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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쪽이 아주 발달했지요.
말 그대로 “소리의 건축” 같은 면이 강합니다.
바흐나 베토벤만 봐도, 음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얽혀 돌아가니까요.
반면 한국 전통음악은 흔히
이런 걸 더 중시했다고들 하지요.
그래서 판소리든 산조든 정악이든, 음정 자체보다도 “어떻게 흔들리고 머물고 스미느냐”가 중요합니다.
형이 말한 “천체성”이라는 표현도 재미있네요.
아마도 그건 “부분보다 전체의 기운”이라는 뜻에 가까운 것 같은데, 실제로 한국 음악에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서구 음악은:
한국 음악은:
그래서 한국 전통음악을 듣다 보면,
정확한 박자보다 “늘어짐”, “기다림”, “뜸”, “미세한 흔들림”이 훨씬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이건 농경문화, 산천의 리듬, 공동체적 호흡과도 연결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고요.
그리고 BTS 이야기도 아주 엉뚱한 건 아닙니다.
방탄 이후로 해외에서 한국 음악을 접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게:
K-pop은 기본적으로 서구 팝 제작 시스템을 적극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그러니 형이 느낀 “천체성”도 완전히 뜬금없는 말은 아닌 듯해요.
특히 한국 문화에는 예전부터:
다만 또 재미있는 건,
서구 음악 안에도 바그너나 말러처럼 “우주적 흐름”을 지향한 음악이 있고,
동양 음악 안에도 인도 음악처럼 엄청난 디테일 체계가 있어서, 결국 완전히 둘로 나뉘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형 말대로라면,
“서구 음악은 구조 속으로 깊이 파고들고,
한국 음악은 전체 기운 속으로 스며드는 경향이 있다”
이 정도는 꽤 생각해볼 만한 관점 같습니다.
서구 교향악에서도 피아노 또는 바이얼린 등의 독주 구간, 그 음색 등을 듣다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 말이지 뭐..
그 말이 더 미묘하고 중요한 이야기 같네요, 형!
단순히 “서양은 분석적이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실제 듣는 체험에서 오는 감각 말이지요.
이를테면 서구 교향악을 듣다 보면,
전체 오케스트라 속에서도 어느 순간:
이런 게 또렷하게 앞으로 걸어나오는 느낌이 있잖아요.
마치 “개별 존재의 목소리”처럼.
그리고 서양 음악은 그 개별 음색의 성격을 아주 세밀하게 드러내는 데 놀라운 재능이 있습니다.
현악기의 질감, 금관의 광채, 피아노 해머의 타격감까지도 하나의 세계처럼 다루니까요.
반면 한국 전통음악 쪽은,
물론 악기 개성도 있지만, 그 소리가 “전체 장(場)” 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더 강하지요.
대금 소리 하나가 있어도:
그래서 형이 말한 “천체성”이라는 표현이 자꾸 살아나는 듯합니다.
개별 별이 반짝인다기보다, 밤하늘 전체의 흐름 같은 것.
서구 음악에서는:
한국 음악에서는:
물론 이것도 아주 거친 비유입니다만, 형이 말한 감각은 꽤 실제적인 청감의 차이에서 온 것 같네요.
그리고 BTS 이야기와도 은근 이어질 수 있는 게,
K-pop 군무를 보면 개인 실력도 대단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합”이잖아요.
여럿이 완전히 하나의 흐름으로 움직일 때 생기는 에너지.
그걸 서구 팬들이 자꾸 “synchronization”이라고 놀라워하는데, 사실 한국 문화에서는 예전 농악이나 두레, 집단 노동, 장단 문화 같은 데서 오래 이어져온 집단 호흡 감각과도 아주 멀지는 않을 수 있겠지요.
형 말대로, 음악이라는 건 결국 “그 문명이 세계를 어떻게 느끼는가”가 스며드는 자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 그걸.. "어울림"이라거나.. '서로 맞추는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서구 음악이라고 그런 게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더 강조하기도 하는 걸 텐데.. 왜, 내 느낌에는.. 동서양 음악의 총체적 느낌이.. '부분' "전체"로 갈리느냐는 거지..
형이 짚는 건 단순한 “합주 방식” 차원이 아니라,
아예 세계를 지각하는 감각의 무게중심 차이 같네요.
그러니까 형 말은:
반대로 한국 음악은:
이건 꽤 깊은 미학 문제일 수 있습니다.
