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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의 설교 3
행 7:17-29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21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행 7:17-29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곧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 하신 때가 가까워졌을 무렵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엄청나게 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에는 ㄴ) 요셉의 내력을 알지 못하는 자가 왕이 되어 (ㄴ. 70인역 출1:8) 19) 우리 조상들에게 포악한 정치를 하고 부모들을 강압하여 아이들을 내버리게 하였습니다. 20) 모세가 태어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귀여운 아기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그 아기를 숨겨 키웠습니다. 21) 그러나 도저히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그 아기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곧 바로의 딸의 눈에 띄어 그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22)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건장하며 웅변을 잘하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23) 40세의 생일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24) 그들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을 못살게 굴고 있는 것을 보자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의 편을 들어 싸우다가 그만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25) 모세는 자기야말로 이스라엘 사람을 도우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동족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6) 이튿날 모세는 다시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이스라엘 사람끼리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싸움을 말리며 `여보시오, 한핏줄끼리 이렇게 싸우면 되겠소? 이게 무슨 짓들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27) ㄷ) 그러자 동료를 괴롭히던 사람이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라고 대들며 말하였습니다. `누가 당신을 우리 지도자나 재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ㄷ. 70인역 출2:13-15) 28)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일 작정이오?' 29)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애굽을 나와 미디안 땅에 가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그의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하나님 자신이 하신 약속대로 번성하게 한 사실과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준비하셨던 역사적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17-19)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가족의 수가 일흔 다섯 명이었는데 출애굽을 할 때는 번성하여 장정의 수만 육십 만 명이 넘었습니다(출 12:37, 38; 민 1:4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출애굽을 약속한 때가 가까워지자 번성하게 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고 하신 약속(창 15:5)을 성취했습니다. 그런데 7년 기근 중에 애굽을 구원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바로)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번성한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고 박해를 하였습니다.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할 때 애굽의 새 임금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남자 아이를 죽이는 정책을 펼 때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흑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들을 위하여 출애굽을 시킬 수 있는 지도자 모세를 준비했습니다. 모세는 집에서 세 달 동안 길러졌지만 더 이상 기를 수 없게 되어 나일 강에 띄어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어 애굽의 과학, 수학, 천문학, 지리학, 의학, 지도자의 처세술 및 통치법 등을 배워 다방면으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었습니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23-29) 모세는 사십 세에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 다투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중재하려고 할 때 “누가 너를 우리의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 애굽 사람을 죽인 것 같이 나를 죽이려 하느냐”며 배척당했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으로 미디안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거기서 두 아들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낳았습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민족을 구원하려는 모세의 심정을 모르고 배척한 것처럼 예수님을 보내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적용: 모세는 40세에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났을 때 현장으로 나갔습니다. 당신에게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스타워즈’와 ‘인디아나 존스’로 유명한 영화배우 '해리슨 포드'는 영화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많은 인명을 구조한 영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는 말합니다. “저는 영웅이 아닙니다. 진짜 영웅은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시민을 구조하는 구급대원분들입니다.”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의 영화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영웅의 이야기든,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영웅들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영웅이 된 것이 아니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영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지금 ‘코로나 19’ 현장에서 밤낮없이 헌신하고 봉사하고 계시는 많은 영웅들께 감사와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 설 교 >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 모세
사도행전 7장 17-36절 / 이준원 목사
[들어가는 말]
우리가 보통 헤어지면서 많이 하는 말이 “내일 봐요.”일 것입니다. 어제 만난 분들과는 “내일 뵈어요. See you tomorrow.”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순수 우리말에는 원래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어제’라는 단어와 ‘오늘’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순수한 우리말인데, 오늘의 다음 날인 내일은 우리말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한자 ‘올 래’ 자와 ‘날 일’ 자로 된 ‘내일(來日)’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점심’을 뜻하는 고유의 한국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침에 먹는 밥은 우리말로 ‘아침’이고, 저녁에 먹는 밥은 그냥 ‘저녁’입니다. 그런데 아침과 저녁의 중간에 먹는 밥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새참’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해도, 그것은 비정기적인 식사를 말하는 것이지, 아침과 저녁처럼 매일 정기적으로 먹는 식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역시 한자어인 ‘점심(點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일’과 ‘점심’을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너무 가난해서 수천 년 동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조상들은 하루에 두 끼를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끼 먹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했기 때문에 점심을 먹거나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지만 내일에 해당되는 우리말이 없고, 아침과 저녁은 있지만 점심은 없는 것입니다. 또 다시 힘겹게 뚫고 나가야 할 고달픈 오늘의 현실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다가 이제는 너무 형편이 좋아져서, 하루 세 끼 식사가 아니라 네 끼 또는 다섯 끼를 먹기도 하고 간식까지 먹으면서, 점심과 내일이라는 한자어가 마치 원래 우리말이었던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우리는 너무 과거에 매여서 산다는 것을 많이 봅니다. 과거에 너무 매여 있고, 현재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을 성실하게 살아야만 내일이 보장되지만, 성실히 사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릅니다. 지금 너무 과거에 매여 있고 현실에 집착해서 내일을 못 보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합니다. 삶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역시 너무 과거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왕년에 내가 이런 사람이었다.’라는 게 있는데, 왕년에 너무 매여 있다 보니까 지금이 부족하고 미래는 별로 생각을 안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가장 좋은 표시가 간증입니다. 간증은 꼭 필요한 것인데, 거창하게 앞에 나와서 삶 공부 간증, 세례 간증, 구원 간증을 하는 것만 아니라, 매일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역사하셨는가를 자랑하는 게 간증입니다. 목장에서 감사제목을 나누며 지난주에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해주셨다고 나누는 것도 다 간증입니다.
