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ZsNVrtRZTbc
중국불교의 사상 및 특징
1. 왕족 불교
❶불법 천자 / 호법왕
양무제(502년~549 在位)ㆍ당대의 측천무후ㆍ청대의 옹정제 등
❷5호 16국(4세기 초∼5세기 말) 시대 불교는 국왕의 보호가 있었고,
왕들은 고승들의 해박한 지식과 종교적 영험 및 신통력에 의지
그러면서 불교를 통해 왕권 강화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음
Ⓐ 5호 16국 시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해 북위 때 성행상징물이 운강ㆍ용문
ⓐ 敦煌 莫高窟
甘肅省 敦煌 막고굴은 자연석굴이다. / 불교미술의 총집합.
366년 승려 樂尊이 처음으로 굴에 불상 조성 시작
700여개 석굴에 2천 4백여 개의 불상과 벽화
북위ㆍ수ㆍ당ㆍ오대ㆍ원나라 때까지 석굴 조성
1900년 5월 왕원록이 17굴 藏經洞에서 5만점 돈황문서 발견
프랑스 폴 펠레오, 영국 아우렐 스타인 등이 자료를 가져갔다.
8세기 이후 인도 불교쇠퇴[더 이상 승려들의 왕래가 無]
탈라스 전투[751년] 실패 후, 중국은 실크로드 실권을 잃었고, 아랍의 압바스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세력의 기반을 굳힘 신장 지역까지 이슬람교가 전파 돈황 석굴은 점차 잊혀짐 |
ⓑ 大同의 雲岡石窟
山西省 大同/ 선비족의 탁발씨가 북위 왕조를 大同에 도읍으로 삼음.
북위의 沙門統인 曇曜가 16굴∼20굴까지 曇曜五窟인데,
황제 문정제(440∼465)에게 권해 460년∼494년 낙양 천도 이전까지 조성
53석굴 / 몇 cm∼17m 이르기까지 51,000여 尊
ⓒ 洛陽의 龍門石窟
河南省洛陽/ 494년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용문석굴 조성.
길이가 60m, 2840여개의 굴, 60여좌의 탑, 총 10만여 尊이 넘는 불상.
효문제(494년)부터 시작해 수ㆍ당ㆍ송나라 역대 왕조에 걸쳐 조성
용문석굴 최고는 奉先寺 석굴인데, 17.14m의 비로자나불[측천무후 모델].
이외 炳靈寺 석굴[肅省省 蘭州]
麥積山 石窟 [甘肅省 天水市]
房山雲居寺石經 / 낙산대불[四川省]
Ⓑ 청대까지 어록이 결집 대장경 판각 등 적극적인 지원.
❸ 陕西省 寶雞 法門寺 지하궁[佛指 사리]을 열어 궁중에서 사리 공양.
수나라ㆍ당나라 황제들이 즉위하거나 특별한 날에 불사리에 공양 올렸다.
❹ 당대 측천무후는 미륵을 자처했고, 大雲經은 ‘大周의 황제가 여자의 몸이라고 해도 미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❺ 명나라 : 어둠의 세계로부터 광명 세계로 이끌어주는데 마니가 헌신하여 세상을 구한다고 하는 페르시아의 마니교는 중국에 와서 明敎가 되었다.
한족의 꿈을 담은 명교백련교로 개칭. 그리고 미륵이 악한 세상을 구제하여 밝은 세계로 구제한다고 주장했다. 한산동이라는 사람은 “내가 미륵의 화신이며, 明王의 현신이다”라고 외치며 미륵임을 자처했다.
백련교도 곽자흥이 주원장의 고향 부근 호주에서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주원장도 곽자흥의 수하에 들어가 백련교도에 가담했다. 얼마 후 곽자흥이 죽자, 주원장이 28세에 백련교인 홍건군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웠는데, 앞에서 말한 ‘明敎’라고 하는데서 ‘명나라’라고 하였다.
❻청나라[1636~1912] : 만주족[=여진족 금나라]이 세운 나라이다.
만주슈리[Manjushri, 문수보살] ‘훌륭한 복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누르하치[太祖]는 문수사리의 화현으로 간주하였다. ‘만주’는 달다ㆍ묘하다ㆍ훌륭하다는 뜻이고, ‘슈리’는 복덕이 많다, 길상吉祥하다는 뜻이다.
