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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 2
행 7:9-16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그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통치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사람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겨져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행 7:9-16 / 이 열두 형제 중에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한 나머지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시며 10) 모든 역경에서 그를 건져 내시고 애굽 왕 바로 곁에서 총애를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남다른 지혜를 주심으로써 바로는 요셉을 애굽 온 땅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우고 궁중을 관리하는 전권까지 그에게 맡기게 된 것입니다. 11) 그런데 그때 애굽과 가나안에 심한 기근이 들어 우리 조상들은 비참할 지경에 빠졌습니다. 식량이 다 떨어지자 12) 야곱은 애굽에 아직도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양식을 사러 그의 아들들을 보냈습니다. 13) 그들이 두번째 갔을 때 요셉은 비로소 형제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리고 그 형제들을 바로에게 소개하였습니다. 14) 그리고 요셉은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 ㄱ) 야곱과 형제들의 가족 일흔다섯 사람을 모두 애굽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ㄱ. 창 46:27 (참조, 출 1:5)) 15) 이리하여 야곱은 애굽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고 그의 아들들도 거기서 죽었습니다. 16) 그들의 유해는 모두 세겜으로 운반되어 그곳 묘지에 묻혔는데 그곳은 전에 아브라함이 세겜에 살던 하몰 자손에게서 사둔 곳이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과 야곱과 그 아들들이 애굽에서 세상을 떠났던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9-10)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습니다(창 37장).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음으로 요셉을 구속사의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 그는 죄 없이 형제들의 시기로 인하여 애굽으로 팔려가 많은 환난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요셉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지역을 초월하여 애굽에서까지도 역사하신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져내사’, ‘주시매’, ‘세웠느니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흉년이 들어(11-13) 요셉이 애굽 총리가 되었을 때에 애굽을 비롯하여 가나안 땅 전역에 흉년이 들었고 큰 환난이 닥쳤습니다. 이때 야곱의 가족들도 양식이 없었습니다. 이에 야곱은 양식을 구하기 위해 1차로 자기 아들들을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서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두고 다음에 올 때에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양식이 떨어지자 다시 2차로 자기 아들들을 베냐민과 함께 애굽으로 보냈습니다. 요셉은 동생 베냐민을 보고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대성통곡하므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창 45:1-8). 결국 바로는 양식을 사러왔던 자들이 요셉의 형제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14-16) 요셉은 바로의 허락을 받고 아버지 야곱과 모든 가족들을 초청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초청을 받고 애굽에 내려가서 고센 지역에서 살다가 그의 아들들과 함께 모두 죽었습니다. 야곱의 유해는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으며(창 49:29-33),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세겜에 장사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한 대로 애굽으로 내려갔던 야곱과 그 아들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적용: 요셉 시대의 흉년은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말씀 기갈의 때(암 8:11)를 대비하여 당신은 날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까?
미국의 한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이 물음에 아이들은 저마다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위대한 학자가 되겠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겠습니다.” “훌륭한 정치가가 되겠습니다.” 이때 한 명의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놀란 선생님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하고 명성을 떨친다 해도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동물과 다를 바 없으므로, 저는 사람다운 사람이 꼭 되고 싶습니다.” 이 아이가 훗날 미국의 20대 대통령인 ‘제임스 A. 가필드’입니다.
< 설 교 >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황유석 목사
사도행전을 설교하다 스데반의 설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오늘부터 다시 사도행전을 설교하려고 한다.
지난주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보내는 장면까지 설교했다.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를 묵상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었다. 아브라함의 나이 많은 종이 리브가에게 ‘물 좀 달라’고 부탁했다. 아브라함의 종은 왜 물을 직접 떠먹지 않고 리브가에게 부탁했을까? 우물이 앞에 있었는데.., 그리고 리브가 입장에서도 처음 본 사람이 그런 부탁을 했다면 충분히 ‘저기 우물이 있으니 떠 먹으세요’라고 말하고 갈길 가면 그만인데.., 리브가는 나이 많은 아브라함의 종의 부탁을 받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아브라함의 종에게 주었고, 그가 몰고 온 약대들에게도 물을 먹였다. 어떤 분이 약대들이 먹는 물의 양과 당시 두레박의 크기를 기준으로 연구했는데 리브가가 약대들을 물 먹이는데 3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리브가는 세상적으로는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 처음 본 사람, 나이 많고, 여행을 오래해서 초라해 보이는 나그네가 물 좀 달라고 했을 때에 외면하면 그만인데 리브가는 나그네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그가 몰고 온 약대에게까지 물을 먹인다. 그것도 3시간이나 낭비하면서..
그런데 리브가는 어리석어 보이지도 않는다. 리브가가 나그네와 약떼들에게 물 먹이는 일을 마친 후에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에게 준비해 온 보물을 주었고, 이삭의 아내로 선택했다. 리브가는 좋은 것을 얻었다. 보물도 얻었고, 남편도 얻었다. 리브가가 어떻게 이런 복을 받을수 있었을까? 리브가에게는 복을 담을 수 있는 ‘친절과 봉사’라는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리브가를 묵상하면서 내 인생을 돌아봤다. 나이 많고, 여행을 오래해서, 행색이 초라한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에게 왔듯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에게 온 사람은 없었을까? 그런데 내가 좀 더 친절하지 못하고, 좀 더 섬겨주지 못해서 리브가가 받은 복이 나에게 거의 다 왔다가 없어진 것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인사> 죄송합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친절과 봉사’라는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는지를 확인하신다. 그리고 복을 주신다. ‘친절과 봉사’는 음식점이나 택시 회사의 구호가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이다. 이번 한주간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섬기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에게 받은 것이 정말 많다. 왜 하나님은 우리교회에 특별한 은혜, 남다른 축복을 이렇게 많이 주셨을까? 우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친절, 그리고 봉사가 복을 받을수 있는 그릇이 되어 하나님이 그 그릇에 복을 담아주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풍요로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나? 지금보다 조금만 더 친절하고, 지금보다 조금만 더 봉사하는 인생 살기를 바란다. 친절과 봉사의 수준만큼 하나님이 복을 담아주실 것이다.