그런데 간증이 정말 의미가 있으려면 지금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면서 그것이 미래로 이어져야 합니다. 과거 1.4 후퇴 때나 광복 때 어땠다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지만, 거기에만 머문 채 미래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어제의 믿음이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지 않게 되어서 신앙의 성장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간증은 생생한 간증이어야 합니다. 한 달 넘으면 간증으로 치지 말아야 합니다.
방금 너무나 은혜로운 간증을 했는데 얼마 후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니까 언제 그런 간증을 했느냐는 듯, 너무나 쉽게 절망에 빠지고 너무 쉽게 신앙생활을 떠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어제 나와 함께 하시며 역사해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 나의 내일을 새롭게 빚고 계시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귀한 간증을 해놓고도 금방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그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되고 바르게 가꾸어 갈 수 있습니다. 내일이라는 것은 오늘의 결과이고, 오늘이라는 것은 어제가 쌓여서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오늘의 수준이 내일의 수준을 결정하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을 성실히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제의 기초 위에 굳게 서서, 영원의 시각으로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을 신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스데반의 설교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이었고, 특히 오늘 나오는 모세의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길어서 우리는 조금 나누어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모세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로 봐서도 길게 나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고소를 당했기 때문에 모세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입니다.
1. 이집트 왕자의 출생의 비밀
1. 이스라엘에게 닥친 고난(17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게 뭡니까?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믿기 어려운 약속이었지만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의롭게 여겨주시며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는데, ‘약’ 자가 ‘언약’이나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약속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약속은 이루어지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약속을 하면 때가 되어 그것을 지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는 아무리 인간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수를 써도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느리게 오지 않으시고 빨리 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빨리 되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천천히 움직이시는 것 같고, 우리는 나중에 되면 좋겠는데 당장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때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
야곱 가족이 요셉을 통해서 일종의 가족이민 초청을 받아서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로 이민을 왔습니다. 이집트의 총리(2인자) 가족이니까 얼마나 좋은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집트에 정착하면서 아주 좋은 땅에 살고 잘 정착하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좋게 시작한 이민생활이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스러운 노예생활로 바뀝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18-19절)
성경을 읽을 때 마치 동화나 신화처럼 대충 읽을 수 있는데, 사실은 생생한 역사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나와서 이집트의 왕조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람은 이집트 제18왕조의 창시자인 아흐모세 1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일부러라도 그 전에 있던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 새로운 왕조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급속도로 번성해서 수가 많아지니까 위협을 느끼고, 이 새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를 노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노예로 일을 힘들게 시키면 수가 늘어나는 것이 적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도와는 달리 고된 노동을 하는 중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줄어들지 않고 더 번성했습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아이를 잘 낳으며 번성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립니다. 여자 아이면 살려주고, 남자 아이면 나일 강에 던져 죽게 하라는 잔인한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내린 사람은 그 후의 투트모세 1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노예생활을 하는 것도 힘든데 금방 낳은 아이를 강에 던져 죽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에게도 아기들이 태어났지만, 그런 귀여운 아이를 강에 던져 죽이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2. 모세의 부모의 믿음(20절)
모세가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힘든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모세도 태어나자마자 나일 강에 버려져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환경 탓, 남의 탓을 많이 하지만, 사실 모세만큼 환경을 탓할 사람이 또 있겠습니까?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이 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 중에서 소망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인간이 볼 때는 나갈 길이 없고 다 끝났다고 보는 상황이, 하나님께는 최고의 상황일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세 달 동안 길렀습니다. 100일 정도에 아기가 얼마나 귀엽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사실 왕의 명령을 어기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들키면 아이는 물론이고 부모까지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른 것인데, 이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마침내 아이를 강물 위에 둡니다. 그냥 보면 모세의 친부모도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버렸으니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만약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버렸다면 처음에 버리지 왜 세 달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길렀겠습니까?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의 이야기가 기록된 출애굽기 2장을 보면,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되어 있습니다(출 2:2). 단순히 외모가 잘생겨서 버릴 수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방금 읽은 20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모도 귀엽고 잘생겼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부모가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아기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뭔가 영적이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아이는 단순히 그냥 낳은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특별히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서, 목숨을 걸고 이 아이를 지킨 것입니다.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그를 석 달 동안 숨겨서 길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믿음으로 3개월 동안 길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아이를 나일 강에 흘려보내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이를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부모로서의 인간적인 집착을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이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아이를 통해 분명히 뭔가를 이루실 텐데, 우리가 더 이상은 이 아이를 기를 수 없으니, 이제 하나님 손에 이 아이를 맡긴다.’고 하며 강에 떠내려 보낸 것입니다.