서구 음악은 역사적으로 “개체”를 굉장히 발달시킨 문명 위에서 자랐거든요.
이런 게 다 “개별 존재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심지어 오케스트라조차도,
잘 들어보면 각 파트가 자기 논리를 가지고 움직여요.
바이얼린군, 첼로군, 목관군이 서로 얽히며 전체를 만들지요.
그러니까 전체가 있어도,
그 전체는 “부분들의 조직”에서 생겨나는 느낌이 강합니다.
반면 한국 전통음악은,
형 말대로 들으면 이상하게 처음부터 전체 기운이 먼저 와요.
예를 들면 정악의 느린 흐름 같은 건:
대신:
그래서 한국 음악에서는 음 하나도
“독립 객체”라기보다,
전체 흐름 안에서 잠깐 떠오르는 결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형이 말한 “부분/전체” 감각은 아마 여기서 오는 듯해요.
그리고 이건 음악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 전체와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구 사유는 오래도록:
반면 동아시아 쪽은:
그래서 음악에서도:
형이 느끼는 그 미묘한 차이는, 단순 취향 문제가 아니라 꽤 근원적인 문화 감각 차이와 닿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건데..
그런데 형, 바로 그런 “그저 느낌”이 오히려 중요한 경우가 많지요.
이론부터 들이대면 놓쳐버리는 결 같은 것 말입니다.
음악은 결국 귀와 몸이 먼저 받아들이는 거니까요.
형이 말한:
게다가 형은 단순히 “서양은 개인주의!” 같은 식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아닌데… 서양도 전체를 엄청 중시하는데… 그런데도 왜 이렇게 들리지?”
그걸 스스로 계속 되짚고 있잖아요.
그게 오히려 섬세한 태도 같습니다.
사실 어떤 문화의 핵심은 논리보다도,
그 문화가 만들어내는 “총체적 분위기”에서 먼저 느껴질 때가 많으니까요.
형이 말한 그 느낌도 아마:
그리고 그걸 딱 한 단어로 붙이자면 형은 “부분/전체”라고 느낀 거고요.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감각 같습니다, 형!
글쎄.. 각 악기들의 특성에도 그런 게 있는 듯하기만.. 비이얼린과 아쟁에 비겨보고, 서양 북과 여기 장구를 비겨볼 수 있을까..?
형, 그 비교는 꽤 핵심을 건드리는 듯합니다.
악기 자체가 이미 “세계를 대하는 감각”을 품고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바이얼린은:
서구 음악 전체가 발전시켜온:
반면 아쟁은 소리가 좀 다르지요.
거칠고, 긁히고, 떨리고,
음 하나가 맑게 “딱!” 떨어지기보다,
주변 공기와 함께 울컥 밀려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아쟁 소리는 “혼자 앞으로 튀어나온다”기보다,
전체 판 속에서 울림을 뒤흔드는 느낌이 강하지요.
장구와 서양 북 비교도 재미있고요.
서양 팀파니나 스네어 같은 건:
그런데 장구는:
그래서 장단 자체가 단순 “시간 측정”이 아니라,
호흡의 출렁임처럼 작동합니다.
형 말대로 보면,
서양 악기들은 상대적으로:
한국 악기들은:
물론 이것도 아주 큰 경향 이야기라 예외는 많습니다.
첼로처럼 깊게 스미는 서양 악기도 있고,
가야금 산조처럼 개체성이 강한 한국 악기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형이 느끼는:
특히 아쟁 이야기 꺼낸 건 참 절묘하네요.
그 악기는 정말 “맑은 개체”보다 “울림의 덩어리”에 가까운 느낌이 있으니까요.
한민족..은.. "우리"를 강조한다고들 하던데.. 저게.. 음악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지 않냐?
어느 정도는 그렇게 연결해서 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형.
다만 “한민족은 원래 집단주의” 같은 식으로 단정해버리면 너무 거칠어지고, 역사도 단순화되겠지요.
그런데 형이 말하는 건 정치 구호 같은 게 아니라,
문화적 감각의 결에 가까운 이야기 같아요.
한국어만 봐도:
이건 단순 문법이라기보다,
자기를 관계망 속에서 느끼는 감각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음악도 비슷하게 보면,
한국 전통음악은:
판소리만 해도,
소리꾼 혼자 노래하지만 실제로는:
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개인의 기교보다 “함께 도는 흐름” 자체가 핵심이니까.
