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공空하다’는 건 결국 다 허무하다는 뜻 아닌가?
어느 사찰에서나 법회는 반야심경 독송으로 시작된다.
반야심경은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인 공空 사상의 진수를 담은 책이다.
풀네임Full-name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마하는 크다, 반야는 지혜, 바라밀다는 피안(저 언덕)으로 간다는 뜻의 산스크리트(범어)다. 피안은 더럽고 모진 속세를 일컫는 차안(이쪽 언덕)의 반대말. 종합하면 천국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크고 슬기로운
마음에 관한 경전쯤 되겠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느니라.” 공에 대한 통찰이 참다운 행복을 얻는 관건임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공空 자는 빌 공이다. 허공의 공이고 허무하다의 공이다. 비어있음이 덧없음으로 의역되면서, 불교는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종교라는 편견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명확히 짚으면 불교의 공은 비어 있다가 아니라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인연에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에 의해 사라질 따름이라는 연기와 같은 말이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제행무상 또는 제법무아와도 맥락이 연결된다.
요컨대 모든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잠시 그런 것이라는 가르침이고, 사정이 이러하니 눈앞의 현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공이다.
오온이 공하다는 반야심경 구절은 인간의 사고방식에 내재된 필연적인 불완전성에 관한 지적이다.
오온은 색(대상 세계), 수(느낌), 상(표상), 행(의식 작용의 진행), 식(분별과 판단)으로 이어지는 인식 구조를 가리킨다.
오온이 공하다는 건 앞서 밝힌 대로 오온에 실체가 없다는 뜻이고, 결국 오온으로 파악한 세상은 각자가 지닌 오온 안에서만
옳을 뿐이다. 예컨데 인간이 바라보는 바다와 물고기가 바라보는 바다는 천양지차다.
인간에게 바다는 오락으로 가끔 즐기는 구경거리나 유원지에 불과하다.
반면 물고기에게 바다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인간에게 육지와 같은 공간이 그들에게는 바다인 셈이다.
세상살이의 해법은 대부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한여름 무더위에 얼음물을 뒤집어쓰면 훌륭한 피서법이 된다.
그러나 혹한기에 얼음물은 자칫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아들에게는 그저 인자한 아버지일 뿐인 사람이, 그에게서 괴롭힘을 당한 누군가에게는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은 악한이다.
이처럼 각자가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동일한 사실도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상황과 조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을 때, 사람은 끊임없이 서로를 오해하고 상대의 성격을 못 견디며 변화를 기다리지
못한다. 피아노 음색이 아무리 아름답다손, 침묵이라는 기반이 조성되지 않으면 소리도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
빛은 어둠에 힘입어 비로서 빛이 된다.
티베트의 유명한 학승이었던 총까빠는 고가古家의 비유를 들어 공을 설명했다.
외딴 시골에 오래된 빈집이 있었다. 겨울이면 여행객들이 하룻밤을 묵고 갔다.
그런데 어느 나그네가 그 빈집에 귀신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견딜 수 없는 추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빈집에 발을 들였다.
겨우 자리를 잡고 누웠으나, 귀신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새 잠을 설쳤다.
그때 또 다른 길손이 들어와 귀신이 사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빈집이라고 일러주었다.
순간 나그네의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알고 보면 그를 괴롭힌 것은 귀신이 아니라 귀신이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김성철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가 저술한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에서 발견한 예화다.
김 교수는 “공 사상은 모든 것은 공하다는 세계관을 심어 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실체가 있다는 착각을 시정해주기 위해 탄생했다.”고 적었다. 결국 공을 깨우쳐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이야기다.
선가에는 체로금풍이라는 말이 있다.
가을날 스산한 바람에 나무가 모든 이파리를 잃어버리고 기어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나뭇잎으로 풍성한 여름날의 나무가 색이라면, 겨울 들녘의 앙상한 나목裸木은 공이다.
그러나 다시 봄이 오면 헐벗은 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색으로 불타오를 것임을 안다.
그래서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당장 힘들다고 세상 무너지는 것 아니며, 잠깐 즐겁다고 영원히 즐거울 순 없는 노릇이다.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 안에는 이미 끝이 도사리고 있다.
공관共觀은 이러한 흐름에 대한 사유다. 이것에 매몰되면 저것에 몽매해지는 법이다.
돌고 돌고 돈다는 순환의 원리를 내면화하면, 얽매이지 않을 수 있고 오판을 줄일 수 있다.
단순하고 질박하게 사는 자에게 극락은 멀지 않고 심지어 실재한다. 마음에 걸림과 쓰라림이 없을 때다.
전화위복도 새옹지마도 사실상 부처님의 법문이다. 나를 비움으로써 비로써 나는 완성된다.
그리하여 공의 적절한 실천은 내려놓음일 것이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눈부시다.
첫댓글 고맙 습니다.나무 아미타불...()()()
공!
참 공의 의미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가르침이지요
고우스님 공에대한 설명을 들으면
수행자가 빨려 들어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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