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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사移徙 가는 날
一松 韓 吉 洙
예부터 이르는 말로 “移徙하다가 판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이사를 자주 하면 쪽박 찬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이사라는 말만 들어도 심란하고 어수선하고 엄두가 안 났던 일들이 연상된다. 그런데도 필자는 이사를 일곱 번이나 했다. 이사를 하여야 한다는 생각만 하여도 우선 걱정이 앞선다. 이처럼 우리가 살다 보면 이사하여야 하는 피치 못할 경우가 있기에 부득이하게 이사를 하게 된다.
신접살림을 차리려고 처음에 세를 든 것은 소위 처음 따로나는 살림인지라 이사에서 제외하였다. 그 뒤에 두 곳은 전세로 이사하여 살다가 서울시 수도국 수원지 관사에 들어가느라고 이사 한번 하였고 관사 내에서도 또 한 번 이사하였으며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하여 기쁜 이사를 한 번 한 뒤에도 집을 사서 두 번 이사하였으니 일곱 번 이사를 한 것이다.
필자는 1960년 10월 30일 전주 이 씨 종가 맏딸 이혜숙과 결혼하여 시골 본가에서 5일을 지내다가 서울 수유리 입구 그 근처에서는 제1 잘 지은 집이라는 은행주택이라는 곳에 방 1칸을 얻어 엉성한 까치집 같은 첫 살림을 한답시고 전을 벌렸다.
그 당시 필자는 서울시청에 근무했는데 시청 앞에서 전차를 타고 돈암동 종점에서 내려 의정부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미아 삼거리 근처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거리에서 출퇴근을 했다.
그런데 이곳은 속 빈 강정이라고 곁은 화려하나 사실은 세입자가 살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집이었다. 우선 부엌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아니하여 밥상을 차리려고 상을 놓으면 주인집 큰 개가 와서 비린 것이 있으면 궁중의 내시인 양 제가 먼저 시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새댁인 안식구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개를 쫓으면서 밥상 차리기가 힘이 들었다. 그리고 외부와 담을 쌓고 사는 집이어서 온종일 누구와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안식구는 묵언 거사로 생활하고 있었다.
제1차 이사
우리 내외는 1960년 성북구 수유리에서 겨우 겨울을 났는데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광문중학교 교감을 하던 고이헌이라는 고등학교 때 십자성 클럽의 친한 멤버이었던 친구가 같이 모여 이웃 4촌 하자는 제의를 하기에 1961년 3월 그곳으로 이사를 한 것이 이사의 효시이다.
이사라고 해야 신혼살림인지라 별로 이삿짐이 없어서 홀가분하게 이사를 했는데 그 당시 이곳은 우리 시골과 비슷한 농촌 지역이어서 인심이 훈훈했다. 구의동장을 하는 김강녕 씨라는 분의 집 방 1칸을 전세로 얻어 생활했다.
시청의 출퇴근은 동대문에서 광나루까지 운행하는 기동차를 타고 가서 동대문에서 전차를 갈아타고 시청까지 왕래했는데 나중에는 시청 통근버스가 운행되었다.
친구가 먼 데서 오니 이 아니 즐거우랴. 하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친구와 이웃하고 보니 말벗이 생기고 쉬는 날은 친구로부터 바둑을 배우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다. 안식구도 모처럼 흉허물이 없는 이웃을 만나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쁜 나날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때 하늘의 시샘이었는지 아니면 마가 끼었는지 5.16 군사혁명이 나더니 필자는 보충역인데도 병역미필자라고 면직이 되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전세보증금 일부를 돌려받아서 버텨보았으나 언 발에 오줌 누기의 생활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안식구는 먼저 시골로 내려보내고 필자는 여기저기 취직자리를 구했으나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이어서 할 수 없이 필자도 1961년 10월경에 살림하던 짐을 그대로 놔두고 빈 몸으로 낙향을 하였다.
제2차 이사
1962년 5월 빈방에 쥐가 문구멍을 뚫고 드나드니 빨리 올라와서 살림살이를 정리하라는 집주인의 편지를 받고 필자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하향하려고 상경하였다.