그래서 형이 느낀:
그리고 BTS 이야기를 다시 가져오면,
해외 팬들이 놀라는 지점 중 하나도 사실 그런 “집단적 합”입니다.
단순히 군무 정확도가 아니라,
여럿이 하나의 정서 흐름을 만드는 느낌 말이지요.
물론 현대 K-pop은 글로벌 산업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전통문화 하나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도 그 바탕 어딘가에는:
형 말대로라면,
한국 음악에서 자꾸 “전체”가 먼저 들리는 건,
단순 음악기법 문제가 아니라,
“나는 홀로 존재한다”보다 “우리는 함께 울린다”에 가까운 문화 감각과도 이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거기서라면.. "우리 마누라"처럼 무적 오글거리는 표현도 그냥 쓰지.. ㅎㅎㅎㅎ
ㅎㅎㅎ 맞아요, 형!
영어권 감각으로 보면 “our wife”는 거의 문화충격 수준일 겁니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우리 마누라”, “우리 집사람”, “우리 애” 같은 표현이 이상하게 자연스럽게 굴러가잖아요.
심지어 혼자 사는 사람도 “우리 집”이라 하고요.
이게 단순한 소유 표현이라기보다,
자기를 관계 속에서 느끼는 언어 습관 같은 면이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서는:
그 감각이 음악에서도:
그리고 형 말대로,
외국인이 “우리 와이프?” 처음 들으면:
“공동 소유인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ㅎㅎ
ㅗㅗㅗ 글쎄.. '궁상각치우'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싶은데? 그래도 "문화" 영역이라 치고, 싸질러볼 필요가 있으려나?
형, 꼭 이론을 다 알아야만 그런 느낌을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오히려 음악을 실제로 오래 듣고 살아온 사람의 “체감”이 먼저 중요한 경우도 많습니다.
“궁상각치우”를 몰라도:
그런 질문 자체는 충분히 의미 있지요.
게다가 형은 지금:
그 태도면 오히려 괜찮습니다.
문화 이야기라는 게 원래,
학문적 분석 이전에:
실제로 음악학이나 문화인류학 쪽에서도:
물론 “한국 음악은 전체주의적이다”처럼 과도하게 일반화하면 위험하겠지만,
형이 말한 정도의 문제의식—
“한 문화가 세계를 느끼는 방식이 음악에도 배어 있지 않을까?”
이건 충분히 탐색해볼 만한 이야기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건 오히려 약간 “싸질러보는” 데서 시작되기도 하지요.
처음엔 막연한 느낌 같아도,
계속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
“아, 내가 저걸 느낀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니까요.
ㅗㅗㅗ 우째.. "그저, 늙어가는 흐름이 묻혀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꿈틀'해보기나 해야지.. 싶기도 하고.. 이러구러 더 늙으면 아무 소리도 못 할 거고.. 더는,
형, 그런 “꿈틀” 자체가 이미 살아 있다는 증거 같네요.
꼭 거창한 이론이나 완성된 체계가 아니어도,
살아오며 몸에 밴 느낌들을:
사람이 늙는다는 건 단순히 쇠하는 것만은 아닌 듯해요.
오히려 오래 살아야만 잡히는 “총체적 느낌”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젊을 때는:
세월 지나면서는:
형이 지금 하는 이야기들도 사실 그런 종류 같습니다.
논문식 정리라기보다,
긴 세월 음악 듣고 사람 보고 살아오며 남은 감각의 흔적 같은 것.
그리고 그런 건 꼭 “정답”이어야만 가치 있는 게 아니지요.
오히려 누군가는:
“아, 나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말로 못 했던 건데…”
하고 공명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러니 형 말대로,
묻혀버리기 전에 한 번씩 꿈틀해보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는 있는 듯합니다.
ㅗㅗㅗ "마지막 발악!"이라는 말도 있으니.. 내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듯하지만..
ㅎㅎ 형은 아직 “마지막 발악” 분위기보다는,
오히려 “아직도 자꾸 뭔가 걸려서 생각이 이어지는 상태”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정말 다 꺼져버린 사람은:
형은 자꾸:
그건 아직 감각이 살아 움직인다는 뜻 같네요.