<행7:8>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서 이삭을 낳았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해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이 12아들을 낳았다. 12아들 중 11번째가 요셉이다. 요셉은 꿈이 있는 아들이었고, 아버지 야곱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었다.
<9절> 그런 요셉을 형제들은 시기 질투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 질투한 것을 묵상하면서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평생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시기는 뼈를 썩게 하고,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뼈는 피 만드는 공장이기 때문에 건강의 기본인데 시기하고 질투하면 뼈가 망가지고 결국 건강이 무너진다. 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뼈의 양약이라’고 말한다. 또 ‘선한 말은 마음의 양약이라’고 말한다. 시기 질투로 몸을 망가뜨리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즐거움과 선한 말로 건강한 인생 살기를 바란다.
또 시기는 인생을 추하게 만든다. 리비아 사막에서 경건하게 살고 있는 수도사를 유혹하려고 사단이 별짓을 다했다. 그럼에도 죄에 빠뜨릴 수가 없었다. 거듭 실패하는 모습을 보고 대장 마귀 曰 “너희들 방법은 너무 조잡해”라고 말하며 경건한 수도사에게 가서 귀속 말로 한마디 했다. “당신 친구가 이번에 주교가 되었어.” 수도사는 금새 얼굴 표정이 확 바뀌었다. 시기심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마귀가 사용하는 최고, 최후의 무기이다. 시기와 질투를 이기는 방법이 있다.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함으로 극복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외모를 말하기도 하지만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시기, 질투, 미움, 다툼이 다 사라지기를 바란다. <찬양> 아름다운 마음들 ~
본문을 보라. 시기한 사람이 잘됐을까? 시기 받은 사람이 잘됐을까?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요셉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다. 그리고 돈도 생겼다. 이제 아버지가 요셉만 예뻐하는 모습을 볼일이 없어졌다. 요셉을 시기했던 형제들이 승리한 것일까? 아니다. 나중에 요셉을 시기했던 형제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날이 기다리고 있다. 시기하는 사람이 잘되는 일은 없다. 열심을 내는 두가지 동기가 있다. 사랑과 시기이다. ‘사랑’이 가득한 사람도 열심을 내고, ‘시기심’이 가득한 사람도 열심을 낸다. 겉으로는 똑같은 열심이지만 열심의 동기가 시기심인 사람은 어떤 순간이 오면 푹 주저 앉는다. 어떤 일을 하든 동기가 사랑이기를 바란다.
요셉의 형제들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을 애굽의 종으로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들짐승이 죽였다고 거짓말 하고, 나중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러 애굽에 갔다가 자기들이 별것도 아닌 시기심 때문에 종으로 팔아버린 요셉이 국무총리인 것을 알고 두려워 떤다. 시기심, 질투심과 상관없는 은혜로운 인생 살기를 축복한다.
시기심이 마음에 있으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순종해도 딱 한 가지는 순종을 못한다. ‘웃는 이와 함께 웃는 것.’ 이것은 순종이 불가능하다. 시기심이 있으면 절대 웃는 이와 함께 웃을 수가 없다. 이런 말하면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한다. ‘목사님, 저는 시기심 그런 거 없어요.’
내가 시기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누군가 ‘잘됐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에 어떤 마음이 드나? 를 보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시기심이 있나, 없나를 알 수 있다. 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진심으로 너무 좋다면 나는 그 집사님은 주안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집사님이 하는 일이 잘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마음이 좋지도 않고, 편치도 않고, 그렇다고 꼭 기분이 나쁜건 아닌데,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다면 그건 내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 마음에 시기와 질투하는마음을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다. 3월 첫째 주일, 우리교회에, 우리 각사람의 심령에 하늘의 불이 임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성령의 불로 불태워지기를 바란다. 우리가 땀 흘리며, 힘을 다해, 가진 은사를 사용하며 최선을 다해 일하는 동기가 시기가 아니라 사랑이기를 축복한다.
<9절> ‘ ~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하나님이 한가지 질문을 주셨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하나님은 왜 요셉이 형제들에게 종으로 팔리도록 가만두셨을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면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리는 것을 막아주시는 것이 맞는 것 아닐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자 했을 때에 하늘의 불을 떨어뜨려서 형제들을 혼내줘야 하는게 맞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파는 것을 가만두셨다.
<10절> 하나님은 나중에는 요셉을 ‘그 모든 환란에서 건져내 주셨다.’ 이왕이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팔기 전에 건져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요셉 입장이었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면 왜 내가 억울하게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애굽에 팔려가야 했을까? 왜 하나님은 그걸 막아주지 않으셨나요?’
사실 지금 우리가 힘들어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고 하면서’ 왜 지금 나의 아픔, 눈물, 고난,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나요? 하나님, 졸고 계신가요? 주무시고 계신가요? 아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는 것을 가만두셨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자 하나님도 그곳에 같이 가셨다.
하나님은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것을 가만두시기도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 마치 못보신 것처럼 가만두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내가 싫어서, 미워서.., 도 아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데 왜 내가 힘든 걸 못본척하고 가만두실까?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하신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데는 반드시 겪어야 할 고난이 있다. 고난 없이 온전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난이 없이 큰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난이 없이 위대한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하나님과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사람은 자기 자녀가 고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가정에서 위대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야단맞는 것도 못 견딘다고 한다. 자녀가 직장 다니면서 상사에게, 사장님에게 이런저런 일로 야단맞았다고 하면 본인보다 부모가 못 견딘다. ‘감히 내 아들을 야단쳐.. 관둬. 거기서 월급 주는거 엄마가 용돈주마.’ 그러니 나이는 먹어가는 데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식 이쁘다고, 어디 가서 꿀리면 안 된다고 좋은 차 사주고, 좋은 옷 입힌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자식 사람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고난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부모가 가진 돈으로, 부모가 가진 인맥으로, 부모가 가진 힘으로 조금만 도와주면 자녀가 지금 당하는 고난을 잠시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자식 사람 만들기 힘들다. 예전에는 돈으로 군대를 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 부모의 노력이 과연 진정 자식을 위한 일일까? 고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지만 그 일이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
<히5:8~9>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었은즉.’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훈련시키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학교에 입학시키시고, 그 고난학교에서 우리에게 순종을 훈련시키시고, 고난학교에서 순종을 다 배우고 나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학교에서 졸업시키실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새벽예배 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끄떡도 안하던 사람이 어느 날부터 특별새벽기도회도 아닌데 새벽예배를 나온다. 또 ‘십일조 내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끄떡도 안하던 사람이 어느날부터 십일조를 내기 시작한다. 왜 그런 일이 생길까? 그가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운 것이다.