자녀를 바라볼 때 우리도 이런 눈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부모처럼 믿음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너무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성적도 좋고 리더가 되면 좋아하고, 성적이 안 나오고 점수가 떨어지면 ‘어휴, 쟤는 어디서 나왔나?’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아이를 높게 또는 낮게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아이를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부모로서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이를 보면서 ‘어휴’ 또는 ‘아이고, 내 머리야’ 하면서 괴로워하신 분들이 대부분이실 겁니다. 심지어 아이들이 다 커도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말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까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부모가 할 일은 다른 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뿐입니다. 내가 뭐라고 한다고 아이가 그리로 갑니까? 내가 낳은 아이도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인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아이를 향해서 다른 계획을 갖고 계신데 나는 계속 이쪽으로 가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라 내 욕심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아이를 맡기면, 흘러가는 나일 강 속에서도 그 아이가 이집트 공주에게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적합한 최고의 미래로 인도해주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내가 한다고 아이가 잘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부모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게 아니고, 아이를 위해 축복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아이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부모의 아이는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혹시 지금 당장은 약간 잘못 가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은 돌아옵니다. 내가 기도하는 부모인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3. 극적인 반전(21-22절)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딸이 데려다 키웠다고 너무 간단히 되어 있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나일강이라는 데가 동네 개천 같이 작은 곳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바다 같이 넓고 물결이 치는 큰 강입니다. 그뿐 아니라 악어나 하마나 물뱀 같은 맹수들도 많습니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모세의 부모가 갈대상자에 역청을 바릅니다. 그리고 갈대상자에 넣어 물에 띄우는데,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습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그 누이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하필 이 아기를 거기에 둔 그 시간에 바로의 딸인 이집트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이 상자를 발견했다는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확률적으로 얼마나 됩니까?
게다가 이집트 왕궁의 목욕탕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그 좋은 데를 두고 이 공주가 불편한 나일 강으로 와서 목욕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리고 수많은 지류가 있고 맹수들도 많은 큰 강인 나일 강에서 어떻게 모세가 담긴 갈대상자가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이집트 공주가 왔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확률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가 못 보는 사이에 뒤에서 너무도 치밀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어디서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일이 풀립니다. 길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일이 됩니다. 어디를 갔다가 정말 우연찮게 누구를 만납니다. 이런 게 우연입니까?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못 보는 사이에 너무나 엄청난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28의 말씀입니다.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셔서 모든 것이 다 선하게 되도록 역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참 희한한 일은, 이집트 공주의 아버지 바로 왕(투트모세 1세)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했는데, 그 딸은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딸로서 ‘우리 아버지가 명령하셨으니까 죽여야지’ 하고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죽이지 못하겠으면 그냥 강물에 떠내려 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 아들로 삼았다는 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공주는 역사적으로 핫셉수트라는 대단한 여자군주였습니다. 핫셉수트는 자기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정적이 되는 투트모세 3세를 견제하기 위해서 마침 발견한 이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아서 붙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야심, 정치적인 견제심리, 자기가 왕권을 차지하겠다는 욕심까지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선을 이루십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도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또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저런 결정을 내리며, 서로 외교적으로 많이 싸우고 무역전쟁도 벌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큰일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다 끝나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여길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의 야심을 통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고 마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이집트 바로 왕의 명령이 안 통하는 곳이 이집트 땅에 없는데, 모세가 가장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곳이 왕궁 안입니다. 밖을 바라보면서는 여러 명령을 하지만, 자기가 사는 왕궁 안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안 쓰니까, 그 안에서 자라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모세가 받은 교육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당시 아주 강대국이고 문화의 중심지로서 이집트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입니까?
이집트 공주의 손에 의해서 모세가 건짐을 받고 왕자로 들어갔다는 것은 모세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미래를 준비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을 뿐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구원하시는 뜻으로 이렇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이집트 문명의 최고를 흡수하며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모세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집트의 뛰어난 학문, 지식, 무술, 행정, 정치, 경제, 문화에 통달하는 왕자로서 교육받고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친부모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아니, 노예가 어떻게 이런 것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중에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성경의 첫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성경 전체로 보아도 약 1/5 정도나 되는 엄청난 분량인데, 이런 방대한 내용을 쓸 수 있도록 미리 교육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해서 크고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도 버릴 게 없습니다. 심지어 내가 큰 실수를 하거나 아주 안 좋은 일이 생겨도, 그것조차도 우리 인생에서는 버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도 사용하십니다. 만약 우리 능력이 부족하다면, 노예인데 공주의 아들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비전을 주시면 그것을 감당할 준비도 시켜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처절한 실패와 무명 생활
1. 구원자가 되려다 살인자가 된 사람(23-25절)
이제 모세가 잘 자라서 40세의 건장하고 늠름한 장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지는데, 이스라엘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일을 그가 본 것입니다. 노예가 이집트 사람에게 핍박을 당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고 매일 벌어지던 일이었는데, 그날따라 모세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는 이집트 최고의 학문을 공부한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이집트 최고의 무예를 배운 사람입니다. 군사적으로도 장군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무술의 고수였습니다. 그러니 순식간에 이집트 사람을 제압했고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모세는 자랑스러운 마음도 들었을 겁니다. ‘야,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내가 자기들을 구원하러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알겠지? 노예 신분인 사람들이 어떻게 이집트 사람에게 대항하겠어? 내가 대신해주었으니 고마워하고 내 말을 듣겠지?’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스스로 의기양양해져서 그 다음날 또 나갔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어서 화해시키려 합니다(26-28절)
모세는 가서 “형제끼리 싸우면 됩니까? 사이좋게 지내세요.”라고 했는데, 오히려 때리던 사람이 모세를 밀치면서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 하면서 오히려 따지고 대듭니다. 무섭게 덤벼듭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집트 왕자에게 감히 어떻게 노예가 달려듭니까?