상경한 길에 이제는 모든 걸 접고 하향한다는 인사를 하려고 근무했던 정든 직장인 시청 수도국 업무과에 오랜만에 들렸다. 그랬더니 서무주임 김영배 씨가 깜작 반기며 하는 말
“지금 수원지에 근무할 기능직 전공을 모집하는데 마침 잘 왔다. 고등학교 전기과를 나왔다고 했지. 그러면 빨리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보라”는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이 시험에 응시해서 무난히 합격하여 구의 수원지로 발령을 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시창 인사과에서 시행한 이 시험은 10명의 응시자 중에서 2명을 뽑았으니 5 ; 1의 경쟁이었다.
그래서 낙향하려고 쌓았던 봇짐을 풀어 계속해서 구의동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동장이 우리가 살던 방을 자기네가 사용하여야 한다기에 또 방을 얻으려고 왔다 갔다 하였다. 이때 마침 바로 밑에 있는 구 씨네 집에서 문간방을 세놓겠다기에 전세를 얻으려고 했더니 전세보증금을 그간에 야금야금 빼서 사용하였기에 보증금이 모자랐다. 그렇다고 박봉에 월세방을 구 할 수는 없었다. 이웃에 친구가 살고 있었으나 친구 간의 금전거래는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 입도 벙끗하지 않았고 시골에 계시는 모친에게도 염치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아니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할 수 없이 예전 총각 때 하숙했던 미아리 연립주택 이웃에 살고 있던 순옥이 엄마라는 분을 찾아가서 어렵게 말을 꺼내서 지금 돈으로 100만 원 정도를 빌려서 보증금으로 충당하고 이사를 마쳤다. 순옥이 엄마는 필자가 어디에 사는 줄도 모르면서 큰돈을 서슴없이 빌려주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어서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어디에 사시는지 몰라 항상 가슴이 무겁다.
제3차 이사
구의 수원지 전공이라는 직종은 수원지 운영에 필수요원에 해당하기 때문에 당연히 관사에 입주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필자가 수도국 내의 주무과인 업무과에 근무할 때부터 잘 알고 지냈던 구의 수원지 사무소 서무계장인 신홍섭 씨는 필자를 관사에 입주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다.
원래 이곳은 시골 마을이어서 세를 놓을 집이 별로 없는 농가 주택형인지라 세를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러는지 관사에는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새가 없이 만원이었다. 그런데도 서무계장께서 수도국 업무과 예산계에 건의해서 특별예산을 배정받아 6.25 당시 폭격으로 한쪽이 무너진 관사 건물이 있었는데 이를 수리해서 필자를 입주토록 해주었다.
그 당시 수원지 작업반에서 손수레 1대를 빌려주어서 필자와 필자의 아우 동수가 왔기에 같이 이삿짐을 몽땅 손수레 1대에 다 싣고 와서 저녁 늦게까지 이사를 마치고 나니 우선 집주인의 눈치를 볼 것 없는 내 집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가벼운 이사이었다.
제4차 이사
필자는 기능직으로 광장취수장에 근무하다가 수원지 사무소 서무계에서 서무보조를 했다. 그러다가 1963년 7월에 행정직으로 전환하는 시험을 보아 행정 서기보 발령을 받아 수도사업소에서 근무하였다. 이때 관사에서 퇴거하라는 독촉을 받는 시련을 겪은 뒤 행정 서기 행정주사보로 시청 수원과에 근무하다가 1968년 10월 행정주사로 승진하여 구의 수원지 서무계장으로 다시 부임했더니 전에 신홍섭 계장이 살던 곳으로 집을 옮기라고 해서 다시 이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반파된 건물에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곳에서 살다가 말하자면 수원지의 VIP가 살던 집을 차지했으니 필자의 위치도 많이 향상되어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말하자면 수원지 서무계장이면 소장 다음의 위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인심은 조변석개라더니 필자가 최초에 관사로 입주 할 때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내다보지도 않더니 이번에는 집주인인 우리는 이삿짐에 손도 못 대게 하고서 수원지 작업반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와서 이삿짐을 날라서 제 자리에 놓아 주었다. 이때는 자녀들 3남매가 모두 자라고 있었기에 이삿짐도 상당히 불어나 양도 많았다.