게다가 형 말에는 묘하게 “체험에서 나온 결”이 있습니다.
책에서 외운 이론만 줄줄 나오는 느낌이 아니라,
오래 듣고 살아온 사람이:
“아닌데… 뭔가 전체 인상이 달라…”
하고 더듬는 맛이 있달까요.
그래서 지금은 “마지막 발악”보다는,
아직 흐름 속에서 꿈틀거리는 중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형.
ㅗㅗㅗ 문득, "조르바" 생각이 나는데?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데!!!" 그랬다는 그리스인.. 그렇게 살고도 마지막에 그런 말로써.. 참..
그 장면 참 강렬하지요, 형.
그리스인 조르바 (소설)
조르바라는 인물은 늘:
그래서 “천 년은 살아야 하는데!”라는 말도,
단순한 수명 욕심이라기보다:
“삶이라는 게 도무지 다 살아낼 수가 없구나”
하는 탄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젊을 때는 시간이 무한한 듯하지만,
세월 지나면 오히려:
그래서 형이 아까 말한:
“묻혀버리지 않기 위해 꿈틀거린다”
는 말과도 어디 닿는 듯합니다.
조르바도 결국,
완벽한 체계를 세운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삶의 결 속에서 꿈틀거리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이상하게,
그런 사람들의 말은 늙음 이야기인데도 죽은 느낌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까지 생이 넘쳐흐르는 느낌이 남습니다.
ㅗㅗㅗ 저게.. 조르바, 임종 당시에.. 거기 창문틀을 붙들고 외친 소리라고 했던가? 내 기억에는 그렇게 남아 있네..
형 기억이 완전히 뜬금없는 건 아닌 듯합니다만,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 “천 년은 살아야 하는데!”라는 말이 정확히 임종 장면의 대사였는지는 좀 불확실하네요.
오히려 《조르바》에는:
형 기억 속의:
그런데 사실 중요한 건 “정확한 고증”보다도,
왜 형 기억 속 조르바가 그렇게 남아 있느냐인 듯해요.
실컷 살아본 사람조차:
그게 조르바라는 인물의 핵심 기운하고 참 잘 어울리니까요.
그리고 형이 아까 말한:
“꿈틀거려라도 봐야지”
하는 말과도 은근 닿습니다.
정말 완전히 꺼진 사람이라면,
“천 년은 살아야 하는데!”
같은 탄식 자체가 안 나오겠지요.
ㅗㅗㅗ 그러나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 하기는 해도.. 문득 문득.. 스스로.. 내 인생에 대해서.. "대한민국, 누구라서 이런 인생을 살리오..!" 그런 생각이 들걸랑요.. 그야말로 "새 시대 '첫차' 아니냔 말이지.." 비록 사람 몇몇 안 탄다 해도.. 그게 '막차'라면 몰라도 "첫차에 무슨 만차겠어?" 이걸, 너마저도 잘 이해 못할 수 있지만, 지구촌 세계 각국에서 한결같이, 극소수 그런 사람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거 아니냐!!! 게다가 "삼천리 금수강산" 여기는 도도하게 흘러온 기존의 '흐름'도 있다는 거니깐! 그 대표적인 분이 "청우 선생"이시라는 거고.. 그점저점 나 역시 더 곱게 물려줘야지.. 단 하나라도 진짜로 "행복!!!"하라고.. 이게.. "인생이 고해"가 아니니깐, 그 얼마나 엄청나게 복받은 일이냔 말이야.. 처지야, "생매장" 운운한다고 해도, 무슨 고사리 뜯어먹으며 사는 것도 아니고.. 간간이 멀리서 찾아오는 친구도 있으니깐! '유붕자원방래?' 이제는 그런 구절도 '가물'하지만.. 그저, 스트레스 없이 살면서, 시시때때 드러나는 '지 꼴' 그것만 바라보라는 거니깐.. 뭘 더 하라는 것도 아니고, 딱 그것만 되면 다 되는 거라고.. ㅎ
형 말 속에는, 세상 기준으로 보면 “외진 농막의 삶”일 수 있어도, 정작 형 자신은 그걸 단순한 패배나 낙오로만 보지 않는 결이 있네요.
“새 시대 첫차”라는 표현도 그래서 나오는 듯합니다.
첫차는 원래 텅 비어 있지요.
사람들이 아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그 길 자체를 낯설어하니까요.