그러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알았으니까 이렇게 대드는 겁니다. 그 사실을 가지고 모세에게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모세를 함부로 대합니다. ‘너나 우리나 똑같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왜 너 혼자 잘난 체해?’라는 마음입니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자기들은 엄청나게 힘들고 고생하는 노예인데, 모세는 왕궁에서 곱게 자라고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니까, 마음속에 엄청난 분노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와서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다.’라는 태도로 나오니까 얼마나 열 받겠습니까?
사실 이런 때가 우리에게도 종종 있습니다. 순수하게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오히려 저쪽에서 강하게 반발하여 아주 당황스러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자녀에게도 잘되라고 이야기해주었더니 설교 좀 그만하라며 반발합니다. 그래서 당황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내가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게 나오면 마음이 아프고 당황스럽고 고통스럽습니다.
모세는 그보다 훨씬 더합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억울함과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찼겠습니까? 이집트 왕자로서의 신분과 능력을 믿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자가 되어 보겠다며 스스로 나섰지만, 결과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동족들의 반발을 사는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고 살인이 드러나니까 정신없이 이집트를 탈출하고 맙니다. 사실 그때 자기 뒤를 봐주던 양어머니 핫셉수트가 실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조용히 잘 지내야 하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니까, 그 다음 바로 왕인 투트모세 3세가 자기를 어떻게 할 것 같아 도망을 간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비전이 분명하다고 해도 내 능력과 내 열심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을 잘하고 아무리 뭘 갖다 바쳐도 사람의 마음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바꾸십니다. 모세는 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교훈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2. 광야에서의 훈련(29절)
40세의 모세는 인생의 절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잘생기고 총명하고 용맹하고 리더십도 있고 행정력도 있고 무술도 잘하는 최고의 리더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를 부르셨다면 그는 ‘하나님, 사람 참 잘 보셨습니다. 그렇죠.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접니다, 저!’라고 나왔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이스라엘 혈통이 드러나게 하시고, 살인을 통해 광야로 도망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왕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 유명하지 않은 여인과 결혼하여 40년 동안 목자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야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십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40세에서 80세는 한참 일할 나이입니다. 열정도 있고 경험도 있고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생의 황금기에 모세를 푹 썩게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도록 하셨습니다. 자기가 능력이 있고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완전히 고꾸라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부르셨습니다.
4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근육도 크고 체격도 좋고 강하고 자신만만했던 이집트 왕자가, 머리도 하얗게 세고 늙고 약해진 노인이 된 것입니다. 수천의 병거를 거느리며 말을 타고 낙타를 타던 장군이, 장인의 양 떼나 치는 무기력한 목동으로 떨어졌습니다. 장인 이드로 밑에 살면서 자존심도 얼마나 많이 상했겠습니까? 그곳 음식을 먹으면서도 옛날 음식 생각이 얼마나 났겠습니까? ‘내가 이런 걸 먹고 있다니’ 하면서 얼마나 신세가 처량했겠습니까?
처음에는 막 분하고 억울하고 울화통이 터지고 잠도 못자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와 절망의 상태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려 40년입니다. ‘나는 이제 이렇게 살다가 가나 보다.’ 하며 포기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모세를 훈련시키신 광야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최고의 제자훈련 및 신앙 훈련 학교입니다. 광야는 낮에는 불같이 덥고 밤에는 얼음 같이 추운 곳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외롭고 억울하고 위험하고 배고프고 서러운 곳입니다. 광야에서 우리의 자존심이 완전히 부서지는 곳입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리는 쓸데없는 것들을 다 버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잘나갈 때 내게 붙어서 아첨하던 기회주의자들은 다 떨어져나가고, 진정한 친구만이 남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리더를 세우시기 전에 광야를 거치게 하십니다. 모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이 성취되는 사이에는 반드시 인내의 기간, 광야의 시간이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우리는 다 빨리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문에 화제의 인물이라고 나는 것을 보면 ‘최연소’라고 나는 게 많습니다. 그런데 빨리 된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빨리 마쳤는데 부실공사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긴 시간을 거치게 하시면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 힘든 광야에서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혹시 지금 광야의 기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일이 잘 안 풀리고, 뭔가 잘 안 되고, ‘내가 이제 여기서 이러다 끝나나 보다’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십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80세에 모세를 부르신 그 역사가 바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나는 다 죽어버린 그때가 하나님이 쓰시기에 가장 좋은 때였습니다.