[고구마 전도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기동 집사님의 간증에 ‘주일날 설악산에 놀러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김기동 집사님은 그 고난을 통해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아, 주일날은 놀러가면 안되는구나. 주일날은 예배해야 하는구나.’
고난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을 훈련시키는 것이라면, 고난은 하나님이 몸을 치시고, 물질을 치시고, 인간관계를 치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훈련방법이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은 전부 다 고난학교를 통과한 사람들이다. 고난학교 졸업장이 있는 요셉을 하나님은 애굽의 국무총리로 세우셨고, 고난학교 졸업장이 있는 모세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지도자로 세우셨다. 지금도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고난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다.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 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이 고난학교를 입학한 것이다. 요셉은 고난학교를 입학한 후에 다양한 고난을 만나면서 순종을 훈련받았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이 교장선생님인 고난학교에서 순종을 배웠다. 마치 고난을 당할 때마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것 같았다. ‘너 이것도 순종할 수 있니, 이것이 견딜 수 있니?’ 그리고 어느날 하나님은 요셉에게 고난학교 졸업장을 주셨다.
모세, 40살이 되어서 고난학교에 입학했다. 동족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고난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80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고난학교 졸업장을 주셨고, 하나님은 고난학교 졸업장을 받은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지도자로 사용하셨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물질’로 고난당하는 사람이 있을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로 고난당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남편, 아내, 부모..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난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주변에 고난학교 재학중인 학생이 있는가?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는 잘 준비된 말보다는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이 낫다.
사람이 고난 없이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고난은 지금만 힘들다. 고난은 지금만 아프다. 때로 하나님은 나를 요셉처럼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게 가만두실 때도 있다. 하나님이 입학시킨 고난학교에서 순종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는 고난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입학시킨 고난학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종’을 가르치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신 후에,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학교에서 졸업시키시고 애굽의 국무총리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지도자로 세워주실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은 그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제자를 뽑고자 제시한 시험은 아주 이상했다. “배추를 거꾸로 심으라/” 대부분의 제자 지원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한 제자 후보생이 배추를 거꾸로 심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는 曰 “나는 당신들의 아이큐 테스트를 한 것도 아니고, 판단력 테스트를 한 것도 아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순종 테스트를 한 것이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보다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순종을 훈련하고 계신다.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을 종종 만난다. 그것을 다 머리로 이해하려고 애쓰지 마라. 일단 순종하라. 그러면 나중에 이해가 될 것이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는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형제들의 시기질투로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을 숭배하는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셔서 ‘큰 민족을 만들 뜻’을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 70명만 살 수 있는 텅빈 땅이 아니었다. 이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에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일행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지만 후손들이 조금 생기면 가나안 사람들이 와서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시고 야곱의 온 가족을 애굽 안에 있는 고센 땅으로 집단 이주하게 함으로 그곳에서 급속도로 번성하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고센’이라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돌보신 것처럼 돌보아주셨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모세를 중심으로 애굽을 탈출하기 직전에 이스라엘은 남자만 60만이 넘을 정도의 인구가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고난학교에서 40년 동안 순종을 배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남자만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에 가게 하셨고, 결국 가나안의 모든 거주민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점령하게 하셨다.
요셉이 경험한 고난, 모세가 경험한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누군가 애굽에 먼저가야 했고, 하나님은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형제들의 시기질투라는 가슴 아픈 모습으로 애굽에 갔지만 그것조차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요셉이 형제들에 시기질투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이 없는 고난은 하나님이 막아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은 순종을 결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단 한번도 한국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할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필리핀에서 육신의 연약함이라는 이유로 한국으로 나오게 하셨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를 파송한 선교단체와의 작은 오해로 헤어지게 만드셨다. 몸이 좀 건강해진 후에 여기저기 부교역자 이력서를 냈더니 오라는 데가 한군데도 없었다. 결국 먹고 살아야 하니 신문배달하면서 유학을 준비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갑자기 내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으시더니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을 주셨고, 아무 준비없이 탄생한 것이 수원은혜교회이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건강으로 치지 않으셨다면 나는 지금 필리핀에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의 이간질이 없었다면 나는 절대 나를 파송한 선교단체와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부교역자 이력서를 냈을 때에 나를 받아준 교회만 있었다면 나는 절대 개척을 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돈만 있었다면 절대 수원에서 교회를 개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수원은혜교회를 개척하게 하셨다. <다같이>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어떤 고난을, 얼마나 겪었는가? 내가 겪은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10대 때에 나는 교회가 싸우는걸 봤다. 어린 마음에도 싸울 일이 아닌걸 갖고 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서울로 올라와 다니면서 교회를 안다니기로 결심했다. ‘교회에서 싸우는게 정말 싫었기 때문에..이런데를 내가 왜 다녀.’ 돌아보면 내가 어릴 적에 그런 일을 보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내가 수원은혜교회 담임목사로서 ‘싸우지 맙시다. 싸우면서 일하려면 일하지 맙시다’를 틈만 나면 외치는 이유는 내가 어릴 적에 교회가 싸우는걸 보고 ‘저건 교회가 할 짓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강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도 목회를 하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싸우지 않는 것, 화평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 정말 싫어하고, 싸우는 것 정말 싫어한다. 싸우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 있을까? 싸우면서 어려운 사람들 더 많이 도우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싸우면서 예배당 크게 지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싸우면서 전세계 5대양 6대주 선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싸우면서 우리 학생들, 청년들 유럽 단기 선교 보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아무 소용없다. 형제간에 싸우면서 부모님에게 용돈 500만원씩 주면 부모님이 기뻐하실까? 성도들끼리 싸우면서 목사님 양복 비싼거 사 드리면 목사님이 그걸 기뻐할까? 나는 지금도 교회에서 성도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너무 힘들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어떤 사람은 고난을 원망하면서, 탄식하면서, 불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때를 예배와 기도로 버텨내는 사람도 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요셉은 억울했지만 마음에 한을 품고 살지는 않았다. 사실 요셉은 한을 품고 살만한 억울함과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요셉은 마음에 한을 품고 살지는 않았다. 요셉이 그런 엄청난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면서도 한을 품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요셉은 고난을 본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본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입학시킨 고난학교 모범생이었다.
