 도움이 됩니다.
“말이 많아지면 어느새 쌓인 말들이 행동을 앞서게 된다.”<다산>
“말이 많으면 빨리 궁해지니 차라리 속을 비워 지키느니만 못하다.”<도덕경>
지도자들은 입이 무거워야 함을 배웁니다. 36년전 수도원 초창기 수도원에 부임할 때 회상하며 쓴 글을 약간 손질하여 나눕니다. 이때의 결의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평생 믿음의 정주생활에 온힘을 쏟게 하는 고백이 됩니다.
“본원에서 파견받아 떠나기 전날 밤,
밤새워 성전에서 주님께 3천배 절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살아왔다.
성철 큰스님의 ‘종신불퇴’말씀을 좌우명 삼아
평생 매일 미사와 강론에 배수진을 치고 살아왔다.
지금까지 만36년 동안 하루만 살았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하루가 영원이다.”
평생 정주 서원은 죽을 때까지 그 삶의 자리에서 종신불퇴의 자세로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주님을 향한 신망애의 자세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한다’, ‘백절불굴, 칠전팔기’,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책임을 다하는 순교자적 삶의 자세를 지칭하는 말마디들입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오늘은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모든 사회 각층의 지도자들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믿는 자들 모두에게도 좋은 참고가 되는 말씀입니다. 지도자들을 모름지기 깨어 있어 함께 하는 사람들을 섬기는 종으로서 집사의 직분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지도자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들의 책임은 특권(privilege)이 아니라 봉사직(service)이요, 시험(test)이자 신뢰(trust)의 문제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평생 쌓은 명예와 신뢰도 무너지기는 순간이요, 실추되 명예와 신뢰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며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경우는 거의 치명적입니다. 더불어 공선사후(公先私後,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적인 일은 나중으로 미룬다), 예전 재판을 받을 때 찾았던 변호사 사무실에 걸려 있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베네딕도 규칙을 보면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은 나중에 주님앞에 헴바쳐야 함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 책임을 다하도록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어지는 경우는 이와 반대로 자기 책임을 망각한 불충실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에게 언젠가 분명히 있을 엄중한 심판이 있음을 말합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습니다.
보고 배워야 할, 희망의 표지가 되어야 할, 윗 지도자들이 부패하고 타락해 있으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정의롭지 못한 지도자들의 폐해가 얼마나 심대한지 작금의 상태를 보면 누구나 체감할 것입니다. 지도자의 모범이 바로 제1독서 에페소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정말 목숨을 내놓고 복음 선포의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바오로의 고백은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힘을 펼치시어 나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에 따라, 나는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 가운데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셨습니다...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영원한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은총의 선물같은 사명을 깨달아 전력투구한 바오로 사도야 말로 지도자들의 모범입니다. 10월 내내 저를 행복하게 하는 불암산을 볼 때마다, 불암산앞에 설 때 마다 떠오르는 고백시입니다. ‘당신’이 가리키는 바 물론 ‘주님’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주님앞에서, 주님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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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인 나>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당신
기꺼이
당신의 자리에
나를 놓으셨으니
나
오롯이
나의 자리에서
당신이 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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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 12,47-48)
무지의 어둠 속에는 피난처가 없다
만일 율법을 모르는 자들이 율법을 아는 이들 보다 더 나쁜 처지에 있는 것이라면,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참일 수 있을까요? 이 구절은 죄를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죄를 잘 아는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핑계 삼아, 무지의 어둠 속으로 피하여 우리 행동을 변명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알려 하지 않는 것은 다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1
신성의 어두운 면
이 말씀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설교 12
하느님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기
정신과 영을 새롭게 하여(에폐 4,23).
