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비고에 실린 기록: 태조 5년(1396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142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이층 지붕이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김학수 화백의 조선시대 칠패시와 함께 그린 풍경)
(김학수 화백의 조선시대 칠패시와 함께 그린 다른 풍경)
(김학수 화백이 그린 여름 풍경)
(김학수 화백이 그린 겨울 풍경)
(1770년 목판인쇄본 지도에 실린 숭례문)
(1880년 사진)
(19세기 말엽 사진)
(1900년 사진)
(영국에 소개된 자동차가 출현했을 때 시민들의 놀람을 그린 그림)
(20세기 초무렵의 사진)
(20세기 초무렵의 사진)
(20세기 초무렵의 사진)
임진왜란과 남대문: 도성(都城)의 남대문(南大門)에 숭례문(崇禮門)이라는 이름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 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
... 현재 숭례문(崇禮門)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世祖)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중에서 발췌)
병자호란과 남대문: 병자년(1636) 병란 때에 임금님께서 강화(江華)로 피신하기로 의논을 정하고는 늙고 병든 사람을 먼저 보내도록 명하였기 때문에 부군이 먼저 도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조 판서의 신분으로 대궐에 있다가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따라서 먼저 길을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임금님이 타신 대가(大駕)가 출발하였는데, 대가가 남대문(南大門)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의 기병을 만났다. 그랬으므로 길을 피하여, 다시 수구문(水口門)을 통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였다. (포저집 선부군 행장 중에서 발췌)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남대문 앞에 세워진, 한일합방을 환영하는 기념문)
(대한제국 멸망 후 성벽이 헐린 직후 무렵 사진)
(일제시대의 사진)
(일제시대 교과서 그림: 한일합방을 즐거워하는 두 나라 사람들 이라는 내용의 설명과 함께)
첫댓글 귀한자료 잘보았구요, 가슴이 저릿저릿 미어지네요
이 자료 잘 보관하여야 겠습니다... 가슴이 쓰리도록... 잘못을 가리지 말고...복원을 시작할 때까지... 두고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으련만... 가림막을 쳐서...안보이게 한다네요... 남산가서...봐야지...
그림 잘 보았습니다.찢어지네요.가슴이.정말로 범인이 맞을까요?
귀한 자료네요. 얼렁 옮겨다 놔야지.
정말 귀한 자료 입니다.....답답하네요.
남대문이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었네요. 잘 봤습니다. ^^
아~~, 막막하네요 ㅜ.ㅜ
눈물이 그렁그렁...흘흘흘..
좋은 자료 잘 보고 갑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우리 국보 숭례문...
서울 살면서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ㅡㅜ
악..정말......버스타고 지나간 게 다인데..미리 봐둘걸 그랬습니다. 어찌나 억울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