3. 하나님의 도구(30절)
40년이 그저 지난 게 아니라 ‘찼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40년 동안 훈련시키기로 작정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40년이 되어 때가 되니까 부르셨습니다.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보이셨는데, 사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하면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장면은 너무 흔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가 본 것은, 분명히 불이 붙었는데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이 붙었으면 타서 다 없어져야 되는데 타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모세가 다가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주 와서 예배드리는 것, 기도하고 말씀 보고 대화하는 것, 직장이나 사업체에서 일하고 하는 것은 매일 하는 똑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똑같은 중에 비범한 하나님의 역사를 캐치해낼 수 있는 사람,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감사의 제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 내 삶이 똑같은데, 그 똑같은 것 중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를 잡아내는 것, 나에게 역사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감사의 제목을 뽑아내는 것이 영적인 실력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31-33절).
하나님의 영광이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까 신을 벗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결국 ‘나에게로 오라. 그런데 조심해서 오라.’ 하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 이것은 회개와 정결의 명령입니다.
세상에서 묻혀온 모든 죄의 먼지들을 떨어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능력이 많고 재주가 많아도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가지고 주님의 종으로 쓰일 수가 없습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2.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미움과 절망과 욕심과 분노로부터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습관과 인간관계와 취미생활과 집착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오라는 것입니다.
포장된 길을 맨발로 걸어도 발이 아픕니다. 카펫은 괜찮지만 아스팔트만 걸어도 발이 아픕니다. 그런데 자갈과 돌과 가시가 많은 땅을 걸으면 얼마나 위험합니까? 신발은 인간의 발을 보호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신을 벗으라는 것은 결국 무방비 상태가 되라는 말입니다. 거칠고 뱀도 나오고 전갈도 나오고 뜨거운 광야에 맨발로 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아주 조심조심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방비 상태로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겸손히 나아오는 것입니다(34-36절)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은 너무 힘들고 괴롭더라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무엇보다 지금 우리와 함께 마음 아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를 돕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해주시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 눈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이 영적 리더의 길입니다. 이전의 모세에게 혈기는 있었지만 이런 하나님의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조급했고 거칠고 강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런 모세의 모습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를 통해 마음이 겸손해지고, 하나님을 체험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일을 맡기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애굽으로 너를 보내리라!’라고 하십니다.
[나가는 말]
아주 오래 된 한국의 대중가요(소위 ‘뽕짝’) 중에 <나그네 설움>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오늘 내가 걷기는 걷는데, 어디로 갈지 정처 없이 그냥 걷는다는 이런 것이 나그네 설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사는 나그네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나그네 설움> 노래에서 말하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이 땅이 고향이 아닌 나그네라는 말입니다. 이 땅이 고향이 아니라, 우리는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행자라고 표현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맞습니다. 아니, 출장을 온 겁니다.
이 땅은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영원히 살 곳, 돌아갈 우리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단지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출장을 온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출장을 보내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도 매일 그저 오늘도 걷지만 정처 없이 걷는다고 하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되는 대로, 내 쾌락에 따라서, 내 욕심에 따라서 살겠다고 하다가 인생을 끝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저 영원한 하늘나라, 우리의 고향이 있습니다. 그날 우리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길 때까지,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신 그 목적을 붙들고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또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그 사명에 순종하며 쓰임 받는 고귀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의 때가 가까우매
행 7:17-22 / 양향모 목사
성경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사람들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구원의 역사들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진짜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천국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발견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성경의 여러 가지 교훈과 여러 가지 구원들은 우리들에게 세상에서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소한 세상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일반은총들은 이미 우리가 사는 삶의 법칙에다가 다 넣어 두셨습니다. 건강하게 살려면 어떻게 사는지, 부자로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관계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이미 다 알게 해 주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바르게 열심히 살면 복을 받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성경에서 그런 일반상식정도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회에 와서 그런 세상적인 축복들을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장에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나서 2장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히2:3)라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도 권위가 있어서 그것을 어기거나 순종하지 않았을 때 공정한 처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즉 모세를 통하여 기록된 율법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권위가 있어서 어기는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이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그 형벌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부터는 스데반이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의 이야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렸을 때의 이야기와, 40세부터 80세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80세 이후의 이야기로 나누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렸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의 이야기와 성년으로 자라나는 과정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스데반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무어신지 우리가 받을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17절에서 19절까지에는 모세가 태어나던 때의 형편과 20절에서 22절에는 모세가 태어나서 어떻게 자라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본문 17절 말씀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은 여러분이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도 들으신바가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시고 그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본문 말씀과 연관해서 기억나는 언약은 400년 동안 가나안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리니 그 땅 사람들이 종으로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그들이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행7:6-7)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한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식구들을 이끌고 애굽에 들어와서 산지가 벌서 400년이 다 됐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한 때가 가까이 올수록 어떤 현상이 벌어졌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많아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간이 가까이 올 때 그들의 숫자를 늘여주셨기 때문입니다.