2. 민중불교 ------------ [ 고대 ∼ 현대 까지 ]
왕족이든 민중이든 현세 행복과 미래 안녕을 기원 ➜ 정토의 미타ㆍ미륵
❶ 4대 성지 : 문수보살[山西省 五臺山=청량산]ㆍ보현보살[四川省 峨嵋山]ㆍ
관음보살[浙江省 普陀山]ㆍ지장보살[安徽省 九華山]
❷ 회창파불[845년] 이후 선종과 정토종만이 발전했다.
✥ 선종은 지리적인 여건상, 강서성 호남성 등 시골에서 발달
❂ 정토신앙은 승려나 일반인들에게 보편적이다.
➜➜➜ 이 또한 명대부터 禪淨一致
❸ 미륵[도솔정토] 신앙, 동진의 도안도 미륵결사
우리나라에서는포대화상 ➜ 중국은 미륵부처
五代 浙江省明州 奉化縣 契此(?∼916)를 모델
❹ 관음신앙과 더불어 법화경 독송과 사경이 유행
❺ 중국 문학의 형식가운데 變文
일반 평민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이야기를 잘 꾸민 설화 형식의 법문.
俗講僧들이 단골 주제 : 목련의 효ㆍ유마ㆍ부모은중경ㆍ8상성도ㆍ대당서역 현장 등 불교를 쉽게 전하는 속강승들에 영향 받아 송대 서민 문학이 발전하는 계기
唱導師[=법사]ㆍ經師[경전을 轉讀]
❻ 관우 신장 ---------------- 우리나라처럼 산신ㆍ칠성 등을 모시지 않음.
❼ 여성 신도들 : 계 조직 비슷하게 해서 함께 독경하고, ... 공부 / 대혜의 노보살
중국에서는 불교신자 남녀 모두 ‘居士’라고 호칭
❽ 재가자 활약 : 청나라 말기부터 근현대까지 화엄ㆍ유식ㆍ정토ㆍ천태학 등 연구
당대 : 방거사ㆍ杜甫(712∼770)ㆍ王維(700∼761)
白居易(낙천, 772∼846) : 興善惟寬(755∼817)ㆍ鳥窠道林ㆍ佛光如滿
裴休(791∼870) : 규봉종밀ㆍ위산영우ㆍ황벽희운
송대 : 송대 사대부들은 선과 문학적인 경향[소동파ㆍ왕안석]
대혜종고의 제자들 : 張商英(1043∼1121)ㆍ張九成(1092∼1159)
원대 : 야율초재(1190∼1244)는 湛然居士로 萬松行秀(1166∼1246)의 제자
청대 : 팽소승(1740∼1796)ㆍ양문회(1837∼1911) 등
불교학을 연구하거나 불교서적 및 경전을 출판.
❾ 라마교 숭상 : 원나라ㆍ청나라 때 더욱 숭상되었다.
❿ 백중 : 당대에는 황제가 우란분 축제를 칙령으로 내림
황실에서는 공양물을 올리고, 7대 조상까지 불공
3.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다른점
4. 유교ㆍ불교ㆍ도교와 삼무일종
❶ 三武一宗의 법난과 이유
北魏(386~534)의 太武帝ㆍ北周(557~581)의 武帝ㆍ唐의 武宗[845년],
後周(951~960)의 世宗
Ⓐ 표면적으로는 儒ㆍ佛ㆍ道 3敎의 대립이나
도교 도사[구겸지ㆍ조귀진]들이 황제에게 사주를 함.
당시의 爲政者들은 정치적ㆍ경제적 위기를 모면하고자 廢佛을 단행.
Ⓑ 유교적인 입장에서 중국 전통의 군신 관계나 가족 혈통을 무시하며, 신체를 훼손함으로서 중국문화에 위배가 되었다.
Ⓒ 불교 내부에도 타락과 비행 : 사원소유의 莊園이 증가함에 따른 국가의 경제적인 문제 발생, 교단적으로 승려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私度僧ㆍ僞濫僧의 횡행도 한 몫했다. 안사의 난 때, 하택 신회(荷澤神會, 670∼762)가 香水錢[승려에게 도첩을 판매]을 팔아 황제에게 군자금을 대어 주었다. 이런 일은 청대에 까지 이어졌다.