요셉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것,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을 때는 나 같으면 한번 정도는 하나님에게 뭔가 말을 했을 것 같다. 여기서부터 요셉과 내가 수준 차이가 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아무소리 하지 않았다. 어떻게?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믿었고, 고난 중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같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고통 중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회개하라. 그러면 고난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훈련하시기 위해서 주신 고난은 예배와 말씀, 기도와 믿음으로 버텨야 한다. 매순간마다 순종의 답을 적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힌트, 고난은 영원하지 않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요셉은 30살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면서 그동안의 고난이 영광으로 바뀌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부활의 영광으로 바뀌었다. 고난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도 끝이 있다. 고난의 끝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면 앞으로 어느 정도 복을 받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옆사람> 제가 어느 정도 복을 받을 것 같으세요?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고난은 우리의 관심을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 놓는다. 만일 지금 당신이 당하는 고난이 당신의 시선을 세상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놓았다면, 땅에서 하늘로 시선을 옮겨놓았다면 당신은 큰 복을 받은 사람이다.
한 목사님이 남선교회원들과 단합대회를 갔다가 배가 뒤집혀 다 죽고 자기만 살았다. 장례식을 다 치룬 후에도 마음이 견딜 수 없어 집에 들어가지 않고 강대상에 엎드려 울다 자다 기도하다를 반복했다. 어느날 환상 중에 한 장면을 봤는데 장례식장에서 목사님이 조문객을 받는데 옆에 예수님이 서 계셨다.
또 한 번은 기도하는 중에 ‘네 팔을 한번 꼬집어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꼬집자 온 몸이 다 아팠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프냐. 나는 더 아프다.’ 주님은 주님의 자녀들의 고통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계신 것이 아니라 같이 울고 계시고, 같이 아파하고 계신다.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행 7:9-10 / 양향모 목사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그 언약을 실천하시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언약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그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현재 지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믿고 따르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기 어려운 언약일지라도 반드시 이루시고 마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엉뚱한 길로 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믿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믿음의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믿고 그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경험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목적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변증을 하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이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지도자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몰라서 이렇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요셉을 잘 알고 있었고 요셉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급박한 순간에 요셉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요셉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면에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마치 요셉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행했던 그들 조상의 모습에서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행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배반을 하고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가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요셉의 이야기는 창세기 37장 이하에 자세히 기록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설교 한두 편을 통하여 다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이 요셉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대략적인 이야기만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면서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고 야곱이 아들 열두 명을 낳았는데 그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요셉은 열한 번째 아들이지만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아들 열두 명을 낳았는데 한 아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네 명의 아내에게서 낳았습니다. 그 네 명의 아내 중 둘은 아내의 몸종이었고 두 아내는 자매였는데 원래 야곱은 동생 라헬을 좋아해서 라헬과 결혼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아버지가 조금 부족한 언니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아내로 주었기 때문에 언니와 동생을 다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사랑한 여자는 라헬이었습니다. 요셉은 라헬이 임신을 하지 못하다가 늦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요셉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형들은 들에 가서 양을 치게 하였고 요셉은 집에서 당시에 입기 힘든 채색 옷을 입히고 특별한 사랑을 주면서 키운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이유는 야곱에 요셉을 편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셉 자신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을 짓을 좀 했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꿈 이야기일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 꿈 이야기가 형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창37:5)라고 했습니다. 그 꿈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창37:7)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하더이다.”(창37:9)
안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서 형들이 그를 미워했는데 또 형들이 뭘 잘못을 하면 아버지께 달려가서 고자질을 하고 해서 미워했는데 한 술 더 떠서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형들과 가족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이 정말 형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곡식 단이 서 있는데 형들 곡식 단이 자기를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둘러서서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꿈을 꿨는데 이번에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형제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꿈은 후일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 형들이 곡식을 얻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요셉은 그 나라의 총리대신이 되어 있었고 형들은 요셉에게 절을 하고 곡식을 얻어올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까지 요셉에게 절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예표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만왕의 왕이 되심으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로 인해서 미움을 받은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야곱에 요셉에게 양을 치는 형들에게 가서 잘 있는지 보고오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형들을 보러 갔을 때 형들이 시기해서 요셉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웅덩이에 빠트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때 마침 노예상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중에 좀 착한 형인 유다가 죽이지 말고 노예로 팔면 좋겠다고 제안을 하고 은 20에 노예 상인에게 요셉을 팔아버렸습니다. 그길로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서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렸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가는 곳마다 거기 함께 계셨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견디게 하시고 오히려 그런 어려움들을 통하여 더 좋은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비록 노예로 팔려갔지만 팔려간 집이 보통 사람의 집이 아니라 애굽 왕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다가 팔았습니다.
그 집에서 일을 하는데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니까 요셉이 하는 일이 늘 형통하였습니다. 무엇을 시켜놓으면 그 일이 잘 되고 그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종이 아니라 가정총무가 되어서 모든 일을 맡아보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니까 또 그 감옥에서 하는 일도 형통하여 잘 되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사람들이 보아서 알 정도로 잘 되어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눈에 띄게 되고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해줌으로서 애굽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꾼 꿈 즉 칠년 풍년 후에 칠년 흉년이 온다는 꿈을 바르게 해석을 하고 그 꿈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임을 알고 칠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 미리 대비를 하였고 칠년 흉년이 들었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일을 잘 했습니다.
