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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사비성 비정에 대한 연구
< 개설 >
예로부터 소치(왕성)는 방어하기 좋은 곳에 설치하였으며 옛 소치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역대 중국왕조들이 낙양과, 장안을 왕궁으로 선택한 한 이유이다.
지금까지 백제 대륙설의 근거는 중국의 25사에 주로 근거하여 그 땅의 경계와 활약상을 알 수 있었지만 이번엔 고려시대 우리의 대학자가 기행문으로 작성한 글에서 마지막 사비성을 답사한 것으로 백제가 대륙에 있었으며, 마지막 사비성의 위치도 알게 된 것이다.
백제가 숭산 인근에 하수가 내려오는 길목에 곰나루(웅진)이란 도읍을 한 이후로 사비로 천도하였는바. 백제가 있었던 하남,산동성에서 강력한 백제의 소치로 볼만한 지명이 없다. 다만 서주(팽성)가 가장 유력하며 사서등에 근접하다. 서주(徐州)는 사수 한복판에 있었고, 한 대부터 왕궁터로 활용해 온 것으로 드러났으며 춘추좌전에 소개되는 서국(徐國--팽국)이었다. 항우와 유방이 팽성을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있었던 고도(古都)이었다.
***徐州(彭城)--徐州——①《禹贡》九州之一。②汉武帝十三刺史部之一。东汉治郯(今山东郯城)。汉末陶谦为刺史,治所尚在郯(见《通鉴》卷六十,初平四年胡三省注)。曹魏移彭城(今徐州)。东晋南朝若有淮北,则徐州在彭城,否则在京口。十六国及南朝置郡以徐州为名者颇多。均在今鲁豫皖境内。隋唐为徐州彭城郡,辖境不过丰、沛、宿迁等地。元为徐州路。明仍为州。清雍正时为徐州府,于府治置铜山县。民国废府。原府治仍为铜山县。今置徐州市、铜山县。
*** 北徐、南徐一一南朝有北徐州、南徐州。北徐州,东晋治彭城(今徐州);齐治燕县(今安徽风阳东北),辖区在淮南。南徐州,刘宋治京口,辖区初在江北,后移江南。, 东晋治彭城(今徐州);齐治燕县(今安徽风阳东北),
해설: 즉 서주는 우나라 시대부터 9주중 1주였고, 한무제시엔 13자사중 한부분이었다. 동한의 치소였고, 통감엔 ‘오랑캐’가 삼성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성은 주요한 3성으로 나당의 통상 경로인 당항성과 소치의 팽성, 백강의 임성으로 추정된다.)조위는 팽성으로 옮겼고, 동진시대에 북을 논한다면 곧 서주의 팽성이며 소치(京)가 아니다 하겠는가? 수당시절엔 팽성군으로 불리웠고 관할 경계는 불가양.이라고 했다. 또한 북서주는 바로 서주인데 유송시대에 도읍의 입구이었다.
***彭城——指今江苏徐州。传尧封彭祖于此,为大彭氏国。秦置彭城县。西汉后期一度以楚国为彭城郡, (동진317-420), (서진265-316),
* 성왕(523-554)은 538년에 사비로 천도하였다.
两江——清初指江南、江西两省,乒分苏、皖、赣三省,*沛郡——汉改泗水郡为沛郡,治相县(今安徽濉溪县西北)。东汉为沛国。东晋又有沛郡。北齐废。沛(늪패-늪/습지,물산이 풍부)
1) 팽성은---지금의 강소 서주이며 오래전 요임금이 팽조에게 봉한 땅이라고 했다. 진시절엔 팽성현으로 되었다가 서한 후기엔 초국의 팽성군이 되었다.(요,순임금은 동이족으로 그 분이 분봉받은 팽조의 땅은(서주) 백제의 영광스런 소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참조: 팽조는 성이 전씨이고 이름은 갱이다. 고양씨의 현손이며 육종의 3남이다, 은나라 말에 이미 767세였다. 고대장수,신선의 대명사로 상처가 49회, 54명의 자식이 먼저 죽었다.
살펴보면 수당시절에 ‘’직할경계로 불과“한 지역으로 나오므로 백제의 수도가 맞다고 할 것이며 통감의 기록을 보더라도 오랑캐(백제-동이)의 3성이라 표기하였다. 사수에 위치한 치소로는 서주밖에 없다 할 것이며, 놀라운 것은 宿遷地로 표기하고 있다. 이미 동한과 조위,동진이 치소로 사용하였던 성으로 이 宿遷은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겨 온것을 직접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근처에 백마하가 있고 샛강인 백강이 있으며, 중간으로 흐르는 웅진강이 지리성과 당항성 사이로 흐르는 것으로 보아 팽성이 치소가 명백헤 진 것이다. 또한 백마하 북쪽에 태산과 황산이 있으므로 틀림없다 할 것이다.