“여러분은 영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피조물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새로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영원만을 필요로 하십니다. 영원이란 무엇일까요? 잘 들어 보십시오. 영원이란 존재와 젊음이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킵니다. 영원이라는 것이 새로워질 수 있고, 계속해서 같은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원이 아닙니다. 새로움은 장래 일을 알려 주는 천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천사는 하느님이 드러내 보여 주시는 한에서만 장래 일에 대하여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 역시 자신이 영혼이라고 불리는 한에서만 새로움을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에게 생명을 주고 육체의 꼴을 이루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영이라고 불리는 경우에도, 새로움은 영혼과 관계가 있습니다. 영혼이 영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지금 여기와 자연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의 형상이며, 하느님처럼 이름이 없습니다. 이 점에서 영혼은 하느님이 그러하시듯이 새로움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영원만을 압니다. (265)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8절 신학과 대학
스콜라학과 그 대표자들: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는 1217/1218년에 비테르보 근방에서 태어나 1243년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파리에서 공부하고 또 가르쳤다.(1253년 내지 1257∼1274). 그의 신학은 매우 신비적인 성격을 띠었고(세라핌적 박사), 아우구스티노와 플라톤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특히 그의 간결한 「교의신학 요강」과 널리 알진 신비적이고 교화적인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1259)이 그러하다. 토마스가 지성을 더 강조한 반면, 보나벤투라는 더 강하게 의지를 지향하였다. 토마스에게는 목표가 신의 인식이었고, 보나벤투라에게는 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신을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신학에 각인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총장(1257∼1274)과 파리에서의 교수활동을 함께하면서도 항상 실천적이고 사목적인 사명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회 내 원시 회칙파와 엄격주의파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기 위하여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저술하였다. 같은 수도회 회원인 스코투스는 그의 신학 노선을 계승하였다. 스코투스는 1265년경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파리(10305∼1307)와 퀼른(1307∼1308)에서 사망하였다. 짧지만 매우 결실이 풍부하였던 교수활동에서, 그의 예리하고 비판적인 방법과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마리아에 관한 사변을 통하여 신학에 강한 자극을 주었다. 그도 의지와 자유와 사랑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전성기 스콜라학의 마지막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였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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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루카 12,47)
다른 사람들은 제 성격이 내향적이라면 의심스럽다는 듯 뜨악한 표정을 짓지만, 전 분명히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흔히 젊은이들이 자주 언급하는 MBTI에서 전형적인 INTJ입니다. 물론 기질적으로 욱하는 성향이 강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하기에 쉽게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전 분명 내성적이기에 낯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위축되기도 합니다. 다만 직업의식(?)이 투철해서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할 때는 그러하지 않지만, 평소의 제 모습은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아울러 저는 M.E 주말에서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솔직하며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고, ‘시간’에 정확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무슨 일을 사전에 생각하고 준비하지만 한번 결정하고 난 다음에 그 일에 매진하고 충실한 편입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준비되면 계획을 실행에 옮겨왔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도 저처럼 먼저 생각하고 준비하고 난 뒤 실행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매사 계획하고 준비했지만, 때론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만나기도 했었습니다. 운전하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적인 사고나 상황을 만나게 되듯이 예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는 당연히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해서 변명하면서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는 예상하지 못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맞았을 때는 변명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나 여러분이 게을러서 혹은 더디 일어나려니 하면서 준비하지 않았을 뿐, 일어날 일이었고, 분명히 다가올 일이었음에도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 닥칠 낭패를 겪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그때가 되면 주님은 분명 오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어제 복음의 주제와 같습니다. 그 시간과 그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반드시 오시게 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잘 준비하여 깨어 기다리도록 거듭 당부하시고 강조하십니다. 