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데 냄새가 난다.
늙은 호박 냄새이다.
지난해 10월 시골 텃밭에서 줄기가 말라버린 호박을 모두 거둬서 자동차에 실고서 서울 올라왔다.
설 익어서 시푸뎅뎅한 것들이라서 남한테 나눠주기도 뭐해서 그냥 베란다에 올려놓았다. 혹시나 얼까 싶어서 베란다에서 거실로 옮겼던 애호박 여러 통이 자꾸만 누렇게 퇴색 변색한다.
호박도 살아 있는 생물이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화되어서 속이 상하고, 맛도 변하다가 썩기 시작한다. 특히나 겨울철에서 봄철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더욱 이런 현상이 빠르게 진전한다.
호박 한 덩어리를 깎았다.
시골 텃밭에서 따 올 때에는 설익었는데도 서울 아파트 실내에서는 자꾸만 늙은 호박으로 색깔이 변했고, 거죽에서도 즙이 나와 말라버린 흔적이 있기에 제일 큰 호박을 부엌칼로 배를 갈랐다.
다행히도 호박씨가 있는 속은 붉으스레한 빛깔로 깔끔했다. 과일 깎는 작은 칼로 속과 겉껍질을 벗겨냈더니만 바구니가 제법 묵직했다.
아내가 묵은 김치, 맛이 신 김치로 호박국을 끓일 게다.
점심밥을 호박국에 말면서 아내한테 말했다.
'며느리네 아파트 알어?'
'동 호수는 알아요.'
'그럼 호박 하나 가져다 주지?'
'아들한테 전화해야겠어요.'
한 달 전, 아들네가 내가 사는 잠실지역 아파트 부근으로 이사왔다.
내가 손녀 손자를 키우는 며느리한테 나눠주라고 말하니까 아내는 큰아들이 직접 가져 가도록 말하겠다고 대꾸했다.
지난 가을철 설익은 호박넝쿨이 줄기째 말려죽었기에 거둬서 서울 가져왔다. 완벽하게 잘 익은 호박은 아니다. 제대로 익지도 못했다. 그래도 며느리한테 주면 호박국을 끓여서 제 식구끼리 먹을까도 싶은데도 조금은 망설인다.
내가 호박을 자식한테 나눠주는데 꺼려하는 이유는 있다. 호박에서는 호박 특유한 냄새와 맛이 난다. 이런 냄새와 맛을 큰아들네가 참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던 탓으로 자식들은 시골문화 시골정서 등에는 거리가 먼 신세대이다. 호박은 시골정서가 밴 흔한 식재료이다.
어제 강동구 길동에 있는 '한국 국보문학' 사무실에 가려고 새마을시장쪽으로 걸어가면서 채전 가게를 스쳐서 보았다. 중간 크기의 시푸뎅뎅한 호박 한 덩어리에는 5,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무척이나 비싸다는 느낌이다. 내 거실 안에 있는 호박은 그보다 커서 부피로는 만 원도 훨씬 넘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큰 호박 한 덩어리이라도 입이 짧은 큰아들과 며느리, 이제 생후 40개월째인 손녀, 25개월째로 들어선 손자가 한참이나 먹을 수 있는 생각이다.
내가 직접 가져다 주면 나을까?
아쉽게도 나는 며느리가 어느 어느 아파트에서 사는지를 모른다.
동 호수를 모른다.
자식네 아파트 주소를 모르고 싶다. 그래야만이 시아버지인 내가 며느리네 집을 방문할 일이 없기에.
이런 내 마음을 짐작한 아내일까? '동 호수는 알아요'라고 대답했던 말이 묘한 뉘앙스가 풍겼다.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말투였다.
얼마 전의 일이다. 인터넷 뉴스에는 무척이나 민망한 게 떴다. 시아버지가 순주를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불쑥 아파트 도어를 열어서 들어갔다. 이에 스트레스를 받던 며느리가 도어 번호를 바꿨는데 시아버지가 도어 문을 못 열자 발길로 현관을 차고... 이런 이유로 분쟁이 나서 이혼하네 마네 하는 사건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가 사는 아파트 현관문을 불쑥, 마음대로 연다는 게 무척이나 상식에 어긋난다.
부모 자식간이라고 해도 각자의 삶과 생활양식이 다르다.
또 각자의 영역공간과 자유시간이 있다.
나는 일흔 살 먹은 노인네이고, 며느리는 삼십대 후반의 신세대이기에 생각차이가 무척이나 난다.