승려는 병역과 노역으로부터 벗어나고, 세금을 면제해주었기 때문이다.
❷ 법난에 대처한 경우
Ⓐ『牟子理惑論』
유ㆍ불ㆍ도교의 교섭을 전하는 현존 最古의 논서이다.
불교의 사상적인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던 때 ‘왜 불교를 믿게 되었는가?’에 대해 중국인 입장에서 최초로 쓴 불교 논서이다.
Ⓑ北周의 무제 폐불은 중국의 유명한 법난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법난 때, 정영사 혜원(慧遠, 523~592)은 목숨을 버릴 각오로 무제에게 충고를 하였다. 혜원은 승조[僧稠, 374∼414, 『肇論』]의 제자로서 『기신론』의 주석서를 쓴 학승이자, 선사이다. 당시 무제에게 항변하는 승려가 없었는데, 유독 혜원만 무제에게 당당하게 맞섰던 것이다. 당시 僧統이었던 담연 법사는 혜원의 손을 잡고 울면서 ‘혜원 스님의 용기는 참다운 호법보살’이라며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때 혜원은 이런 말을 하였다. “올바른 도리는 반드시 주장해야 합니다. 이 한 목숨을 뭣 때문에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법은 절대로 멸하지 않습니다. 모든 대덕들이여! 걱정할 것 없습니다.” 혜원은 山西省 부근 서산에 은거하다가 수문제 때, 淨影寺에서 널리 법을 펼쳤다. 선사는 깊은 산골에 머물면서 『법화경』ㆍ『유마경』을 1천회 이상 강독하기도 하고, 깊은 선정에 들기도 하였다.
Ⓒ 송나라 眞宗(998~1022 在位)이 太平興國寺를 없애고 창고로 만들려고 하였다. 조서가 내리던 날, 한 스님이 절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온몸으로 항의했다.
황제는 中使에게 칼을 주며 “그 승려가 절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
“그 스님이 이 칼을 보고 겁내거든 목을 베고, 그렇지 않거든 용서해 주어라.”
중사가 황제의 명대로 스님에게 칼을 들이댔더니, 그 스님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목을 길게 내밀며 “불법을 위해 죽는다면 칼을 핥으라고 해도 달게 받겠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사찰을 폐사하지 않았다[『인천보감』].
조선 白谷處能(1617∼1680)은 18대왕 현종
『諫廢釋敎疏』라는 8천여 자에 이르는 조선시대 가장 긴 장문의 상소문
Ⓓ 佛日契嵩(1007~1072)의 『輔敎扁』[韓愈(한퇴지, 768~824년)의 배불에 항거]
장상영의 『護法論』
❸ 儒ㆍ佛ㆍ道 3교 화합 상징
Ⓐ 虎溪三笑 虎溪橋 : 慧遠(334∼416)이 江西省 九江市 廬山 東林寺에 머묾.
도교의 陸修靜(406∼477)과 유교의 陶淵明(365∼427)이 혜원을 찾아왔다. 3인이 며칠을 보내고 두 사람이 떠나려고 할 때, 스님이 전송하며 호계교를 건넜다는 데서 유래한다.
Ⓑ 山西省 大同縣空寺三敎殿에는 중간에 부처님, 좌측 노자, 우측 공자님이 모셔져 있다.
湖南省 南岳衡山[도교 성지] 福嚴寺는 岳神殿이 있어 도교의 신을 모셔놓았고,
형산의 산신인 南岳神 청동상이 모셔져 있다.
Ⓒ 불교는 중국의 사상계와 중국인들의 정신 사유를 바꿔 놓았다.
불교는 도교의 의례와 도교 사찰의 체계가 발정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도교 경전[道藏]은 불교경전을 그대로 본 따서 만들었다.
선사상은 송대의 성리학ㆍ양명학에 영향을 미쳤다.
송대의 주자는 『대혜어록』을 즐겨 읽었는데, “현재 禪學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깊은 곳에 이르러 보지 못할 것이다.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면 반드시 선에 나아간다”- 『주자어류』고 하였고, 당대의 潙山靈祐(771~853)의 선사상을 좋아했다.
첫댓글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감사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