2) 참조로 백제의 부흥 운동을 했던 주류성이 서주 좌측에 있고 서주 오른 쪽엔 가림성(林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치소로 봄이 마땅하다 할 것이다. 백제본기(의자왕 20년)에 나당연합군이 지리성을 함락하고 부흥군이 있는 주류성으로 집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지리성 윗쪽에 당항성이 있고, 주류성이 있다.)
3)그리고 나당연합군은 청주,치주,내주,해주에서 7천명의 군사를 징발했다는 기록이 역시 백제본기에 전한다. 이 4지역은 전부 산동성에 존재하는 중국지명이다. 그러므로 백제부흥운동은 대륙 산동성에서 일어 난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다만, 중국측에서 백제를 오랑캐로 간주(동이)한 만큼 일일이 수도(도읍지)를 고의적으로 논하지 않는 것은 고구려, 백제,신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사서에 백제의 2번째 치소인 사비성이 지도에 없는 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4) 고려때의 문신인 이곡(목은 이색의 아버지)이 그의 문집인 ‘가정집’에서 조룡대에서 바라 본 천정대는 그 높이가 1,000척이라고 했다. 1천척이면 300미터가 되는 높은 절벽이다. 한반도에서 300미터나 되는 절벽이 없다. 이곳을 가르키는 것이다.(이곡집에서:암석에 마치 바위를 타고 올라온 것 같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다.) 그리고 호암의 서쪽에는 1,000척(尺) 높이의 단애(斷崖)가 있는데,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그런데 대륙 산동성 태행산정에 천정대가 있다. (天井关——在今山西晋城县南太行山顶-이곳이 한반도의 조룡대와 천정대의 전설이 된 듯하다.)대개 이곳은 백제 시대에 하늘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의 이름을 써서 이 천정대 위에 올려놓고는 군신이 조복(朝服) 차림에 홀(笏)을 쥐고 북쪽 강안의 모래톱 위에 줄지어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하늘이 그
이름위에 낙점한 뒤에야 뽑아서 썼다고 한다.) *하늘의 우물을 잠그는 곳---천정관
5) 이제 확연한 증거가 다시 나타납니다.
이곡이 갔었던 주행기를 봅시다. 기축년(1349, 충정왕 1) 5월 16일에 진강(鎭江) 원산(圓山)에서 한밤중에 배를 타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용연(龍淵)에 이르니,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도 송정(松亭) 전 거사(田居士)와 임주(林州)에서 온 반 사군(潘使君)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과 동행하여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가서 저녁에 고성(古城)에 정박하였다.
그 이튿날에 부여성(扶餘城) 낙화암(落花岩)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에 당(唐)나라가 소 장군(蘇將軍-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백제(百濟)를 쳤는데, 부여는 바로 그때의 도읍지였다. 당시에 포위를 당하여 상황이 매우 급박해지자 군신(君臣)이 궁녀들을 놔두고 도망쳤는데, 궁녀들이 의리상 당나라 군사들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다고 하여 떼를 지어 이 바위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래서 낙화암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부여의 감무(監務)가 바위 모퉁이에 있는 승사(僧舍)에 음식을 차렸다.
정오가 지나서 닻줄을 풀고 조금 서쪽으로 가니, 물가에 거대한 암석이 반원(半圓)의 형태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밑에 맑은 물이 잠겨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이곳에 와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는데, 강을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끼어서 사방이 어두워졌으므로 방향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염탐하게 하였더니 용이 그 밑의 굴속에 살면서 본국을 호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당나라 사람이 술자(術者)의 계교를 써서 미끼를 던져 낚아 올리기로 하였는데, 용이 처음에는 저항하며 올라오지 않았으므로 있는 힘을 다하여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물가의 암석에서부터 그 바위 꼭대기까지 한 자 남짓 되는 깊이와 너비에 길이가 거의 한 길쯤 되는 파인 흔적이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 내어 만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 일러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조룡대에서 서쪽으로 5리쯤 가면 강의 남쪽 언덕에 호암(虎岩)이라는 승사가 있다. 거기에 암석이 벽처럼 서 있고 그 암석을 절이 등지고 있는데, 암석에 마치 바위를 타고 올라온 것 같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 있다. 그리고 호암의 서쪽에는 1,000척(尺) 높이의 단애(斷崖)가 있는데, 그 꼭대기를 천정대(天政臺)라고 부른다. 대개 이곳은 백제 시대에 하늘과 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등용할 때면 언제나 그 사람의 이름을 써서 이 천정대 위에 올려놓고는 군신이 조복(朝服) 차림에 홀(笏)을 쥐고 북쪽 강안의 모래톱 위에 줄지어 엎드려서 기다리다가 하늘이 그 이름 위에 낙점한 뒤에야 뽑아서 썼다고 한다. 그 지방 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이야기가 이와 같다. 호암에서 걸어서 천정대에 오르니, 대에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없고 오직 바위가 반공에 솟아 있을 뿐이었다.