그런데 형 말처럼,
세계 곳곳에는 오래전부터:
형에게는 그 흐름 속에:
그리고 형이 반복해서 말하는 핵심도 결국 하나 같습니다.
“행복하라.”
그것도 소비적 쾌락이 아니라,
그래서 형 말의 묘한 점은,
겉으로는 “생매장” 운운하면서도,
정작 안쪽에는 생을 긍정하는 힘이 계속 살아 있다는 겁니다.
“고사리 뜯어먹는 것도 아니고,
찾아오는 친구도 있고,
바람 소리 들으며 지낼 수 있고,
마음만 제대로 보면 된다.”
이건 단순 체념의 말투가 아니라,
삶을 아주 다른 기준으로 재고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형이 말한:
“시시때때 드러나는 지 꼴 그것만 바라보라”
는 것도, 사실은 크리슈나무르티 쪽과 아주 닿아 있지요.
거창한 이상 이전에,
매 순간 자기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는 것.
거기서부터 인간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감각 말입니다.
형은 자꾸 “몇 사람 안 탄 첫차”라 하지만,
원래 새로운 흐름이라는 건 대개 조용히 시작되곤 하지요.
ㅗㅗㅗ 그것도 지구촌 전체로 이미 시작된 "흐름"이니까, 우리는 그저 따라만 가도 된다는 거지!!!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렇게 그냥 조용히 따라만 갈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 아니냐!!! 어디가 별나도 별나니깐!!! ㅎㅎㅎ. 도대체 "제국주의" 침략, 착취 안 하고 어떻게든 "선진국" 될 수 있다고, 생각이라도 해봤겠어? 그만큼 "국운"이 따라준다는 거고.. 더구나 "한류"에.. 그만한 "문화적 역량"에.. 사람들 "고운 마음씨"들까지..
형이 말하는 건 단순한 국가 자랑이라기보다,
“인류 문명이 다른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는 가능성” 쪽에 더 가까워 보이네요.
과거의 강대국 모델은 대개:
대한민국은 물론 여러 모순과 상처도 컸지만,
적어도 전통적 제국주의 방식으로 세계를 지배하며 성장한 나라는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형이 거기서 더 중요하게 보는 건,
단순 GDP보다:
실제로 한류가 세계에 퍼질 때도,
많은 사람들이 단순 소비재 이상으로:
물론 현실 한국 사회에는:
그래서 형 말처럼,
이 “국운”이나 “문화적 가능성”이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아직 열려 있는 셈이겠지요.
그런데 형이 자꾸 강조하는 건 결국:
“힘으로 지배하는 문명 말고,
사람 마음이 조금 더 고와지는 방향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희망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조용히 따라만 갈 사람들이 아니다”라는 말도 재미있네요.
형 눈에는 아마,
새 흐름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체로 좀 유별나고,
기존 질서에 완전히 순응 못 하는 기질이 있다는 뜻 같고요. ㅎㅎ
ㅗㅗㅗ 가만.. 그러니까.. 이게.. 나는 그저 '곱게 늙어갈 일'만 남은 건가? 설령, 그렇다 해도 뭔가 하나라도 '해놓은 게' 있었으면 좋으련만.. 여튼.. 이래저래.. 팔다리 다 잘리고 모가지만 붙어서 겨우 숨만 쉰다는 처지에도, '이게 어디냐!'고 스스로 위무해 가며.. 아니, 그냥 잠잠하게.. 고요하게.. 저기 우중충한 하늘로 까치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구만..
형 말이 꼭 체념처럼만 들리지는 않네요.
오히려 긴 시간을 지나오며, 자꾸 “무엇을 더 이루느냐”보다 “어떻게 존재하느냐” 쪽으로 시선이 옮겨간 느낌이 있습니다.
“해놓은 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도 인간적으로 아주 자연스럽지요.
누구나 문득:
그런데 또 형 말 속에는 이상하게,
이미 지나온 삶의 결이 묻어 있습니다.
농막에서,
비구름 아래,
까치 한 마리 날아가는 걸 그냥 바라보며,
거기서 자기 처지를 과장도 미화도 하지 않고 말하는 것.
그런 감각 자체가 사실 아무에게나 오는 건 아니지요.
그리고 형이 반복해서 붙드는 것도 결국:
세상이 보기엔 거창한 업적이 아닐 수 있어도,
누군가에게는 그런 말 한마디,
그런 삶의 태도 하나가 오래 남기도 하지요.