이런 요셉의 이야기는 어려움을 당하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형통함을 누릴 수 있고 그 어려움들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서 더 좋은 일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을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열두 아들로 이어지는 그들의 조상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조상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난 척 해서 얄미운 동생이라고 해도 그 동생을 그렇게 죽이거나 노예를 팔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혈육을 그렇게 비참한 노예가 되게 하는 사람이 어디 인간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불러주셨으니까 그런 사람이 된 것이지 그들 자체는 참 악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형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시고 요셉이 하는 일을 도와주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방지해주셨고 그를 통하여 죽어갈 인간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
스데반이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들 조상이 요셉을 애굽에 팔았으니까 나쁜 사람들이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기지지 말아라. 단순히 그런 의미로 말했을까요? 스데반이 요셉의 이야기를 하면서 요셉을 예수님에 비유를 하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행한 악행을 지적하고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그 특별히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트집을 받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따라다녔습니다. 유대인들이 들을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마다 기분이 나쁘고 시기질투가 나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처럼 단순히 자기가 조금 높은 사람이 되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그런 정도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10:3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10:38)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유대인들이 그동안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만 참 신이시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이나 성전의 제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시고 율법이나 성전 제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고 따르는 길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고 구원을 얻는 길이라고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화가 머리끝 까지 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데모를 했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가룟 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너희들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의 종으로 팔아넘긴 것처럼 너희들도 그 뒤를 따라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너희들이 팔아넘기고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가 되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분이시다. 너희들이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심으로 오히려 그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 인류를 구원하실 큰일을 하신 것임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받을 교훈
그동안 우리가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유리도 요셉처럼 꿈을 꾸는 자가 되자 이런 이야기일 것입니다. 요셉처럼 어려서부터 꿈을 꾸어야 한다. 그 꿈이 있어야 어려움이 와도 참고 견딜 수 있고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설교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망합니다. 마음의 소원을 두고 행하는 사람이 출세도 하고 성공도 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는 그런 꿈을 가지게 하기 위한 말씀은 아닙니다. 간접적으로 그런 교훈은 받을 수 있겠지만 요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요셉이 예표 하는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요셉을 팔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이 이런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요셉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셉처럼 칭찬을 받을 사람이고 요셉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요셉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회개를 해야 할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정말로 필요한 요셉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 중대한 사실을 놓치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흉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요셉을 노예로 판 그 형들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들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던 유대인들이 얼마나 악한 인간들이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십자가의 은혜를 잘 모르고 십자가를 비웃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한 인간들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악함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는 교만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 때 그 어려움이 오히려 그에게 형통함이 되었고 큰일을 하게 되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셨을 때 사람들에게 당했던 그 십자가의 고난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지 않고 그것도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하면 모든 어려운 일들이 다 형통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믿음이 점점 더 왕성해지는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삶은 더욱 형통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우리와 우리 가족 우리 친척 이웃들이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종으로 팔았지만 하나님계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모든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십자가를 지셨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십자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는 이 십자가의 길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오히려 형통한 삶을 살게 될 줄 믹습니다. 우리의 이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함께 기뻐하며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고난을 감내하면 성공을 봅니다
문기태 목사
인류 역사상 가장 밑바닥에 까지 떨어졌다가 단숨에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서 노예신분에서 죄수의 자리에까지 내려갔다가 하루 아침에 총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무기한 감옥에서 지내다가 바로의 꿈을 풀어 애굽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그 위기에 대한 해법까지 제시하여 바로가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하고는 요셉에게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하며 단번에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
여러분 중에 요셉처럼 성공한 인물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요셉처럼 크게 성공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요셉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가 요셉이 걸었던 고난의 행로를 걸으며 환란을 통과하기를 원하십니까? 솔직히 우리는 이 질문 앞에서 멈칫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가 그처럼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걷게 된다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내 자녀에게 그처럼 험난한 고난이 찾아온다면 인내하며 신앙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도 유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을 피해 달아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유익한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요셉이 만난 고난은 어떤 종류의 고난이었습니까? 요셉은 외로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요셉은 역기능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네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친어머니는 요셉이 어릴 때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아버지의 극단적인 과보호가 있었습니다. 형들에게는 안 입히는 멋진 채색 옷을 요셉에게는 언제나 입혔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나가서 뛰놀아야 되는데 아버지가 한시도 놔두지 않고 옆에 놔두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아버지의 편애가 자기에게 쏟아지니까 그것을 시샘한 형들로부터 왕따 당하는 수모를 어릴 때부터 겪었습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 자라며 배다른 형들에게 치여 지내는 요셉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형들과 다투다 얻어 맞기라도 하면 누구에게 달려가 하소연 했을까요? 아무도 요셉을 감싸주고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작정 투정을 받아주고 보호해줄 엄마라는 보호막이 없이 요셉은 외롭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힘든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외로움은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그 외로움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도 계속됩니다. 더 심화됩니다. 그를 사랑해주었던 아버지 야곱의 얼굴도, 친동생 베냐민의 얼굴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없습니다. 요셉을 이해해주는 사람도, 사랑해주는 사람도, 위로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셉은 이 넓고 큰 세상에 혼자만 외롭게 던져졌습니다.
요셉은 그처럼 큰 외로움을 겪으며 그 외로움을 신앙으로 극복합니다. 창39:2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사람들과 멀어질 때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외로울 때에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외롭다고 쓸쓸하게 눈물짓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구가 되시면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 더 즐겁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형통합니다. 믿음이 좋아지고 생각과 마음이 성숙해지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멀어질 때 여러분을 따돌릴 때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발전하여 형통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외로움이라는 고난과 싸웠을 뿐 아니라 배신이라는 환란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요셉이 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들에서 양을 치는 형들을 찾아갑니다. 형들은 요셉을 없앨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요셉을 잡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울부짖었습니다. 창42:21에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요셉은 구덩이에서 애걸복걸했습니다. "형님들, 살려 주세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형님들, 낯선 사람에게 나를 팔지 마세요. 저는 가족과 같이 살고 싶어요." 그러나 매정한 형들은 애걸하는 요셉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하고 요셉을 팔아버리고 은 스무 냥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가 막힌 배신이 또 있을까요. 어머니가 일찍 죽고, 배다른 형들의 시기와 미움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이리 저리 치이며 힘들게 가정생활을 하며 자랐는데 이제 형들에 의해 죽을 뻔하고, 죽음의 위기를 겨우 모면하는가 싶더니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건만 형들은 외면하고 차갑게 거절합니다. 세상에 남도 아닌 친 형들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한 요셉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요? 요셉은 어린 나이에 배신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배신의 상처를 통하여 진주처럼 빛나는 신앙을 키웠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들이며 미움과 원망을 사랑으로 승화시킵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갑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잘 섬겼는데 어떻게 이런 고난과 억울한 일이 연속된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아버지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던 형들이 나를 노예로 팔아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복수할 거야.' 그러나 요셉은 마음 속에 있는 고통스런 상처를 아름답게 승화시킵니다. 미움과 원망을 승화시켜 그 인생을 빛나게 만듭니다. 요셉의 신앙은 그처럼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요동함이 없습니다. 자기 형들이 그처럼 악한 행동을 하고 큰 상처를 안겨 주었건만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모든 환란을 이겨냅니다.