** 임주(林州)는 강소성으로 태행산맥의 뻗은 골짜기로 도화곡,매통골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트레킹 코스로 찿는 곳이다.(태행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은 산동성, 하남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서쪽은 산서성 북은 하북으로 불리우고 있다.)그러므로 이곡선생이 출발했던 곳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의 강소지방의 진강(鎭江)에서 출발하였고 같이 간 일행도 강소성 상주에서 온 일행인 반사군이었다.
6) 자! 그럼 이곡이 출발했던 진강(鎭江)이 어딥니까?
南徐——南朝宋在京口(今镇江)置南徐州,辖地本在江北,后改为江南。
镇江——宋政和间升润州为镇江府
润州——隋置,治延陵(今江苏常州),唐移丹徒(今镇江)。北宋政和间升镇江府。
(당은 고구려 유민 20만명을 신강자치주의 사막과 남단으로 이주시킵니다.-- 이 사람들이 현재 살고 있는 중국의 동부,서부,중부에 있는 묘족입니다.)
**남조의 송나라(서기420년-479년),북송(960-1127), 당(618-907), 수(581-618)
해설: 진강은 남조시대 송나라의 수도 입구였으며 남서주로 불리우며 즉 진강(鎭江)으로 강북에 위치하였다. 후에 개명되어 강남으로 불리웠다. 당은 붉은 무리들(패잔병,역모의심 무리들-전쟁에서 패한 무리로 해석)을 진강으로 이주시켰다. 남조의 송나라 시절 윤주의 진강부는 사실, 일찍 수나라 시대부터 윤주로 설치되었다.
주석: 이곡(李穀) 선생은 고려시대 목은 이색의 아버지로서(1298-1351) 젊어서부터 정동행성 향시에 급제하여 원나라 조정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수십년동안 중국대륙 여러 곳을 주행하면서 많은 시문과 기행문이 ‘가정집(稼亭集)‘에 실려 있다. 20권 4책으로 1364년에 간행하였다.
7) 이곡 선생은 그의 주행기에서 그 당시 강남이었던 진강에서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용연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용연은 덕안에서 청양으로 가다보면 중간 뱃길에 귀지(貴池)라는 지명이 용연으로 봅니다.(당연히 용은 아주 귀한 동물이니까요?) 못연과 못지는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이 용연인(귀지) 뱃길을 따라 북상하여 청양을 거쳐 사수에 도달하게 됩니다.
8) 泗沘성은 (성왕때 천도(538년)다만, 한자는 뜻글자이므로 사비성에 한자인 泗자는 삼수변에 넉사입니다. 실제로 하남,하북을 흐르는 泗水가 숭산과 황산방향으로부터 4갈래로 흐르고 있습니다. 물론 샛강이 더러 있으며 백제 부흥운동에 등장하는 웅진강도 있습니다.(지리성,당항성등)
이 지명을 충족시키며 백제본기의 내용과 딱 맞아 떨어지는 지역은 6세기경 하남지역인 서주(팽성)일대 이곳 말고는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성왕때 사비로 천도하고 남부여라고 개칭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선시대와 일제에 의해 대륙지명이 이동되었는데 대표적인 그 지명으로는 광주,나주,신안,청양,진해, 강릉등으로 한반도에 이동시켜 조작,왜곡에 강단사학자들이 한반도에다가 부여를 가져다 놓고 금강에다 억지로 짜깁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결국 강단사학자들이 백마강 강변언덕에 자리 잡았다고 우기는 부소산성은 대륙의 팽성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남제서-490년>는 북위와 전쟁하여 승전 후 동성대왕이 제수한 낙랑태수와 성양태수, 조선태수, 광양태수, 대방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등의 일곱 태수를 임명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북위 386-534)
백제 성왕은 북위가 멸망한 뒤인 서기 538년 사비(팽성)로 도읍을 정하고 북위의 수도인 평성(태수지역)을 포함한 산동,산서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平城——在今山西大同东北,北魏时曾为都城。
* 백제 도읍지는 산동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송준희 교수 연구 논문)
한서지리지 산동성 ‘동래군’ 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弦有百支萊王祠 有鹽官 師古曰弦音堅
견유백지래왕사 유염관 사고왈견음견
☞ 弦(견) : 앞부분에 수건 건(巾)변이 있는 글자이다.
