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에서 세계적으로 연쇄살인마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와 더불어 프로파일러들이 인기 직종이 되었다.
국회로 진출했던 프로파일러도 있고, 이번 총선에서 프로파일러 이수정은 보수당 후보로 실패하였다.
그 유명한 대파 사건이 실패 원인이었다.
최초의 남성 연쇄살인범은 김대두이다.
유영철 사건 발생 전까지 3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뺏은 살인범으로 기록됐다.
이판능이나 우범곤은 대량살인으로 분류되고 정신질환자(간헐적 폭발 장애)로 평가할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제외한다.
김대두는 1949년 11월 17일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의 한 마을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명문 중학교 진학을 원하던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공부에 대한 의욕을 가지지 않은 채 탈선을 이어갔으며 아버지는 그런 그를 광주로 보내 공부를 시켰지만 그럼에도 방황은 멈추지 않았다.
17세가 되던 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에서 농사를 돕던 그는 돌연 큰 돈을 벌고 싶다는 마음으로 목포에 위치한 한 가구점에 취업하여 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둔 후 전라도 지역에서 머슴 일을 하거나 품삯을 받아 심부름을 하고 양복점의 직원으로 일하는 등 다양한 일을 전전했다.
몇 년 뒤 모든 일을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집에서 며칠 머물다가 서울로 향했다.
이후 서울에 다다라 전셋집을 얻은 후 무직으로 떠돌이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때 돈이 없어 군에 입대하려고 했으나 당시는 국방비 문제 등으로 개나소나 면제를 받던 시절인 데다 왜소하고 허약한 체질로 인해 군대를 면제받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폭력 사건에 휘말려 전과 2범의 범죄자가 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두 차례나 수감되었고 주변에서 좋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었는데 곤란한 생계로 인해 친척과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도 이들은 그를 전과자라며 무시하였고 점차 소외감과 사회에서의 불만을 가지게 된 그는 살기를 품기 시작했다.
김대두는 1975년 8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17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하였다.
1975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까지 55일 동안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마을 주민 안종현(63)을 살해한 것을 비롯하여, 무안군, 경기도 평택시, 서울 등지에서 9차례에 걸쳐 모두 17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1975년 10월 7일 서울에서 피해자의 피가 묻은 청바지를 세탁소에 맡겼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세탁소 주인 하근배(26)의 신고로 검거되었다.
그리고 연쇄 살인범 김대두는 체포되었을 때 현장검증에서 자신이 경기도 일대에서 일가족 단위로 4차례나 살해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후 1976년 12월에 사형 선고를 받고,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었지만, 결국 12월 2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연쇄살인(連鎖殺人,serial murder)은 연속적으로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범죄를 말한다.
범인은 주로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르며 일정한 간격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PCL-R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사이코패스에 해당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많은 살인을 저지른 연쇄살인범으로는 1978년부터 남성과 소년들을 살해, 시체와 성애를 벌이거나 인육을 먹는등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러 테드 번디가 꼽힌다.
그의 살인 횟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최대 100명 이상 살인을 했던 그의 살인 행위에 대하여 전 세계가 경악하였고 그 이후로 '연쇄살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프로파일러는 용의자의 성격과 행동 유형 등을 분석하고 도주 경로나 은신처 등을 추정하는 역할을 하는 수사관. 주로 증거가 불충분하여 일반적인 수사 기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에 투입된다.
연쇄 살인은 선진국이나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국가에서 자주 벌어진다.
자본주의와 범죄와의 연관성은 분명히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