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영화관 동대문 옆에 세워진 첫 영화관, 광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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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17. 13:08조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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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영화관
동대문 옆에 세워진 첫 영화관, 광무대
요약 1903년경, 동대문 옆의 전기회사 창고에서 미국인 콜브란이 장사 목적으로 시작.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8시에서 10시까지 상영, 입장료는 10전.
단성사 사주 박승필이 1908년 인수하며 '광무대'로 명칭을 변경.
'최초'에 대해 '원각사', '손탁호텔' 등의 다른 설도 있음.
한국에서 영화가 맨 처음 상영된 곳으로는 남대문에 있는 중국인 창고라는 설도 있고, 정동의 손탁호텔이라는 설도 있으며,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던 원각사라는 설도 있다. 모두 19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이다. 이는 이 무렵에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형태가 여러 경로를 통해 이 땅에 상륙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 신빙성을 주고 있는 곳은 동대문 옆에 있던 광무대(光武臺)라는 극장이다. 1903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보인다.
"동대문 안에 있는 전기회사 창고에서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 매일 저녁 8시에서 10시까지 활동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활동사진은 대한과 구미 각국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입장료는 동전 10전."
이 광고에서 말하는 동대문 안이란 지금의 동대문 종합상가 자리를 이르는 것이고, 전기회사라는 것은 바로 이곳에 5년 전에 세워진 전차 운행용 발전소를 이르는 것이다. 이 회사는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가 정부의 허가를 얻어 세운 것이다.
그런데 광고로 보면 이때 이미 활동사진이라는 것이 대중에게 꽤 알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활동사진이라는 단어가 별다른 설명이 없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로 외국의 외교관들이 당시 세계적으로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던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를 자기네 나라에서 들여와 이제 막 문호를 개방한 동방의 작은 나라에 소개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주로 공식적인 모임에서 활동사진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에게 어떤 대가를 받고 그것을 보여준 것은 콜브란의 경우가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황성신문>의 광고는 바로 그렇게 대가를 받고 볼거리인 활동사진을 보여주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활동사진을 보여주겠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장소,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입장료를 받고 보여주겠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장소인 광무대야말로 이 땅에 처음으로 등장한 영화관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곳의 명칭이 광무대가 된 것은 아마 단성사 사주 박승필이 인수하여 운영하면서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박승필이 인수한 것은 1908년이었다. 이곳에서 활동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사실, 그때의 영화관에 대한 세상의 여론, 그리고 박승필이 인수한 사실 등은 <황성신문>을 비롯하여 <대한매일신문> <매일신보> 등에 자세하게 보도되어 있다. 당시 신문들은 새로운 문물의 도래에 대하여 경이로움과 우려의 시선을 가지고, 프로그램이 바뀌기만 해도 기사로 보도했다.
그런데 <황성신문>의 광고에 일요일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비가 오는 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일요일에 하지 않는다는 것은 콜브란의 종교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고 안이라고 해놓고 비가 오는 날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건물이 허술해서 밤이면 별이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 아닐까?
콜브란은 장사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차 개설 이후에 이곳 창고에 옥양목 스크린을 설치하고 대중이 신기해하던 활동사진을 보여준 것이다. 처음엔 입장료를 빈 담뱃갑 열 개로 대신 받았다고 한다. 그는 올드 골드·하니·하로 등 외국산 담배를 들여와 팔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입장료를 10전으로 정했다. 이는 획기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낮에는 주로 뚝섬의 놀량패와 소리꾼들을 불러와 놀게 하고 저녁에 활동사진을 보여주면서 담배를 팔았던 그들이 이제는 정식으로 입장료를 받았던 것이다. 신문에 광고를 한 것은 그런 사실을 당당하게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광무대는 문을 열자마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차츰 유명해졌다. 신문은 그런 점을 예의주시하면서 기사를 썼는데, 그 내용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마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즉, 활동사진을 보기 위해 광무대에 모인 사람들을 '탕자음부'라고 하는가 하면, '호객탕자' '풍속 괴란장'이라는 말이 거침없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활동사진 중에 한국의 모습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기록영화인 셈인데, 그 시간은 5분 안팎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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