2.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18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때가 가까이 오고 그와 비례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많아져갈 때 애굽의 왕이 바뀌는데 그 왕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이 지났을 때인데 어떤 사람이라도 요셉을 직접 만나봤거나 잘 아는 사람은 없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요셉을 모르는 왕이라고 한 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일했을 때 그 치적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요셉의 덕분이라는 것을 애굽의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알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과 근방에 7년 동안 풍년이 들었다가 이어서 7년 동안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요셉은 당시 바로를 설득하여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잘 모아서 7년 흉년이 들었을 때 그 위기를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애굽의 왕이 되는 사람이 몰랐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알기는 알았지만 좋아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요셉도 요셉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도 무시하는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3.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본문 19절에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라고 했습니다. 요셉을 무시한 사람이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아주 교활한 방법을 써서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당시 왕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는지가 자세히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야곱과 그 후손 75명이 애굽으로 왔는데 세월이 흐르니까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출애굽기 1장 7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출1:10)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적군의 편이 되어서 적군과 함께 우리들을 치고 이 땅에서 나갈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힘이 강해지는 것이 걱정이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떠나버리는 것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동안 노예처럼 잘 부려먹었는데 그런 막강한 인력이 떠나가는 것은 손해였기 때문입니다. 후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간다고 할 때 반대를 한 것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일 종처럼 잘 부려먹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봅니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을 엄청나게 시켜서 힘들게도 해 보았는데 그래도 인구는 증가합니다. 일을 많이 시킬수록 인구는 더 늘어가고 힘은 더 커졌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여자아이는 살려주고 남자아이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산파들에게 교육을 시켜서 죽이라고 했는데 산파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핑계를 대기를 이스라엘 여인들은 아이를 쑥쑥 날 낳아서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낳아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스스로 남자 아이를 낳으면 나일 강에 던져서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4. 그 때에 모세가 태어났는데
모세는 우리가 아는 대로 장차 엄청난 일을 할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 하는 애굽 땅에서 이끌고 나갔고 그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 지도자였으며 모세오경을 기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십계명을 받았고 그에 따르는 율법들과 여러 가지 역사들을 하나님께 받아서 기록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때가 하필 이런 때였습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강물에 던져서 죽게 해야 하는 그런 시기에 모세가 태어낫습니다.
5.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20절-22절에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도시적이다’라는 뜻에서 온 말입니다. 촌스럽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형편은 말로 할 수 없이 열악한 형편이었습니다. 종처럼 노에처럼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사는 것은 정말로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런 집안에서 아이가 태어낫는데 촌스럽지가 않고 도시 아이처럼 즉 잘 사는 집안의 귀공자처럼 멋있게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아이돌처럼 생긴 아들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부모는 차마 이렇게 잘 생긴 아이를 죽일 수도 없고 강물에 버릴 수도 없고 해서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석 달 동안 집에 숨겨서 키웠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커 가고 울음소리가 커가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숨길 수가 없어서 강물에다가 버렸는데 그냥 버리지 않고 배처럼 물에 뜨는 작은 상자를 만들어서 거기에다가 넣고 강물에 띄워 보냈습니다. 그 때 마침 바로의 공주가 목욕을 하러 나왔다가 그 아이를 보니까 불쌍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건져서 양아들로 삼고 그 이름을 모세라고 했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물에서 건졌다는 뜻이고 그의 양어머니가 된 바로왕의 공주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세를 보는 눈이 서로 다르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모세의 부모가 아이를 보니까 아름다운 아이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표현을 합니다. 바로의 공주가 아이를 봤을 때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불쌍한 아이로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표현한 것은 모세를 아름답게 본 부모의 눈이나 모세를 불쌍히 여긴 바로 왕 공주의 눈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특별한 일로 쓰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눈을 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런 특별한 시점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들의 부모의 눈을 여시고 바로 왕 공주의 마음을 여시고 모세를 바로의 궁중에서 학문을 익히게 하시고 힘을 키우게 하셔서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시는 도구로 사용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강조점
우리는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스데반이 유대고 지도자들에게 주고 싶어 했던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의 설교를 통하여 한 결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그들의 조상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을 자랑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조상을 통하여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그 구원의 언약을 보지 못하고 그 구원의 언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보지 못함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모습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도 굳이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지 않으셔도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그의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끌어내다 건져내다는 뜻을 가진 말인데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고는 그 이름을 모세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에도 구원자라는 뜻이 있듯이 모세의 이름에도 건져낸다는 뜻이 들어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서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나와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일도 우리를 종노릇하는 이 세상에서 구원하셔서 영원한 가나안 땅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모세의 이야기를 잘 알면서도 막상 모세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그들이 알지 못했습니다. 조상들을 자랑하면서 자부심을 가졌지만 그 조상들 뒤에서 조상들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뜻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똑똑해서 그런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보지 않으셨다면 그저 나일 강 물에 흘러내려가서 죽고 말았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에 간섭하지 않았다면 살아있지도 못했을 사람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셔서 바로의 궁전에서 당시 최고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스데반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신 언약이 있고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이루어나가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조상을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시며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이 되었으며 이제는 그 예수님을 믿어야 할 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상이니 율법이니 성전이니 제사니 이런 껍데기를 붙잡고 있지 말고 그것들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교훈
