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달샘:
첫 사마디samadhi 이후에
해야 할 것은
사마디에 관한 능숙함과
현장의 적절함인
혜慧를 닦게 됩니다.
사마디samadhi(견성)는
활성화된 배경의식과 현상이
공존하는 상태입니다.
의식의 관점에서
판단없는 배경의식과
판단으로 특화된 '마음'의 이중성이
존재하는 상태이지요.
판단 곧 분별하는 의식인 마음이
있기에
현상이 인식되고
혹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마디는
모든 이미지가 사라진 배경의식이
아니며
뇌 기능의 휴지休止로 발생하는
코마coma나 깊은 잠이
아니지요.
그래서 요가 전통에선
사마디samadhi와
뚜리야Turya(배경의식)를
구분합니다.
사마디는
일회성의 의식 상태이지요.
물론 닦음의 3차 목표는
일회성이 아닌 지속성을 지향하며
잡힐 듯 말 듯 한
저 앞의 깃발을 향해 나아갑니다.
1차 관문인 사마디의 발현은
아직은
일회성이기에 곧 닫히지요.
사마디의 어려움은
배경과 마음의 이중성에서 옵니다.
마음을 꺼버리는
일부 뇌 기능의 휴지休止는
사실 쉬운데
우리는 매일 이것을 잠을 통해
시행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앉아서 시행하지요.
앉든 눕든
의식의 구조적 측면에선
둘 사이에 다른 점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디는 분별 의식이 작용하여
현상이 버젓이 구현되는
상황에서
분별하지 않는 의식인 배경의식이
활성화되어 있는
상태이지요.
이 사실은
우리가 접하는 선禪 일화가
방증하는데
모든 견성의 일화는
현상이 구현되고 있는
즉
분별하는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일어납니다.
예외적 일화를 보았는가요?
선禪 일화의
킬링 포인트(punch line)는
고상하고 거룩하거나
순수하고 맑은
이상화된 상태가 아닌
평범하고 하찮고
심지어 저속하기까지 한 일상성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이것은
충격이며
당혹함이지요.
선禪 일화가 의도하는 것이
바로
이 파괴성입니다.
온갖 철학과 윤리로
이것은 설명될 수 없지요.
이것은
선禪의 전통이 지닌 강점인 동시에
사전 준비가 되지 않은 이들에게
난해함을 주며
장벽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선禪 일화의 장점은
어느 영성 전통보다
영성이 지향하는 방향성을
정확히 짚어주고 있다는
점이지요.
그럼에도
불교에서의 아쉬움은
선禪 불교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선 통상적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수행의 종지로
삼지요.
합리적이며
어느 누구도 이 말 자체에
반론을 제기하긴 힘듭니다.
문제는
그 과정의 구체성과 디테일에
있지요.
흔히 정定은
의식의 단일성으로 언급됩니다.
사념 혹은 분별심을 밀치고
판단없는 의식 상태에
이르는 수련이지요.
이것은
닦음의 1차 관문인
배경의식의 활성화 과정과
동일합니다.
명상 혹은 방편이라고 하는
모든 기술적 요소가
여기서 작동하지요.
그러나
세간에 떠도는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일체의
'명상 기법' 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모든 이론과 기술은
인간 개체를 강화시키는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지요.
무아無我와 무위無爲라는
진보된 철학을 지닌 불교에서
그 교단의 종사자가
'자기 중심성'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피상적 이론과 기법들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은
아쉬움을 넘어
애처로움마저 듭니다.
불교에서 정定의 수련은
사마디 곧 견성을 위한
필수 요소이지요.
다음으로 혜慧는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입니다.
이것은 안목이기에
판단하는 의식인 '마음'에 관한
영역이지요.
당연히 이곳은
개념과 언어와 논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가
개념과 언어와 논리로써
혜慧에 접근하려는 시도이며
교학敎學에 치중하는 어리석음을
낳았지요.
이것은
교학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학을 하는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우선
정定이 먼저 입니다.
현상을 바라보는 안목인 혜慧는
개념과 언어에서
절대 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절대'라는
엄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우주 차원의 위계상
혜慧는
개념과 언어와 논리보다
상위의 차원이고
상위 차원은
하위 차원에 담기지 않는다는
현상의 규칙성 때문이지요.
혜慧는
교학에서 '절대' 오지 않습니다.
혜慧는
정定에서 출발하지요.
혜慧는
사마디의 결과물입니다.
이제
누군가 반문할 것입니다.
"사마디 이전에도
혜慧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삶의 지혜는
인간 진화 과정의 모든 지점에서
발생하지요.