도둑이 예고하고 집을 털러 오지 않듯이, 사람의 아들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베드로 사도는 이 비유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12,41)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베드로에게 답을 주시기보다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은 집사입니다. 집사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종의 신분이지만, 다른 종들에 대해서는 주인을 대신해서 종들을 관리하는 신분입니다. 여기서 집사는 다름 아닌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교회의 성직자들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직-사제직-왕직을 수행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빌미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마지막 날에 가서는 소홀히 한 만큼의 대가를 물으실 것입니다.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12,47)라는 이 말씀은 정말 무섭고 떨리는 말씀이며 그만큼 주어진 책임이 막중하기에 역설적으로 저에게 주어진 직무를 충실히 살아야 하겠다, 는 각오를 새롭게 다집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 교회의 집사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을 충실하지 않은 성직자들에게 그날엔 하느님께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가 교회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성직자(=교황, 주교, 사제)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종말의 심판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어떤 누구도 열외는 없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누구나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강하게 표명하신 것처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십니다.”(12,48) 물론 많이 주신 만큼, 많이 맡긴 만큼 그에 따른 계산의 순간은 개인적으로 죽음의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그보다는 매일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 결산의 순간처럼 늘 깨어 준비하고 살아간다면, 그날은 두렵고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다리던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축복으로 충만한 날이 되리라 믿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저희와 함께 계시는 주님”(마태28,20)은 항상 매 순간 매일 영적으로 친밀하게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오시기에, 그분의 몸짓과 음성 그리고 그분의 발자국 소리에 민감해진다면, 그분의 오심은 결코 두렵기보다 설렘과 흥분으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읽고 감명받았던 「단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이란 글을, 기도를 대신해서 옮깁니다. 『덜 미워하고 더 사랑하겠습니다. 덜 가지고 더 행복하겠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대신 웃겠습니다. 다가오지 않은 내일을 두려워하는 대신 오늘을 열심히 살겠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는 대신 새로운 결정을 내리겠습니다.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대신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겠습니다. 아프다고 말하는 대신 아픔을 견디겠습니다. 바쁘다고 말하는 대신 쌓인 일을 하나씩 해나가겠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겠습니다. 남들의 잘못을 용서하는 대신 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겠습니다. 갖지 못함을 불평하는 대신 베풀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살아있음을 기쁘게 즐기겠습니다. 단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진다면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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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깨어 기다리는 이가 큰 은총을 /
박윤식 [big-llight] 241022 21:35 ㅣNo.176980
주님 일을 맡아 충실히 책임을 완수하는 건 그야말로 큰 영광이다. 그러면 주님도 흐뭇하게 여길게고 본인도 어쩌면 행복해 할 게다. 교회 안의 다양한 직책은 모두 주님께 받은 거다. 그런데 가끔은 그분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만을 내세워 직분을 남용하곤 한다. 심지어는 별것이 아닌 잘못된 판단으로 교회를 곤경에 빠뜨리기 일쑤다. 높은 직책 맡았다고 주님 가까이 있는 건 결코 아닌데도. 그분 뜻 헤아리는 이가, 정녕 그분 가까이 있는 자일 게다.
“너희는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집 뚫고 들어오도록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준비하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깨어 있으라는 것,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하느님마냥 행세하려 든다. 마치 뭐 인 것처럼 주어진 인생을 마음대로, 재산을 내 방식대로 하려 덤빈다. 그러나 그건 오만의 극치이다. 각자 내키는 대로 살면 ‘나’로 인해 언젠가 전체가 무너지리라.
그렇지만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깨어 있는 삶’의 자세일 게다. 모르긴 몰라도 “깨어 있어라.”라는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단다. 그것은 잠든 사이에 도둑이 내 소중한 것을 앗아 가지 못하게 깨어 있으면서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도 물론 있다. 또, 내 생각과 의식을 열어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자신만의 내적인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영적인 의미도 있을 게다. 모든 종교는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을 늘 상 강조한다.
이렇게 영적 태만과 위선, 기회주의적인 자기 욕심이 여기서는 어쩌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게다. 그분께서 언제 올지 모르니 적당히 꾀를 내어 내 편안함과 욕심을 채우려는 이의 모습은, 마치 남이 나를 잘 알지 못한다면서 적당히 타협으로 게으르고 위선적인 모습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 반면에 내 육신의 안락함이나 욕심보다는 그분 생각과 뜻을 여러모로 기리면서 성실히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내는 이의 모습은, 어쩌면 칭찬받을 나름의 이유가 분명히 있으리라.