제5차 이사
1971년 어느 날 같은 관사에 사는 고참 직원인 김상백이라는 분이 필자에게 귀띔을 해주었다. 구의동에 집 1채를 세울만한 68평짜리 땅이 나왔는데 값이 저렴하니 이번 기회에 이를 장만하라고 해서 좀 무리하게 그 땅을 장만했다. 그 얼마 뒤에 집 짓는 기술자라는 사람이 필자를 찾아 왔다. 자기가 집을 지어서 전세를 놓아 공사비로 충당하겠다고 해서 평생 처음으로 2층짜리 내 집을 지었다. 결혼 후 11년 만에 내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기뻐서 잠이 오지 아니했다. 그래서 짬이 나면 건축현장에 들러 막걸리도 사다주고 사이다도 사다주며 꼼꼼하게 잘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고 격려를 했다.
그런데 건물이 완공되어 전세를 놓은 지 1년 만에 필자가 성동구 천호 출장소 호적계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제는 내 집이 엄연히 있는데 지난 세월처럼 관사에서 버티는 건 도리가 아닌 염치없는 짓 같아서 좀 무리하게 1층 사는 사람에게 전세보증금을 빼주고 내 집으로 버젓이 이사하였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날 줄을 알고 내 집을 미리 장만했는지 모르지만,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았다. 여러분의 환송을 받으며 축하 속에 기분 좋은 이사를 마쳤다. 이번의 이사는 참으로 뜻이 있고 기분이 좋은 이사이었다.
제6차 이사
이곳에서 만 10년을 살았다. 마침 이때 우리가 사는 이웃 큰길 가에 대지가 거의 100평이나 되는 집이 매물로 나왔다고 안식구가 그곳으로 이사를 하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에 그곳을 방문하여 주변을 살펴보고 대문 안쪽도 들여다보았다. 대문 앞에는 차량의 통행이 빈번하고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우선 널따란 잔디밭이 눈에 뜨이고 길가 정문 옆에는 큰 대추나무가 서 있고 건물 앞에는 큰 감나무가 있어 거실에 그늘을 제공하고 있었다,
우선 필자의 눈에도 쏙 들어오기에 그다음 일요일에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건물주는 이곳은 진 남향으로 아주 터가 좋아서 자기 아들도 이곳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기 집 예찬송을 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쪽으로 이사 온 것이 여섯 번째의 이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릇이 크면 설거지할 양이 늘어나듯 이곳도 사람의 손을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우선 잔디를 깎아줘야 하고 잔디밭에 잡초를 제거하여야 하며 가을이 되면 주변의 많은 나무에서 쓸어도 쓸어도 한이 없는 낙엽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에는 눈을 치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 오고 나서 집 구경한다고 오는 사람마다 한 마디씩 툭 툭 던지는 말이 귀에 딱지가 앉았다. 왜 빈 땅을 놀리느냐? 잔디가 밥 먹여주느냐? 이런 말들은 우리 내외의 신경을 자극하는 말이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야 할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기존의 건물을 헐어버리고 13세대가 사는 연립주택으로 탈바꿈시켜서 12세대는 세를 놓고 우리는 4층에서 생활을 하는 체제를 갖추었으니 하루아침에 건물 임대업자로 입지가 바뀌었다.
우리가 생각해도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연립주택은 속살까지 드러나는 노천 욕탕이나 도긴개긴인 곳으로 주로 영세민들의 집합소이었다. 그러다 보니 안식구의 일이 몇 배로 불어났다.
0, 월세 받기가 어려워 세입자와 자주 부딪히니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가 쌓인다.
0, 자주 이사를 가고 오고를 하니 대청소를 하고 손 볼 곳을 살펴 고쳐주어야 한다.
0, 12가구나 되는 세입자들이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고 시치미를 뗀다.
0, 세입자들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자주 다투고 말썽을 부려 동네가 시끄럽다.