‘동래군’ 속한 현중에 "견(弦)현“이 있는데, 그곳에는 백지래왕(百支萊王)의 사당이 있고, 소금담당 관청이 있었다. 사고왈(안사고왈) 견의 음은 견(堅)이라 하였다. 이곳의 위치는 지금 산동성 래주만 인근이다. 춘추좌전에 弦나라는 초에 복속된다.
9) 황산묘수(黃山廟首)는 무엇인가?(신안 위쪽)
황산 전투에 죽은 백제군의 전몰장병을 매장하고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고 이해
를 해야 한다. 덕안의 동북에 위해 있으며 신안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도데
체 백제가 멸망했는데도 그 누가 이런 지명을 후세에 남겨 놓았을까? 연구해
볼 과제인데 이 지역이 백제 멸망 후 유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백제의 땅이
란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지명이라 할 것이다.
10) 사수(泗水)는 태행산맥을 기점으로 동쪽과 서족으로 흘러 내리며 서주(팽성) 의 위쪽으로 백마하가 흐르며, 샛강이 흐르며, 그 한 물줄기는 서쪽으로 하여 주류성과 지리성으로 흘러 내리는 일명 웅진강인 것이다.(여기도 샛강인 흐른다) 원래 사수의 큰 물줄기는 요동과 숭산을 거쳐 한 줄기는 섬서성쪽으로 흘러 들어가 광주에 이르게 된다. 팽성근처로 흐르는 강을 제수(濟水)라고 하였다.(청나라 고지도 참조) 그러므로 백제로 흐르는 하(강)를 제수(濟水)라 불렀던 것이다.
泗水——①古泅水长一千数百里,为淮河下游最大的支流。起源于今山东泗水县东蒙山南麓,向西至今兖州后,向南至今济宁市东的鲁桥镇,再循今运河南下,穿过今南阳湖,由今昭阳湖西继续向南到今徐州东北,再从现存的淤黄河故道东南下,至清江市附近入淮河。鲁桥以上的泗河至今仍存,以下则面目全非。徐州以下一段,金代被黄河所夺,黄河于清咸丰间北迁后,这段河道完全淤废,故古泅水的下游不复存在。鲁桥到徐州段,即古泅水中游,元明时成为大运河的一部分,而且在明隆庆、万历以后,这段运河的河道移到昭阳湖、微山湖以东,原来的泗水中游水源断绝,从南阳镇(在鲁桥镇西南,位于南阳湖和昭阳湖的分界点上)到徐州一段,完全变成了平地。②秦有泗水郡,治相县(今安徽淮北市西北),汉改沛郡。
11) 东平——汉有东平国,南朝为郡,治无盐(今山东东平东)。隋唐曾以郓州为东平郡,治须昌,在今东平西北。宋宣和时以郓州为东平府,治须城,即今东平。明清为州。民国改县。
한조시대엔 동평국으로 하였고 남조시대엔 군으로 불렀다.
수당시절엔 동평군으로 불리워 졌으나 그 치소는 팽창(彭昌)이며 동평의 서북이었다. 송(선화)에 이르러 동평부로 승격 되었고, 그 치소는 팽성(彭城)이었다.
여기에서 주목 할 것은 동평의 치소가 당 시절에 팽창이란 점이다.이미 서주엔 팽성이 오래전인 요,순시절부터 있었고 요임금으로부터 분봉 받았으며 조위,동진이 치소로 정한 도읍지를 중국사가들이 고의로 팽성을 누락시키고 대신 그 치소를 팽창으로 지목하고 그 방향을 산동 동평동에서 동평서북으로 찿지 못하게 하였다.(서북방향은 요동지방인 태원,석성,대방,서안평,석문이 있는 곳으로 팽창의 지명이 없는 곳이다.)