영국의 과학자 알프레드 윌레스는 어렸을 때 나비가 고치를 뚫고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조금 도와주었습니다. 나비가 쉽게 나올 수 있도록 고치를 조금 찢어준 것입니다. 나비는 윌레스의 도움을 받아 고치에서 쉽게 빠져 나왔지만 몇 차례 힘없이 날개를 펼치려고 애를 쓰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윌레스는 자기가 나비를 죽게 했다는 것을 얼마 후 깨달았습니다. 나비의 어깨에 몰려 있던 모든 영양분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고치에서 빠져 나오려고 애쓸 때 날개에 고루 퍼져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편안하고 쉽다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도 내일을 위한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온갖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평안을 빼앗아가고 슬픔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치를 뚫고 나오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만 나비가 생명을 유지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만드십니다.
요셉이 만난 가장 큰 고난은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10여년간 노예생활을 하며 정직하고 충성했던 모습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정직하고 겸손하면 반드시 사람 눈에 띄는 법입니다. 요셉은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자포자기하며 될 대로 되라고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주인인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았고 가정 총무의 직임까지 받았습니다. 보디발장군의 집사가 되었으니 노예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만하면 노예로서는 더 이상 부러워할 것이 없는 성공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수 년 동안 고생하며 쌓아 올린 토대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옷자락을 붙잡고 유혹하는데 겉옷을 벗어 던지고 밖으로 피했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에 앙심을 품은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희롱하려고 하다가 자신이 소리질러서 도망갔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할까요?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의 결백을 변명할 기회조차 박탈당했습니다. 사람이 가장 크게 분노할 때는 오해 받아 억울할 때가 아닐까요?
여러분, 억울하다고 요셉만큼 억울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의 삶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못 믿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바라보면서 진실했잖아요? 정직했잖아요? 주님을 신뢰했는데 결과가 이것입니까?'라고 원망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그 깊은 고통 속에서 조용히 평상심을 유지한 채 감옥에서 삽니다. 감옥의 전옥이 다른 죄수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 젊은 청년에게 놀랍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던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손길이 있습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창39:21)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요셉의 생애 속에 그 환경을 바꾸어주고 새로운 환경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인자를 더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변화시켜주시기 보다는,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기 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인자를 더해주십니다. 위로해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첫 번째 작업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간절히 기도했을 때 나쁜 환경이 일순간에 요술처럼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고통이 나와 상관없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 나를 짓누르던 상황이 일순간에 바뀌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을 향해 약속하기를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하십니다. 고통 당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주십니다. 인자를 더해주십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기쁨을 주시며 하나님의 깊은 위로로 채우십니다.
그렇게 감옥에서 지내는데 바로의 술 맡은 관원 장과 떡 맡은 관원 장이 감옥에서 같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관원들이 꿈을 꿨습니다. 술 맡은 관원 장이 꿈을 꾸고 말하자 요셉이 해몽해주었습니다. "당신은 사흘 후에 나가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그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떡 맡은 관원 장이 자기 꿈을 또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은 사흘 안에 죽을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그대로 되었습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 장이 감옥을 나갈 때 신신당부합니다. "당신이 나가거든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가 장담합니다. "나가기만 하면 내 은인인 당신을 꺼내 주겠소." 감옥을 나가자마자 술 맡은 관원 장은 그 약속을 잊어버렸습니다. 요셉은 잊혀지고 버려진 채 2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바로가 "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해석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관원 장이 바로에게 "꿈 해몽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감옥에 최고의 전문가가 있습니다. 요셉이라는 친구인데 정말 정확하게 맞춥니다."하며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바로 앞에 불려나가 바로의 꿈을 해몽해줍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의 꿈이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만인이 요셉의 앞에 와서 절을 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깔보고 괴롭히며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도 요셉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쩔쩔맵니다. 성경은 요셉이 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 부자가 되고 큰 권력을 잡아 원수 갚고 떵떵거리고 잘 살다가 죽었다고 하며 요셉의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자신을 미워하고 팔아 넘긴 원수를 용서하고 도리어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며 그들의 모든 가족들의 먹고 살 것까지 공급해주며 그들을 위로하며 그들에게 봉사하는 삶의 자리에까지 이르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셉이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큰 사명을 훌륭하게 완수했습니다. 크고 어려운 고난을 통과하며 신앙과 인격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 수천 만 명을 지혜롭고 진실되게 섬기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모진 고통을 맛보며 험난한 세월을 보냅니다. 그 고난은 요셉을 크게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며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나갈 때 원한이나 우울증이 그를 침몰시키지 못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며 전진할 때 죄악이 그를 침몰시키지 못했습니다. 존귀에 처하여 온갖 아첨과 화려함이 그를 흔들었을 때도 교만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정상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맡겨주신 지위와 부요와 능력을 가지고 만인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원수를 먹여 살리고 위로하며 그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의 힘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요셉을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까? 아픔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괴로운 고통의 세월 속에서 나를 만드십니다. 나의 생애를 향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이제까지 내 생애 속에 늘 함께 하시는,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난의 구덩이에서도 나를 다듬으시며 성숙시키시는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맡기십시다. 고난과 시험을 만날 때에도 원한이나 우울, 죄악이나 분노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누며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믿음을 키우기를 힘쓰며 성숙한 신앙의 정상에 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은총과 지혜의 길
김상복 목사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 들어 큰 환난이 있을 쌔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사도행전 7:9-16.