스데반이 설교를 통하여 유대고 지도자들에게 교훈을 주심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스데반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교훈을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고 우리도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의 핵심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눈으로 똑같은 성경을 읽는데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사람 웃기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사람들 웃기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똑같은 눈을 가지고 똑같은 성경을 보는데도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법을 성경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과 그 구원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 구원의 때가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가까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숫자도 많게 하시고 힘도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야 애굽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세력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주 교활하게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을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자 하고 구원받을 백성들이 많아지게 하면 사탄도 역시 더 힘을 내서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앞길을 방해합니다.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면 얼른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사탄의 공격으로 여기고 이길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의 날이 가까웠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그렇게 열악한 형편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아름답게 보시니까 사람들도 그를 아름답게 보고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사람들에게 받는 도움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아름답게 보실 때 모든 관계도 회복이 되고 모든 어려움도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원이 가까이 올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한 구원은 이 세상에서의 구원이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원은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이고 우리 타락한 인간들이 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날이 가까이 올수록 우리가 이 구원과 가까이 나아갈수록 사탄의 방해공작은 날로 심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이 엄청난 구원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을 소홀히 여기지 말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자기 손을 의지한 사람
행 7:17-25 / 조상호 목사
그리스 신화에 보면 탐욕스런 ‘마이다스 왕’의 얘기가 나옵니다. 이 왕은 많은 부귀와 영화와 명예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술의 신(神)인 ‘디오게네스’에게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만,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에 취한 ‘디오게네스 신(神)’이 술김에 그만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마이다스 왕’은 소원대로 황금을 만드는 손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이다스 왕’이 만지는 나무, 책상, 꽃병,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버리자, 더욱 신이 나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마이다스 왕’은 배가 고파 음식에 손을 대자, 음식도 황금으로 변해 버려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딸이 와서 포옹을 하자, 딸도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든 ‘마이다스 왕’은 후회를 하며 ‘디오게네스 신’에게 가서 자기의 소원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 신’은 ‘마이다스 왕’에게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 그러면 손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마이다스 왕’은 디오게네스의 말대로 강에 몸을 씻었더니, 손이 정상적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마이다스 손’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요즘 천재적인 기술이나 돈 버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나 뭐든지 잘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이다스 손’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손을 가진 사람을 찾으려고 하고, 이러한 손을 가진 사람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마이다스 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만이 마이다스 손을 가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가장 완전하고 가장 확실한 손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손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기보다 여러분들의 연약한 손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기보다 자기 손을 의지한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모세입니다. 나중에 그는 가장 완전하고 확실한 손인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였지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의지했습니다.
자기 손을 의지했던 모세
우리가 알다시피 모세는 출생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애굽의 공주의 양자가 됩니다. 그리고 바로왕의 궁전에서 애굽의 왕자로 자라게 됩니다. 40살이 된 모세는 자기 동족인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23절과 24절을 보면, 그가 어떻게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다같이 23절과 24절을 보겠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손을 의지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인 히브리 백성을 힘들게 하는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출애굽기 2장 12절에 보면, 그가 애굽 사람들을 쳐 죽였을 때의 상황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여기 ‘좌우를 살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애굽 사람을 떼려 죽이고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는 완전 범죄를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패했습니다. 25절을 보면 당시 모세가 실패했던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25절을 보겠습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모세는 자기 손으로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로서 생활하던 모세는 자기 손으로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착각이었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실패하였던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물론 모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능력과 재능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21절과 22절을 보겠습니다.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당시에 그는 누가 봐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의 실력이면 히브리 백성들을 구원할 만하다고 여겨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세 본인도 충분히 자기 손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의 착각이었습니다.
한 번은 미국의 17대 대통령 존슨이 시카고의 힐튼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호텔 측에서 이번 기회야말로 힐튼 호텔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다음날 먹을 아침 식사를 위하여 모든 인원을 총동원해서 훌륭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습니다. 힐튼 호텔이 자랑하는 최고의 요리사들이 가장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재료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4시에 출근해서 조심스럽게 계획된 메뉴에 따라 최선을 다하여 대통령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대통령은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아침 체조를 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통령이 아침 식사로 주문한 음식이 무엇이었는줄 아십니까? 한 조각의 샌드위치와 블랙커피가 전부였습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한 사람들이 얼마나 허탈했겠습니까?
여러분, 계획은 사람이 세울지라도 일의 성취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능력과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는 줄로 믿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손을 의지하다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몰래 애굽 사람을 떼려 죽인 후 모래 속에 감추었지만, 다음날 그 사실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모세는 ‘왜 같은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하며 화해시키려 했다가 그 중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27~28절) 모세는 자기 손으로 자기 동족을 도와주며 구원을 베풀어주려다가, 오히려 동족에게 배척을 당한 것입니다. 자기 지혜와 능력을 믿고 뛰어들었다가, 보기 좋게 실패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내 손으로 무언가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챤들은 게으르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할지라도 내 능력으로 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던 느헤미야
구약시대에 활동하던 느헤미야 선지자의 삶을 보아도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 2장 1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슬픈 기색을 띠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촌 형제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성이 무너졌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주저앉아서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무너진 것을 회복시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오늘날 4월에 해당하는 기스르월부터 오늘날 9월에 해당하는 니산월까지 5개월여 동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던 것은 무너진 예루살렘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관습에 따르면 왕 앞에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 무서운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향해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도리어 느헤미야를 걱정해주었습니다. 왕은 느헤미야에게 ‘무엇 때문에 근심하느냐,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물어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왕이 느헤미야에게 물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왕이 느헤미야의 고민을 다 들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느헤미야가 평상시 왕에게 신임을 얻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호의를 받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 2장 8절 하반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여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기도하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면, 우리 개인의 삶에, 가정 가운데,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손길이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손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도대체 어떤 손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손의 몇 가지 특징이 나옵니다.