내가 자식네로 들를 일도 없다. 자식들이 우리 내외가 사는 아파트로 자주 오면 된다.
며느리한테는 소중한 영역과 자유시간이 필요하기에. 간섭도 눈치도 없는 그런 공간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어제 오후에도 며느리는 어린 애들을 시어머니한테 맡기고는 제 볼일 보러 나갔다.
실은 얘들을 돌보려면 예순다섯 살 할머니인 아내는 진이 다 빠진다.
그래도 좋다. 아내와 나도 귀여운 손주들을 돌볼 수 있기에.
지금은 오후 세시 15분.
서울 송파구 잠실 아파트에서 사는 내 방에는 13 :30 ~15 : 30 사이가 가장 햇볕이 맑고 밝고 강하다.
내가 사는 23층보다 더 높은 앞 동의 건물이 햇볕을 가리기에 아파트와 아파트 틈새로 스며드는 햇살이 잠깐만 들다가는 오후 네시 쯤으로 그늘이 지기 시작한다.
지금은 오후 세시 45분
어둑컴컴하다. 그늘이 짙어졌다. 아까까지도 유리창에 빛났던 햇볕은 그늘이 되어 내 눈조차도 침침해지고 있다.
자꾸만 더 자꾸만.
지금은 오후 네시 5분.
다시 저녁 햇살이 희미하게나마 되살아났다. 아파트 벽 틈새로 햇볕이 고개를 내밀었다.
반가워, 그리고 고마워. 덕분에 내가 이렇게 얼굴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게 무척이나 즐겁고 고마워.
동지 이전에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
동짓날을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더 늘어나고, 햇볕도 더 밝게 환하기 비추기 시작한다.
이번 동지도 이틀 뒤에 끝난다.
1월 5일은 연중 가장 춥다는 소한이 시작되지만 까짓것이다. 햇볕이 더욱 강하면 아무리 추워도 별로 겁나지 않는다. 햇볕 속에는 희망이 들어 있기에.
시골 다녀온 지도 벌써 40일이 넘었다.
마음은 시골에 가 있다. 오랫동안 비워 둔 시골집과 텃밭 속의 식물들은 어떨까?
겨울철 냉해를 입을까 싶어서 바람막이라도 되는 화장실 안에 넣어둔 다육식물도 어떨까 싶다.
세수대야에 물 붓고는 그 속에 화분을 넣었다. 내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기에 그렇게 하면 화분 밑바닥으로 물기가 스며들까 싶어서.
식물뿌리도 숨 쉬고, 물을 마신다. 식물도 목이 마르고 탄다. 물이라도 마셔야만이 그들도 간드랑거리며 산다.
장기간 집을 비우면 식물들도 나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내려가고 싶다.
시골로. 텅 빈 집으로.
이렇게 햇볕이 비치는 날이면 더욱 그렇다.
2018. 1. 3.
첫댓글 호박국? 이라...늙은 호박을 신김치 넣고 끓인 국이라면 먹어 본 적이 없군,
나도 그다지 땡기지 않는데 젊은이들이 좋와하겠나? 며느리한테 늙은 호박은 주지 마시게 ㅎ 혹시라도 버리면 또 그 상처를 어찌 할꺼나?
아들네 집 동호수 모른다꼬? 그거 정상일세 ㅎㅎ, 나도 딸네집 동호수 모르거든...
어쩌다가 가보려면 필히 아내의 뒤를 따라가야 해, 친정어미인 아내는 일주에 두세번씩 드나들며
돌보아 주는데 나는 거의 가지 않네,
우리들의 생각을 바꾸는 도리밖에 별 수 있겠나? 새 세대는 그들의 방식대로 살게 내머려 두고
우리는 남은 시간들을 우리식대로 사는 거고 말일세 ㅎㅎ
호박 특유의 냄새가 있어서...
호박농사 짓기 쉬워. 수확량도 많고... 나는 푸짐하게 먹지. 호박 특유의 맛을 희석하려면 여러 가지 식재료를 마구 섞어야 돼. 호박 이외에 고구마, 감자도 수화량이 많은데... 지난해 장에서 사서 먹었지. 고구마도 이제는 얼마 안 남았대. 자식 셋 나눠주었더니만 나는 몇 박스만 고작...
햇볕이 드는 1월 초. 자꾸만 마음은 시골로 내려가기 시작했네그려.
댓글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