그러나
영성이나 종교적 측면에서 논하는
혜慧는
그 시대에 통용되는
보편적 지혜를 넘어선
'통찰'의 수준을 가리킵니다.
혜慧는
각 시대 각 차원을 선도하는 안목을
의미하지요.
견성이 이루어지는
즉
논리와 이원성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피어나는 꽃이
혜慧이지요.
교학만 하는 이들은
선현들이 피웠던 꽃을
3D 프린터로 복제하여 보여줄
뿐입니다.
그 꽃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안목이
현장에 구현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제
순서는 명확합니다.
사마디 이후에
혜慧가 옵니다.
반면
교학도 나름의 역할이 있지요.
첫째 역할은
첫번 사마디까지 도달하기 위한
동기 부여와
소소한 주의 사항들이지요.
둘째는
새롭게 알게된
사마디 이후의 차원에서 오는
많은 혼란에
길잡이 역할을 합니다.
영성 수련자들의 혼란과 고통은
첫 사마디 이후
더 극심할 수 있지요.
더 많은 유혹과
좌절에 직면하는데
그들이 삶에서 경험한 현상의
편차가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산 정상과 아래 벌판의 편차였다면
이제는
하늘과 어두운 바다 밑까지의
편차이지요.
심신이 미약한 이는
영성 수련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선 상식선에서
건강과 건전함이 요구되지요.
사마디 이후의 문제로
돌아오면
첫 사마디를 통해
눈이 띄었다면
닦음의 2차 목표인
의도가 있을 때
언제든 사마디에 드는 의식의 힘을
키우는 수련입니다.
사마디의 재현이며
능숙함이지요.
의식의 단일성과 순도를 높이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아
정定의 영역에 해당하지요.
이 작업은
단순히 의식 집중만을 가리키진
않습니다.
사마디에 들고 남을 오가는
많은 여정 속에
우리의 기억, 습관,
시스템화된 낡은 사고 체계의
붕괴를 겪어야 하지요.
그것들이 폐기되지 않으면
혜慧가 오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 과정은
폐기와 혜慧가 점진적으로
교차하는
선순환의 과정이지요.
그리고 결국엔
사마디에서 얻은 안목과 체제로
재설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긴 과정인데
생리적 뇌의 기능까지
미세하게 조정되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의 습관은
유전자에 기록될 만큼 강력한
현상입니다.
영성 수련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이지요.
잦은 사마디를 통해
의식 체계에 일정 변화가 생기면
혜慧는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정定과 혜慧는
영역이 다르면서도
서로 맞물려 있지요.
정定과 혜慧는
원래 함께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은 정定이 열지요.
몇 자 읽은 글이
혜慧는 아닙니다.
교육 기관에서 찍어준
<증>을
혜慧라 할 수는 없지요?
혜慧는
고정된 논리나 합리성이 아닙니다.
혜慧는
현장의 적절함이지요.
언어에 담길 수도 없으며
유사한 상황에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생화生花만이
향기를 내지요.
앞에서
사마디 이후의 혼란이 극심하다
하였습니다.
이 혼란을 헤쳐나가는 힘이
혜慧이지요.
혜慧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현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엔
판단이 있고
분별이 있어야 하는 영역이지요.
지금 우리에겐
21C에 적절한 혜慧가 필요합니다.
영성 수련의 1차 목표는
사마디이지요.
순서를 바꾸어
과정을 엉클어 놓으면
혼란은 깊어지고
힘은 소진됩니다.
많은 이들이 수행의 결실로
혜慧를 얻고자 하지요.
이것은
우리의 당연한 바램이기도 합니다.
이원성의 현상은
혜慧를 필요로 하고
혜慧는
사마디samadhi에서 오며
사마디는
모든 개념과 이미지를 내려놓은
현장의 의식을
직면하는 것에서 발현하지요.
교학은 물론이고
감정과 트라우마를 관리하는
기법으로
현장을 채우면
사마디samadhi는 묘연합니다.
교학도 심리 기법도
그 쓰임이 있겠으나
영성과는 다른 영역이며
정定과 혜慧와는
유의미한 상관성이 없지요.
우선은
사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이해해야 하며
정定과 혜慧의 관계성을 알아야
정상적 수련이
가능합니다.
벽면 가득한 빛과 그림자
뜨거운 혼란 넘칠 듯 펴도
깊은 향 담장 넘어 오르니
청량한 하늘 매화 품었네.
..261006小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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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小野의 옹달샘
사마디(견성) 이후에 무엇을 닦는가?
소야(小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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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6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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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고맙습니다.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