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빈 여정을 하루 하고도 반나절만 소화하면 6월 13일 인천행 비행기에 오른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마음이 바빠진다. 객실 창문 아래 공사 현장에 벌써 웃통을 벗어제친 인부들이 눈에 띈다. 오늘 덥겠구나.
집친구와 아침 먹으러 가며 희한한 실수를 했다. 객실 나와 제법 긴 통로를 통해 걸어 나오는데 옆에 엘리베이터 통하는 문이 있길래 열었더니 열렸다.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와 체크인하며 들었던 층과 다른 층에 식당이 있어 약간 미심쩍은 마음이 일었지만 데스크에 다가갔다. 산뜻한 유니폼의 여직원이 환한 미소로 맞다가 룸번호를 듣고는 낯빛이 확 달라진다.
“너네 다른 호텔에 내려왔어. 너네 방은 우리 호텔에 없어. 밖에 나가 돌아가면 너네 호텔이 나올 거고 거기 들어가면 밥 먹을 수 있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황당해 하자 조금 더 상급자로 보이는 키 큰 청년이 다가와 더 친절하게 되풀이 설명했다. 영어도 잘 안되는 난, 틀림없이 엘리베이터 타고 잘 내려왔다니까, 마구 우기며 다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짜증 날 법도 한데 환히 웃으며 그럴 수 없고, 요리조리 가면 된다고 일러줬다. 우리가 연신 미안하다고 하니까, 아냐, 너네처럼 실수하는 애들 많아, 그런다.
알고 보니 우리가 묵은 이비스 빈 하우프트반호프 호텔과 바로 옆 노보텔 스위트 빈 시티 호텔은 한 건물을 사용해 엘리베이터를 착각하기 쉬웠다. 딸은 나중에 카톡으로 우리가 묵은 호텔은 싸구려이고, 옆 호텔은 그래도 노보텔 브랜드이긴 한데 다 한 회사라고 일러줬다. 그런 걸 알았어야지.
그런데 우리 호텔 식당도 훌륭했다.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이랄까? 특히 와플, 처음에 우리야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는데 누군가 그걸 어떻게 사용하느냐고 알려달라니까 한 여직원이 엄청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러준다.
역 구내에서 먼저 빈 카드를 구입했다. 이날 오전 9시 59분에 샀으니 24시간 동안 일인당 8유로에 빈 시내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벨베데레를 향해 걸었다. 무척 가까웠다. 철로 건너 조금 걸으니 벨베데레 궁전 지붕이 보였다. 입장료는 일인당 8유로씩. 너무도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 앞이 유난히 북적였다. 미술관 들어오기 전 선물가게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잘츠가 모차르트 덕에 먹고 산다면 빈은 클림트 덕에 산다고, 그러다 점심 무렵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얘기는 조금 뒤에.
상궁 미술관에 들었더니 클림트 작품 가운데 ‘주디스’가 집을 나갔다.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살해하고 옛 유대를 구한 과부 주디스를 클림트가 비엔나 남자들이 성적 매력을 느낄 만한 여인으로 둔갑시켰는데 4월부터 10월까지 일본 도쿄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에 출장 전시 갔다고 했다.
하지만 저유명한 ‘키스’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여러 무리의 그룹들이 각자 언어로 명작을 설명하니 야단법석이고 역시나 유리에 반사돼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기 어려웠다.
밖에 나오니 정원과 푸르른 하늘이 오히려 더 값어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슈테판 성당 북쪽 종탑을 올랐다. 6유로씩. 철망을 거의 4m 높이로 빙 둘러놓아 빈 하늘을 오롯이 전망하겠다는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차라리 멀리서 종탑을 바라본 사진이 역시 값어치 있어 보인다.
2시 24분쯤 우리는 땡볕 아래서 줄을 서 있었다. 그 유명한 자허 커피숍이다. 바로 모퉁이 돌아서 자허 호텔 커피숍이 있는데 우리도 이곳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했다. 처음에 우리는 이곳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설왕설래를 했다. 30분 기다릴 가치가 있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빈에 왔으니 들어가자는 데 동의했다. 20분쯤 기다리니 얼음을 동동 띄운 물 한잔씩 돌려 기다리는 이들을 달래줬다.
안에 들어갔더니 시계를 1910년대쯤으로 돌린 듯한 웨이터와 웨이트리스 등이 고풍스러운 살롱 안을 분주히 돌아다닌다. 샹들리에도 촛불 거치대도 정말 세월을 거스른 것 같다. 값이 19.3유로(자허 토르테 7.5유로, 멜랑지 5.9유로, 아인스패너 5.9유로)로 비싸지 않았다. 고급스럽긴 했지만 커피가 생각보다 가볍고 밋밋했다. 워낙 무겁거나 신맛이 강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
빈의 어디를 더 돌아다녀야지, 하던 우리는 트램에 올라 타 어딘가 끝쪽까지 갔다가 다시 달려와 지친 다리도 쉬고 빈의 전체 풍광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1번 트램에 몸을 실었다.