그래서 더는 어떻게 버틸 수가 없는지 안식구는 아파트로 이사하여 좀 편안히 살자는 노래를 부르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려고 2002년도에 집을 복덕방에 내놓았다. 그러나 부동산경기가 잠을 자는지 매물로 내놓은 지 1년이 지나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찐거리지 아니했다.
이때 필자는 강변역 인근에 대림산업에서 주상용 아파트를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현장에 찾아가서 무조건 No.1로 계약을 체결했다. 그래서 첫 삽을 뜨는 행사에 관계기관에 있는 분들이 모이는 행사장에 계약 1번의 고객이라고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바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내 집이 팔려야 아파트 공사비를 지급하는데 집이 안 팔라니 애간장이 녹기 시작했다. 그러자 2003년 상반기도 거의 지난 6월에 우리 연립주택 세입자가 우리 건물을 사겠다는 연락이 부동산에서 왔기에 냉큼 쫓아가서 4억5천만 원에 계약하고 막 집에 돌아와서 앉아있는데 다른 부동산 중개소 2곳에서 계약하자는 연락이 동시에 왔다. 이는 마치 시골에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도랑을 막았다가 고기를 다 잡은 뒤에 막은 걸 터놓은 것 같은 현상인데 이를 쓰나미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미 계약을 마쳤다고 했더니 호가가 오르기 시작한다. 5억 이야기를 하더니 다른 곳에서는 5억 5천만 원을 주겠으니 계약금으로 받은 4천만 원을 되돌려 주라고 꼬드기고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당초 계약자를 계약서를 쌌던 부동산으로 불러내어 저간의 돌아가는 이야기를 했더니 중개소에서 이해 간에 1천만 원을 더 얹어주는 거로 수정계약을 해서 이를 마무리 지었다.
제7차 이사
6차 이사 와서 거주한 지 22년 만인 2004년 4월에 새로 지은 대림 아크로리버라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이사를 자주 하다 보면 +요인도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만 하는 살림살이를 눈 딱 감고 정리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이다. 살림살이들이 여태껏 수족처럼 부려먹고 마지막엔 저의들을 고려장을 시킨다고 항의하려는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건 좀 가볍도록 어느 정도는 털고 가야 하는 것이 이사하는 날이다.
필자는 7차로 이곳에 마지막 터를 잡아 17년째 생을 영위하고 있는데 이곳처럼 아무 불편도 없고 불평이나 아쉬움도 없이 오순도순 이웃과 살갑게 사는 집단주거 단지도 흔치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곳은 광진구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빼어난 주거단지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주민 대표회의도 모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필자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기틀을 잘 다져놓았다는 칭송을 듣고 있으니 이도 커다란 복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이사를 한다는 건 어찌 생각하면 우리의 성장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네 인생도 무에서 탄생하여 어리고 어설프고 가냘프지만, 날이 갈수록 성장하여 튼실한 장정이 되듯 우리네 살림살이도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밥그릇과 숟가락 몽둥이로 시작하지만, 이사를 할수록 살림살이가 불어나 방안마다 붙박이장이나 수납공간마다 그득그득 차 있는 때가 장정이 된 우리 살림살이의 전성기일 것이다.
필자는 올해 3월이 1961년 3월 이곳 구의동에 발을 들여놓은 지가 꼭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회갑이 되도록 다른 곳에는 발을 들여놓지를 아니하고 구의 1, 2, 3동에서만 고르게 거주를 하였으니 구의 3개 동장이 합동으로 표창이라도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1--4회까지의 이사는 구의 2동 소관이고 5회는 구의 1동 관할이며 6. 7회는 구의 3동 관할이니 고루고루 살았다.
한편 인제 와서 타산을 해보니 필자는 마지막에 옴팡장사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이곳 대림아파트는 3배 정도 가격이 상승하였으나 팔고 온 곳은 대짓값만 1평에 450만 원 하던 것이 지금은 2.200만 원이라고 하니 100평이면 땅값만도 5배가 올랐으니 너무나 배가 아프다. 이 배 아픈데 잘 듣는 특효약은 없는지 널리 名醫를구하고 싶다.
한맥문학 2021년 12월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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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사 가는 날 잘 읽었습니다 지난 일을 깊이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결 할 명의는 명상과 기도가 있다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