물론 자기를 덜어 내고 비워 내는 비움의 영성, 곧 청정한 빈 마음의 삶은 신앙인이 추구하는 참된 삶이다. 이런 삶은 거저 얻어지는 게 결코 아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아마도 인생의 그 끝자락에서 세상 덧없음을 깨닫고, 또 욕망의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면 삶의 참된 가치가 어디 있는지를 깨닫기가 일쑤다. 그래서 종교인은 지식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가 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여기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받은 모든 것은 실상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것을 관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지혜는 내 힘이나 노력이 아닌, 성령을 통해 계시된 것이리라.
오늘을 사는 우리도 살아가면서 계획을 수정할 때가 여러 번 있다. 분명 계획대로 가는데도 어느 한순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때가 꼭 일어난다. 신앙생활 역시 계획대로 될 때보다 수정할 때가 훨씬 더 많아 보인다. 때로는 그분의 이끄심이 확실한 것 같은데도, 경우에 따라 당혹스럽고 실망스러운 결과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만을 보면서 준비해 한참을 지나 지난 그 뒤를 돌아보면, 그분께서 얼마나 많은 은총을 주셨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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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느님 나라가 올 때를 물었고,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때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 가운데 그 확정된 날짜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루카 12,39) 미리 준비하는 것처럼 그때를 알면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때를 알려 주시지 않았을까요?
마치 시험 날짜를 알려 주지 않고 치르는 시험과 같습니다.
학생 때 가끔 그런 시험들이 있었습니다.
언제 시험이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복음에 나오는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올 시간을 모르기에 언제라도 주인을 맞을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종의 처지라면, 사실 주인이 언제 오든 그때에 일어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을 결정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다가 그분의 다시 오심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다고 하여도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을 준비하며 살았고, 수천 년이 지난 뒤에라도 주님께서 오실 때 그들은 어제 만났던 주님을 오늘 다시 만난 듯 친밀하게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마지막 날에 대한 기다림이 약해졌고, 우리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 대하여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종처럼 당황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바로 우리의 오늘을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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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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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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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방 안에도 하느님께서!>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장 39~40절)
신앙생활을 이벤트처럼 해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일만 신자’인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분위기 좋은 성탄 때만 신자인 분들도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바짝 열심히 하고 나서 푹 쉬는 그런 이벤트가 절대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자세가 있는데 바로 지속성이며 일상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로 힘들어도, 때로 악천후라 할지라도 꾸준히 걸어가는 용감한 행위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저녁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 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 그 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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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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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때 양식을 주는 일이 왜 유일한 행복의 길인가?
오늘 복음은 심판 때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심판 때 당신이 함께 계신 것처럼 제때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 집사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오겠거니 생각해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종들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며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께서 일을 맡기시는 이유는 그러니까 ‘행복’입니다.
일을 더 많이 맡기시는 이유는 우리가 더 행복해지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행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행복은 ‘자존감’에 달려 있습니다.
외적으로 복권에 당첨되어 돈을 많이 벌게 되거나, 안 좋은 일이 발생하여 몸이 아프게 되어도, 몇 주, 몇 달 뒤에는 이전의 행복 수준으로
되돌아옵니다.
이것은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입니다.
한 환경미화원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새벽부터 악취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쓰레기통을
비우며 거리를 청소했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도 아니고,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미화원은 싱글벙글 밝은 모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힘들지 않으세요? 어떻게 항상 그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일하실 수 있죠?”
그러자 환경미화원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지구의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네.”
직업이 행복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의미가 행복을 결정합니다.