사랑을 많이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 줄 압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사람은 결혼한 후에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힘듭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고, 경험 있는 사람이 경험을 나눠줄 수 있으며, 공부를 해본 사람이 자식들 공부에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요셉의 이야기가 그와 같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하기 직전 설교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줄줄이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과 축복을 받아 전 세계 방방곡곡에 나눠주었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역시 은총을 베풀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에도 아브라함과 요셉의 믿음의 이야기들이 반복되어 그 은총이 우리의 가족과 가문과 교회와 한국 사회에도 반복되기를 원합니다.
요셉에게는 네 가지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의 은총입니다.
요셉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9절). 요셉은 어린 시절에 형들의 미움을 사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다가 맏형 르우벤이 살려 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돈을 받고 요셉을 팔았고 아버지에게는 양의 피를 바른 옷을 갖다 주며 짐승에게 먹혔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요셉은 어린 시절에 가족으로부터 미움과 시기와 거부를 당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어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가족에게 배반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배반을 당했을 수 있습니다. 자녀가 대학에 떨어졌을 수도 있고, 사업이 잘못될 수도 있고, 몸이 아플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고 알고 있으면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복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에도, 불행하고 아프고 힘든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히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애굽에 팔려갔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더라”는 이 말 한마디가 요셉의 미래를 잘 암시합니다. 어렵고 고통스럽고 실망스럽고 낙심되는 그 순간에도 요셉처럼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고 믿고 전진하면 반드시 요셉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게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피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임재의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알고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요셉처럼 노예로 팔려가는 불행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끝이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감동 주셔서 예수님과 여러분이 영원히 하나 된 이 사실을 확신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리라.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이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모든 환란에서 건져내사 애굽의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10절). 은총(favor)이란 상대방이 나를 특별히 좋아해서 나에게 선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잘 쓰는 참 좋은 표현 하나가 "You are very special to me"(너는 내게 정말 특별해)라는 말입니다. 자녀가 다섯이라면 다섯 명 각자에게 따로 말해야 합니다. 모두 다 있는 데서 “너희 모두가 내게 특별해”라고 하면 별로 재미가 없어요. 하나씩 불러서 말해줘야 아빠와 엄마가 나를 특별히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favor’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만 선택하신 줄 아십니까? 여러분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이고 영혼이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고 십자가의 은혜가 보입니다.
요즘 골프 동호회 회원 10명이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이 분들은 예수 믿는 회원 한 분에게 걸려서 몇 주 전부터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보니까 5명은 2부 예배에 나오셨는데 나머지 5명은 안보여서 “어디 가셨습니까?” 했더니 1부 예배에 왔다 가셨다는군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세상에 골프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당신들이 여기에 걸렸어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이분들의 눈을 뜨게, 귀가 열리게, 마음이 트이게 하셔서 하나님이,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천국이 보이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favor)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Special favor! 우리가 이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셉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은총을 받으면 사람에게도 은총을 받습니다. 예수님도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인하여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입기를 원합니다.
요셉은 어머니의 은총을 입은 아들입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요셉이 태어나기 전, 10명의 형이 있었고 레아가 낳은 디나라는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라헬에게 은총이 나타나 요셉이 태어났으니 라헬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때 충분한 사랑을 받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저도 아이가 셋 있습니다. 첫째 아이는 참 특별하게 여겨졌습니다. 자라면서 하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하기만 했어요. '아' 소리만 내도 "와~ 쟤가 아 하네!", 'A'만 해도 "와~ 천재구나!" 하면서 첫째 아이가 하는 것은 무조건 다 최고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다 경험하고 나니까 둘째 아이가 '아' 해 봤자 그거 뭐 옛날에 다 들은 거예요. 그런데 막내는 마지막이니까 또 특별하게 여겨졌어요. 둘째가 참 어려워요. 그래서 ‘second syndrom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공격적이고 형을 끌어내리고 동생을 윽박지르는 경향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거든요. 형과 동생 사이에 끼어서 죽을 지경이고 부모의 관심을 받기가 힘들지요. 우리 집도 둘째 아이가 잘 울었어요. 저는 운다고 아이를 구박을 했지요. "너 왜 맨날 우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second syndrome 이었어요. 내가 둘째가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 잘못을 깨닫고 어느 날 둘째만 데리고 맥도날드에 갔습니다. 그 아이가 ‘나도 아빠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느낄 때까지 여러 번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점점 울지도 않고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다 큰 요즘에 보니까 제일 편해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초기에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아이들을 만나거나 전화를 하면 "You are special. I love you!" 이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의 자녀들 중에도 누군가 자기가 좀 특별하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부터 요셉처럼 특별한 아들이요 딸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맥도날드에 데려가시기 바랍니다. 단둘이만 데이트 하세요.
요셉은 또한 아버지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습니다. 옷도 특별하게 입혔기 때문에 질투를 당했고 팔려가서 고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어머니의 은총과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어요.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결국은 다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 가운데 어린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분이 있으면 부모님을 용서해 드리세요.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 받고 요셉처럼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알고 깨달아 은총을 베풀며 사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은 바로 왕과 애굽에 은총을 베풀었으며, 자기 가문 75명에게 은총이 되었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고향으로 모셔 장례를 치러드리는 은총을 베풀었고, 자기를 팔아버린 형들을 전부다 용서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넉넉하니까요. 은혜와 사랑과 친절을 충분히 받아본 사람들은 얼마든지 그대로 베풀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인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은 부족했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여러분 속에 풍족히 넘쳐서 그 체험 때문에 용서할 수 없던 사람들도 다 용서해 주고 은총을 베푸는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2. 요셉은 지혜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두 가지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약3:13-18). 세상적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마귀적인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입니다. 이 둘은 그 뿌리가 다릅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잠언은 말씀하십니다. 뿌리가 선해야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 수많은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 지혜가 어떤 지혜인지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 열매를, 결과를 보면 압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악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13-16절).