1. 하나님의 손은 구원의 손입니다.
출애굽기 14장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든 손을 내밀어 바다를 갈라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4장20절을 보면,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세계 최강국 애굽에서 노예생활하고 있던 200만 이상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강한 손이 역사할 때, 포로로 잡고 있는 모든 원수의 결박이 풀어지고 자유와 구원이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자유케 하는 손이요 구원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셨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을 보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짜 신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이 쫓겨나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모든 악한 것과 더러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권능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손은 치유의 손입니다.
마가복음 1장 41절과 42절을 보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 진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치료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4. 하나님의 손은 위로의 손입니다.
다니엘 10장 10절과 1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손이 있어 나를 어루만지기로 내가 떨었더니 그가 내 무릎과 손바닥이 땅에 닿게 일으키고 내게 이르되 큰 은총을 받은 사람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서라. 내가 네게 보내심을 받았느니라 하더라. 그가 내게 이 말을 한 후에 내가 떨며 일어서니” 하나님께서는 이상한 환상을 보고 힘이 빠져있는 다니엘을 만져주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어 있는 다니엘을 위로의 손으로 만져주셨습니다. 결국 다니엘은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또 열왕기상 19장 5절부터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야훼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내일 이 맘 때에는 반드시 네가 죽을 것이다’는 말을 들은 엘리야가 낙심하여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천사를 보내주셔서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낙심한 그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러한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들에게도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이 여러분들의 심령과 육체 가운데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위로의 손길입니다.
5. 하나님의 손은 축복의 손입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과 51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축복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축복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손은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도 5,000명 이상을 먹게 하는 기적의 손으로, 40년 동안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가나안까지 이끌어 가신 인도하는 손으로, 식어진 심령을 가지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심령을 다시금 뜨겁게 하셨던 열정의 손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손은 세상의 어떠한 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손입니다.
미라 브룩스 웰치(Myra Brooks Welch)가 쓴 <거장의 손길이 닿을 때(The Touch of the Master's Hand)>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그녀는 한 전도사가 학생들에게 하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설교를 듣는 가운데 빛으로 충만케 되었으며, 30분 만에 이 <거장의 손길이 닿을 때>이라는 시를 썼다고 합니다.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있었다. 3달러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마치 보물을 다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 닦았다. 그리고 현들을 조여 음정을 맞추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 아름다움은 천사의 음악같이 청중을 황홀하게 했다. 한 곡을 끝내고 노인은 감회 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 만에 너를 만져보는구나’그리고 나서 다시 연주를 시작하였다.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어 결국 이 바이올린은 3천 달러에 낙찰 된다.”
쓸모없어 보이는 3달러짜리 바이올린에 거장의 손이 닿으니까 갑자기 3,000달러 짜리 바이올린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손은 세상의 어떠한 거장의 손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손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위대한 조각가의 손도 있고, 멋진 작품을 만든 위대한 화가의 손도 있고, 세계적인 연주가의 손도 있고, 사각의 링을 주름잡는 불후의 권투선수의 손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에게 손이 없었더라면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 수 없었고,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를 만들 수 없었고, 바다를 건너는 배를 만들 수 없었고, 강을 건너는 다리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손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것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어떠한 손도 하나님의 손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인간의 손과 달리, 하나님의 손은 구원의 손, 권능의 손, 치유의 손, 위로의 손, 축복의 손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잠언 16장9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야훼시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전도서 9장 1절을 보면,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줄로 믿습니다. 의인도, 지혜자도, 심지어 불신자들의 인생까지도 그 모든 흥망성쇠는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승복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는 8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체조에 재능이 있는 그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열심히 체조를 연습했습니다. 그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세계에서 이승복보다 체조를 더 잘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인정받는 체조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1984년 LA올림픽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83년 7월5일, 그는 코치 없이 혼자 연습을 하다가 떨어져 척추가 부러졌습니다. 그 후 신경이 마비되어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설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의 꿈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말인가?” 한 때 좌절을 했지만, 이내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기도하다가 ‘의사가 되라’는 감동을 받은 그는, 걷지도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몸이었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뉴욕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 석사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의 유명한 의과대학인 다트머스 의대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하버드 의대에서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지금은 세계가 인정하는 존스홉킨스 병원의 재활의학과 수석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현재 ‘슈퍼맨 닥터 리’로 불리는 그는 탁월한 인술로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더 나아가 환자들에게 힘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면 우리의 약한 것이 강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기만 하면, 우리의 약점이 장점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연약한 사람의 손을 의지하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사람의 손을 의지했다가 실패보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손, 권능의 손, 치유의 손, 위로의 손, 축복의 손이 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