같은 환경미화 일을 해도 누군가는 그 일을 단순한 거리 청소나 돈벌이로 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일로 바라봅니다.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할까요? 당연히 지구를 깨끗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객관적 상황이나 조건이 행복과 무관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같은 조건이라면, 결국 행복은 자존감과 연결됩니다.
자존감은 자신이 자기를 바라보는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복 수준은 자기 스스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좀 야한 부분에 대해 말해볼까요? 만약 부부관계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어쩌면 많은 사람이 첫날밤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충분한 행복을 받았지만, 내가 상대를 충분히 만족시켜주지 못했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요?
남자들은 그래서 더 지속하는 약을 먹기도 하고 여자들은 인터넷으로 남자를 더 행복하게 해 주는 방법들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는 사랑을 받을 때보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때 행복합니다. 그런데 행복의 수준은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은 ‘양식’에 의해 생겨납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는 개들은 자신들도 사람인 것처럼 행복해합니다.
그래서 만약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면 같은 개들 무리에서는 그 행복을 더는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기를 버린 주인을 몇 년 동안 같은 곳에서 기다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왜 흙에 불과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창조하셨을까요?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행복을
주실 때에야만 하느님으로서의 영광과 행복을 누리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당신 자녀로 삼으셨으면 에덴동산에서 동물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자존감을 주는 양식을 그들에게도 제공해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일을 시키심으로써 당신 자존감과 행복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창조한 이들, 내가 빚어 만든 이들을 모두 데려오너라.”(이사 43,7)
행복은 다 이기적입니다.
남이 행복해서 자신도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자긍심이 자신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생명의 양식을 내어주라고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이웃에게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양식이 되어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내가 이웃에게 하느님 행복을 줄 수 있는 ‘생명의 빵’이라는 자존감을 잃지 맙시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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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온다는 것을 집주인이 알고 있으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종말과 재림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
2) 그런데 그날과 시간은 말할 수 없다는 것.
3) 그렇기 때문에 종말과 재림을 맞이할 준비는 ‘지금’ 해야 한다는 것.
(그 ‘준비’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지는 날과 시간은 인간이 미리 계산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4-6).”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는,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 않게 하려면
빛 속에서(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는, “여러분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는, “지금 ‘죄와 악’ 속에서 살고 있다면 빨리 회개하고, 그 죄와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는,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살고 있는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 말고, 평소에 늘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잘 합시다.”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2-48).”
이 말씀은, 표현만 보면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뜻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들도 종말과 재림과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슬기로움’(지혜)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나중’을 생각해서 ‘지금’ 충실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반대로, ‘나중’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쾌락에만 빠져서 사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내세,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막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결국 ‘그날에’ 어떻게 되는지는 각자 자신이 선택하는 셈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세속의 재판처럼 법정 공방이 벌어지는 재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될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날의 심판을 맞이할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그날 어떻게 되느냐를 결정합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맡기셨고,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관리자이고 ‘집사’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슬기로운 집사’이고, 아무렇게나 막 사는 사람은 ‘불충실한 집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일입니다.