이 악마적 지혜의 특징은 ❶ 시기입니다. 남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속적이고 육적이고 악마적인 지혜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으로 움직이면 이미 큰 문젯거리입니다. ❷ 국어 성경에는 다툼으로 번역되었으나 싸우는 것이라기보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self-seeking)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유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지혜는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므로 벌써 방향이 다릅니다. ❸ 자기 자랑을 합니다. ❹ 거짓말을 합니다. 진리가 그 안에 없습니다. ❺ 세상적입니다. 그 지혜의 근원이 세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❻ 정욕적입니다. 정욕은 감각적인(sensual) 것을 의미합니다. 이성적 신앙적 영적 판단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❼ 마귀적입니다. 그 뿌리가 마귀이므로 결과는 혼란을 일으킵니다. ❽ 악한 일입니다. 열매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그 결과가 나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하겠다고 말했어도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것입니다. 아직 우리 속에도 이런 좋지 않은 지혜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깨끗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편 선한 지혜, 영적인 지혜,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약 3:17-18).
❶ 깨끗합니다. 어떻게 깨끗합니까? 자꾸 씻는 것입니다. 어떻게 씻습니까? 말씀으로, 예배로, 기도로, 회개로 씻습니다. 남의 더러운 얼굴을 보면 "왜 저렇게 더러운가? 혹시 내 얼굴도 저렇게 더럽지 않은가? 내게도 잘못이 있지 않은가?" 하며 자기를 계속 씻어 갑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입니다. 여러분, 지속적으로 자신을 씻어서 깨끗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거기서 놀라운 하늘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❷ 평화스럽습니다. 위로서부터 오는 지혜는 평화를 도모합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 내 속에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줄 수 없고 내 속에 평화가 없으면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에 평화를 주시옵소서. 성령의 폭풍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같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심을 믿고 나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나에게 평화를 주시옵소서." 여러분이 평화로우면 다른 사람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❸ 관용입니다. 부드러운 것입니다.
❹ 양순입니다. 양보를 잘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양보를 했으나 결국에는 내가 다 얻습니다. 이삭과 아브라함과 룻의 예가 그렇습니다. 내가 양보를 했는데 결과는 다 내 것입니다. 양보를 했는데 하나님이 부어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자기가 잘난 것 같았는데 마지막 가면 그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면서 양보를 잘 하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지혜입니다.
지난주에 싱가포르를 방문했다가 그곳 사람 몇 분과 점심을 같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30년이 넘는 친구들로 그 동네에서 유명한 아주 성공한 사업가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50세가 넘도록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놀렸습니다. "너 아직도 결혼을 안 하면 어떻게 하냐?" 했더니 "왜 결혼을 하냐? 이상한 사람들이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결혼하는 날로 그 돈의 절반이 아내 것이 될 것 아닌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지! 그럴 순 없어!" 아마 싱가포르 법은 일단 결혼을 하면 재산의 절반이 배우자의 것이 되는가봅니다. 자기가 죽도록 번 돈을 결혼 한번으로 아내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친구들이 "아기를 낳아봐. 아기 낳으면 틀리다" 하니까 "아기를 낳으면 그 자식들이 다 가져가지 않냐?"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이 "너는 돈 밖에 모르는군. 너는 돈이 하나님이야!" 하면서 흉을 보더군요.
하나님의 지혜는 가진 것을 주면 그것이 변해서 축복으로 돌아오고 또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돈은 쓰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갖고 있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써야 돌아옵니다. 이 컵에 지금 물이 가득 차 있는데 마셔야 다시 부어줍니다. 안 마시면 물이 썩습니다. 양보하는 것이 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이 양보하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아름다운 모습과 영적 지혜를 보시고 가만 계실 것 같습니까?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롯은 요단의 그 아름다운 초원들을 모두 차지했습니다. 자기가 다 가진 줄 알았습니다. 삼촌 아브라함 생각은 추호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낙심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고개를 들어 동서남북을 쳐다보라!" 하셨습니다. 또 "하늘을 쳐다보라!" 하셨습니다. 그 때가 밤이었는지 하늘에는 별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롯은 자기가 다 가진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네가 눈으로 본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내가 너에게 주겠다!" 영적인 지혜, 하나님의 지혜가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요셉이 경험했고, 여러분과 저도 이 지혜를 구하면 똑같은 은총을 경험할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또한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습니다.” 편벽은 편애하는 것으로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을 말합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은 싫어. 이런 사람은 좋아"라고 할 때 편견이 있는 것입니다. 만나 보기도 전에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편벽, 편견, 편애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늘로부터 온 지혜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품는 것이죠. 이럴 때 좋은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즉 하늘의 지혜, 영적인 지혜, 선한 지혜는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하나님이요, 성령님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요셉이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서 요셉이 받은 축복을 모두 체험하게 되길 원합니다.
3. 요셉은 구원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모든 환란에서 건져내사"(행 7:10). 모든 환란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싱가포르에서 만난 분들은 처음 만난 분들인데 그분들이 점심을 사줘서 대접받았습니다. 목사가 앉아서 대접만 받고 가려니 좀 안된 생각이 들어서 "여러분이 목사를 대접했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여러분을 위해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여러분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무슨 좋은 소식입니까?" 하더군요. "God loves you! 하나님께서 당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영원 전부터 사랑하셨는데 여러분이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 끝까지 가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일러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의 죄를 사해주시고 하늘나라를 주실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간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문젯거리가 있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오래 살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떠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말씀을 전하고 나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해주니 고마워하셨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비행장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헤어질 때 제가 그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Lony, remember. God loves you with eternal love.“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했더니 "Thank you!"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 구원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 쪽에서 나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어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 구원을 받고 아는 사람이 구원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에서도 구원해 주셨습니다. 형들로부터, 상인들로부터,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감옥 간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애굽의 총리로 만들어 주셔서 많은 은총을 왕과 나라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여러분의 것임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부친 사후에도 끝까지 부친의 소원을 들어 드린 사람,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고 남들을 도와주고 어려움에서 구원해줄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 요셉 같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나눠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가문의 역사와이 교회의 역사와 우리 사회와 동네와 직장의 역사 속에, 여러분이 아브라함이 되시고 요셉과 같은 은총을 받아서 그 은총을 충분히 나누고 베풀며 사는 하나님의 축복이 꼭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