다만 송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동평을 팽성 관활로 끼워 넣어 치소로 만든 것으로 산동,섬서,하남,하북등지에서 다스린 백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작업이었으며, 백제시대엔 팽성에서 동명과 동평을 다스리지 않았던 지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이미, 송준희 교수가 발표한 북위와의 전쟁에 남제서에 나타난 청하,광양, 대방, 광릉, 낙양, 성양, 평성태수등 7태수를 임명한 그 당시의 기록에 전혀 배치되는 것이며 그중 평성은 북위의 도읍지였다. 平城——在今山西大同东北,北魏时曾为都城。또한 이미 당나라가 5도독부를 설치한 웅진, 마한, 금련, 덕안, 동명의 도독부에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특히 동명도독부 안쪽에 동평이 있어 자연스레 관할이 포함되는 것임에도 동평을 백제가 다스렸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계책이며 그 치소인 팽성을 감추기 위한 술책으로 팽창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팽창은 6세기경에 산동,화북성에 나타나지 않는 지명으로 가공된 지명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실 역사적으로 동명도독부가 인근의 동평을 다스려야 하나 치소(도읍)의 근처인 동평을 직할로 다스렸다고 봄이 상당하며, 도읍인 사비성즉, 팽성이 치소가 되는 것이다. 늦게야 송나라 시절에 팽성이 치소가 되었던 것이다.
12)제수(濟水)는 사수의 북쪽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을 제수라고 부른다.
춘추에 나타난 동방민족의 활약에서 제수는 오래전의 전쟁터였다.
즉 이 때 산융山戎은 [하수河水-구하九河(북정北征에서의 기록은 맥구貉拘*구하拘夏로 나온다)-제수濟水가 연결되는 북쪽 루트를 따라 동진東進하면서 천천히 육박하고 있었다. 앞서 당唐(신申과 등滕의 동편)에 근거 하였는데 제수濟水 서편까지 파고 들어간 남쪽의 융戎이 그쪽 지역에서 거莒 등과 손을 잡고 뿌리를 박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이들이 결국 석문石門을 교두보橋頭堡로 삼아 제수濟水를 넘으면 남융南戎과 합쳐지니 노魯와 제齊는 맨발로 도망쳐야 하는 꼴을 맞을지도 모른다.
북정北征은 이러한 큰 그림에서 이루어진 제후연맹의 결단決斷이어야 옳다. 그래야 조금은 현명하다 소리를 듣는다. 이 전역戰役은 사실 별 이로움은 없었던 듯 하다. (춘추좌전에서)춘추좌전에서 언급한 대로 신라는 이미 정주의 관산성(管城) 전투로 하남성을 장악했으며쪽의 산융(오랑캐)처럼 서쪽에서 밀고 들어오고, 당나라는 래주만으로부터 황산진 ,동평,동명을 통해 사수를 거쳐 백제를 공격함으로서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 결 론 의 도출
1) 사비성은 사수를 끼고 있어야 한다는 점
2) 사비성은 근처에 백마하가 있어야 성립된다는 점
3) 사비성 근처에 웅진강등 샛강(백강)이 있어야 한다는 점
4)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성인 주류성, 가임성등 책성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점
5) 강을 끼고 있으며 수비가 용이한 곳이어야 한다는 점
6) 대백제에 걸맞는 큰 왕성이 필요하다는 점
7) 사부리주(사벌주)안에 있어야 한다는 점
8) 사수 지류에 방어를 하는 책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
9) 나당의 통상경로와 이동을 막는 당항성이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점
10)소정방의 수군은 산동성 래주만으로부터 진격하여 왔고 황산진을 거쳐 동평,동명으로 사수에 도달하게 된다. 육상 진격로는 탄현인데(박산) 육상으로 오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비성은 어디인가?
이런 10가지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성은 춘추좌전에 있었던 서국(徐國) 즉, 팽성
뿐인 것이다. 이 10가지 말고도 더 충족시킬 수 있는 사비성의 비정이 있다면 내놓아 보실 것을 권한다.
(참고문헌)
과정집(이곡선생)=한국전통문화원
우리역사의 비밀 -송준희 교수 발표문(남제서 발표문등)
춘추좌전
중국고지명대조표
고 임승국교수의 국회청문회시에 발표한 6세기의 지도 지명
첫댓글 백제가 산동성 까지 다스렸다.
산동성,강소성,절강성,안휘성까지 다스렸다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륙신라와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많이 나타남에 비정하였
습니다.
이른바 백제대륙설이로군요~ 글쎄요~
중국의 고지명을 현대지명과 대조하엿습니다.
우리나라 고려말의 대학자가 갔다온 기행문인데 안믿으시면 누굴 믿나요?
@화무십일홍 이미 중국의 25사에 대륙삼국의 경계가 상세히 실려 잇습니다, 워낙 일제의 반도사관에 찌들다 보니 생소한 것입니다. 궁금하시면 일단 조회하여 보세요.
믿거나 말거나....
아니면 말고식의 잡담이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