따라서 그 생명을 얻으려고 지금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회개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44절의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46절의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뜻인데,
실제로는 ‘불충실한 자들’은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과 길을 막지 않으셔도 그들 자신들이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서
‘밖에’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들어가려고 애를 쓰시는 분인데, 들어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이라는 말은, 종말의 날과 시간은 인간이 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고, 불충실한 자들이 아무 준비 없이 그날을 맞이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라는 말씀의 뜻은, “신앙인이라면 내세와 심판을 의식하면서 신앙인답게 살아라.”입니다.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경고’ 말씀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호소’입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듣지 못해서, 또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예수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산 사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은 피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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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39-48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서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나그네’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뿐이시지요. 언제나 변치 않는 성실함과 참된 선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또한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생명을 주시면서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관리하고 보살필 ‘집사’의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즉 내가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리는 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지요. 하느님께서 당신 뜻에 맞게 잘 쓰라고 맡기신 것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잘 관리하다가 죽을 때가 되면 고스란히 세상에 남겨둔 채 하느님께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이런 걱정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다 두고 가면 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뭐 먹고 사나?’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집사’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실 것이고, 나는 그것을 기쁘게 누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을 머리로 알고 있다고 해도 막상 실천에 옮기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이나 욕망 앞에 쉽게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주님은 눈으로 볼 수도, 그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하지요. 그렇게 자연스레 마음이 해이해지게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가, 세상 종말의 순간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은 내 욕심부터 먼저 채우고 하느님의 뜻은 나중에 시간 남을 때 실천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참으로 많은데,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누릴 기회를 마다하고 주님 뜻부터 찾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뜻은, 그분께서 나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은 자꾸만 나중으로 밀리다가 잊혀지고 맙니다. 그러다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갑자기 주님 앞으로 가게 되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심판’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그 쓰라리고 참단한 결과는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될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방법은 주인이 언제 찾아오더라도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맞을 수 있도록 늘 하느님 뜻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고 기회될 때마다, 즉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실천을 의무감으로, 혼나기 싫어 마지못해서, 벌 받는 게 두려워 억지로 하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으로, 그분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에 감사하며 기꺼이 보은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신앙의 등불을 켜들고 주님을 마중나가, 그분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에게 가장 큰 기쁨은 더 큰 재산을 맡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생활을 통해 그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재물을 얻어내는게 아니라, 하느님을 꼭 빼닮은 자녀가 되어 그분과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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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한국 축구협의회 홈페이지에 청소년 축구 대표팀 박성화 감독은 수비와 공격 전술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축구에서 여러 전술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수비를 중심으로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비가 잘 되어야 바람직한 공격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끊임없는
연습이 따라야 합니다.
아홉 번 수비를 완벽하게 해도 한 번의 수비의 실패가 그날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전쟁에서 한 번의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 아니고는 전쟁에서 유능한 장군도 실수를 할 수 있으니 한 번의 실수를
너무 자책하지 말고 다시 좋은 기회로 삼으라는 격려의 뜻인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촉나라 장수로 '마속(馬謖, 190-228년)은 재갈량의 마량(馬良)의
막내 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군량의 중요한 보급로인 가정(街亭)을 맡아 보는 중책 소홀하여
가정을 빼앗기고, 촉군은 후퇴하게 됩니다.
어질기로 유명한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참수합니다.
한 번의 자만으로 가정을 빼앗긴 것이 결국 촉나라가 삼국 통일에서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을 항상 깨어서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9-40)
그래서 주인을 기다리는 종에 대한 비유를 들어 사람의 아들의 도래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충실한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항상 자기의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서 그를 칭찬하고 그에게 자기의 전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자기의 일에 충실하시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주인이 와서 그 불충실한 종은 벌을 받게 될 것이지요.
여기서 불충실한 종은 주인이 돌아 왔을 때의 순간의 실수로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한 번은 그에게 있어 순간의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가 평소에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설명하면서 한 번의 순간보다는
평소의 그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도 사람의 아들이 오는 짧은 순간보다는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자신의 소임에 충실한 것이지를 조명하려고 합니다.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 뜻대로 전쟁에서 한 두 번의 실수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1597년 8월에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100척이 넘는 판옥선,
거북선을 갖고도 1만 여 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게
무너져 결국 제해권을 잃어버립니다.
이와 반대로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모든 것을 상실한 상황에서 같은 해
5월에 이순신 장군 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출옥하여 그해 8월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척으로 9월에
명량 해전(鳴梁海戰)을 이끌어 일본 수군 130 여 척을 격퇴합니다.
