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시조와 서정은 별개의 문제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서정시가 아닌 시조는 시
조가 아니지(궁서체) 이는 시에도 해당하는 말이죠. 자, ’서정‘의
문제가 드디어 나타났습니다. 네, 맞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서정‘, “여기 카페가 서정적인데?”, “노랫말이 서정적이야”하고 말
하는 그 ’서정‘, 맞습니다.
서정(抒情/敍情)의 사전적 정의는 “주로 예술 작품에서, 자기
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려 냄”입니다. 당연히 시에 있어서 ’서정성‘
이 없으면 안 되겠죠. 그런데 이 ’서정‘이라는 개념은 무척 모호하
고 ’서정시‘라는 말 자체도 문제가 많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시대
를 살피면서 문학 장르인 시라는 것에 대한 기존의 정의와 선입견
을 하나씩 추적해 나가고자 합니다. 잘 따라오시길.
한국시를 정의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자 ’절대로‘ 흔들릴 수
없는 아니, 흔들리면 안 되는 ’서정‘이라는 개념은 매우 혼란합니
다. 시 장르를 일컫는 ’서정‘과, 시의 하위 장르로서의 ’서정시‘가 혼
용되고 있기 때문이죠.
가장 먼자 ’서정‘이라는말을 추적하다 보면, 그리스철학의 아
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서정‘, ’서사‘, ’극‘이라는 <문
학 장르 3분법>이죠. 그러나 3분법에서 말하는 ’서정‘은 서사적인
것. 극적인 것과 속성상 차이를 갖고 있을 뿐, 실체로 존재하는 것
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의 하위 장으로서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으로 나누고 이렇게 분류된 시가 있다고 믿습니다. 여기서
부터 오해가 비롯되었죠. 속성을 장르로 착각하고, 한 작품을 서정
시, 서사시, 극시 등으로 구분하려고 합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한국에 서사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극시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학계에서는 김동환의 「국경의 밤」, 신
동엽의 「금강」, 김지하의 「오적」 등을 대표적인 한국 서사시로 언급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극시는요? 자도 극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서정시, 서사시, 극시를 나누는 명확
한 기준이 없으므로, 누구나 마음대로 ’서정적인시‘, 서사적인 시’,
‘극적인 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답니다. 물론 맞고 틀리고는 본인
책임이죠.
더욱이, 아히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서정시’가 아니라, 고대로
부터 17세기까지 문학 일반을 뜻하는 말이 ‘서정시’였습니다. 그런
데 17세기 이후 ‘소설(novel 또는 roman)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생
겨나면서, 소설과 다른 문학의 하위 양식인 ’시‘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문학 일반을 뜻하는 상위 양식의 ’서정시‘가 있었는데, 17
세기 이후 문학의 하위 양식인 ’시‘가 등장하면서 혼란이 생긴 거
죠. 이제 앞으로 절대로 헷갈리지 마시길.
물론, 시와 소설, 시와 에세이는 전혀 다른 장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여기서 우리가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시=서정시‘라는
등식입니다. 이에 따라 ’서정(抒情,lyricism)을 둘러싼 E.슈타이거,
W.카이저, D.람핑, 조동일, 김준오 등의 논의를 살펴봐야 하지만,
깊게 파고들어 가봤자, 이들의 논의는 결국 시와 ‘서정’을 일치시켜
야 하는 순환 논리로 귀결될뿐이니, 이하 생략.
그러나 ‘샤=서정시’라는 등식은 특히 모더니즘 이후 현대시를
포괄하는 데 있어 한계를 보입니다. 시라는 장르에 있어 당위처럼
여겨졌던 ‘서정’, ‘서정시’라는 개념이 이제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
는 시대적 요청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죠.
왜냐하면 ‘서정시’라는 이데아 혹은 무의식이 그동안 우리 안
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전통적인 방식’
으로 써 내려간 작품을 서정시라 보고, 그와 반대항에 위치한 것을
‘反서정시’ 혹은 ‘(서정시가 아닌) 실험시’로 봅니다. 여기서 서정시
여부를 나누는 기준이 바로 ‘전통’인데, 권혁용 평론가에 따르면 전
통 서정시를 지탱하는 것은 “말의 질료성에 대한 배려, 율격을
위해 시인의 독자적인 발언을 희생하는 것. 중화된 이미지에
대한 편향, 풍경을 그리기 위해서 주체의 개입을 가능한 한 차단하
는 것. 시적 관습에 대한 존중. 어슷비슷한 대상과 구문에서 가
능한 한 일탈하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전통 서정시가 아닌 작품
은 이미 한국문학의 태동기에 출현했었죠.
三十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막달은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러케 뿐이
모였소.(다른 사정은 업는 것이 차라리 나앗소)
-이상, 「오감도(烏瞰圖)-시 제1호」 전문<조선중앙일보>, 1934.7.24.)
이태준의 소개로 발표된 이상의 연작 「오감도」는 신문에 발표
되자마자, 독자들의 투서가 빗발치면서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소위 물의를 일으킨 것인데, 그는 기존의 시라는 개념을 전복하는
작품을 보여주면서 시가 무엇인지 재확인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
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와 ‘시가 아닌 것’의 기준이었는데,
‘시적인 것’과 ‘시적이지 않은 것’의 기준이 바로 ‘서정성’이었고, 이
상은 이 기준점 자체를 문제 삼았던 겁니다. 이후 한국의 현대시는
‘전통-서정’계열과 ‘현대-실험’ 계열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타자로 인식해가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학사를 실천해갔
습니다.
현대시조 입문서, ‘오늘부터 쓰시조 김남규, 헤겔의 휴일
5. 시조와 서정은 별개의 문제. 60~64쪽 중에서
첫댓글 문학성의 갈등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무한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