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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수칠때 떠나는 사람 원문보기 글쓴이: 땡큐삐리
▲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자료화면
A Hard Rain's Gonna Fall, 소낙비
01. A Hard Rain's Gonna Fall - Joan Baez 02. 소낙비 - 양병집 03. A Hard Rain's Gonna Fall - Bob Dylan (Concert For Bangla Desh) 04. 소낙비 - 이연실 05. A Hard Rain's Gonna Fall - Edie Brickell & New Bohemians 06. 소낙비 - 이정렬 07. A Hard Rain's Gonna Fall - Ann Wilson 08. A Hard Rain's Gonna Fall - Leon Russell 09. A Hard Rain's Gonna Fall - Hanne Boel
은 밥 딜런이 1963년에 발표한 두 번째 음반 'The Freewheelin' Bob Dylan' 에 수록된 반전 노래로(이 음반을 밥 딜런의 데뷔 음반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뷔 음반은 'Bob Dylan'이다) 1962년 당시에 있었던 쿠바의 미사일 위협으로 인해 고조된 3차대전의 기운에 대한 경고성 메세지가 있는 곡이다. 미-소 양국의 냉전이 잔재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우려감이 드러나 있다. 여기서 Hard Rain은 미사일이나 폭격을 의미한다. 일부에서는 이 곡을 "핵 낙진의 폐해를 고발한 반전노래의 대표곡"으로 소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수록된 음반'The Freewheelin' Bob Dylan' 은 당시 반전과 평화를 주창하던 젊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시대 히피 문화의 반영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이연실이 73년에 발표한 음반 <시악시의 마음>에 "소낙비" 라는 제목으로 양병집이 번안하여 소개한 바 있고 1974년에 양병집은 음반 <양병집 1집 - 넋두리>에서 불렀다 .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가 부른 녹음은 음반으로 많이 나와 있는데 여기엔 한 곡씩만 올린다. 밥 딜런의 노래는 1971년 3월25일 파키스탄 나팍 병사들에 의해 벌어진 방글라데시 다카대학에서 일어난 대학살과 관련하여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과 동료 가수들이 1971년에 진행 한 공연의 실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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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딜런의 최고작이자 저항·포크 음악의 경전으로까지 손꼽히는 1963년 음반
A Hard Rain's A-Gonna Fall
Oh, where have you been, my blue-eyed son?
Oh, what did you see, my blue-eyed son?
And what did you hear, my blue-eyed son?
Oh, who did you meet, my blue-eyed son?
Oh, what'll you do now, my blue-eyed son?
▲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의 자료화면
세찬 비가 내리려고 해
어디에 가 있었니? 푸른 눈동자의 내 아들아
무엇을 보았니? 푸른 눈동자의 내 아들아
그리고 무엇을 들었니? 푸른 눈동자의 내 아들아
누구를 만났니? 푸른 눈동자의 내 아들아
이젠 무얼 하려고 하니? 푸른 눈동자의 내 아들아
▲ '소낙비'가 실린 이연실의 1971년 1집음반과 이 곡의 번안자인 양병집의 1집음반 '넋두리'
소낙비
어디에 있었니, 내 아들아
무엇을 보았니, 내 아들아
무엇을 들었니, 내 아들아
어디로 가느냐, 내 아들아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는 1959년 1월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였다. 쿠바 혁명 정권은 곧바로 일정 한도 이상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고,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으며,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하는 획기적인 농지 개혁에 착수했다. 특히 1959년 10월에는 쿠바에서 미국의 이권을 폐기하고, 미국 자본이 착취하는 것을 제한했으며, 1960년에는 미국계 기업의 자산을 국유화했다. 곧 반봉건 토지 소유제와 외국자본을 근절했으며, 1961년 5월에는 쿠바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1962년 부터는 사회주의 건설 4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이러한 쿠바의 움직임은 당연히 미국과 관계를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1960년에 미국은 쿠바로부터 사탕수수 수입을 대부분 삭감했으며, 중요 물자의 수출 금지 로 쿠바에 경제적인 압력을 가했다. 1961년 1월에는 국교가 단절되고, 미국내에서 결성된 쿠바 혁명 평의회 의장 호세 미로 카르도나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동년 4월 반혁명군을 인솔하고 쿠바 동남부에 상륙, 카스트로 정권 타도를 계획하였으나 오히려 진압되었다. 미국으로부터의 무력 공격의 위협을 느낀 쿠바는 급속도로 소련에 접근하였고, 1962년에는 소련과 쿠바의 무기 원조 협정에 따라 쿠바에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케네디 정권은 10월 23일 미사일 기지 철거와 핵 미사일 반입 금지를 요구하고 쿠바에 대한 해상 봉쇄 명령을 내려, 핵전쟁의 위험으로 전세계를 동요시켰다. 미국과 소련 정상이 긴박하게 대응한 결과, 소련은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고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함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제1서기 흐루시초프의 새로운 협정은 11일(또는 14일) 동안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긴장감을 완화시켜주었고, 핵전쟁으로부터 시작된 미소간의 냉전을 풀어주었다. 극도로 긴장된 양국간의 관계를 먼저 회복시킨 쪽은 흐루시초프였다.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건설중인 미사일 기지 공사를 중단하고, 기곳에 이미 도착된 모든 무기들을 소련으로 다시 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케네디는 쿠바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며, 쿠바에 대한 봉쇄 정책을 해제하겠다고 다짐했다.
1959년 수립된 쿠바의 혁명정부에 대하여 미국은 1961년 4월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에 의한 쿠바 반(反)혁명군의 침공작 전을 시작하고, 미주기구(OAS)로부터의 쿠바 축출, 미국 해 ·공군의 영해 ·영공 침범 등 군사 ·외교압 력을 가하였다. 이런 속에서 쿠바는 1962년 9월 ‘소련-쿠바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미사일을 도입하였다. 미국은 그 해 10월 14일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 중임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하였다. 22일 미국 대통령 J.F.케네디는 텔레비전 전국방영을 통하여 처음으로 “소련은 서반구에 대하여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 라고 공포하고, 쿠바에 대하여 해상봉쇄조치를 취하였다. 케네디는 소련의 N.S.흐루시초프 서기장에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공격용 무기를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 세계의 긴박감 속에서 소련은 26일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27일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27 일의 제안을 무시하고, 26일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28일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선단(船團)의 방향을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11월 2일 위기는 사라졌다. 소련이 쿠바로부터의 폭격기 철거에 동의한 20일 미국은 해상봉쇄를 풀었으며, 12월 7일 소련은 공격용 무기를 쿠바로부터 철거하였음을 미국에 통고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3년 미 ·소 간에 핫라인(hot line:긴급통신연락선)이 개설되었고, 핵전쟁 회피라는 공통의 과제하에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었다.
쿠바에서 당한 소련의 굴욕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적어도 미국과 대등한 핵능력을 보유하겠다는 소련의 비장한 결의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쿠바에서의 케네디의 승리는 곧바로 후르시초프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그는 바보스럽게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했으며 비겁하게 이를 제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형상 승리자로 보였던 케네디는 결국 암살되었다. 어찌보면 흐루시초프와 케네디는 양극에서서 전쟁이라는 극단 상황을 피하려했던 공동의 목적을 가진 정치가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출처 : | 맑은영혼을 위하여 | 글쓴이 : 김승규 원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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