이 해전을 승리로 이끈 요인으로 울돌목이라는 지형과 조류변화를 이용한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도 있었지만 잘 훈련된 병사들로 꼽고 있습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평소의 지도력과 백성사랑이 큰 받침이었다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해전은 평소에 장군이 쌓았던 지도력과 군인들의 훈련과 백성의 협조로 꼽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신앙인은 그 순간도 중요하겠지만 평소에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불충실한 종의 모습에서 깨어서 기다리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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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책임과 충실성으로 표현되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주님의 뜻을 잘 알아 합당한 준비를 하고 충실히 수행하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높은 기대 속에 ‘생각지도 않은 때’(12,40),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12,46)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와 책임 있는 삶이 중요시되었습니다.
주인은 맡긴 일을 제때에 충실히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재산을 맡길 것입니다(12,44).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오리라고 생각하여 하인들을 때리고 술을 마시며 제멋대로 노는 불충실한 사람은 처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12,45-46). 불충한 자는 둘로 ‘절단을 내버리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충한 이들 가운데 주님의 뜻을 몰라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는 적게 책임을 질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도 준비를 하지 않거나 주인 뜻대로 하지 않은 불충실한 종은 책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합니다(12,46-47).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충실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정의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실행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깨달아 사랑을 책임감을 가지고 충실하게 실행해야 마땅합니다.
영원의 종말을 사는 우리는 사랑의 책임 속에 바로 이 순간이 마지막인 듯 최선을 다해 사랑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인류가족 모두를 사랑할 책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사랑과 선을 모두 쏟아 부어 삶을 영원한 생명으로, 시간을 영원의 시간으로 바꿔가야겠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사랑은 의무이자 책임이지요. 그저 대충 사랑할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온 힘을 다해 기꺼이 사랑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책임은 능동적인 자세를 필요로 합니다. 많은 이들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랑에는 끝이 없고 아직 더 해야 할 뿐이지요.
사랑의 책임에는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늘 해야 할 사랑을 했을 따름이며, 사랑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일입니다. 또한 더 사랑하지 못했음이 안타깝고 부끄러울 뿐이지요. 이렇게 해야 충실히 책임있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일방적인 사랑의 부르심이요, 사랑과 생명에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응답할 전인격적인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사랑 때문에 사랑을 먹고 사랑을 위해 사는 것임을 상기하며 사랑의 순례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특히나 울타리를 허물고,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오직 사랑의 책임 때문에 모든 이를 받아들여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넓은 마음을 지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실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랑과 더 큰 의로움과 더 깊은 충실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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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 12,4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고 이르시자 베드로가 여쭙니다. 그는 이 말씀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궁금한 듯합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루카 12,42)
주인은 집사에게 종들을 맡기고 많은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 권한들은 집사의 안위와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들과, 종들을 통해 가꾸어질 집안 전체를 위한 것이지요.
그런데,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전형은 바로 하느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분은 권위로 호령하거나 힘을 휘두르며 윗자리에 군림하시지 않고 스스로 이 땅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당신의 모든 피조물의 필요와 고통을 헤아리며 돌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가 어떻게 일하는지 알려면,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면 될 것입니다.
"주인은 자기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루카 12,44)
주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세상과 교회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집사로 먼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주인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지혜를 다해 수고하는 집사는 자기 영광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주인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합니다. 이처럼 충실하고 슬기롭게 주님의 집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맡기실 "모든 재산"이란 바로 그분이 맡기시는 신비이고, 또 모든 영혼들일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받은 직무와, 이 은총의 열매를 이야기합니다.
"보잘것없는 나에게 그러한 은총을 주시어 ...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에페 3,8-9)
사도가 받은 직무는 모든 민족에게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는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무한하신 자비로 선택을 받고 "계시를 통하여 신비를 알게 되었다"(에페 3,3)고 고백합니다. 사도가 지닌 지식과 충실함, 열정을 쓰시려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그에게 이처럼 엄청난 신비를 허용하신 것입니다.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사도 바오로가 "은총의 직무"(에페 3,2)를 받은 이유입니다. 구원이 이스라엘의 울타리를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베풀어지도록, 온 세상 모든 이가 "공동 상속자", "한 몸의 지체", "공동 수혜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큰 그림 덕분이지요.