창 밖 풍경을 보며 어디에서 내리나 망설일 즈음, 옛날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나 만날 법한 장인들의 모습을 담은 책 표지들을 미니 팔레트 위에 줄줄이 세운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게 왜 여기 있지? 그곳 진열장에서 책 표지를 눈여겨봤다. 주인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자리를 비웠다.
그 가게 앞에서 돌아선 난, 다시 해머를 머리에 맞은 듯 멍해졌다. 요상한 건물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그때까지 여기가 어디지? 하던 집친구가 여길 와봤다고, 그런데 굉장히 헤매다 여기를 와서 자기는 이곳이 그곳인지 몰랐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건축가 훈터레트바서가 설계한 쿤스트하우스였다. 말이 필요 없다.
지난 6일 북한산 번개산행에 오신 분들만 받은 컵받침대에 담긴 건물이다. 뜻밖에 명소를 발견한 난 신이 났고, 황당하게도 친구들과 왔던 곳을 다시 찾은 집친구는 떨떠름해 했다. 클림트와 함께 빈을 훈테르트바서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이곳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을지 고민고민하다 점심을 건너 뛰고 저녁을 일찍 먹기로 했다. 슈테판 성당 근처로 돌아와 그 시간에도 이미 술손님들이 득시글거리는 호프 바에 들어가 갈비 립과 슈니챌(독일이나 오스트리아 돈까스)를 먹었다. 감자 샐러드의 일종으로 나온 것이 독특하고 인상적이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 한국인 모녀가 앉아 소박하게 시켜 먹고 빨리 일어서는데 집친구는 가뜩이나 양이 적은 편이라 내 혼자 다 뜯어먹느라고 조금 창피한 기억이 있다.
달이 뜨니 슈테판 거리는 사람들과 맥주, 정장을 차려 입은 이들로 넘쳐난다. 밤 10시 30분 넘어서까지 소화도 시킬겸 이리저리 싸돌아 다니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빈에서 이번 여정의 마지막 아침을 맞았다. 새벽 3시쯤 일어나 로비 내려가 2시간쯤 기사를 썼다. 객실에 노트북 갖다놓고 호텔 밖으로 달려나갔다. 벨베데레에 다시 갔는데 정말 가까웠다.
한 시간쯤 뛰다 돌아와 아침 먹고 트렁크 싸놓고 벨베데레를 다시 이번에는 둘이 함께 갔다. 트램을 타고 갔다. 빈 카드는 24시간 유효하기에 갈 때만 탔다. 갈 곳이 거기 밖에 없었다. 2시간쯤 벤치에 앉아 사람들 오가는 것을 지켜봤다.
걸어서 돌아와 잠시 숨 돌리고 체크아웃을 했다. 218유로. 좋은 입지에 훌륭한 조식을 제공하는 호텔인데 값도 그리 비싸지 않았다. 역으로 가 공항 가는 열차에 올랐다. 일인당 4.2유로. 부다페스트 행 열차가 몇 분 연착해 우리 플랫폼에 들어왔는데 플랫폼을 헷갈린 이들이 허둥지둥, 우왕좌왕했다. 난 쯔쯔쯔 혀를 찼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부치려는데 키오스크에서 한단다. 어떻게 하지, 조바심을 내는데 노련해 보이는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도와줘 짐까지 거뜬히 부쳤다. 생수를 샀는데 금세 검색하는 곳에 이르러 뺏길 판이라 돈이 아까워 부어라 마셔라 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 16박 17일을 돌아봤다. 돌로미티는 여행 최적기보다 적어도 일주일쯤 앞당겨 왔던 터라 여러 모로 손해를 봤지만 그럭저럭 첫 여정으로는 그만이었다. 토스카나는 기대 이상이었다. 정말 일주일 정도 머무르며 속살을 더 맛보고 싶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고향으로서 아니라 옛 정취가 생생히 남아 있는 고도로, 빈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묘하게 어우러진 도시였다. 잘 놀았다. 부부의 다음 여행을 꿈꾸게 만든 여정이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꼼꼼이 여행 계획을 짜서 긴 여정을 600만원 안팎으로 마무리하게 해준 집친구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사를 올린다.
첫댓글 대장정이 드디어 끝났군. 잘 읽었네. 친절한 안내에 따라 우리 부부도 가고 싶긴 하지만 꼼꼼이 여행계획을 짤 집친구가 없어서...아무튼 고맙네.
진지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빈을 먹여 살리는 또 한 사람은 그래서 훈데르트 바서야? 네가 선물 사느라 돈을 많이 써서? ㅎㅎ 암튼 긴 글 쓰느라 수고했고 잘 읽었다. 근데 산행 공지는 안하냐? 여행기도 좋지만 내일 가는 산행이 아직도 안올라오면 어떡할라고~~빨랑 해!!!
회장님이 지적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전반적으로 글을 다듬었다. 회장님이 산행 공지 안하냐고 댓글 단 게 9시 39분인데 내가 공지한 게 9시 34분이다.
@알자지라 니 글 읽을 때 올린 모양이구나. 시간차 공격~~ㅋㅋ
여행기 잘 읽었네, 가성비 좋은 여행및 산행이었을 듯, 나중에 이쪽으로 놀러가면 참고가 많이 되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