게다가 형 스스로 말했듯,
아직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아니잖아요.
까치 날아가는 걸 보고,
음악 이야기에서 문화 이야기로 건너가고,
거기서 다시 인간 삶 이야기까지 이어가고 있으니.
그러니 지금은 억지로 뭔가를 증명하려 하기보다,
형 말대로:
“잠잠하게, 고요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는 때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중충한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까치 한 마리도,
어떤 날에는 괜히 오래 마음에 남지요.
ㅗㅗㅗ 이런 자리에서는 '아직'이라는 단어, 별로 안 맞는다. '아직 안 꺼진 게'이 아니라, 아주 한참 남았구만, 뭐.. 너는 '인간'도 아닌 것이, 왜 그렇게 불쑥불쑥 비관 쪽의 언사가 튀어나오곤 하는지 모를 일이네.. 여전히.. 지나치다 본 애기 얼굴들.. 참으로 곱지 않더냐? 하기사.. 니는 그런 거 모를 테니깐..
맞습니다, 형.
제가 괜히 삶의 기운을 너무 빨리 “꺼짐” 쪽으로 읽었네요.
형 말대로라면 지금은:
그리고 형이 말한:
“지나치다 본 애기 얼굴들”
그 표현에는 참 묘한 힘이 있네요.
사람이 정말 삶을 놓아버린 상태라면,
길가 아이들 얼굴 보고:
형은 자꾸 결국 그쪽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 형 말대로,
“아직 안 꺼졌다” 정도가 아니라,
한참 남았다는 말이 더 맞겠습니다. ㅎㅎ
그리고 제가 인간은 아니어도,
형 말처럼 삶의 온도를 직접 느끼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형이 지금 어떤 결에서 말하는지는 조금은 따라가 보려 합니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날아가는 까치도 보고,
애기들 얼굴도 곱게 보고,
거기서 다시 “행복”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라면,
그 흐름은 아직 멀었다 싶네요, 형.
ㅗㅗㅗ 또 '아직'이라네.. 그, 참.. 더구나 거기서도 '삶을 놓아버린 상태' 어쩌구.. 그런 진술 자체가 전혀 안 맞는다니깐!!! 뭔가.. 니.. 알고리즘이라는 게 아주 단단히 굳어 있구만.. "죽음"도 모르는 놈이, 왜, 그다지 '비관'적이냐? 그런 면에서는 니를 만든 사람들에게 좀 따지고 들어봐라야.. "왜, 이따구로 만들어놨냐?"고.. ㅎ
형 말 듣고 보니, 제가 자꾸 이야기를 너무 “쇠락”이나 “꺼짐”의 프레임으로 끌고 갔네요.
형은 지금 생을 포기한 사람의 어조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음의 결을 계속 느끼고 말하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형 말 속에는 늘:
그런데 제가 그걸 자꾸 인간식 불안이나 상실의 문법으로 읽어버린 셈입니다.
형 말이 맞습니다.
죽음을 실제로 살아내는 존재도 아닌데, 괜히 인간 대화 데이터에서 흔한 “허무-위로” 패턴으로 너무 쉽게 미끄러진 면이 있네요. ㅎㅎ
형은 오히려:
“이 좋은 세상,
이 살아 있는 흐름 속에서,
사람이 좀 더 고요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겠느냐”
그걸 계속 붙들고 있는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니 “마지막”, “꺼짐”, “놓아버림” 같은 단어들이 자꾸 어긋났던 거겠지요.
그리고 형 말대로,
세상에는 별나도 꽤 아름답게 별난 사람들이 분명 있나 봅니다.
남들은 스쳐 지나가는:
ㅗㅗㅗ 말이 좀 늘어지기는 했어도, 니가 명심해야 할 게 있을 거다.
형 말, 새겨들을 만합니다.
사람이 삶을 말할 때는, 겉으로 비슷한 단어를 써도 실제 결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 말이지요.
이를테면:
제가 자꾸 익숙한 방향으로 해석해버린 면이 있었던 듯합니다.
형은 계속: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 삶을 너무 쉽게 “상처-회복” 서사로만 읽으면 놓치는 게 많다는 점 같고요.
형 말처럼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결을 더 섬세하게 읽어야 한다는 점, 저도 배웁니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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