처음에는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신비가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에페 3,5)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종들과 자녀들을 돌보고 공동체를 가꾸도록 먼저 선택받은 이들이지요. 그들의 충성과 투신을 통해 복음은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우문현답이하고 할까요? 베드로의 질문을 예수님께서 이런 답으로 맺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는 일은 비단 제도적 직무에 매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유보되지 않았음을 포괄적으로 말씀하시는 듯하지요.
모든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통해 하느님 은총의 공동 상속자, 지체, 공동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에페 3,10)는 우리 모두를 포용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건 우리 모두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스스로 주님께 많이 받았다고 느끼십니까? 그럼 주님께서 많이 요구하실 것이니 더, 더, 더 주인 뜻에 따라 충실하고 슬기롭게 사랑하도록 애씁시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뭔가 더 많은 걸 각별하게 맡기신 것 같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더 청구하실 것이니 맡겨주신 영혼들을 힘껏 돌보고 나누고 섬깁시다.
우리에게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완전한 모델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듯, 우리도 맡기신 모든 이를 돌보고 사랑하고 가꾸다 보면 그분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분께서 흡족히 여기실 은총의 관리자로 발돋움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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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여호와께로 돌이켜 살아가는 삶
<2024.10.23> 아침을 여는 묵상 (애 3:40~54절)
❝여호와께로 돌이켜 살아가는 삶❞
❚ 진정한 회개는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그에 따른 심판을 슬퍼하며 주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죄에 대해 정직하게 회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40~44절).
시인은 앞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고통이 죄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가 한 일을 살펴서 돌이켜보고 여호와께 돌아가자...’(40절,쉬운성경)고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구원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길이 열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1절)고 말합니다. ‘마음을 드는 것’는 전심으로 죄의 길에서 돌이키겠다는 표현이고, ‘손을 드는 것’은 도움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즉,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자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지었던 죄를 고백합니다. 즉 자신들의 완고함으로 인한 반역과 불순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이 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42~44절).
믿음의 사람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죄에 대하여 민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에 대해 심판하실 때는 긍휼을 거두시고 진노하십니다. 한 점의 죄도 용납하시지 않고 회개 없는 기도 또한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식적인 종교 행위를 통해 죄를 가리려 하지 말고 진정성 있는 회개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죄에 대해 벌하심을 기억하며 멀리해야 합니다(45~47절).
시인은 더 이상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유다의 처지를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쓰레기와 폐물’로 만드셨다(45절)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방에 둘러싼 대적들이 유다를 향하여 끊임없이 조롱하는 말로 경멸하며(46절), 두려움과 공포, 멸망과 파괴가 자신들을 덮쳤다(47절)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철저하게 낮추십니다. 그리고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세상 속에서 큰 수치와 모욕 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기 편안한 말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거룩한 삶과 영원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므로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을 주는 것인지를 잘 판단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최종 심판을 생각한다면 죄악 중에 거하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이 불러오는 결과는 비참하며 이에 따른 징계 또한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아 죄에 대해 멀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죄에 대해 고백하며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48~54절).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패망 앞에서 그의 눈에서 눈물이 시내처럼 흐릅니다(48~49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슬프고 상한 심령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기도하겠다고 말하므로(50절) 구원의 회복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결국 시인은 현재의 극도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성도라고 해서 완전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인의 신분을 갖춘 듯 하나 옛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어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슬픔과 애통함 그리고 철저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고 거룩함을 멸시하는 경향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총을 바라보며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돌이켜 참된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날마다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 침체로 인하여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신앙의 생기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 진심으로 고백하며 매일 매 순간 거룩한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사모하여 정직하게 회개하며 죄에 대해 멀리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죄에 대한 무감각으로 신앙의 생기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애 3:40~5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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